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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받은 자의 태도 (시116:1~19) 찬송 ; 460장.
본 시편은 내용으로 볼 때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하여 곤란 중에 있을 때의 처지와 그 소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삼하16~18장). 그래서 다윗의 저작으로 보기도 합니다. 1~11절까지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자상하심을 찬양하고, 12~19절에서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로 인해 행한 서원을 갚겠다는 다짐을 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은혜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1. 여호와는 우리의 음성과 간구를 들으십니다(1~4).
목자가 사랑하는 양들의 음성을 알듯이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의 음성을 아십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간구를 들어 주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시50:15절 말씀에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어떤 형편가운데 있든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기 위해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2.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자비로우십니다(5).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경험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자비하심도 우리를 죄악에서 구속하신 사건 속에서 구체적이고도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사도 바울의 증거 가운데 거듭 강조되고 있듯이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주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엡2:8~9).
이 하나님의 은혜는 강권적인 은혜입니다. 그래서 칼빈의 교리가운데서는 이것을 가리켜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공로로 보나, 처지로 보나 은혜 받은 만한 구석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을 멀리해 온 죄인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는 못 견디게 하는 요소가 됩니다.
3.이 하나님의 은혜를 단순히 깨닫고 받아들이는 자를 보존하시는 하나님(6~7).본문 6절 말씀에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란 단순하다는 뜻으로 마음에 간교와 잔꾀가 없는 자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단순하고 순진한 마음을 가진 자를 하나님은 보호하십니다. 한 마음으로 두 가지 생각을 품지 않고, 그 마음이 변치 않는 저를 하나님은 보호해 주십니다.
4. 환난에서 건지시는 하나님(8~16).
본문에서 시인은 당한 환난이 얼마나 심했는지 모릅니다. 사망의 줄(3절), 음부의 고통(3절), 사망, 눈물, 넘어짐(8절), 큰 곤란(10절), 죽는 것(15절), 결박(16절) 등의 표현을 보아도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 고통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거의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심각한 생과 사의 문제였습니다. 이런 엄청난 위기에서 주님은 구원해 주셨습니다. 본문 8절 말씀에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위경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구원을 생각할 때 어찌 감사, 찬송이 흘러나오지 않겠습니까? 성도는 죽은 것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 환난이 왔다고 바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15절에서는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이 함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따라서 택한 백성들을 아무런 의미 없이 사악한 자의 손이나, 질병, 뜻하지 않은 변고로 죽임을 당하도록 버려두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부합할 때만 성도를 데려가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 앞에서 죽음 이 기정사실화 되더라도 원망하거나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죽음도 감사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가 감옥과 죽음 앞에서도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와 같은 믿음에서 나운 것입니다.
5. 이같이 놀라운 은혜를 보답하는 마음으로 찬송하고 감사해야 합니다(17~19).
시인은 주의 은총을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께 감사함은 물론 서원한 것을 지키기로 다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보답하려고 하는 자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은혜 받으면 반드시 그 은혜를 갚으려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받은 이 엄청난 은혜들에 대하여 감사하기는커녕 더 부어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한다면 어리석은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는 모두 하나같이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을 잘 알고 그 속성에 감복된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받은 은혜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점검하고 그 은혜를 찬송하고 증거 하기 위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아멘.
여호와를 찬양하라 (시117:1~2) 찬송 ; 46장.
오늘 본문은 시편 말씀 가운데 가장 짧은 말씀입니다. 비록 짧은 시이지만 하나님께 찬양할 것을 힘써 권유하고(1), 또 우리가 찬양해야 할 이유(2)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와 동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 시편은 구속사적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구약 교회가 가지고 있는 포괄적인 선민사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들은 여호와를 찬송해야 합니다.
본문 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지어다.” 아멘. 오늘 시편 기자는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은택 밖에서 사는 백성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고 만물을 주셔서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습니다. 행17:25~26절 말씀에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성 때문에 찬송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딤전2:4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받기를 오래도록 기다리십니다. 벧후3:9절 말씀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2. 하나님의 크신 인자로 인해 찬송해야 합니다.
본문 2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아멘.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 하는 것은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보내신 사건 속에서 명백해졌습니다. 이것은 온전히 그 분의 크신 인자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의 인자가 “이것이다.” 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고, 그 정도나 분량이 어떠한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 하나님의 크신 인자하심은 우리 모든 성도들의 찬송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3. 영원한 진실로 인해 찬양해야 합니다(2).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하시며 변함이 없으십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지만 하나님은 참되시며, 우리에게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신 분이십니다. 롬3:4절 말씀에 보면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또 딤후2:13절 말씀에서도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을 확인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진실의 토대 위에 안연히 쉼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함당한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아멘.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라(시118:1~29) 찬송 ; 395장.
본 시편은 저자와 배경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대략 다윗이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마침내 왕위에 오르게 되었을 때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그 탁월한 능력을 찬미한 것이라 추정되고 있습니다.
1.영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1~4).
다윗은 도피생활에 지쳐 있었지만 하나님 중심적으로 사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고난이 극심할수록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였습니다. 그러한 중에 오늘 본시에서처럼 구원을 받은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그 응답을 토대로 하나님의 인자함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인내의 형태를 띱니다. 때로 인간은 연약하고 완고하거나 변덕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인내하심으로 즉각적인 징계를 미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자에게 온유로 대하십니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병상의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와 같이 기다리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연단의 형태를 띠기도 합니다. 고난 받는 자가 하나님께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즉각 응답하시지 않으시고 기다리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훈련의 기회를 주십니다. 이것을 연약한 인간은 하나님의 돌보심이 떠나갔다고 속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시기에 신앙의 연단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의지하여 어려울 때나 기쁠 때나 언제든지 변함없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윗은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그동안 자신이 겪은 고초를 모두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러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5~21).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후 담대해졌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에 있음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떤 핍박이나 고난이 닥쳐와도 능히 물리칠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한 것입니다. 곧 다윗의 담대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의 능력으로 함께 하신다는 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사울이 생명을 노린 와중에서도 사울의 생명을 보호하는 은혜를 베풀었고 동족이 이방의 침입을 받았을 때 자기 수하를 이끌고 나가서 구했습니다. 자기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었는데 그렇게 여유롭게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확신을 하였기에 동족의 어려움을 외면치 않고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후 담대해졌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처지에 있는 동족을 구할 수 있는 여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자는 자신의 구원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웃과 더불어 구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3.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을 찬양하고 있습니다(22~29).
다윗은 험한 망명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왕위에 등극하게 되고 다시 여호와의 성소에 나아가게 된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방 하늘 아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열정에 불타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없는 처지 때문에 또한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고난이 이제 그치고 왕위에 오르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으로 형통하게 될 것을 확신하고 이를 찬양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자신의 확신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이 임하기를 간구했습니다. 이는 은혜 받은 자로서 자신이 받은 은총을 공유하고자 하는 자연스런 마음가짐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다윗은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구원 받은 것을 감사하고 찬양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자의 당연한 태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윗이 자신의 구원 체험을 낱낱이 소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때로는 우리는 구원이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은총을 드러내 놓고 찬양할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체험에 대한 증거를 듣고 구원에 참예할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증거의 차원에서 그 은혜를 찬양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아멘.
말씀대로 행하는 자의 복 (시119:1~8)찬송 ; 235장.
본 시편 말씀은 작자 미상의 시로서 성경 전체에서 가장 긴 구절을 담고 있는 장입니다. 총 22연으로 된 시로서 한 연에 8절씩 되어 있습니다. 22연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작시된 시입니다.
시편 119편은 시편 1편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복 있는 삶을 가르쳐 줍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복을 추구하고, 복 있는 삶을 원하는데 정말로 복이 있는 인생이 누구인가?, 진실로 복 있는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본문 1~8절 말씀에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1. 첫째로 복 있는 삶은 말씀을 지키는 삶입니다(1~2).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되며,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전심전력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2), 그런 자가 복된 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편 저자는 단순히 말씀을 읽는 자가 복 있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1:3절 말씀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읽는 것도 복이요, 듣는 것도 복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든지, 성경 말씀을 들을 때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해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성경을 접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열 때마다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행하여 사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하면 항상 주의 율례를 벗어나 불의한 길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행하여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3).
2. 복 있는 삶은 기도하는 삶입니다(5).
여러분! 말씀대로 순종하여 사는 삶이 쉽든가요? 어렵든가요? 예, 어렵습니다.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살 수 있는 사람은 엄밀한 의미에서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할 때 우리 자신의 무력함을 얼마나 뼈저리게 느끼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의 사람은 자연적으로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긍휼을 구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일컬어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라고 하였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문화가 우리는 지배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죄를 범하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릅니다. 우리는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항상 근실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결론적으로 자신도 여호와 하나님의 율례를 지킬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달라고 간구했던 것입니다(5). 그러나 아무리 힘써도 율법으로 온전케 될 사람은 없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우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전히 힘쓴다고 하여도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여야 합니다.
3. 복 있는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입니다(7).
7절의 “감사하리이다.”라는 말을 달리 번역하면 “찬양하리이다.”입니다. 감사와 찬양은 사실 같은 것입니다. 복 있는 삶은 찬양하는 삶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기도를 한 시간 하셨습니까? 그러면 그 기도 중에 적어도 절반 이상은 감사를 드리도록 하십시오.”라고.
우리는 기도할 때 감사가 많이 생략됩니다. 구하기만 하고 끝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감사로 시작하여야 하고 감사로 끝을 맺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4:6절 말씀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기도하는 사람은 감사와 찬양이 터져 나오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 복을 싫어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을 찾아 해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복에 대한 개념입니다. 무엇을 복으로 생각하느냐? 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 말씀에서 시인은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이고,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고 기도하는 자이며, 또한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입니다. 유명한 R.A. 토리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 많은 번역이 있는데 번역이라는 것은 옮기는 작업이다.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성경번역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내 삶으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세워지고, 이 말씀 위에 서서 살아가는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정결한 청년의 삶(시119:9~16) 찬송 ; 236장.
인생을 크게 나누면 유년기, 청소년기, 청장년기, 노년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시기가 다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 어느 시기도 인생 중에서 세월을 허송해도 괜찮은 시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한 시기를 택하라고 하면 청년의 시기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1. 왜 청년의 시기가 중요합니까?
첫째,청년의 시기는 인생의 골격을 세우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청년기는 인생의 방향을 정립하고 올바른 인생관과 가치관을 확립하는 시기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때의 중요성에 대해서 굉장히 강조하여 말하였습니다. 사실 우리가 때를 놓쳐 버리므로 말미암아 후회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인생의 바른 골격을 세우지 못한다면 우리의 인생길은 평생을 방황하며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청년의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인생을 바로 정립해야 합니다.
둘째, 많은 죄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죄를 선호하며 육체적 욕망에 의해 삶이 좌우될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청년기는 무엇보다 힘과 정열과 혈기를 절제하기 힘들고 육체적 소욕과 정욕, 감정에 사로잡힐 위험이 다분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런 끊임없는 육체적 정욕과 유혹 앞에 노출된 청년들을 향해 그 행실을 정결케 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2. 청년의 때를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본문 9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고상한 철학이나 도덕적 지침, 기르고 수준 높은 법률보다도 청년들이 방황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최상의 에너지를 공급하여 줍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가 조심스레 행동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9),
장년이나 노년에게 부족한 것이 행동력과 추진력이라면, 청년에게 부족한 것은 자제력과 인내심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가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청년이 행실을 정결케 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비결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그 말씀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선한 생활의 출발은 하나님의 법을 기쁨으로 준수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푯대로 삼아야 합니다. 아멘.
인생의 목적 (시119:17~32) 찬송 ; 427장.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70~80평생의 삶이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지 모릅니다. 천차만별입니다. 양이 다양하고, 질이 다양하고, 목적이 다양합니다.
그리고 목표가 다양하고 소원이 다양합니다.
1. 오늘 시인의 인생의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의 말씀과 더불어 사는 삶이 너무도 귀하고 소중하여 그 말씀으로 기쁨을 얻기 위해 오래 오래 살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시인은 일평생 주의 말씀을 사모하느라고 그 심령이 지치고 곤핍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본문 20절입니다. 같이 읽을까요?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아멘.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주의 말씀을 순종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또한 말씀에 크게 위로 받기를 사모하는 시인의 신실한 믿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 25절 말씀에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8절 말씀에서는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발이 비가 온 후에 수렁에 빠진 것처럼, 불꽃에 초가 녹아 흘러내리듯 시인은 이렇게 엄청난 인생의 시련과 곤고 가운데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의 말씀으로 위로받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2. 이런 위기에서 시인이 주께 간구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본문 25절 말씀에 보면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또 26절에서는 “내가 나의 행위를 고하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으니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합니다.
또 27절에서는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사를 묵상하리이다.”라고 말하고,
28절 말씀에서는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29절에서는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제게 은혜로이 베푸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시인이 인생의 갖은 곤고와 역경에서 주께 간구한 내용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말씀가운데서 굳게 서고 주의 말씀으로 영혼이 위로 받고 소성하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위기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 주의 율법 앞에 올바로 서기를 사모하는 시인의 열심히 오늘 본문 말씀의 중심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 중심적인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고난 가운데서 이길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줍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역경 중에서도 소망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소망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열매로 우리 앞에 돌아오게 합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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