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재집 제7권 =잡저(雜著)-이준과의 문답 정묘년(1567, 명종22)〔與李浚問答 丁卯〕
내[덕홍(德弘)]가 시습재(時習齋)에 홀로 머물 때에 회재(晦齋) 이 선생의 서손(庶孫) 준(浚)이 계상(溪上)에서부터 도산(陶山)을 지나갔다. 내 항상 회재 선생은 세상에 뛰어난 인재이고 선각자이신데 참소하는 말에 시달렸고 유배지에서 목숨을 잃었으니, 이는 천고의 불행이며 이승과 저승에서 통탄할 일이라 여겼다. 이제 성명(聖明)의 시대를 만나 죄가 없다는 것이 밝게 드러났으니, 한편으로는 이 사람을 위해 축하할 일이고 한편으로는 우리 유도(儒道)를 위해 다행한 일이다. 그 후손을 만나니 정이 마치 옛 벗과 같고 마주앉아 얼굴을 펴니 나도 모르게 진심이 드러났다.
이준(李浚)이 묻기를 “퇴계 선생이 누차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는데, 만약 벼슬이 더해지는 명이 있고 옛날의 예를 회복한다면 무슨 말로 사양하며 무슨 뜻으로 나아가지 않았겠습니까? 더구나 군자가 학문을 한 것이 어찌 뜻이 없겠습니까? 맹자가 말하기를 ‘어려서 배우는 것은 장성해서 그것을 실행하려는 것이다.’ 하였으니, 군자가 외진 산야 사이에 살면서 그 시대의 일에 입 다무는 것이 어찌 그 본마음이겠으며 어찌 그것이 도리이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군자의 도는 그러하고 맹자의 가르침은 확고합니다. 나의 소견으로는 우리 선생께서는 도가 있다고 자처하지 않았고 도를 행한다고 스스로 기약하지 않았으며, 항상 부족한 마음을 지키고 허물이 없는 영역을 기약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세 조정을 섬기면서 네 번이나 권간(權奸)을 만났으나 포부를 감추고 도를 지키며 아부하거나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조정에 나아가서는 물러날 것을 계획하고 초야에 물러나서는 나아갈 것을 생각지 않았으며, 병을 조리하고 졸렬함을 지키는 것을 자기의 분수로 여겼고 경(敬)을 지키고 의(義)를 밝히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습니다. 본원(本源)을 함양하여 오래도록 침잠하고 만족해하며 부지런히 힘써 완상하고 즐기면서 노년이 이르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 또 어느 겨를에 외물(外物)을 사모했겠습니까?
그러니 도를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세상을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며 출처(出處)의 사이에서 힘썼습니다. 옛사람으로 도의(道義)를 자신의 임무로 여기고 도를 행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기는 자가 요순(堯舜)과 이주(伊周)와 같은 군신을 만나지 못하면 모두 조롱당하고 곤욕을 치르는 치욕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공맹(孔孟)의 시대에 임금이 되었던 자가 반드시 다 어질고 훌륭한 인물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 아니고, 정권을 잡은 자 또한 반드시 쓸 만한 자를 알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이 사람이 이 정치를 맡으면 나라가 반드시 다스려질 것이고 백성들이 반드시 편안할 것이다.’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현의 출처는 시운(時運)의 성쇠에 관계되고 사람의 노력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공맹(孔孟)이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주자는 세상에 보기 드문 인재로 여러 현인을 모아 크게 이루었고 그 사람됨 또한 지극하였습니다. 송(宋)나라가 남쪽으로 옮겨가고 효종(孝宗)의 밝은 시대를 만나 도를 행하고 세상을 구제하여 나라의 치욕을 씻고 옛 강토를 회복할 책임을 알지 못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결같이 사특한 무리가 이간하고 소인이 조정에 나아가면 황급히 물러날 것을 생각하여 밥을 지으려고 물에 담가 둔 쌀을 건져 급히 떠나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니니, 이와 같은 것이 어찌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음(陰)이 생겨나 양(陽)의 가운데 성하여 날마다 양의 덕을 깎으면 그 화(禍)는 상구(上九)에 오르는 참혹함보다 심할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산림의 사이에서 세상을 마치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우리나라 기묘 제현(己卯諸賢) 또한 세상에 드문 인재로 여유를 가지고 서두르지 않는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몸소 성명(聖明)의 시대를 만나 절박하게 정치를 도모하여 삼대(三代)처럼 백성들은 법령을 편안히 여기고 선비들은 가르침을 즐겁게 여기며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토론의 정치가 거의 이루어져 태평성대에 들어갈 만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라지풀과 같은 소인배가 그 사이에 싹을 틔워 임금의 귀에 참소하였으니, 그 말에 이르기를 ‘이 사람의 어짊은 옛날에도 보기 드물었고 이 일의 성대함은 주(周)나라 이후로 듣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이 그림자처럼 응하고 선비들이 물결처럼 따르며, 인심이 날로 합하고 세력이 날로 성대해 집니다.’라고 하니, 이에 임금이 진노하여 당고(黨錮)의 화를 초래하고 당시의 참상을 빚어내었습니다.
이때부터 선비들이 수행을 좋아한 해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서로 경계하며, 난초와 산초가 변하여 향기를 풍기지 않고 미치광이 말만 익숙해져서 도리어 전날보다 못한 데 이르렀으니, 이는 이 세상에 이로움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도리어 이 도에 해로움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중종(中宗)의 초심이었겠습니까? 다만 뭇 용들이 나오는 날에 어린 돼지를 살피지 못한 까닭입니다.
더구나 공자가 말하기를 ‘《서경(書經)》에 효(孝)에 대하여 말하였다. “효도하며 형제간에 우애하여 정사(政事)에 베푼다.”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정사(政事)를 하는 것이다.’ 하였고, 《대학》 전문(傳文)에 ‘집을 나가지 않고 나라에 가르침을 이룬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동강(桐江)의 한 가닥 실오라기의 낚싯줄이 한(漢)나라의 구정(九鼎)을 부지하였다.’라고 한 것입니다.
회암(晦菴)은 붓 하나로 만고(萬古)의 긴 밤을 열었으니, 당시에 정권을 잡고서 어진 이를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한 자들과 어찌 동일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나아가서도 근심하고 물러나서도 근심하는데, 혹은 헤아리지 못하는 재앙이 있고 혹은 절로 그렇게 되는 효과도 있으니, 군자의 출처를 살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선생께서는 본래 성현을 자처하지 않았고, 성현의 사업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러나 스스로 쓰일 만한 실력이 없다고 여겨 오래도록 참된 학문에 힘써 만에 하나라도 있을 공효를 기대하였습니다. 저는 부족하여 들은 것도 없고 또한 본 것도 없습니다. 다만 이 사람이 시의(時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나의 기준으로만 논하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에 문답 사이에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D001] 이준(李浚) :
1540~1623.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求庵)이다. 조부인 회재의 문집 서문을 받아 출간하고, 옥산서원(玉山書院)을 건립하였다. 1593년(선조26) 임진왜란 때 영변에 미곡(米穀)을 헌납하여 군사들의 식량을 도왔다. 또 화왕산(火旺山) 회맹(會盟)에 동참하여 수어(守禦)에 대비하였고, 무과에 합격했다. 경산 현령, 군기시 첨정, 만경 현령, 청도 군수가 되었고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저서로 《구암유고(求庵遺稿)》가 있다.
[주-D002] 유배지에서 목숨을 잃었으니 :
이언적이 1547년(명종2)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한다.
[주-D003] 어려서 …… 것이다 :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이 어려서 공부하는 것은 장성하여 그것을 세상에 행하려는 것이다.[夫人幼而學之, 壯而欲行之.]”라고 하였다.
[주-D004] 병을 조리하고 :
병들었다고 핑계를 대고, 방문한 사람을 맞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후한(後漢) 고표(高彪)가 마융(馬融)을 방문하여 대의(大義)를 물으려고 하였으나, 마융이 병들어 만날 수 없다고 거절하자, 고표가 옛날 선비를 만나려고 급급했던 주공(周公)과는 전혀 다르게 “공은 지금 병을 치료한다면서 선비를 오만하게 대한다.[公今養痾傲士]”라고 책망하고는 그대로 떠났다고 한다. 《後漢書 卷80下 文苑列傳 高彪》
[주-D005] 이주(伊周) :
은주(殷周) 시대 현상(賢相)인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을 말한다.
[주-D006] 밥을 …… 것 :
황급히 떠나는 것을 말한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공자가 제(齊)나라를 떠날 적에 밥을 지으려고 물에 담가 둔 쌀을 건져 급히 떠났다.[孔子之去齊, 接淅而行.]”라고 하였다.
[주-D007] 상구(上九)에 오르는 참혹함 :
《주역》 〈건괘(乾卦) 상구(上九)〉에 “높이 날아오른 용은 반드시 후회할 것이 있다.[亢龍有悔]”라고 하였는데,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겸퇴할 줄 모르면 쇠하여 패망한다는 의미이다.
[주-D008] 기묘 제현(己卯諸賢) :
1519년(중종14)에 있었던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를 입은 사림(士林)을 말한다. 조광조(趙光祖)를 위시한 김정(金淨) 등 유교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이른바 삼대(三代)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려던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훈구파(勳舊派)인 남곤(南袞)ㆍ홍경주(洪景舟) 등의 모함으로 사사(賜死) 또는 유배당한 일이다.
[주-D009] 당고(黨錮)의 화(禍) :
당쟁(黨爭)에 연루되어 화를 당한 것을 말한다. 동한 환제(東漢桓帝) 때에 환관(宦官)이 정권을 주도하자, 사대부였던 이응(李膺), 진번(陳蕃) 등이 태학생 곽태(郭泰), 가표(賈彪) 등과 연합하여 환관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러나 환관들은 오히려 그들이 붕당을 지어 조정을 비난했다고 무고하여 이응 등 200여 명을 체포하여 종신금고형(終身禁錮刑)을 받게 하였고, 영제(靈帝) 때에 이응 등이 다시 기용되어 대장군 두무(竇武)와 모의하여 환관을 주벌하려 하였으나, 일이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는 바람에 이응 등 100여 명이 피살되고 말았다. 그 후 이 사실을 당고지화(黨錮之禍)라고 불렀다. 《後漢書 卷97 黨錮列傳》
[주-D010] 수행을 …… 없다 :
올바른 것이 오히려 재앙이 되었다는 것을 한탄하는 말이다. 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經)〉에 “어찌하여 옛날엔 향기롭던 풀들이, 지금은 다만 이처럼 쑥 덤불이 되었는가. 그 어찌 다른 까닭이 있어서이랴. 수행을 좋아한 해보다 더한 것이 없구나.[何昔日之芳草兮, 今直爲此蕭艾也. 豈其有他故兮, 莫好修之害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11] 뭇 용들이 …… 까닭입니다 :
군자가 소인을 살피지 못한 까닭이라는 말이다. 뭇 용은 군자를 비유한 말이고, 어린 돼지는 소인을 비유한 말이다. 《주역》 〈구괘 초육(姤卦初六)〉에 “약한 돼지가 날뛰고 싶은 마음이 진실하다.[羸豕孚躑躅]”라고 하였는데, 이는 어린 돼지가 비록 강하지는 못하지만 항상 도약할 뜻을 품고 있듯이 소인이 기세가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항상 군자를 해치려는 뜻을 품고 있다는 말이다.
[주-D012] 《서경(書經)》에 …… 것이다 :
《논어》 〈위정(爲政)〉 21장에 나오는 말이다.
[주-D013] 동강(桐江)의 …… 부지하였다 :
후한(後漢) 엄광(嚴光)이 친구인 광무제(光武帝)가 높은 벼슬을 주겠다는 호의를 거절하고 부춘산(富春山)에 들어가 숨어 살며 동강에서 낚시로 소일하였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선비들의 기개를 높여 주어 후한의 국운을 유지하게 했다는 말이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嚴光》 구정(九鼎)은 하우씨(夏禹氏)가 구주(九州)의 쇠붙이를 모아 주조했다는 솥을 말하는데, 하(夏)ㆍ은(殷)ㆍ주(周) 시대를 전해 내려오면서 천하를 차지한 제왕 혹은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보배로 여겨져 왔으며, 후대에 종묘사직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史記 卷12 武帝紀》
ⓒ 한국국학진흥원 | 김우동 (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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