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있는 식물들.
현관 문 앞에는 관음죽, 창처럼 입 끝이 뾰족한 유카, 언제나 머리를 숙이고 있는 벤쟈민, 거실에는 우산을 펼친 모양의 파키라, 손가락 크게 벌린 것 같은 잎을 가진 셀럼, 학(鶴)처럼 흰 모양의 꽃봉오리가 달린 스파티필름, 다양한 연두빛 무늬를 가진 스킨답서스. 거실 창가에는 생기 발랄한 행운목, 전영석 형제님이 교회에 올려 놓으셨던 안시리움, 딸을 보는 것 같이 좋은 싱고니움, 어머니 살아계실 때 서울 외삼촌집에서 온 자칭 인조화라고 부르는 놈, 거실창을 자신의 잎으로 아아치 모양의 수를 놓은 일년초 더덕.
빛이 강한 베란다에는, 잎가를 둘러 작은 돌기가 돋아나는 물을 싫어하는 천손이, 또 물을 싫어하는 잎이 두꺼운 은행목, 물이 필요하면 잎이 붉은 색으로 변하는 적귀성, 정금자집사님이 부산 가실 때 주신 잎이 시원한 비비추와, 꽃이 족도리같이 생긴 족도리풀, 거의 매일 물을 주어야 하는 어린 캔들프랜트, 보라색 꽃으로 피어 하얀색으로 지는 향기 만점 자스민, 수반에 담긴 화분에서 자라는 동전모양의 워터코인, 집 사람 손가락 하나에 묻어와 워터코인과 함께 번식하고 있는 물개구리밥, 봄철 내내 보라색 꽃을 피워 준 경란자매님이 주신 제라늄, 호접란에 장식용으로 심겨 딸려왔던 산호수, 베란다의 최고참인 아주 어렸던 단풍, 일년내내 하얀 꽃을 피우는 알뿌리 사랑초, 오랜 고생 끝에 회생한 부겐베리아, 교실 아이들 손 올리듯 빨간 꽃을 일제히 올리는 시클라멘, 지난달 서울서 와서 단추 모양의 붉은 꽃을 낸 꽃기린, 가을 온다고 노란 꽃봉오리를 맺은 교회 뒷 계단에 있던 들국화, 포자를 날리는 시기에 화단에 민폐를 끼치는 고사리, 키 크고 넓게 뻗은 가지에 달린 잎으로 화단 분위기를 살리는 남천, 여름이 오기까지 풍성한 꽃을 보여주는 권양숙 집사님이 주신 신비디움. 매일 새 꽃을 피우고 지는 나팔꽃. 앙증맞은 선인장들, 그리고 아직 달린 것이 없는 가지와 하늘고추, 오래도록 세력이 미미한 춘란, 그 반대인 군자란과 풍란, 무지한 주인을 만나 고생이 많은 상사화, 호접란과 겨우 한줌 남은 너도부추, 그리고 죽을 것만 같은 잎이 가늘고 긴 이름 모르는 알뿌리 꽃...
올해 우리집 베란다는 그야말로 화단이 되었다. 집사람은 집에 들어올 때마다 환성을 지른다. 집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작년에는 이렇지 않았지요?” 물론 작년에도 배란다에는 많은 화분이 있었다. 그러나 올해 우리는 어느 봄 날부터 화단에 사랑과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詩)에서처럼 꽃은 누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자 꽃은 그에게로 가 꽃이 된다. 왜냐면 만물은 사람이 다스리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들의 이름을 불러줄 때 그들은 우리에게로와 비로소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그들이 가진 아름다움이 비로소 아름다움이 된다..
만물을 다스리는 사람을 다스리는 분은 하나님이다. 꽃이 사람에 대하여 그렇듯 하나님이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사람은 다만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실 때 나는 비로소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우리는 그에게로 가 각각의 이름로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된다. 창조주의 화단 안에 있을 때 우리가 가진 아름다움은 비로소 아름다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