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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1월25일 연중 제3주일
[수도회] 내 인생의 그물을 버리고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요나 3,1-5.10
† 제2독서 1코린 7,29-31
† 복음 마르 1,14-20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기념 없음 (해외 원조 주일)
한국 교회는 해마다 1월 마지막 주일을 ‘해외 원조 주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03년 추계 정기 총회에서 해외 원조 사업에 대한
올바른 홍보와 신자들의 의식 강화를 도모하고자 ‘해외 원조 주일’을
정하였다. 오늘 특별 헌금은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지의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원조에 쓰인다.
오늘 전례
◎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오늘은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경제적으로 양식과 물과 의약품이 부족하여
인간다운 환경을 갖추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국의 형제들을 기억합니다.
또한 그곳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자 파견된 헌신적인 선교사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희생과 나눔의 성사인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기도와
애덕의 실천이 경제적으로 힘든 형제들에게 하느님 사랑의 열매가 되어
전해지기를 간구합니다.
★ 하느님께서는 예언자에게 당신 뜻의 전달자로서의 사명을 받들게
하신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계시를 백성에게 선포한다. 신실한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회개 선포에 충실하게 호응한다(제1독서).
★ 그리스도의 재림이 다가온다고 여긴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제 세상의 가치들과 결별하고 천상의 삶을 준비하라는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한다(제2독서).
★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느님의 사람 세례자 요한이 체포되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이 단절되지 않도록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고,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농부는 땅을 갈고 어부는 그물을 던진다. 삶에 필요한 물자를 얻으려고
저마다 바다로 가거나 논밭으로 나가고, 직장으로 간다. 어제의 피곤이
충분히 풀리지 않았지만 가족을 위해 일터로 나간다. 가족마저 알아주지
않는 애환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가정에 대한 책임감으로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다. 가족이 행복해야 자신도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복과
가족의 행복은 별개가 아니다. 한 몸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서로에게
생명과 밥을 주고받으며 공유한다. 그래서 가정은 가장 작으면서 가장
완전한 공동체다.
공동체 영성이란 세상 모든 존재가 서로 생명을 주고받는 유기적인
관계라는 것을 믿으며, 인간과 자연, 자연과 우주의 모든 구성이 하나의
몸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신앙이다. 불교에서는 ‘인드라망’으로
설명한다. 나와 이웃과 세계가 하나의 몸이기 때문에 고통도 기쁨도
하나이다. 저편 누군가의 고통과 상처와 눈물은 파동을 타고 내 영혼을
울린다. 그로 말미암아 나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 세상이 슬퍼하는데 홀로
행복할 수 있는 기술은 없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라도 이웃이 행복해야
하고, 그를 위해 나를 내어놓아야 한다.
공동체의 세계관에 진정한 행복의 원리가 있고 시대의 치유의 길이 있다.
꽃은 바라보는 사람 모두에게 향기와 아름다움을 선사하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이웃을 위한 나의 희생과 헌신은 행복 발전기로서
내 기쁨의 원천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어부들을 부르시며 깨우치신다.
‘네 가족을 넘어서라. 세상의 모든 이를 네 가족으로 삼고 그들의 행복을
위해 그물을 던져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
- 매일 미사 -
◈ [수도회] 파도타기(Surfing) 인생 -회개, 추종, 이탈-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1월25일 연중 제3주일(뉴튼수도원 76일째),
요나3,1-5.10 1코린7,29-31 마르1,14-20
제1독서
<니네베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섰다.>
◎ 요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5.10
제2독서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7,29-31
복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0
파도타기(Surfing) 인생 -회개, 추종, 이탈-
아침 영어미사 중 퇴장 성가 후렴이 은혜로웠습니다.
"My soul is longing for your peace, near to you, my God!“
(내 영혼 당신의 평화를 갈망합니다. 내 하느님! 당신 곁에 있는 내
영혼이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요, 주님의 평화만이 우리
영혼에 안식을 줍니다.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밤사이 지금도 계속 내리고 있는 흰 눈이 얼마 안남은 제 귀국을 앞두고
하느님이 베풀어 주신 환송연 같습니다. 뉴튼수도원에 도착 며칠 후
내렸던 흰눈의 환영연과 참 좋은 대조를 이루니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요
행복입니다.
어제는 화창한 봄 날씨 같았는데
오늘은 흰눈 가득한 겨울이니 흡사 겨울 안에 봄이 있는 듯 합니다.
절망 속에 잉태되는 희망이요 죽음 속에 잉태되는 생명을 알리는
메시지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파도타기 인생에 신선한 활력이 됩니다.
모든 언어가 그렇지만 영어는 제게는 바다입니다.
중학교때부터 참 많이도 배웠는데 말하기와 듣기는 여전히 초보입니다.
반쪽 짜리 영어입니다.
어제 수도승 영성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도 새삼 영어는 바다임을
절감했습니다.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아 대부분 사전 찾기를 포기하고
대략 전체의 내용만 파악합니다.
그러다 마지막 장에서는 사전을 찾았습니다.
두 쪽에 걸쳐 자주 나오는 단어가 마치 키워드(keyword)처럼 생각되었습니다.
'Surfing(서핑)!' 사전을 찾아보니 눈이 활짝 열리는 듯 했습니다.
'surfing(명사;1서핑, 파도타기. 2<컴퓨터>인터넷 상의 정보 탐색)'으로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마지막 장의 뜻이 환히 들어나는 듯 했습니다.
마지막 결론처럼 끝나는 구절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시간, 성사적 만남이다. 그러나, 그래서 파도타기다
(It was a holy time, a sacramental encounter. But then, so was
surfing).‘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지체없이 '파도타기'로 정했습니다.
파도타기 인생입니다. 무리하지 않고 순리 따라 하느님의 흐름에 파도
타듯 순응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 순간이 거룩한 시간이요 성사적 만남입니다. 너무 낙관할 것도 비관할
것도 없이 추우면 추운대로 더우면 더운대로 기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평범한 듯 하지만 바로 이것이 영성생활의 진수입니다.
진정한 영성가는 파도타기의 대가입니다.
여기 뉴튼수도원의 내부 공사도 한 고비를 넘어선 듯 합니다.
성전까지 가는 긴 회랑의 길이는 아마 100m는 될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이 가는 도중 'EXIT(출구)'라는, 밤낮 24시간 회랑 곳곳을 환히
밝히는 붉은 색 글자 표지판 12개를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화재나 비상사태시 출구를 통해 탈출하라는 표지입니다.
저에겐 '회개하라', '탈출하라'는 하느님 자비의 표지로 다가옵니다.
매순간 회개를 통한 하느님께의 탈출입니다.
살다보면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진정한 출구는 회개를 통한 하느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깨달음 역시
일상의 파도타기 삶에 신선한 활력이 됩니다. 오늘 말씀 묵상 중 파도타기
인생은 '회개-추종-이탈'의 리듬따라 이뤄짐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 주님께 돌아가십시오.
진부한 얘기 같지만 유일한 출구는 주님뿐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 출구를 통한 탈출이 바로 회개입니다.
탈출의 여정, 회개의 여정은 바로 끊임없는 파도타기의 여정입니다.
개인적 회개와 더불어 공동체의 회개가 더욱 이상적입니다.
공동체적 응답의 회개가 절실합니다.
바로 미사전례가 공동체적 회개의 시간입니다.
'전례는 기도의 시작이자 완성'이라는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오늘 복음 중 주님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성을 띤 말씀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절박한 호소입니다.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요나의 회개 선포에 니네배 사람들은 즉각 회개로 응답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하고 모두가 자루옷을 입습니다.
그들이 악한 길에서 당신께로 돌아서는 모습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재앙을 철회하십니다.
이런 공동체적 회개의 실천이 절실한 수도원이요 교회요 대한민국입니다.
둘째, 주님을 따르십시오.
회개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회개는 주님을 추종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요나의 회개 실천의 동선(動線)이 좋은 모범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내렸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
요나 예언자의 순종과 주님을 추종함이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말씀을 듣자 '일어나-가서-외치는' 요나의 추종의 동선이 뚜렷합니다.
안주하지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을 따라 가서 내 삶의 현장에서 회개의 복음적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의 회개 선포에 이은 갈릴래아 어부들의 추종이
감동적인 본보기입니다. 회개를 통해 일상의 무의미한 삶에서 탈출하여
주님을 따라나선 어부들인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새삼 회개를 통한 주님을 따라 나섬이 우리의 유일한 '출구(EXIT)'임을,
주님을 부단히 따를 때 성공적인 파도타기 인생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이탈의 삶을 사십시오.
회개와 주님 추종의 자연스런 열매가 이탈의 삶입니다. 주님만이 온 삶의
목표요 전부이기에 저절로 무집착의 이탈의 삶이 됩니다. 주님께 집착
(attachment)함으로 세상으로 부터의 이탈(detachment)입니다.
주님이 모두(everything)가 될 때 세상의 모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nothing)이 됩니다.
세상의 부정이나 무시가 아닌 세상사로부터의 초연함을, 이탈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바오로 사도가 이탈의 모범이요 파도타기의 대가입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바로 세상 것들에 집착함이 없이 이탈의 파도타기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고 세상의 형체는 사라지고 있음을 직감한
바오로 사도의 종말론적 삶의 권고입니다.
언어만 바다가 아니라 시간도 바다입니다. 계속 파도치는 바다입니다.
아, 이 끝없는 시간바다에서, 인생바다에서 익사하지 않고 살 길은
파도타기의 기술을 익히는 것뿐입니다.
어쨌든 감사하게도 지금 여기까지 나름대로 파도타기하며 살아 온
우리들입니다.
1.회개하십시오. 2.주님을 따르십시오. 3.이탈의 삶을 사십시오.
끊임없는 회개-추종-이탈의 삶이 성공적인 파도타기 인생을 살게 할
것이고 마침내 하느님 목적지에 도달하게 해 줄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공적 파도타기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복음 묵상 -
내 인생의 그물을 버리고
2015년 나해 1월25일 연중 제3주일 마르 1,14-20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르 1,18)
내 인생의 그물을 버리고
오늘날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무감각’인 것 같다. 세상적인 것들에
맛들이고 길들여져 마냥 영원히 살 것처럼 느낌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일상화되어버린 범죄, 심각한 인간 존엄성의 박탈,
부정부패, 사고 등에 대해서도 놀라지 않는다. 제1독서에서 요나는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3,4)고 선고한다. 바오로 사도는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7,29-31)라고 권고한다. 우리는
결정적인 구원의 ‘때가 차서’(마르 1,15)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음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이제 ‘예수 추종의 길’에 대해
성찰해보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의식하면서, 자신을 비우고,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가며 “사람 낚는 어부”(1,17)의 길을 걷도록 부름
받았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1,17) 하시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20절)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때는
‘곧바로’ 지금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현재’ 이 시간을 통하여 은총을
주시며 '지금' 나를 도구삼아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려면 먼저 자기를 버리고 비워야 한다. 시몬과 안드레아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그물을 버렸다’는 것은 단순히 생계도구를 버렸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근거와 습관과 경험, 자기애, 인간적인 지식 등을
버리고 삶의 중심을 철저히 예수님께로 돌렸다는 뜻이다. 회개란 우리의
체험 속에 흔히 변증법적인 모습으로 부각되는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차리고 그분과 나를 동일화시키며, 삶을 믿음 안에서 자기화하는 것을
말한다.
따르기 위한 회개의 모습은 지금까지의 가치관을 버리고 그 빈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채우는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말씀은 ‘고기 낚는 어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도록 부르셨음을
뜻한다. 이 말씀은 인간적인 성취들을 부정하고 제거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이 세상이 하느님의 구원 경륜이 드러나야 하는 현장임을 엄숙히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인간관계나 다른 나라와 맺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관계를 그리스도의 마음과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과 용서라는 통치
이념이 지배하도록 투신하는 자세를 말한다.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것은
사라져 없어질 껍데기에 눈멀지 않고 사람이나 사건 속에 숨어있는 내면을
바라볼 때 가능해지는 삶이다.
예수님을 따름은 편협하고 폐쇄적인 사고와 행동을 거부하는 것이다.
요나서의 저자는 귀양살이 이후 시대에, 국가를 재건하겠다는 집념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이 선민의식과 배타주의에 빠져 있음을 개탄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다고
해서 하느님의 자유를 제한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요나 예언서를 통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야 하는’ 참된 회개의 모습과
더불어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되지 않는 하느님의 구원 경륜의
보편성을 볼 수 있다. 제자들의 길은 이렇게 구원의 진리와 하느님 사랑에
그 어떤 제한도 두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따름의 길은 자기 본성을 거스르는 지속적인 투쟁의 길이기도 하다.
동물에게 귀소본능이 있듯이, 우리들도 자주 옛날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으로 돌아가려는 강한 움직임이 있다. 사람들은 그렇게 본능과
본성에 끌려 살아간다. 그런데 제자의 길은 근본적으로 본능과 본성을
거스르는 길이다. 그래서 따름은 본성을 거스르는 자기와의 투쟁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버릴 내 인생의 그물은 무엇인가? 나는 왜 그다지도
하느님이 아닌 그물에 애착하는 것일까? 요나는 주님의 파견을 피하려고
도망치다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이나 있다가 나왔다(1-2장). 이 사회에
불의와 불신이 팽배해 가지만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요나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피해 가며 살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름의 길은 겸손의 길이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라는 말씀처럼, 겸손은 제자에게 덕이 아니라
제자의 본질이다. 따름의 길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길인데, 배의
주인처럼 처신해서는 안 된다. 주인공은 늘 스승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에는 늘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나는 튀고 싶고
인정받고 싶으면서도 남이 튀는 것은 봐주지 못하는 고약한 마음은
제자답지 못하다. 어부는 고기를 열심히 낚기만 하면 된다. 또한 따름의
길은 십자가를 향한 길인 동시에 나를 그리스도로 채워 나가는 기쁨과
행복의 길이다. “따르라”는 부름은 수난의 선포와 밀접히 얽혀 있다.
예수님의 수난은 수난의 모든 가치와 명예까지도 박탈당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버림받는 일”이다. 곧, 예수님의 수난은 철저한 불명예의
수난이었다. 십자가는 쉽사리 인정되듯 일상의 괴로움, 번민, 어려움 등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아니 더욱 본질적으로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이요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인 것이다. 따라나섬은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고 이 결합은 십자가의 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오늘도 끊임없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는 우리는 ‘바로 지금이 구원의
때’임을 분명히 의식하면서, 애착을 둔 '인생의 그물'을 과감히 버리고,
그분과의 친교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채우도록 하자. 지나가
버릴 세상 것에 현혹되지 않고, 모든 사람과 사건 안에서 그분을
주인공으로 드러내는 겸손과 수난의 길을 걸어가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이 기쁨을 따랐습니다.
2015년 나해 1월25일 연중 제3주일
제1독서
<니네베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섰다.>
◎ 요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5.10
제2독서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7,29-31
복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0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 영혼이 하늘에 가면 신이 두 가지
질문을 하는데, 대답에 따라 천국에 갈지 말지가 정해진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 두 가지 질문이란 이렇습니다.
‘인생의 기쁨을 찾았는가?’, ‘자네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했는가?’
인생의 어떤 목표도 또 의미도 아닙니다. 단지 ‘기쁨’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상당히 공감이 갑니다. 기쁨의 삶 안에서
진정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 역시 같이 묻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인 기쁨이 과연 진정한 기쁨을 가져다줄까요? 아닙니다. 진정한
기쁨은 나의 기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전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기쁨은 바로 사랑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학창시절에는 일등만 하면 가장 행복할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특히
공부에서의 일등을 행복과 연결시켰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참석했다가 항상 일등만 하던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선생님을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교권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요즘 선생님 자리가 얼마나 힘든지 만을
이야기합니다. 먹고 살아야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생질을 계속한다는
말에 씁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한 친구도 생각납니다. 이 친구는 항상 꼴찌였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공부를 못할까 했던 친구였지요.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기술을
배워서 열심히 일했고, 지금 현재 사장님 소리를 들으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고,
기쁘게 지금을 살고 있었습니다.
학창시절의 일등은 순간의 기쁨일 뿐입니다. 이런 순간의 기쁨이 전부인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순간의 기쁨이 아닌 영원한 기쁨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자기 모습이 많이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순간의
기쁨들이 모여서 큰 기쁨이 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그 순간만의
기쁨으로 끝나버리는 것이라면 대단한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이렇게 외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당시 사람들이 하느님처럼 믿었던 율법을 믿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보다는 복음, 즉 기쁜 소식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기쁜
소식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순간의 기쁨을 따르는 것이 아닌, 주님께서 직접 주시는 영원한 기쁨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이 기쁨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소유물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따르고 있는
기쁨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무례하거나 퉁명스럽고,
자기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공경한다면, 당신은 평생동안
스스로를 이등시민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조지 와인버그).
꿀같은 사랑을 하세요.
사랑하는 애인을 ‘허니(Honey, 꿀)’라고 말하지요. 왜 그럴까요? 저는
꿀이 달기 때문에 달콤한 사랑을 생각하면서 애인을 ‘허니’라고 말하는 줄
알았습니다. 아마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꿀에는 또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며칠 전에 알게 되었습니다.
이집트 왕 바로의 무덤에서 5천 년 전의 꿀이 발견되었는데, 글쎄 이 꿀이
먹을 수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진짜 꿀은 썩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은 달콤함이 변하지 않는 것, 그래서 애인을 허니라고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항상 강조하셨던 것은 사랑이었지요. 이 사랑은 상황에 따라서
변하고 퇴색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도 변함없이 달콤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 그 사랑을 위해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고 그 사랑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정말로 꿀과 같이
변하지 않고 달콤한 사랑을 내 몸으로 실천하고 있나요? 그 사랑이 바로
지금 이 순간 이루어져야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리스도의 제자는 단호하게 버릴 줄 알아야
2015년 나해 1월25일 연중 제3주일
<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복음: 마르코 1,14-20
< 그리스도의 제자는 단호하게 버릴 줄 알아야 >
차태현, 이은주, 손예진이 주연했던 ‘연애 소설’은 차태현을 사랑하는
이은주와 손예진의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차태현은 카페에서 일을 하다 손예진에 한 번에 반하고 맙니다. 그런데
항상 손예진과 함께 다니는 이은주가 있었습니다. 태현을 예진과 은주
모두 사랑하게 되고 태현도 둘과 지내는 것이 행복합니다. 그러나 예진은
몸이 좋지 않아 자주 함께하지 못하게 됩니다. 처음엔 예진을 좋아했던
태현도 자주 보게 되는 은주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사실 예진은 자신도
좋아하지만 자신의 친구를 위해 태현을 양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진은 곧 죽을 운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예진이 죽고 은주는 죽어가면서까지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인
태현을 자신에게 양보했던 혜진 때문에 너무나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은주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태현과 헤어지자고 말합니다. 태현은
영문도 모른 채 두 여자를 한 거번에 잃고 슬퍼합니다.
뒷이야기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사랑은 방법이 아무리
좋아도, 그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둘’이 아니라, 혼자이거나 혹은 셋,
넷이 되면 좋게 끝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좋아지면 다른
사람은 보내야합니다. 한 배를 타려면 다른 배에선 내려야합니다. 아주
당연한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따를 때는 양다리를 짚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도 좋은데 돈도 좋고 명예도 좋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세상 것과 비교를 당하며 저울질을 당한다면 그 심정이 어떠하실까요?
그래서 하느님을 질투하는 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그분을 따르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들은 가차 없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랐던 첫 제자들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버리고 갔던 ‘그물’과 ‘아버지’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큰 내어놓음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에게
‘그물’은 그들의 생계수단이었고 그들의 꿈이었고 삶의 전부였습니다.
어부가 그물이 없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에게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삯꾼들이 있었고 또한 대사제 가야파의 집에도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어부로서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자신의
가업을 이어받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를 버립니다. 이는
가족에게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손가락질을 당할 일이었습니다.
사실 애정을 끊는 것이 가장 힘든 일입니다. 부모님을 제대로 모시지
않는다고 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것도 가히 견디기 쉬운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서 ‘그물’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물은 바로 세상에
살 때나 추구해야 하는 것인지 신앙인이 되어서도 똑같이 추구하고 있는
모든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의 인사이동 때 이런 일들이 가끔
벌어집니다. 인사이동을 시키면 하도 불만이 많아서 전화기를 꺼 놓고
당분간 휴가를 다녀올 정도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시켜주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일을 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한 신부님은 음악가가 되고 싶어 합니다.
사제가 음악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본당을 비워놓고
음대에 다니느라고 본당 신자들의 불만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교님께서
그러면 안 된다고 우선은 본당에 충실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신학교 때부터 그렇게 공부를 시켜달라고 했는데도 해 주지도 않았고
또 지금은 음악을 공부하라고 돈도 대 주지 않아 자비로 아껴가면서 하고
있는데 너무하신다고 오히려 주교님께 반발을 합니다. 자신은 훌륭한
음악가로서 교회음악의 발전을 위해 살겠다는 꿈이 있는데 교회가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음악 재능을 더 키워주면
교회를 더 발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세상에서 하고
싶었던 일들을 포기하지 못했다면 아직은 ‘그물’을 버리지 못하고
거짓으로 주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신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가짜 제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게를 하는
사람인데 성당에 나가면 사람들이 자신의 매상을 올려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봉사를 하는데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좋아서
임기가 다 찼는데도 다른 봉사자가 없다고 하며 10년 이상을 버팁니다.
10년이 지나면 이제 그 단체는 자신의 작은 왕국이 됩니다. 왜 대통령들이
법까지 바꿔가며 정권에서 내려오지 않으려고 하겠습니까? 바로 명예욕,
권력욕의 맛이 그만큼 강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벗어나기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은퇴 나이가 되지 않으셨는데도 수원 교구장을 10년만
하시고 다 내려놓고 시골로 들어가신 최덕기 주교님이 이런 면에서 참
대단하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만약 다른 봉사자가 없더라도 임기가 끝났으면 퇴임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내 꿈을 이루는데 도구처럼 쓰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를
쓰시는 분이 하느님인데, 하느님을 금송아지처럼 나의 꿈을 이루는 도구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물을 들고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복음에서 아버지 제베대오로 상징되는 세상의 인간적
애정들도 버리지 못하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기도 합니다. 어떤
신부님들은 가족이 어려워지자 자신이 가족을 돕겠다고 옷을 벗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그나마 양심이 있는 것인데, 굳이 교회에서 하는 어떤
사업이나 큰 직책을 맡아서 자신의 가족들을 배불리려고 하는 성직자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가족의 안위를 위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경우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사제 직무를 이용하여 자신의 사람들을 만들어갑니다.
어디 놀러갈 때 꼭 신자들을 동행시키거나 돈을 대게 함으로써 주위엔
항상 신자들이 따라다닙니다. 아마도 클 때 외로웠기 때문에 사제나
수녀가 되어 그것을 이용하여 친분을 넓히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어떤 신자도 그 사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용당한다는 기분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많이 얻기 위해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가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 제가 예수님을 열렬히 따르겠다는 마음으로 제 자신을 모조리
봉헌할 수 있는 불같은 신앙을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예수님께서 “그래? 그렇다면 네가 불구자로 살았으면 좋겠다. 네가 차
사고가 나서도 항상 감사하며 산다면 많은 사람이 나를 믿게 될 거야”
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저는 기도를 잘못했다싶어 얼른 “그건 아니고요,
몸은 좀 성하게 해 주세요”라고 조건을 변경했습니다. 그런데 상상 속에서
차 사고가 나서 불이 붙어 화상을 입을 상황인데 천사가 앞 유리를 깨고
기적적으로 저를 꺼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너 나에게 다 바친다고 했지? 그러나 사실 나도 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다만 네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을 마음을 원하는 거야.
세상에 복을 주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처럼 자기 아들마저도 주저 없이
봉헌할 수 있는 참된 종이 필요해.”
그렇습니다. 저 자체도 아직 못 버린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진정 우리가
그분의 죽음에 합당한 우리 생명을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을 그분께 감사로이 봉헌한다고 하지만 온전히 봉헌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많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를 따랐던 제자들이 바로 그물과 아버지를 버리고
따랐다는 사실은 참으로 대단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도
그분을 따라야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아직 포기하지 못하는 그물은
무엇이고 아버지로 상징되는 애정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하나를 버리지 않으면 다른 하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 것도, 세상의 애정도 다 미워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다처럼 제자가 된다고 하면서도 결국엔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삼각관계를 만드는 것들을
과감히 버릴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청합시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무엇을 회개라고 하는 것일까요?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복음에서 말하는 회개란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는 것을 말합니다.'
2015년 나해 1월25일 연중 제3주일 복음묵상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코1,15)
---
그리스도인에게 회개라는 말은 너무도 익숙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와 닿지도 않고 체험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일회적이지도 않습니다.
즉, 무엇이 회개를 말하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무엇을 회개라고 하는 것일까요?
단지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는 것을 회개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를 모른다 해도 사람들은 후회도 하고 뉘우치기도 합니다.
똑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쉽게 접하기 힘든 일종의 영적이고 신비적인 어떤 세계를
체험하는 것일까요? 복음이 말하는 회개는 죄에 대한 철저한 통회로
시작해서 결단으로 이어지는 체험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철저한 통회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아픔입니다. 결국 회개란
‘하느님과 나’라는 관계 안에서 자신의 전존재(全存在)를 뒤흔드는 통회의
체험이며, 이는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결단을 허락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회개란 하느님을 만나야만 주어지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커다란 은총입니다. 완전한 분의 그 크신 사랑 앞에서,
불완전한 존재로서 지은 죄에 대해 변명의 여지 없이 인정하게 되고,
그럼에도 감히 용서를 청하는 마음의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에서 말하는 회개란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사랑의 힘 때문에 자신의 모든 죄가 자연스럽고 선명하게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아픔을 느낍니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느끼는 아픔입니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으로 용서를 청하게 됩니다.
그 체험을 청하십시오.
그래야 회개의 의미를 알게 되고 참된 회개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의 불완전성은 또 다시 새로운 죄를 만들어갈 것입니다.
이 역시 우리 인간의 나약한 조건임을 하느님께서도 잘 알고 계십니다.
이 세상을 다하는 날까지 끊임없이 회개를 거듭하면서 조금씩 그분께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변함없이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체험한다면, 그분의 사랑을 이용하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적 삶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믿어야만
합니다.
---
(1월26일부터 2월6일까지 자리를 비우게 되었습니다. 기도 부탁 드립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2015년 나해 1월25일 연중 제3주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마르 1,20)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고귀하고 값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이 세상의 온갖 좋은 것도
다 가지고 싶어합니다.
예수님만으로 만족하십시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십시오.
하늘나라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오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아버지와 그물을 버리고
즉시 부르심에 응답하였듯이 또 오늘 개종축일을 지내는
사도 바울로가 그랬듯이 내려 놓고 가볍게 그분을 따라 나섭시다.
그것이 회개요 개종이겠지요.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내려놓으실래요?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한 마리 산새처럼
2015년 나해 1월25일 연중 제3주일
제1독서
<니네베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섰다.>
◎ 요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5.10
제2독서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7,29-31
복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0
한 마리 산새처럼
성경을 봉독할 때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묵상할 때 마다 얼마나 표현의
강도가 센지 깜짝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바오로
사도가 겪었던 하느님 체험이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이겠지요.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필립비 1장 21절)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코린토 1서 7장 29~31절)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릴 때부터 봐온 친척 큰 형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다들 없이 살던 시절이었습니다. 겨울이 되면
춥기는 또 얼마나 추웠습니까? 다들 두꺼운 외투 한 벌이 아쉽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형수님이 품을 팔고 또 팔아 두툼한 외투를 하나 장만해 큰
형님에게 입혔습니다. 그런데 마음 착한 큰 형님 한번은 술 한 잔 걸치시고
퇴근을 했는데 집안에 난리가 났습니다. 퇴근하고 집으로 들어오는 형은
얇은 셔츠 차림으로 오들오들 떨면서 들어온 것입니다.
다그치는 형수 앞에 형은 뭐라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우물쭈물
얼버무렸습니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퇴근길에 한 노숙자가 공원 벤치에
앉아있는데 얼마나 추위에 떨고 있던지 그러다 그 밤을 못 넘기겠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큰 형님은 형수 얼굴 때문에 몇 번을 망설이다가 마침내
외투를 그분 어깨에 걸쳐드리고 뛰어왔다는 것입니다.
수도원에 들어와서도 그런 모습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신부님 수사님들
중에 참으로 옷맵시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뭘 입어도 안어울립니다.
아예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다보니 마치 노숙자처럼, 개장수처럼 허름하게
옷을 입고 다닙니다. 그런 모습을 본 다른 형제들은 마음이 또 짠합니다.
그리고는 즉시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에게 걸쳐줍니다. 참으로 훈훈한
모습입니다.
사실 우리가 걸치고 있는 것,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손에 꼭 쥐고
있는 현찰 우리가 세상을 떠나면 누구 차지가 되겠습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하는 식구들, 그들도 사실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우리 마지막 순간에 머리맡에 앉아있을 수는 있지만 죽음까지 함께 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바오로 사도는 정말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세상의 형체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 이 지상의 도성이 영원한
도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이기에
용감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필립비 1장 21절)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코린토 1서 7장 29~31절)
지난 며칠 저희 수도회에서는 큰 경사가 있었습니다. 10명이나 되는
입회자, 4명의 사제서품 등등...
너무나 가슴 흐뭇한 일이 있었습니다. 막 서품을 받은 형제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디로 가서 사목하면 좋겠냐는 제 질문에 입이라도 맞춘
듯 똑같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제 출발선에 선 새 사제입니다. 회사로 치면 신입사원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신부님께 어디로 보내 달라 청하겠습니까?
저를 가장 힘든 곳에, 저를 가장 어려운 것이, 단 가장 가난한 청소년들
가운데로 보내주십시오.”
한 마리 산새처럼 아무런 미련 없이 소임지를 향해 간단한 짐을 싸는 우리
형제들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이 지상에서 이미 ‘찐한’ 하느님을
체험했기에, 이 세상에서 이미 충만한 하느님 나라를 체험했기에 가능한
신앙고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하늘부름(聖召)에 따름이 인생결론
2015년 나해 1월25일 연중 제3주일
제1독서
<니네베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섰다.>
◎ 요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5.10
제2독서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7,29-31
복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0
하늘부름(聖召)에 따름이 인생결론
대출하라 부르고 물건 사라 부르고 병 고치라 부르는 광고세상입니다.
돈 쓰라는 부름들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들으며 살아가는 나날입니다.
어른들이 그런데 청년들 아이들 아기들은 도와 달라 어른들을 부릅니다.
세상 어디서나 나를 부르기에 이에 응답하며 살다 인생 저물어 갑니다.
조용할 때 몸이 나를 부르고 영이 나를 부르며 진지하게 말 걸 테지요.
세상부름에 바쁘기보다 하늘부름(聖召)에 따름이 인생결론일 거라면서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르코 1,17~18)”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부르심과 응답|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1월25일 연중3주일
(요나3,1-5.10:1코린7,29-31:마르1,14-20)
제1독서
<니네베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섰다.>
◎ 요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5.10
제2독서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7,29-31
복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0
부르심과 응답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르심은 일상 안에서
주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응답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이 시간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는 기쁨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시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다.
“님께서 부르시면 ‘나’ 달려가지요.
하던 것 멈추고, 있는 것 버리고……
님께서 부르셨으니 ‘나’ 응답하지요.
두려움 버리고, 망설임 없이,
임이 원하시는 그 모습으로 ‘예’ 하며…. -홍요한-
예수님께서는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안드레아, 그리고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와 삯꾼들을 배에 남겨둔 채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마르1,18-19). 이것은 일상생활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부르심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물을 버리고 더욱이 아버지까지
남겨둔 채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는 것은 기존의 생각, 가치관을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만을 생각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소중한 것들을 미련 없이 떨쳐 버리고 앞을
보고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기”(루가9,62) 때문입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창세19,26) 그래서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사도는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코린7,31)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버리고 아버지를 남겨두는 것은 편안함과 안전, 기득권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제 생각을 바꿔라.
불의한 기존 질서를 따르지 말고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요구를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내 뜻을 접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은 멀리 있지 않고 일상 안에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 온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실천 없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2,17).
따라서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마음에 들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늘 생각해야 하고 또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회개한다는 것은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죽음에 이르기 까지 지속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내를
대하는 태도가, 남편을 대하는 태도가, 자식을 대하는 태도가, 부모를
대하는 태도가,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과연 주님의 마음에 드실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있다면 단호히 버려야 합니다. 잘못된 습관이 있다면
그물을 버리듯, 아버지와 삯꾼과 관계를 끊어버리듯 확실하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4,23-24). 응답한다는 것은 결국 새로워진 회개의 삶이
전제된 것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바다를 모르는 것은 좁은 우물 안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고, 여름 벌레가 얼음을 모르는 건 더운 여름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래요. 한 가지만 생각하는 사람이 다른 여러 가지를 모르는 것은
그 한 가지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내 안에 갇히면
다른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 판단이 아니라 주님의 판단이기를 바랍니다. ‘나는 잘 하고 있는 데
다른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을 주님의 잣대로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어머니의 위치에서 아내의 자리에서 혹은 아버지의 위치에서 가장의
자리에서, 남편의 위치에서, 직장의 상사로, 사원으로, 좋은
이웃으로……… 지금 삶의 자리에서 당신의 뜻을 행하길 원하시며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 마음에 드는 답을 하시기 바랍니다.
“주 하느님, 당신을 만나 뵐 수 있을 때 당신을 찾게 하소서. 당신이 계실
때 당신을 부르게 하소서…… 죄인은 제 길을 버리고 불의한 사람은 제
생각을 떨쳐 버리게 하소서. 당신이 가엾이 여겨주실 때 저희가 돌아오게
하소서. 당신의 생각은 저희 생각과 같지 않고 당신의 길은 저희 길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길은 저희 길 위에 있고 당신의 생각은 저희 생각
위에 드높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비와 눈이 땅을 적시어
싹을 틔우듯이 당신의 말씀이 저희에게 심어져 당신이 뜻하신 바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당신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고 뒤따라간 제자들의 대열에 저희가 들 수 있도록, 당신의
말씀이 헛되이 돌아가는 일이 없게 하소서”(이사 55,6-11참조).
매 순간 부르심에 응답하는 가운데 주님을 깊이 만나시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행정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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