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9년에 장흥 행원에서 출생하였다. 위씨 사당 '석천사'에 1822년에 배향되었다. 1651년, 22세, 신장 9척. 어느 날 남도벽지 시골 청년이 활력을 되찾았다. 갑작스럽게 새로운 인생의 기회를 얻게 된 것. 장흥에 내려온 호남어사 민정중(1628~1692)과 조우하게 되었다. 어사 민정중은 1649년에 정시 장원급제를 했다. 승승장구할 운명의 경화세족 출신 엘리트였다.
'기골 장대'한 청년 위천회는 '문무 겸비' 인재였다. 그런 장점을 젊은 어사가 한 눈에 알아보고 높이 평가했던 것일까? 서로 한 살 차이이니, 의기투합했을 수도 있을 터. 어사 민정중은 공식 '서계'를 올려 위천회를 추천했다. 개인적 도움에 관한 자세한 전말은 알 수 없다. 여하튼 호남어사 추천이 무과급제에 큰 힘이 되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사람들은 위천회의 무예를 보고 칭송했다. "번쾌불사 장비부생" '번쾌'가 죽지않고 '장비'로 다시 살아왔다. 바로 그 해, 현종2년, 1651년 무과에 급제했다. 1657년 선전관ᆞ사복시 내승을 거쳤다. (동생 '위천상(1635~1683)' 역시 1655년 무과 급제에, 후일 '해남현감' 등으로 평온한 관직 생활을 마쳤다.)
1660년 전라우수영 우후. 1663년 도총도사. 1664년 3월, '삼수 군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때도 민정중의 도움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이요, 시기였을까? 마침 '삼수'에는 거물 유배객이 있었다. 4년 전에 위리안치된, 남인 거두 윤선도(1587~1671). 고향 장흥에서 가까운 해남 사람으로, 77세 고령. 서인들에게 '윤선도'는 타도대상 제1 주적이요, 다시 살아 돌아와서는 안될 존재였다.
1665년 2월. '윤선도'를 '광양'으로 이배하라는 명령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북쪽 삼수에서 남도 바닷가로 옮기면서 고생 좀 하라, 먼 길 떠나시라는 숨은 뜻이겠다. 삼수군수 위천회는 그때 어떻게 처신했던 것일까? 그 이배에 따른 편의 제공을 했다. 가마꾼 제공 정도는 관례적으로 허용되던 수준. 당파 싸움이 하도 치열한지라 그런 부분이 새삼 문제되고 말았다.
단지 위천회로서는 그랬을 법하다. 동향 출신의 유배객에게 표시해본 작은 정성이요, 백발 정치가에게 드린 인간적 예절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일로 그 인생 파탄이 시작되었다. 서인 당파를 배신하고 그 반대파 남인 정객을 함부로 도와준 혐의로 크게 비난받게 된 것. 그 주변의 다른 지방관들도 그러했지만, 특히 위천회는 '삼수 군수'라서 유독 괘씸죄가 더 박혔던 것 같다.
다음 해 1666년 평안도 용천부로 1차 유배되었다. 1668년 복직되었다. 1671년 경상우후 교지를 받는다. 그의 재기에 판서 민정중의 도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의금부가 개입한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재직 시에 있었던 '살옥 사건'이 재론되면서 추가조사가 진행되었고, 직접 가해자로 지목됐다. 이른바 피해자 쪽이 제기한 '원정'도 있었긴 하지만, 거기에 정치적 파당 싸움 여파가 겹쳤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평소 위천회를 시기하던 경쟁자들에게 호재였을 것.
1672년 이후. 다시 파직되었다. 의금부의 추궁은 집요했고 계속 조사받는다. 무려 33차에 걸친 형문 고문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끝내 '불복'했다. 1674년, 의금부는 '가형'을 주장했으나, '減死 정배자' 처분을 받았다. 사형을 감하여 유배를 한다는 것. 1681년,(1680년에 서인이 다시 집권했다) 민정중이 '감사 정배자'에 대한 감경 조치를 조심스럽게 꺼내보지만, 채택되지 아니한다.
1682년, 왕이 '감사 정배자' 처분을 최종적으로 확정한다. 기약 못할 무심한 세월이 계속 지나가던 1683년 5월, 드디어 위천회의 아들이 '격쟁'을 한다. 11월, <도년유배 방질자> 명단에 기재된다. ‘방질자'는 '방면 예정자 명단'에 오른 사람을 말한다. 2차 유배사건 개시 후 무려 12년 세월이 지났다. 위천회의 몸은 과연 온전할 수 있었을까?
다음 해 1684년에는 어디에 있었을까? 제대로 방면을 받긴 받았을까? 아들의 부축으로 고향으로 돌아오긴 했던 것일까. 그 말년을 어디서 어떻게 지냈던 것일까? 마지막 노후는 알 길 없고, 終年 불명이다. 위천회와 민정중. 누가 더 오래 살았을까? 위천회 묘소는 '행원 강정등'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그럼 시골청년 위천회에게 새 길을 열어준, 서울 사람, 노봉 민정중(1628~1692)은 어떠했는가? 동생 민유중의 장인이 바로 숙종 임금이다. 송시열 문인으로 중도적 성향의 서인 정치가. 1671년 43세 판서. 1679년 6월에 '장흥'으로 유배된다. 동생 민유중은 '흥해'로 유배된다. 1679년 10월에 방면된다. 1680년, '경신대출척(경신환국)' 서인 세상정계 복귀 이후에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한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 세상서인 민정중은 함경도 '벽동'에 유배된다. 서인 거두 송시열은 '정읍'에서 사사된다.
1692년 민정중 역시 '벽동'에서 사사되고 만다. 노봉 민정중은 '장흥'과 또 다른 인연이 있다. 1679년경 '장흥' 유배지에서 잠시 가르쳤던 장흥제자 이민기(1646~1704)가 1681년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민정중의 도움을 받았을 이민기는 스승 민정중을 평생 받들어 모셨다.
1698년, 민정중은 장흥 연곡서원에 배향되었다. 전라관찰사를 역임한 동생 민유중도 장흥을 후히 지원했던 인연으로 1716년에 추배된다. 한참 후대 일이지만, 제자 이민기도 1988년에 추배되었다. (한편 여흥 민씨 집안의 후손들과 장흥 위씨 고읍 방촌 쪽 집안 역시 따로 교류하게 된다. 존재 위백규 선생의 '예예설'에 그 어두운 그늘이 나온다.)
마무리한다. 위천회와 민정중의 평생 관계는 어떠했을까? 두 사람 모두 그 인생에 큰 곡절 부침을 겪었다. 온갖 간난 속에도 그 각별한 인연의 변함이 없다면 얼마나 좋았을 일이겠는가? 그 시작과 끝이 한결 같았을 인연의 고리를 고이 믿어봄도 그저 부질 없는 일이 아닐 것 같다. 위천회에게 민정중의 만남은 '운명'이었을 것이다.("효종 승하 후에 위천회가 자진 은퇴했다"는 <정묘지> 일부 기록은 잘못되었다)
장흥 예양강변에는 '취수정' 江亭이 있었다. 옛 행원정 자리와 겹칠지도 모르겠다. 위천회가 소축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으나, 언제 어디에 어떻게 세웠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소축자로 본 기록도 있긴하나 위천회가 세웠을 것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취수헌, 취수정'이란 말인가. 다른 사람들은 다 醉한다 한들, 나 홀로 깨어 있어야 하거늘, 왜 '醉睡'란 말인가? '醉睡'- 잠에 취한다. 취해 잠든다. - 취한 채 잠을 자고 싶은 인생. 아, 어찌 우리 고향사람 위천회 뿐이겠는가. 잠에 취한 '醉睡春夢'이 우리네 인생길 아니겠는가.
박변호사님에게 후손으로써 좋은 글에 감사를 드립니다...
늘 취수헌공의 파란만장한 삶을 생각합니다...
휼륭하신 위문중 조상님들의 옛발자취와 역사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감사 합니다
격조높은 글로 취수헌공을 잘 조명하셨습니다.
종보가 풍요로워집니다. 박형상 변호사님과 우리 문중과의 관계가 각별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