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고비마다 임한 주님의 손길 나는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어나 북한에서는 중류 계급이라 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부모를 비롯한 친척들도 당 간부이거나 군 고위 관계자였기 때문에 북한 제도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충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난의 행군 시기가 오면서 남동생이 길거리에서 죽고 아버지는 더는 살 희망이 없다면서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
남편이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매일 도박과 음란한 생활을 이어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1999년 말, 30대 초반에 북한을 탈출할 결심을 하게 됐다. 아들과 함께 두 차례 탈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세 번째 시도에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을 두고 먼저 중국에 가서 자리를 잡고 데리러 오겠다는 굳은 약속을 한 뒤 탈출에 성공했다.
두만강을 넘어 중국 길림성 산골에 사는 총각에게 인신매매로 팔려 15년을 생활했다. 북한에 두고 온 아들과 부모 형제를 생각하면 제대로 잠을 못 이루고 눈물로 지새우다 보니 심장병으로 고생을 하고, 심한 출혈로 병원에 가보니 자궁에 문제가 생겨 수술하지 않으면 3개월을 넘기지 못한다고 했다.
동네 이웃의 전도로 한족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나를 안타깝게 여긴 한 교인이 벼를 팔아 번 돈을 주며 빨리 수술하라고 도와줬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나는 마태복음 10장 1절 말씀이 떠오르며 나를 치료한 것은 전적인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북한사람이라고 고발당해 공안차에 실려 길림성 감옥으로 가게 됐다. 나는 3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밤낮으로 중국어 찬양을 불렀다. 밤이 되고 내 찬양소리가 울려 퍼지던 중, 한 경찰이 다가와 자신도 기독교인이라며 내일 오후에 버스가 오면 북송될 텐데 지금부터 가짜로 죽는 흉내를 내면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알려줬다.
나는 입에 거품을 물고 바지에 물을 부어 실수한 것처럼 쓰려져 있었다. 다음 날 경찰들이 내게 다가와 눈을 뒤집으며 “죽어가고 있다”며 집으로 후송시켰다. 그 후 몇 차례 공안이 잡으러 왔지만 하나님과 교인들의 보살핌 속에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고 2014년 제3국을 거쳐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늦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해 사회복지학과 4년을 졸업하고 치열하게 생활하다보니 연골이 심하게 닳아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해야만 했다. 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의 기도와 격려 가운데 수술은 잘 되었지만 수술비가 문제였다. 그런데 “모든 것을 근심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리고 바로 병원 접수처에서 구청과 주민센터가 협력해서 수술비를 해결해줬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현재 평화나눔 봉사단의 사회복지사로 활동하고 있다. 앞으로의 비전은 탈북민들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돕는 작은 시설을 운영하는 것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하늘의 소망을 품고 감사히 살아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