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리에 조덕삼이란 갑부가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의 일입니다. 조덕삼은 유교 및 불교를 믿는 보수적인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그 마을을 찾아 온 테이트(한국명 최의덕)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사랑채를 예배처소로 사용하도록 내주었습니다. 마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헌신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조덕삼이가 예수를 믿을 즈음 그 집의 마부였던 청년 이자익도 예수를 믿었고, 1905년도부터 이 집에서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조덕삼은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사랑채로 초청하였고, 그 결과 사랑채는 많은 사람들로 미어졌습니다. 그곳이 금산교회의 시초입니다.
마부 이자익은 본래 경남 남해도에서 태어났는데, 6세에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배고픔을 견디며 지내야 했습니다. 이자익이 17세가 되었을 때, 더 이상 가난에 찌들어 살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육지로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전주로 갔다가 다시 김제로 향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말입니다. 금산리의 조덕삼 집에 도착하고는 무슨 일이든 맡겨만 주면 최선을 다해 일하겠노라며 부탁을 했고, 조덕삼은 그를 마부로 받아주었습니다.
조덕삼 집의 식솔이 된 이자익은 그 집 아들이 글공부 하는 것을 창문 밖으로 들으며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주인에게 들키고 말았지만, 조덕삼은 그를 나무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 아들과 함께 글을 배울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 후로 이자익은 글을 깨우쳤고, 예수를 믿으면서 성경을 읽고 쓰는 일에도 몰두하였습니다.
그즈음 금산교회에는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는데, 장로 투표에서 뜻하지 않은 결과가 발생하였습니다. 지주 조덕삼이가 아닌 마부 이자익이가 장로로 선출된 것이지요. 테이트 선교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라 교회가 분열될 것이라 예측하기도 하였지만, 조덕삼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영수는 집사와 장로 사이의 직분)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 저는 아직 장로가 될만한 그런 믿음이 없습니다. 선출된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금산교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그 후 금산교회는 30리 밖에서도 사람들이 모이는 유명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때 조덕삼은 땅을 헌납하였고, 그 결과 교회 건축이 이루어졌습니다.
교회 건축이 완공된 후 조덕삼은 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이자익 장로에게 신학을 공부할 것을 권하였고, 그간 소요되는 모든 경비는 자신이 대겠노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이자익은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훗날 금산교회 목사가 되었고,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목사를 도와 금산교회를 혼신을 다해 섬겼습니다.
그러한 섬김은 축복으로 이어졌습니다. 조덕삼 장로의 손자는 얼마 전 타계한 조세형 국회의원이고, 이자익 목사의 손자는 이규완 장로로 우리나라 고분자화학계에 크게 공헌한 KAIST에서 제자를 양성하는 박사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