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단상 42/시간여행 2]‘송서送序’라는 문학장르
다시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이다. 올해의 마지막 달 첫째주. 월요일이면 출근을 해야 하는 게 여지껏 ‘도시의 삶’이었다. 퇴직한 지 햇수로 3년째인데도 ‘월요일’이면 ‘출근’이 먼저 떠오른다. 물론 그동안 시골에서 살았으니 까마득한 옛일이지만,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에 열흘째 있으니 드는 생각이다. 부스터샷(백신 3차접종)을 맞으러 판교엘 갔는데, 세상에나?이게 웬일이람? 광역버스 9003번을 기다리던 정류장에 피곤한 몸으로 줄을 서 기다리던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그때의 나는 엄연히 마을버스 안에 앉아있는데 말이다. 하하. 이건 숫제 환영幻影이다.
새벽에 불쑥 한 어르신이 보고 싶었다. 나로선 잊지 못할 그 어른을 이번에는 반드시 만나뵈어야겠다. 3년 전 귀향을 앞둔 나에게 ‘송서送序’를 직접 지어서 써주신 분이다. 송서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분들이 많으리라. ‘서序’는 옛 선비들이 쓰던 한문문체의 하나인데, 서서書序, 후서後序, 송서送序書, 증서贈序, 수서壽序, 명서名序 등이 있다. 사물(사건)의 전말과 내력을 적은 글이므로, 송서는 남과 이별할 적에 이별의 아쉬움이나 교훈의 뜻을 붙여 적은 글을 이른다. 1936년생, 올해 여든여섯 살 한문학자이시다. 마지막 유종儒宗(유학의 가장 큰 어른)인 중재 김황(1896-1978)선생의 친자親炙(직접 가르침을 받음) 제자이다. 나같은 게 뭐라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3년여 동안 뵈었을 뿐인데, 이런 귀한 글을 써주셔 황감했다. 내용은 얼굴을 더욱 화끈거리게 했다. ‘서序’라는 문체(장르)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이제 우리나라에 열 손가락도 안된다고 들었는데, 표구를 하여 시골집 책상머리에 걸어놓고 수시로 보며 그리워하던 선생님이었다. 게다가 그 연세에 사고방식이 아주 건전하고 세련되시어 무슨 얘기든 말이 잘 통했다. 시시비비가 분명한데도 모진 데가 없으셨다. 말하자면 수많은 지식인 원로元老 중에 가장 존경하는 어른이다.
송서를 받잡고 맨먼저 떠오른 한시가 고려조 정지상이 지었다는 ‘송인送人’이었다. 대부분 외우거나 내용을 아시리라.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비 갠 긴 언덕에는 풀빛 짙은데,
그대를 보내는 남포항에 슬픈 노래 울려 퍼지네.
대동강 물은 그 언제 마를 것인가,
해마다 이별 눈물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어려운 글자라야 ‘헐歇’인데 ‘그치다’ ‘쉬다’라는 뜻이다. 친구든 지인이든 헤어질 때의 애틋한 느낌이 화악 다가오지 않는가. 그런데 이 송서는 한시가 아니고 한문으로 된 산문이 아닌가.
노선생님은 나를 황송하게도 ‘외우畏友(경외하는 친구)’ ‘노대老大(전문가)’ ‘효자’라며 “이 사람은 어디로 간들 이롭지 않겠는가(오호嗚呼 오자하소왕이불리재吾子何所往而不利哉)”라고 쓰셨다. 오버를 하셔도 너무 심하셨다. 그 전문을 전재하며, 그 뜻을 새삼 되돌아본다.
<송최효자우천씨귀고원서 送崔孝子愚泉氏歸故園序>
외우최우천畏友崔愚泉 전업기자지노대자야專業記者之老大者也
우성동직연상지연분偶成同職連床之緣分 일고여왈日告余曰 아불원지간我不遠之間 종료진사終了盡事
귀고원이양노친歸故園頤養老親 장습탈준시서將習脫樽柿鋤 제채지업諸菜之業 이위노부지심以慰老父之心
건립애일당 建立愛日堂 지기연수知其年數 부지기여사야不知其餘事也
여탄왈余歎曰 유사호고인지둔지약무소계有似乎古人之遯之略無所係 작작유여자綽綽有餘者
차소위비둔무불리야此所謂肥遯無不利也
비자여오자지충대관유지심야 肥者如吾子之充大寬裕之心也 둔자역표연원서 遁者亦飄然遠逝
무소계체지행야無所係滯之行也
오호嗚呼 오자하소왕이불리재야吾子何所往而不利哉 정성기부定省其父 고침기소高枕其所 개유리재皆有利哉
여소이명제자余所以命題者 하유과재何有過哉 서차이송지書此以送之
세재歲在 기해己亥 사월일四月日 학산초부제學山樵夫題>
아무리 머리카락을 쥐어뜯어도 해석이 도무지 난망이지 않은가. 그렇다. 한문은 이제 완벽하게 영어보다 더 어려운 외국어가 된 지 오래이다. 손에 쥐어줘도 알기 어려울 터. 풀이까지 부탁드렸다.
아래의 해석도 마저 읽어보자.
<외우 우천 최영록은 기자를 전업으로 한 노대(전문가)이다. 우연히 같은 직장(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함께 일을 한 인연으로 만났는데, 하루는 나에게 말하길 “저는 조만간 세상일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면서 앞으로 감을 따거나 여러 가지 채소 키우는 일들을 익혀 노부의 마음을 위로하고 애일당을 건립하여 아버지의 연세를 알 뿐, 그 나머지 일은 알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탄식하며 말하길 “옛 사람이 세상을 버리고 은거하며 조금도 매인 바가 없이 여유작작한 것과 비슷하구나. 이것이 이른바 ‘여유 있는 은둔이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비肥라는 것은 마치 우리 친구가 관대한 마음을 채우는 것과 것과 같고, 둔遯이라는 것도 표연히 멀리 떠나서 아무 얽매이는 바가 없이 실행하는 것과 같다. 아아, 우리 친구는 어디로 간들 이롭지 않겠는가. 그 아버지께 혼정신성하며 그곳에서 편안히 높게 베개를 베는 것이 모두 이로운 것이니, 내가 제목을 이렇게 붙인다고 무슨 지나침이 있겠는가”
하고는 이것을 적어서 그를 보낸다. 기해년(2019년) 4월 학산노부 씀>
학산學山은 노상복 선생님의 호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정신문화연구원의 후신) 내에 1997년 ‘청계서당’을 개설한 이래 지금껏 많은 후학들을 길러내시고 있다.
불쑥 선생님께 불쑥 전화를 드렸더니 “우천”하며 아버지(춘부장)의 안부를 먼저 물으시며 반색을 하신다. 무엇을 드릴까 생각하다 일주일 전 올라오며 조금 가져온 서리태가 생각나 1kg쯤 봉지에 넣었지만 손이 부끄럽다. 지난번 햅쌀 찧었을 때 10kg라도 보내드렸으면 좋았을 걸 후회가 됐다. 아무튼 연신내역 스타벅스로 나오시라 하고, 전직장 동료들과 놀이터나 마찬가지였던 연서시장을 한바퀴 돌면서 재직중인 후배동료들에게 전화를 하니 무척 반가워하며 저녁을 하자, 술을 하자, 차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며 이구동성이다.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한번 나오고나면 끝이라면 나의 사회생활이 얼마나 가난하고 초라하겠는가. 같이 길거리에서 먹던 오뎅도 혼자서 두 꼬치 먹어본다. 말하자면 시간여행, 아니 추억여행같기도 하다.
선생님은 여전히 정정하시다. 허리도 굽지않고 목소리도 청청하다. 비대면 온라인 강좌를 세 과목이나 하고 운전도 손수 하시는 노익장이다. 아니 노익장이란 말이 무색하다. 세상과 정치, 전염병을 바라보는 시각도 건전하시니 내가 좋아하고 존경할 수 밖에 없는 어르신이다. 저녁을 굳이 당신이 후배들에게 사시겠다며 신선설농탕집으로 앞장을 서신다. 아무리 편하게 말씀하시래도 꼭 존대말이다. 선생님처럼 나이를 들어가야 할 터인데, 나는 도무지 자신이 없다. 곱게, 잘 늙어 가는 것처럼 힘든 일이 있을까? 재력과 건강도 문제이지만, 역시 올바르고 의로운 정신精神이 더 문제이지 않을까? 나는 금방이라도 악담을 퍼붓고 싶은, 정신적으로 불구가 되어버린 ‘노추老醜들’을 많이 알고 있다. 김동길, 조갑제, 장기표, 김문수 등등등등. 이제 뒤죽박죽 진중권, 서민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여러 모로 대단하신 한학자 노선생님이 오래오래 강녕하시며 ‘영원한 현역’이시길 빌고 또 빌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