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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약 두 달의 겨울방학을 마친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지난해보다 좀 짧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게 이 겨울이 그다지 춥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두 번 추위가 있기는 했습니다. 그 뿐이었지요. 지출한 난방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작년과 비교가 됩니다. 하지만 별로 고맙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겨울은 추워야 제격이잖아요. 춥지 않은 겨울이 지독하게 뜨거운 여름을 불러올까 두려워집니다. 하기야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하루의 걱정도 버거울 텐데 말입니다. ㅋㅋ 설마 이 나이에도 걱정할 일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걱정 없는 인생, 걱정 없는 하루가 있을까요? 그게 인생이냐? 할 것입니다.
참으로 오랜 만에 맑고 파란 하늘을 어제 아침 보았습니다. 한 겨울 지나며 그런 아침을 몇 번이나 보았는지 가물가물합니다. 거의 미세먼지에 범벅되어 지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난겨울 추위 대신 미세먼지 아래서 지나왔습니다. 이제는 어쩌면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존재 아닌가요? 물론 다 없어야 좋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에도 익숙해지나 봅니다. 코로나든 미세먼지든 있거나 말거나 용감하게(?) 맨 입에들 다니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기는 정말 답답하지요. 어쩔 수 없이 3년을 버텼던 것입니다. 일단 오늘을 살자는 심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을 지나야 내일이 오니까요. ㅋㅋ 아무튼 코로나든 미세먼지든 이기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자입니다.
다시 주말입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
2024년 2월 17일 김종우 목사 드림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잠언 22 : 29)
<소풍>
경제문제에 부딪치면 일단 쉽고도 빠른 해결책을 찾으려 합니다. 그 가장 기대해볼 만한 상대가 부모입니다. 자식 사랑 없는 부모는 드물지요. 어떻게든 도와주려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것을 자식도 잘 압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부모에게 손을 내밉니다. 부담 없고 뒷걱정 없고 어쩌면 가장 확실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눈치 볼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무작정 달라붙어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그만한 경제력이 있다면 크게 문제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입니다. 나이 든 부모도 경제활동에서 진작 물러나 있고 버는 것보다는 쓰는 위주로 살고 있다면 사실 도움을 줄 만한 힘이 없습니다. 본인의 삶을 유지하는 것만도 다행이지요.
그럼에도 가진 것 다 긁어서 자식을 도와주다 거덜 나면 어떻게 될까요? 아직 젊은 자식은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발버둥 칠 수 있습니다. 소위 맨 땅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늙은 부모는 그럴 입장이 못 됩니다. 몸도 마음도 그리고 실제적인 실력도 모자랍니다. 앞서가는 시대를 따라가기 어렵습니다. 일할 만한 체력도 부족합니다. 그런데 아직 자식은 도움을 줄만한 형편이 안 됩니다. 어떻게 할까요? 막막해집니다. 그래서 요즘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에게 절대로 재산 물려주지 말라는 것이지요. 살아생전에는 가지고 버티라는 것입니다. 속담에 그런 말도 있잖아요. 뒤 보러 갈 때와 보고 나올 때가 다르다고요. 일단 주면 끝입니다.
아들 녀석이 사업을 하다가 위기에 봉착합니다. 홀로 사는 어머니를 찾아옵니다. 도와달라는 것이지요. 사실 이미 전에 많은 것을 가져갔습니다. 이제 남은 거라야 집 한 채입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담보로 달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줄 것이 없다고 하지만 아들은 끈질기게 달라붙습니다. 갈등합니다. 주고 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들 집에 가서 살아요? 사업이 다시 일어난다는 보장도 없고 아들 집에 들어가면 며느리의 눈치를 보며 살게 될 것입니다. 몸이 자꾸 쳐지는데 도움은커녕 짐이 되기 십상입니다. 좋아할 며느리는 없을 것입니다. 잘 해줘야 요양원으로 입소시키겠지요. 그렇게 살 것이 훤히 보입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은심’이 더 이상 줄 거 없다고 버티고 있는데 갑자기 고향 친구 ‘금순’이가 곱게 차려입고 방문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그라믄 오랜 만에 고향에나 함 내려가 보자,’ 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오랜 만에 둘이서 남해가 보이는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옛날 다니던 초등학교는 폐교하였습니다. 짐작하였듯이 젊은이는 얼마 없고 노인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셈입니다. 그 때 그 시절 같이 학교 다니던 친구들을 봅니다. 반갑지요. 반세기도 전에 있었던 학창시절의 일들이 떠오릅니다. 그 때의 얼굴들하고는 차이가 있지만 함께 하였던 사건들이 모락모락 떠오릅니다. 좋은 일도 있고 마음 상하는 일도 있습니다. 즐거운 추억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꼭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인생이 복으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막걸리 배달하는 남자가 잠시 바라보더니 놀라 다가옵니다. 학교 다닐 때 좋아 따라다니던 남학생 ‘태호’입니다. 반갑다고 야단입니다. 어쩌면 첫사랑, 다 늙어서 만나니 기분이 이상합니다. 옛날이야기이지만 그 때의 감정이 살며시 떠오릅니다. 이제는 모두 인생 거의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 때의 애틋한 마음을 가져볼 수는 없겠지요. 주름진 몸으로 그런 감정이나 느낌을 되찾고자 하는 것도 과욕일지 모릅니다. 그래도 묘하기도 하고 애틋하지는 않지만 그 설렘을 가져보고 싶은 마음은 있을 것입니다. 기쁘고 반가운 마음에 함께 어울려 당시의 노래도 불러봅니다. 조용했던 마을이 잠시 잔치 분위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자연은 그대로일지라도 누리는 사람들의 기분에 따라서 다르게 따라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분 좋게 누릴 수도 있고 아프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인생은 그 속에서 나름의 시간을 만들며 어울려 사는 것입니다. 그 좋은 풍경을 포탄으로 짓밟을 수도 있고 잔치하며 즐길 수도 있습니다. 순전히 사람들 나름이지요. 모두가 짧은 한 생애를 살고 떠나는 것인데 서로 쌈질하며 전쟁하며 서로 빨리 보내려고 아우성치는 것을 보면 안타까움만 일어납니다. 모처럼 만난 고향친구들이 즐겁게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병마가 언제 무슨 일을 가지고 누구에게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위험요소는 항상 있습니다. 그만한 시간을 사용한 몸이니 어느 부분에서 고장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마음 설렜던 시간, 좋아했던 시간, 가슴 아파했던 시간들이 각자의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느지막이 만나서 짧게 추억잔치 하며 즐겁게 지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사람이 세상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우리도, 나도 곧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감사하며 이 날을 즐겁게 지냅니다. 때가 오기 전에, 우리 함께 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시간을 만드는 거야. 인생이란 잠시 다녀가는 소풍인데 못 즐길 것도 없지. 영화 ‘소풍’(Picnic)을 보았습니다. 남해의 고즈넉한 풍경과 인생 살아본 배우들의 찰진 연기가 잘 어울립니다. 아마도 나이별로 느낌이 다르겠지요.
천국 비자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은 저 바벨론 땅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아직 자식도 없던 그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겠다, 너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겠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다(창 12 : 1 - 3) 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자기 고향을 떠납니다. 하나님이 가라 하는 곳으로 들어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가나안 땅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왔지만 그 땅을 소유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느 날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또 말씀하십니다. 창 15 : 13 - 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그 이방이 어디가 되는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그 말씀을 받던 때 아브라함에게는 자식도 없었습니다. 나이도 지긋하게 노인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 뒤에 놀랍게도 늙은 아브라함 부부에게 아들이 생깁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지나 이방 땅 즉 애굽에 내려가서 살게 됩니다. 처음에는 대접 받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크게 번성합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큰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이방 민족이 들어와서 번성해가니 본토 백성이 겁이 날 수밖에 없었겠지요. 누구보다 통치자인 왕이 걱정합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대로 그 땅에서 크게 곤욕을 당합니다. 자식도 마음대로 낳지 못하는 고난을 당하지요. 그러니 백성의 아픔과 슬픔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오래 전 조상에게 약속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부르짖었겠지요.
하나님이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약속하신 그 때를 기억하시고 당신의 종을 택하여 부르십니다. 그 종이 바로 모세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세를 통하여 오래 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일을 행하십니다. 즉 당신의 백성을 그 이방 땅에서 이끌어내시는 것입니다. 자 이제 성경을 보겠습니다. 출 6 : 2 - 3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많이 들어왔겠지만 다시 한 번 새겨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호칭할 때 크게 두 이름을 사용합니다. 흔히 사용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누구나 사용하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또 따로 사용하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바로 ‘여호와’입니다. 물론 그 발음에 있어서 정확성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지금 세상에서 그 누구도 정확한 발음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호와’는 전혀 틀린 발음이고 아마도 ‘야훼’가 그래도 비슷하지 않을까 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당신을 소개할 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그 이름은 바로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출 3 : 14) 아마도 모세에게 처음으로 그 이름을 소개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막연하게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구전으로 쭉 전해져 왔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여호와라 말씀하십니다. 모든 일의 출발이며 원인자이시라는 뜻입니다. 렘 33 : 2절에 보면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바로 그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택하시고 부르시고 건지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출 3 : 7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이제 모세에게 나타나시고 모세와 함께 하셔서 애굽에서 당신 백성을 위해 구원의 역사를 행하시겠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택하고 부르신 당신의 백성을 돌아보십니다.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 아픔과 슬픔을 내려다보시며 우리를 그 고통의 자리에서 구원해 내시고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 봅니다. 사 43 :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신약성경에서는 좀 더 자세히 말씀하십니다. 엡 1 : 4 - 6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신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1. 우리 하나님은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말씀하였습니다. 그 뜻은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인간들이 신이 있다는 둥 없다는 둥 떠들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하나님은 그냥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모든 세상과 만물의 창시자이십니다. 골 1 :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아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창조,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전능하시기에 창조하십니다. 창 1 :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보이는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전능한 하나님이신가 보여주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분명 그를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어주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 나이가 90이 되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렇다 치고 그 아내 사라도 이미 나이 80이 된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여자로서의 기능도 끝났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부부는 이제 자기네 몸에서 자식이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도 또 10년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창 17 : 15 - 16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그런데 정작 아브라함은 17 - 18절에서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즉 첩의 자식이나 후사로 삼게 해달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할진대 그 아내인들 오죽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나타나 말합니다. 창 18 : 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그리고 그 반응은 11- 12절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한 마디로 못 믿겠다 그거지요.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과연 말씀하신 그 날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기네 몸에서 낳은 아들을 갖게 됩니다. 창 21 : 1 - 2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사람이 한 일입니까? 사람은 포기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롬 4 : 17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출 6 :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수십만이 되는 백성이 어떻게 한꺼번에 이동을 하겠습니까? 더구나 자기 지배하에 있는 그 값싸고 막대한 노동력을 어찌 그냥 내보냅니까? 당시 애굽에서는 여기 저기 방대한 건축공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감당합니까?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 히브리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에서 들어온 노예들이나 진배없었습니다. 출 1 : 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그런데 이 노동자들을 그냥 보내줍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애굽 왕이 내보내게 만들겠다. 누가요?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세상에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든지 뜻하지 않은 질병에 걸린다든지 천재지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을 누가 주관합니까? 우리 하나님이.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니 우리 이상의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나의 능력 이상의 힘을 가지고 계신 분이 나를 지키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산다면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겠습니까? 기도는 나약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언약대로 행하십니다.
사람은 약속을 해놓고도 마지못해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랑을 나눈 연인이 잠시 헤어져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굳게 약속을 합니다. 언제 어디서 만나기로 말입니다. 그 날을 행복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약속 당일 시간 맞춰 약속 장소로 달려갑니다. 부푼 가슴을 안고 시간에 늦을까 초조한 마음으로 택시기사를 독촉하며 달려갑니다. 저기 그곳이 보입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너무 기뻐서 좌우도 살피지 않고 길을 가로지릅니다. 그런데 깨어나고 보니 온통 붕대로 감겨 병원에 누워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힐 일입니까? 어느 영화 이야기를 간추린 것이지만 이런 일이 우리들의 인생길에서는 종종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약속을 하지만 그리고 그것을 지키려 최선을 다하지만 어쩔 수 없이 못 지키는 경우도 생깁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께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행하십니다. 언약하신 대로 이루십니다. 창 21 : 1 다시 봅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말씀대로 권고하셨고 말씀대로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까? 그 말씀에 신뢰성이 없다면 어찌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우리가 정치인들의 말을 그다지 경청하지 않습니다. 왜요? 신빙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엽기 유머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국회의원 나리를 태운 고급 승용차가 빗길에 미끄러져 절벽 아래 논두렁으로 추락했습니다. 때마침 폭우를 걱정하던 농부가 논을 살피러 나왔다가 사고 현장을 목격했지요. 농부는 땅을 파고 국회의원을 정성껏 묻어줬습니다. 며칠 뒤… 파출소장이 그 길을 지나가다 부서진 승용차를 봤습니다. 차적 조회 후 그 지역 국회의원의 승용차임을 알고는 깜짝 놀라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그 농부에게 어찌된 영문인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농부는 파출소장에게 사고가 난 경위와 자신이 그 차에 있던 국회의원을 고이 묻어주었노라고 말했습니다. 경악한 파출소장 왈 "아니 그렇담 그 국회의원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겁니까?" 농부의 대답인즉 "뭐 살아있다고 외쳤지만 그 사람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우리의 현실을 빗대어 만든 것이지만 이게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민 23 : 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아멘!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짓자 죄에서 구원해줄 구원자를 약속하십니다. 사람을 죄에 빠뜨린 원수에게 말씀하십니다. 창 3 :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그 말씀하신 대로 갈 4 : 4 - 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하여 말씀하신 대로 여자의 후손으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나아오시는 것을 보며 말합니다. 요 1 : 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우리 인생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롬 6 : 23) 그래서 히 10 :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약속하신 대로 이루시고 우리는 구원의 길을 얻었습니다.
출 6 : 4 - 5절 봅니다.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아파하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신 약속,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우리는 잘 압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인도하여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행하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우리 정치인들은 믿을 수 없지만 우리 하나님만은 언제라도 믿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말은 이루어지는 그 순간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늘 조마조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일호의 의심도 불편함도 초조함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반드시 이루십니다. 할!
3. 하나님은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여호와,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행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6 - 7절까지 읽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아멘! 하나님이 전능하신 그 능력으로 당신의 백성을 애굽에서 빼내어 건져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당신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고 또한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창조자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자식을 키운 부모라면 그 자식이 자라서 처음으로 부모를 바라보며 ‘아빠’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의 감격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그 자식의 부모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당연한 그 호칭을 그 입에서 들을 때의 그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듭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의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이요 또한 그의 택하심을 받은 그의 백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우리가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그 누구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기뻐하십니다.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지라” 하나님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여 부르시고 그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 강한 손에 의해 구원받은 것을 알고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엡 1 : 4 - 6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아멘! 이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제물로 삼으시고 우리를 죄악 세상에서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여 하나님을 기리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언약을 지키고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여 그 하나님을 마음으로 자랑하고 칭송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하나님은 기쁜 마음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문제는 그 하나님을 내가 과연 알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 하나님은 달리 말씀하십니다. 호 6 :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세상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제사도 번제도 드리지 않습니다. 누가 드립니까? 하나님 백성이 드립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압니까, 모릅니까? 안다면 하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안다고 생각은 하겠지만 사실은 모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사나 번제를 드리기 전에 우선 하나님부터 알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오늘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전에 하나님부터 알고 드리라는 말씀이지요.
왜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씀하실까요? 요 1 :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을 아시나요? 얼마나 아십니까? 성경 1189장, 31173절 가운데 몇 %나 아십니까? 암송하고 있는 성구는 얼마나 되지요? 암송한들 그 뜻을 알겠습니까? 성경은 구약과 신약 곧 약속입니다. 지키자고 한 약속 아닙니까? 그런데 알아야 지키지요. 여태 듣고 배우고 알고 있다는 성경은 거의 과거 역사 이야기 아니면 현재 우리가 지켜야 할 교훈의 이야기 아니었습니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약속은 앞으로 있을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면서 어떻게 약속을 지키렵니까? 그래서 알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 혼자 약속을 지키시고 우리는 못 지킨다면 초림 때 하나님 백성 유대인이 오신 메시야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일과 똑같이 할 것입니다.
그런데 뭐 그리 복잡하게 신앙생활 하냐고 핀잔주시렵니까? 성경 몰라도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고 우기시렵니까? 성경을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서 하나님에게 예배드린다고요? 하나님 말씀과 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 가서 영생복락을 얻겠다고요? 마귀가 박수치며 환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바로 자기 나라, 마귀 나라로 올 곳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길입니다. 제대로 하나님 나라 가는 길입니다. 요 1 :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을 자꾸 되뇌어보십시오. 말씀이 하나님이십니다. 마 7 :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아버지의 뜻은 당신을 알라는 것이고, 하나님이 말씀이시니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켜야 할 약속이 무엇인지 알고 지킬 수 있습니다.
언약(약속)을 지키지 아니하면 망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그래서 멸망하고 끝난 것입니다. 호 6 : 7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우리는 이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 천당’이 끝이 아닙니다. 시작일 뿐입니다. 말씀, 곧 약속을 확실하게 알고 신앙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천국비자입니다. 단순히 다시 오신다,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언제’는 모른다고 하셨지만 어디에 왜 어떻게 오시는지 알아야 대비하지 않겠습니까. 단 12 : 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부지런히 다니며 배우십시오. 육신의 양식은 외식도 잘 하면서 왜 자기 것만 우깁니까?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이 질타하셨습니다. 마 23 :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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