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70
6월28일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13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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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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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Vh4h5PVHRnc (김한솔 도미니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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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정의감으로 활활 불타오르던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기원전 760~750년 경이었습니다. 묘하게도 그 시기는 북이스라엘이 다윗왕 시절 못지않은 전성기랄까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배경에는 너무나도 당연히 당신이 선택한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축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속성상 잘 나갈 때 꼭 문제가 생깁니다. 자신의 힘으로 잘 나가는 줄 알고 기고만장합니다. 예로보암 2세 왕을 비롯한 정신 나간 측근들, 우둔한 지도자들은 잔뜩 겉멋이 들어 속병이 깊어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점점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풍요로움과 세속적인 향락에 깊이 빠져들어가 헤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상아 침상 위에 자리 잡고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양 떼에서 고른 어린 양을 잡아먹고 우리에서 가려낸 송아지를 잡아먹는다. 수금 소리에 되잖은 노래를 불러대고 다윗이나 된 듯이 악기를 만들어 낸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고 최고급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니...”(아모스 예언서 6장 4~7절)
성전 역시 타락하여 빈껍데기뿐인 허례허식만 남게 되었습니다. 돈맛을 들인 지도자들과 부자들은 하늘 두려운 줄 모르고 가난한 백성들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불의가 일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불의한 상황 앞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모스 예언자는 그야말로 철퇴로 뒤통수를 치듯, 마치 한 마리 사나운 사자처럼 포효하며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섬뜩한지 모릅니다.
“그날에 나는 한낮에 해가 지게 하고 대낮에 땅이 캄캄하게 하리라. 너희의 축제를 슬픔으로, 너희의 모든 노래를 애가로 바꾸리라. 나는 모든 사림이 허리에 자루 옷을 두르고 머리는 모두 대머리가 되어...”(아모스 예언서 8장 9~10절)
아모스 예언자의 날 선 발언에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잠시 멈칫하였지만, 결코 물러선다거나 말씀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심기가 잔뜩 불편해진 그들은 슬슬 반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가 대체 뭔데? 어디 배워먹지도 못한 남유다 출신의 듣보잡, 깜도 안 되는게 나타나 요란을 떠는가냐?’며 콧방귀를 끼었습니다.
거침없이 당당한 아모스 예언자의 말이 귀에 몹시 거슬렸던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는 화가 잔뜩 나서 아모스를 베텔에서 쫒아냅니다.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을 하지 마라.”
아모스 예언서 안에서 마치 후렴구처럼 자주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다양한 징벌들, 재앙들을 보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께로 돌아서지 않았음을 아쉬워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결론은 하나입니다. “너희는 나를 찾아라. 그러면 살리라.”
불의한 현실 앞에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하느님의 음성을 전하는 또 다른 아모스 예언자들이 필요한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언자는 악에 민감한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정의, 불의와 관련해서 사소한 일에도 관심을 갖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빛나며 불타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한 옥타브 높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우상을 타파하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엄정함과 동정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 헤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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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7pJeL9py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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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를 영해도 변하지 않는 이유: 나는 두려운 것을 닮아간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풍랑에 죽을까 봐 두려워하다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고는 예수님을 두려워하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7)
제자들의 두려움은 이제 자연에서 주님께로 변화되어갑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오늘 기적으로 원하신 일입니다. 우리 안에도 예수님이 계십니다. 성체성사로 그분을 모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킬 힘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두려워하기 전까지는. 왜냐하면 사람은 두려운 것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개는 훌륭하다’에서 배은망덕 견 영구가 나왔습니다. 영구는 착한 주인들을 뭅니다. 특별히 소유욕이 강해서 집을 자신의 것으로 여깁니다. 마당만 들어오면 통제가 안 됩니다. 주인들은 개에게 모든 것을 맞춥니다. 물리기 싫기 때문입니다. 문을 들어갈 때도 허락받고 산책할 때도 개에게 맞춰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개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람은 두려운 것에 의해 변화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체 앞에서 두려워 떨어본 적이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손바닥보다 작은 밀떡 덩어리를 두가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속에 누가 계신지, 그 실체를 알면 어떻게 될까요? 까무러치고 말 것입니다.
그런 분에게 우리는 이래라저래라 청하기만 합니다. 그분이 이 세상 모든 걱정과 두려움을 한순간에 없애버릴 능력을 지니신 분임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을 청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는 사제가 들고 있는 그 작은 밀떡이 무엇인지 안다면 기절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 합니다. 타볼산에서 잠깐 신성을 보여주셨을 때도 제자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리고 요한 묵시록에서 요한이 그분을 천상에서 보았을 때는 납작 엎드렸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하느님으로 보고 두려워할 줄 알 때만 그분은 나를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나의 노력으로 성장시켜야 합니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동석은 엄마를 매우 싫어합니다. 아빠의 친구였던 사람의 첩으로 들어가서 그 집에서 형들에게 매를 맞으며 자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한 마디 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는 비뚤어진 성격으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말기 암에 걸렸습니다. 동석은 놀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왜 그리 모질게 대하셨는지 알아보기 위해 엄마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합니다. 동석 의붓아버지의 제사에 모시고 갔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엄마 옥동은 동석의 편을 들어줍니다. 전에는 그렇게 해줄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 세 끼 밥을 먹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동석도 그런 엄마의 마음을 읽으며 조금씩 엄마를 용서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점점 두려워집니다. 엄마를 잃을까 봐. 사랑은 두려움을 수반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면 잃게 될까 두렵습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을 잃는 일입니다.
옥동은 동석이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끓어놓고 더는 일어나지 못합니다. 동석은 죽은 엄마를 끌어안고 한없이 웁니다. 이때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죽은 어머니를 안고 울며 난 그제서야 알았다. 난 평생 어머니, 이 사람을 미워했던 게 아니라 이렇게 안고 화해하고 싶었다는 걸. 이렇게 오래 안고. 지금처럼 실컷 울고 싶었다는 걸.”
어머니는 약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분이 사라지면 나의 변화 가능성은 사라집니다. 세상 것들을 두려워하며 그들의 노예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동석이 어머니와 동행하며 어머니를 잃는 것을 두려워할 수 있게 되었듯, 우리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그분을 잃는 것을 두려워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과 사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내 안에 가장 두려우신 분이 하느님임을 안다면
세상 다른 것은 두려운 것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그분 때문에 변하게 됩니다. 그분처럼 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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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8,23-27 :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배에 타신 것은 아무 이유 없이 하신 일도, 터무니없는 위험과 맞닥뜨리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주님은 그들이 위험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겸손하도록 가르치고자 하셨다. 그래서 군중을 돌려보내신 다음 그들만 옆에 있게 하시고는 풍랑에 휩쓸리게 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시련을 인내심 있게 견디도록 훈련시키신다. 어떠한 어려움이나 박해도 견디어 낼 수 있게 하신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24절)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상황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신 듯이, 폭풍에 대해, 그 절정의 순간과 위험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으셨을까? 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깨어 있고,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완전한 파멸의 위험 속에 있는데도 당신 혼자만 잠이 드셨을까? 폭풍을 이겨나가기 위해 고도의 기술의 키잡이가 필요한 이때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고 그때 일어난 일을 더욱 분명히 깨닫게 하려고 주무신다. 배를 모는 제자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허사였다. 그들은 겁에 질려 우주의 통치자이며, 창조주이신 세상의 키잡이 예수님께 달려갔다. 그들은 그분께 풍랑에 죽게 되었다고 자신들을 구해달라고 애원하였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26절) 그리고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랬더니 잠잠해졌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운 것은 그분이 누구신지 그들이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분이 깨어 계실 때는 물을 꾸짖는 권능을 지니신 것은 알았지만, 잠들어 계실 때도 같은 권능을 지니셨다는 사실은 아직 몰랐다. 많은 기적을 보고서도 아직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주님, 구해주십시오.”(25절) 이렇게 제자들이 외친 것은 잘 한 것이다. 그 말은 믿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어려움에 처하자,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25절) 하였기 때문에 믿음이 약한 자들이라고 꾸지람을 듣는다. 그들은 결코 믿음이 없는 자들이 아니었지만, 위험이 닥쳤을 때,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다는 사실에서 용기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믿음이 약한 자들’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재우신다. 당신의 교회라는 배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든 세상의 풍랑을 잠재울 수 있으시다. 그분은 당신을 믿는 이들이 안전한 항해로 하늘 본향에 도달하도록 이끄신다. 그리스도께 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배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거룩한 키잡이가 있어야 교회라는 배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할 수 있고 목적지 항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27절) 수님께서는 명령 한 마디로 풍랑을 잠재우셨다. 그래서 호수를 건너던 제자들이 바로 분이야말로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인정하고 믿었다. 그분을 온전히 믿고 따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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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3-27)
마르코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4,38) 마르코복음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면, “주님, 구해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는 제자들의 말은, 주님을 믿고 주님께 살려 달라고 간청하는 말이 아니라, 모두가 위험한 상황인데도 예수님 혼자서만 태평스럽게 주무시는 것을 원망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이 일에서 요나서에 있는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 배 밑창으로 내려간 요나는 드러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선장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당신은 어찌 이렇게 깊이 잠들 수가 있소? 일어나서 당신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나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주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요나 1,5-6)>
마르코복음과 상관없이, “주님, 구해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는 말을 표현된 그대로 생각하면,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주님께 살려 달라고 간청하는 말로 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라고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그 상황에서 제자들은 어떻게 했어야 했나? 믿음이 있어도 겁이 나는 상황에서는 겁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만 보고 믿음이 부족하다고 꾸짖을 수는 없습니다. 제자들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상태에서(구해 주신다는 믿음도 없이) ‘말로만’ 구해 달라고 간청한 것이 됩니다. 그 상황에서 필요한 믿음은,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믿음이었는데, 제자들의 믿음은 아직 그 단계까지는 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기적들을, 즉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등의 기적들을 직접 보았지만, 바람과 파도를 다스리는 일은 완전히 차원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 일이어서, 제자들이 그 믿음을 갖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신 일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고쳐 주느라고(마태 8,16) 피곤해서 주무셨을 텐데,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처한 상황을 모르시지는 않았을 것이고, 제자들의 상황에 대해서 무관심하셨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주무실 수 있었던 것은, 제자들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일 것이고, 또 어부 출신 제자들의 경험과 실력을 믿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걱정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주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믿으시는데,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못 믿을 때가 많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라는 말입니다. 이 질문의 답은, “예수님은 온 세상 만물을 지배하는 주님이신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 즉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라는 증언이고,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라는 것을 온전히 믿게 되면, 살든지 죽든지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겨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어떤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주님께 구해 달라고 간청하면(믿기만 하면) 주님께서 반드시 구해주신다고 믿는 믿음은 초보 단계의 믿음입니다. 살고 죽는 것을 모두 주님께 맡겨 드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바로 그 단계에 도달한, ‘완전하고 성숙한 믿음’을 베드로 사도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헤로데가 야고보 사도를 죽인 다음에, 베드로 사도도 죽이려고 감옥에 가둔 일이 있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네 명씩 짠 네 개의 경비조에 맡겨 지키게 하였다. 파스카 축제가 끝나면 그를 백성 앞으로 끌어낼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헤로데가 베드로를 끌어내려고 하던 그 전날 밤, 베드로는 두 개의 쇠사슬에 묶인 채 두 군사 사이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문 앞에서는 파수병들이 감옥을 지키고 있었다.”(사도 12,4-6) 베드로 사도는 그를 구해 주려고 온 천사가 옆구리를 두드려서 깨워야 할 정도로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사도 12,7) 그 모습은 큰 풍랑 속에서도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같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는 모습, 살고 죽는 것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생사에 초연한 모습, 그 모습이 바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고 성숙한 단계에 도달했음을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신앙인은 항상 ‘주님의 뜻’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나의 뜻’대로 해 달라고 고집부리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죽는 것이 주님의 뜻인지, 조금 더 사는 것이 주님의 뜻인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특별한 방법은 없습니다. 꾸준히 기도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다 하고, 결과는 주님께 맡겨 드리면 됩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마태 6,27) 언제 어떻게 떠나느냐가, 즉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준비한 상태가 되어서 하느님 앞으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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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물을 더 깊은 곳으로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던지라고 한 그물과 제자들이 버린 그물은 같은 그물이지만 잡으려는 것들이 달랐습니다. 우리는 그물을 던지면서 무엇을 건지려고 할까요? 성공, 명예, 권력을 잡으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들을 잡기 위해서 그물을 촘촘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모두들 그물을 던지니 경쟁도 치열합니다. 남의 그물을 찢어 놓기도 합니다. 남이 잡은 것들을 빼앗아 오기도 합니다. 공정과 정의를 지키지 않고 편법과 불법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욕망을 향해 그물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끊임없이 총기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욕심을 향해 그물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기후 위기가 오고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은 이기심을 향해 그물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물을 던져서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들을 하나도 잡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던지면서 무엇을 건지려고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건지려고 하셨습니다. 그곳에는 믿음, 희망, 사랑이 넘쳐납니다. 이웃에 대한 헌신, 하느님께 대한 순명, 소유가 아닌 존재가 있습니다. 사막에 물이 넘쳐나듯이, 사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놀듯이, 늑대와 어린양이 손을 잡듯이 경쟁과 투쟁이 없습니다. 오직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곳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모습에서 그물에 가득 잡아 올린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교회에 봉헌하였습니다. 가난한 이, 과부, 고아는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더 이상 슬픔의 눈물, 고통의 눈물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찬양과 기도가 넘쳐났습니다. 복음의 기쁨이 향기가 되어 이웃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물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잡으려 하는 대상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풍랑에 흔들리는 배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곧 바다에 빠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편안한 자세로 누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을 흔든 풍랑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느님 나라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의 바람이었습니다. 스승까지 팔아넘기려는 탐욕의 바람이었습니다. 스승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던 두려움의 바람이었습니다. 욕망과 탐욕이 없으신 예수님에게는 두려움이 없으신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풍랑이 없었습니다. 평온했던 저의 마음에도 거센 풍랑이 불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나의 욕심을 채우려는 욕심의 바람이 불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삶을 살기보다는 섬김을 받으려는 교만의 바람이 불기 때문입니다. 사제직에 충실하기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게으름과 나태함의 바람이 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대한 희망을 갖기보다는 두려움과 근심의 바람이 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재우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이렇게 믿음이 약하냐!” 우리의 마음을 빈 배로 만들 수만 있다면 욕망의 바람이 불어도, 교만의 바람이 불어도, 두려움과 근심의 바람이 불어도 우리는 예수님처럼 평온함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미끼가 없는데도 새가 땅에 있는 그물로 내려앉겠느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는데 땅에서 그물이 튀어 오르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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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호수에서 풍랑을 가라앉히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고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 함께 배에 올랐는데,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일 지경에 이릅니다. 그야말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제자들의 혼란과 공포를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배가 뒤집힐지도 모를 참으로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태연히 주무시고 계십니다.
이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가 그분을 흔들어 깨우며 말합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시며 그들의 ‘부족한 믿음’을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니, 풍랑이 멎고 호수가 잠잠해집니다. 제자들이 몹시 놀라워하며 말합니다. “이 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완전히 깨닫지 못하였지만,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를 보여 주십니다.
전통적으로 성경에서 배는 교회를, 바다는 세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을 항해하는 배로 자주 묘사됩니다. 또한 바다의 거친 바람과 파도는 세상을 항해하는 교회가 겪는 갖은 어려움과 곤경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그 어떤 어려움도 당신의 권능과 말씀만으로 다스리실 수 있는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녀야 할 것은, 주님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분에 대한 ‘믿음’입니다. ‘부족한 믿음’이 아닌 ‘온전한 믿음’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맡겨 드리며 도우심을 간절히 청한다면, 그분께서는 기꺼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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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성인께서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의 믿음은 어떨까요? 당연히 믿음이 컸기에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냐고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성인 역시 이 세상 안에서 믿음의 문제로 고민하신 분이 많다고 합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믿음이 없어. 나는 믿지 않아.”
성인이 된 마더 데레사도 믿음에 관한 고민을 많이 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믿음이 약하다’라고 고민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닐까요? 오히려 ‘나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만큼 교만하다는 증거일 테니 말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문명의 발달로 볼 것도 많고, 들리는 것도 너무 많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주님을 보기도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을 보는 것, 주님 목소리를 듣는 것을 아예 포기한다면 믿음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약한 믿음이 아니라, 없는 믿음이 되고 맙니다.
자신의 믿음 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약한 믿음에서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을, 즉 주님을 보고 주님 말씀을 들으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어느 순간 성인들의 믿음에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믿음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을 오늘 복음에서 봅니다. 예수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놀라운 표징들을 직접 두 눈으로 봤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을 때, 두려움 속에서 어떻게 할지를 모릅니다. 사실 제자 중에는 어부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돌발 상황을 잘 극복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자기의 능력도 믿지 못했고, 또 함께하는 주님의 힘도 믿지 못했기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자 아주 고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실 때처럼, 자연의 힘을 향하여 ‘주님’으로서 명령하십니다. 그만큼 자연을 향해서도 명령을 내려서 복종하게 하시는 큰 힘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분과 함께할 믿음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연 어떨까요? 예수님과 늘 함께했었던 제자들도 부족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하물며 우리의 믿음은 어떨까요? 한없이 약한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이 약함을 인정하면서, 조금 더 나아지는 노력을 계속해서 해야 할 것입니다. 조금씩 주님과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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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무릎 꿇고 있는 나무>
로키산맥 해발 3000m 높이에 수목한계선이 있는데 이 지대 나무들은 거센 바람으로 곧게 자라지 못하고 모두가 무릎을 꿇고 있는 형태로 서 있다고 합니다. 그런 자세에서만이 살아남을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이 무릎 꿇고 있는 나무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열악한 환경이 강인하고 탄탄한 나무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련은 우리를 성장시키기도 하고 또 쓰러뜨리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시련이 좋은 성장의 계기가 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요.
인간은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시련을 겪게 마련입니다. 시련을 잘 받아들이고 성숙의 계기로 삼아야함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오늘 복음에는 믿음 앞에서 시련과 유혹을 맞는 제자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일어난 일이지요. 갈릴래아 호수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생명의 호수입니다.
당시 갈릴래아 호수에는 염분이 흘러 들어갔기 때문에 오늘 복음처럼 '바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지금은 염분을 따로 다 빼내기 때문에 호수라는 말이 적합하지요.
갈릴래아 호수, 티베리아 호수 또 겐네사렛 호수는 다 같은 이름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상도 크기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인 이스라엘에 있는 갈릴래아 호수는 길이21km, 너비 11~2km, 둘레 52km정도에 수심이 49m정도인 아주 큰 호수입니다. 골란고원 아래 자리잡고 있지요.
골란고원 뒤쪽은 지중해인데 지중해보다도 212m 더 낮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골란고원 쪽으로 비가 오면 물은 대부분 갈릴래아 호수로 들어가고 요르단강을 건너 사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사해는 더 아래 있지요. 해저보다 훨씬 더 밑에 있는 셈입니다. 지금은 비가 와도 물을 이용하므로 요르단강으로 흘러보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우리의 산정호수 같은 곳이지요. 산은 원래 변화무쌍한 곳입니다. 맑은 날씨였다가도 금방 바람이 불고 또 비가 내리기도 하지요.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물이 출렁이기도 하고 풍랑이 불기도 하는 대단히 변덕스러운 곳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배경인 갈릴래아 호수의 상태입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이곳을 건너는데 갑자기 풍랑이 몰아치지요.
아무리 노를 저어도 역풍을 만나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작년에 이스라엘에 갔을 때 바람 부는 것을 보았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강도였습니다. 거센 바람에 나무들이 밤새 휘청거리는 것을 보았지요.
그런데 거센 풍랑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뒤덮이는 중에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겁에 질려서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매달리지요.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 8,25)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26)고 말씀하시며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마태 8,26)습니다.
사람들이 놀라 수군거렸지요.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7)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시련, 어려움을 알고 계셨습니다. 잔잔했다가도 갑자기 바람이 몰아치는 것이 우리 인생살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시련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지요.
오늘 복음은 그러한 뜻하지 않은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 우리 삶의 모습임을 다시 한번 깨우쳐 줍니다. 누구나 제자들처럼 당황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중에도 하느님께 의지하고 구하고 믿으면 그 시련은 성장의 계기가 된다는 것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입니다.
시련의 시기가 성장의 시기로 이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타깝게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서두에서 말씀드렸는데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여정에서 어려움이 닥치면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냉담이나 엉뚱한 길로 빠지는 계기가 됩니다.
대부분 사람은 어려운 시련의 시기에 하느님을 알게 되지요. 은총의 시기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시련이 오히려 하느님을 떠나서 혼자 세상을 방황하다가 참담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불신의 계기가 되기도 하지요. 신앙의 빈털터리가 되는 경우입니다.
어려움이 닥치고 위험이 몰아치는 내 인생의 위기에 잊지 말아야 할 해결책을 오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지요.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 나를 믿어라!“
삶의 과정 속에서 겪게 되는 많은 어려움이 성숙의 계기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유산은 하느님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기에 하느님 안에서 은총을 구하고 지혜를 찾는 삶을 살게 해 주는 것이지요. 대입 시험을 앞둔 시기, 군대 가는 시기, 입사하는 시기, 결혼하는 시기 등 아주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시기들은 대단히 중요한 인생의 고비들입니다. 이런 때에 특히 하느님 안에서 지혜를 구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들이 하느님을 아는 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 인생의 고비 때마다 부모가 오히려 앞장서서 냉담의 계기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 주위에는 그런 부모들이 꽤 있습니다. 어리석지요. 부모들은 자녀에게 하느님 안에서 은총을 구하고 지혜를 찾으며 참으로 하느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심을 깨닫는 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 중요한 시기를 오히려 엉뚱한 곳에서 방황하게 만드는 그런 부모라면 지혜로운 부모라고 말할 수 없고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의 야단을 피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마태 8,26)
인생의 어려운 시기에 오히려 하느님을 알고 인생이 성숙되는 계기가 되도록 먼저 모범을 보이고 삶으로 전해주는 지혜로운 부모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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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2005년 외국의 어느 극장에 화재가 발생하여 최소 30명이 숨지고 45명이 부상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극장 안에는 천여 명의 관객이 연극을 관람하는 중이었는데, 무대 커튼에서 불씨가 피어올라 화재가 시작되었고 그것이 대형 참사로 번진 것입니다.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는 화재에 놀라 긴급히 대피하는 과정에서 발에 밟혀 숨졌다고 합니다. 화재 자체보다도 발에 밟혀서 죽은 사람이 많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던져 주는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왜 발에 밟혀 숨진 사람들이 더 많았을까요? 어쩌면 화재보다도 화재에 따른 지나친 걱정과 공포심이 오히려 더 큰 인명 피해를 낳았는지도 모릅니다.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에 따르면 우리가 하는 걱정의 40%는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을 일이라고 하고,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22%는 걱정하기에는 지나치게 사소한 것이며, 4%는 자신이 전혀 손쓸 수 없는 일들에 대한 걱정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걱정 가운데 96%는 지나치고 쓸데없는 것입니다. 결국 걱정하여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나머지 4%에 불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지나친 걱정을 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풍랑이 이는 것을 보고 ‘죽을 지경’이라고 생각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혹시 우리의 모습은 아닐는지요? 지나친 걱정에 사로잡혀 ‘지금 죽을 지경이야.’ 하고 신음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걱정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걱정으로 신음하느니, 그럴 때일수록 하루하루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야 지나친 걱정이 불러일으키는 화를 면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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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용진 요셉 신부님]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오늘 복음에서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풍랑이 거세게 달려들자 겁을 먹고 있습니다. 어부들이 겁을 먹을 정도였다면 얼마나 심한 풍랑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심한 풍랑, 즉 인생의 고난을 겪고 있는 예수님의 배에 우리도 올라타서 함께 풍랑 속으로 묵상을 들어가 봅시다.
첫째, 어제복음에서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대로, 제자들도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함께도 따라 올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한 배가 거센 풍랑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뒤덮이게 되었습니다. 이 내용에서 장차 예수님과 함께하는 제자의 길이 얼마나 험한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자의 생명을 책임져야 하실 주이신 예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갈릴레아 지방의 호수, 즉 정확히 표현하면 겐네사렛 호수는 길이가 20키로, 폭이 10키로로서 서북 혹은 남서풍이 여기로 불어오면 거센 풍랑이 일게 됩니다. 풍랑에 익숙한 어부들이었지만 심한 풍랑 속에서 겁을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대자연의 혼란 중에서도 고요히 잠들어 계신 하느님의 아들과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이 가냘픈 제자들의 모습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를 본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주무시고 계신데 제자들은 겁을 먹고 있으니...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다에서는 제자들이 훨씬 더 능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삶의 자리가 바다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헤쳐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주님을 붙들고 매달립니다.(우리 모습이고) 아니 헤쳐나갈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한계에 이르렀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제자들의 모습)
그런데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그 위기를 헤쳐나갈 유일한 방법을 깨달은 것입니다. 바로 극한상황에서 "아, 예수님이 내곁에 계시지..." 하면서 깨달은 것입니다.
바다를 안방 드나들듯이 능숙한 사람들이 위기를 맞으니까, 자기들의 무능을 인정하고 바로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 제자가 된 이후에 어떤 형태로든지 주님이 누구인지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상황을 바꿔 주시리라는 것을.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님!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이제 이렇게 우리 죽게 되는 것 같습니다...”라고 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제자들의 호들갑에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 하시고 나서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자 사방이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했다구요? 예수님의 첫번째 말씀은 부드러운 꾸지람이었습니다. 아마도 피곤한 눈을 비비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뭐가 걱정이냐. 나도 너희들이랑 같이 있잖느냐? 내가 누구냐? 설마 내가 너희들 버리고 배신을 때리겠냐? 나, 아까... 니네들 병자 고치느라고 고생하는 것 봤지?... 바다야..조용히 좀 하거라. 나 무지 피곤하다...”...... 아그야, 알간?(조폭 두목 같은 목소리로...)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제자들이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작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작은 믿음만으로는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으로서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라는 말씀은 오늘 나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내 뜻대로만 해결하려고 하고, 예수님께는 청하지 않는 나. 혹시 그분이 안 들어 주시면 어떡하지? 하는 의구심보다는 “설마 그분이 들어주시려고...” 하는 불신과 체념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는 나. 그런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나의 신앙을 키우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하튼 바람과 바다를 일갈에 잠재우시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하는가?" 하며 수군거리면서 매우 당황했습니다. 말씀 한마디에 풍랑이 잔잔한 호수로 바뀌었으니 말입니다.
어부들은 바다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바다가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잔잔한 호수로 바뀌니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여러분 만약에 내 삶 안에서 그런 경우는 어떤 경우가 있을까요? 성당 다니지 않겠다던 배우자가 갑자기 성당에 다니겠노라고 선언할 때, 얼마나 당황하겠습니까? 부족한 믿음으로 무엇인가를 청했는데 그분께서 들어주시면 얼마나 당황하겠습니까? 그 당황 속에는 자신의 불신에 대한 죄스러움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예수님 앞에서 “내가 줄은 참 잘섰지..”하는 기쁨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으로 앞으로는 굳게 믿을 것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복음에서와 같이 우리는 항상 어려움 속에서 일을 해결하려 할 때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마음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직도 나 혼자, 나 스스로 해보다가 안되면 포기하는 그런 자세는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확신이 있다면 인내를 가지고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제자들의 청을 절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이 약하다고 크게 탓하지 않으시고 더 키우라고 행동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혹시 내 신앙이 커 가는데 있어서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습니까? 조만간 그런 체험이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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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겁내지 말자>
2022. 06. 28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마태오 8,23-27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겁내지 말자>
살림을 위한
죽음의 길에서
아무도 나를
죽일 수 없으며
스스로 기꺼이
죽어가는 것이니
그 누구든
겁내지 말자
다만 끝까지
한걸음 또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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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는 만큼 보게 된다>
믿음은 세상을 충만케 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알기 위해서라도 먼저 믿으면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보게 될 뿐 아니라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굳센 믿음을 간직하십시오. 믿음이 큰 만큼 하느님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믿고 의탁하는 만큼 강하게 만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믿음은 삶의 모든 순간들을 빛내주는 예수님의 자비를 경험으로 알게 되는 그분과의 살아 있는 만남을 통해 태어나고 또 새로워집니다.
예수님과의 살아있는 만남을 매일 접할 수 있는 것이 좋습니다. 말씀을 읽고 침묵의 기도 안에서 주님의 사랑에 들어가십시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성장과 견고함을 위해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한배를 탔는데 어떤 이는 잠을 자고 있고, 어떤 이는 겁에 질려 허둥거립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있었기에 무서울 것이 없으며 절박한 생존의 난국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는 위기는 아예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문제시하십시오.믿음이 없으면 믿음을 더해달라고 매달리면 됩니다. 그냥 덮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을 깨운 것을 보면 아직 그들의 믿음이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주님 품 안에 있었으면 아무 걱정할 것이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믿는다고 하였지만, 철저히 맡기지 못했던 제자들입니다. 아마 우리도 같은 위험에 처했더라면 모든 희망을 잃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려움에 맞서 주님께 살려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완전하지 못한 채 그렇게 있어야 하나요? 두려워 말고 주님을 바라봅시다.
허둥대던 제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권위를 가지고 선포한 주님의 가르침에 놀랐고, 풍랑과 파도를 지배하는 주님의 능력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이제는 단순한 무서움의 차원을 넘어서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하며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접하면서 커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서 따른다기보다 따름으로써 성장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있기보다는 두려움과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혹 어려움에 직면할 때 아직도 허둥대고 있다면 믿음의 부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1베드 5,7)
주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25.3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걱정일랑 주님께 떠맡기고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시편저자는 말합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 37,5)
성경을 보면 롯의 가문에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오” 하는 천사의 말을 듣지 않고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창세 19,26) 믿지 못한 결과입니다.
민수기에 보면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구리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고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민수 21,9)
주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어찌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그러므로 믿으십시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주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십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마치 생명이 하느님의 선물이고 역사가 하느님의 선물인 것처럼 말입니다.”(까롤로 까레또)
믿음 안에서 능력의 주님을 만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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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푸른솔(靑松)>
- 믿음은 은총이자 분투의 노력이다 -
“주님은 나의 힘, 내 기쁨이시도다.”
“주님은 온유한 자, 의義를 따라 걷게 하시고,
주님은 겸손한 자, 당신 도道를 배우게 하시나이다.”
성무일도중 제 좋아하는 계응송입니다. 참 한결같고 아름답습니다. 늘 봐도 늘 좋고 새롭고 놀랍습니다.
바로 믿음의 청송(靑松) 푸른솔이 그러합니다. 오늘 알렐루야 복음 환호송 다음 시편 말씀이 흡사 푸른솔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나 주님께 바라네. 주님 말씀에 희망을 두네”(시편 130,5)
불암산 바위산의 소나무들은 제 믿음의 스승입니다.
불암산 기슭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기 34년 동안 한결같이 여전히 바위에 믿음의 뿌리내린 은은한 솔향의 푸른솔들입니다. 아주 예전 24년전 써놨던 푸른솔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절망하지 말자
가난과 절망의 바위 틈바구니
집요히 믿음의 뿌리내려
희망을 피어내는 생명의 푸른솔
온갖 풍상 고초에도 언제나 한결같다.
하늘 사랑은 이처럼 강하고 질긴 것
언젠가 죽어 사라질 때까지
한마디 말도 없이
계속되는 믿음의 뿌리내림이다.
삶이 고달플 때 바위틈에 뿌리내린
푸른솔을 보라.
하늘위 푸른솔만 보지 말고
아래 바위틈 좌우사방으로 파고드는
부드럽고 강인한 믿음의 뿌리들을 보라
말없는 말을 들으라.
그리고 그 누구에도
그 어떤 환경에도 절망하지 말라
잘 보면 절망의 바위에도 그 틈이 있나니
그 틈에 뿌리내려 희망으로 자라나는
생명의 푸른솔이 될지니.”-1998.1.18.
믿음은 은총이자 분투의 노력이자 주님께 부단한 뿌리내림입니다. 생명의 푸른솔을 볼 때마다 심기일전 백절불굴의 믿음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함은 주님께 계속 믿음의 뿌리내리기 위함입니다.
오늘은 성 이레네오 순교자 주교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참으로 믿음의 용사, 믿음의 대가로 70년 한평생 믿음의 전사로 분투의 노력을 다했던 동서방 모든 신자들이 우러러 보는 2세기 성인입니다. 성인은 130년경 지금의 터키인 스미르나에서 태어나, 요한 사도의 제자인 성 폴리카르보 주교를 통해 사도적 정통성을 이어받았으며, 후에 프랑스 리옹의 두 번째 주교가 되어 영지주의 이단과 피나는 싸움을 통해 정통 교리를 수호한 대표적인 호교교부로 손꼽힙니다. 성인의 대표적 저서는 ‘이단논박’과 ‘사도적 가르침의 증명’입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 ‘주님에게서 오는 평화’라는 이름 뜻처럼, 일생을 평화와 일치를 위해 헌신한 목자요 교부로서 동방과 서방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 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2년 올해 1월21일 ‘일치의 박사Doctor unitatis’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교회학자’로 선포하였습니다. 이로서 이레네오 성인은 교회의 37번째 ‘학자’가 됩니다.
얼마나 뿌리 깊은 믿음의 성인인지 감동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물론 믿는 이들을 감동시키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믿음입니다. 새삼 믿음은 은총의 선물이지만 분투의 노력의 산물임을 깨닫습니다. 여기 수도공동체 형제들이나 오늘 모임을 갖는 예수성심자매회 회원 자매들의 책임을 다해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을 통해, 또 20년 이상 한결같이 제 강론집을 매달 제본해다 주는 한 자매를 통해 감동하는 겸손한 믿음입니다. 제가 늘 감동하고 배우는 바도 이런 믿음입니다.
이점에서 오늘 복음의 제자들과 제1독서 아모스 예언서의 이스라엘 자손은 실패했습니다. 모두가 우리 믿음의 현주소를 거울처럼 비춰줍니다. 오늘 복음의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는 상황’이 상징하는 바, 때로 반복되는 두렵고 불안한 오늘의 현실입니다. 당시 제자들의 교회공동체가 처한 불안하고 두려운 현실을 반영합니다. 바로 이런 혼돈의 중심에 살아 계신 주님을 잠시 망각忘却한 무지無知의 제자들입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곤히 잠자고 계신 예수님을 깨우는 제자들의 절박한 기도입니다. 이런 혼란한 상황중에도 숙면을 취하고 계신 주님의 믿음이 참 놀랍습니다. 애당초 타고난 믿음도 없고 믿음의 완성도 없습니다. 삶의 믿음의 여정입니다. 이런 절박한 기도와 더불어 주님의 응답이요, 이런 배움과 깨달음의 체험을 통해 날로 견고해지는 믿음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주님은 말씀하신후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니 사방이 아주 고요해집니다. 폭풍을 미풍으로 바꾸시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주님께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주님께 믿음의 뿌리내림이 날로 깊어지면서 우리는 폭풍暴風을 미풍微風으로 바꿀수 있고 미풍에서 폭풍으로 빠지는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으니, 바로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당시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화두같은 말씀입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로 하느님이신 예수님으로 늘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시며,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늘 새롭게 모시는 분입니다.
좌우간 이런 믿음의 체험을 통해 날로 성장, 성숙하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육신은 노쇠해가도 믿음은 갈수록 주님께 깊이 뿌리내려 늘 “푸른솔” 영혼으로 살았으면 소원所願이겠습니다..
오늘 아모스서 말씀이 우리 믿음에 충격과 더불어 좋은 깨우침을 줍니다. 아무리 은총의 축복을 받아도 분투의 믿음이, 노력이 없으면 하느님 은총의 축복도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됨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호의favor가 편애favoritism는 아닙니다. 우리가 분투의 노력으로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호의도 회수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일체의 기득권도, 특권도 없습니다. 보십시오. 여지없이 죄로 인해 무너져 망가지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말입니다.
“나는 이 땅의 모든 씨족 가운데에서, 너희만 알았다. 그러나 그 모든 죄를 지은 너희를 나는 벌하리라. 나 하느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뒤엎은 것처럼 너희를 뒤엎어 버리니, 너희가 불 속에서 끄집어낸 나무토막처럼 되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너의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여라.”
그대로 오늘 우리의 즉각적인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끝까지 결코 방심해서는 안되며, 끊임없이 깨어 챙기고 가꾸고 돌봐야하는,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누군가에게는 두려운 순간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뜨거운 그리움으로 기대되는 날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모두 오매불망寤寐不忘 분투의 노력을, 믿음을 다하다가 주님을 맞이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이 되도록 합시다.
“오, 주 하느님! 일편단심一片丹心, 당신만을 믿고 사랑하나이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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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님, 구해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 8,25)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자, 제자들이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급히 깨우며, 자신들이 죽게 되었으니 구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시면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십니다. 그러자 풍랑이 멎어 아주 고요해집니다.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합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7)
오늘 복음에서 언급되고 있는 풍랑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크고 작은 시련이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아가는 삶 속에서 크고 작은 풍랑이 없는 사람은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조금만 관심을 갖고 너와 주위를 바라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겪고 고통이 나만의 고통이고, 가장 큰고통이라고 착각하면서 넘어지는 사람들, 그것도 크게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크고 작은 풍랑, 시련과 고통 앞에서 나는 어떤 모습인가? 제자들처럼 살려달라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가? 나는 하루의 삶 속에서 나의 구원자이신 주님의 이름을 얼마나 부르고 있는가?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는 이 외침 안에서 제자들의 큰 간절함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의 간절함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주 주님의 이름을 불러봅시다! 그것도 온 마음을 담아서 아주 간절하게 불러봅시다! 그것이 바로 기도자체이고, 아주 멋진 기도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다양한 방법과 모습으로 ㅎㅎ
오늘은 저의 18주년 서품기념일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주님의 이름을 간절하게 불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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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P3Ju1eEQ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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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마태 8, 28)
바람이
거세다.
풍랑을
치유하는
믿음이다.
믿음은
바람과 호수를
꾸짖는다.
꾸짖는 믿음은
삶을 위한
올바름의
시작이다.
거센 풍랑을
봉헌한다.
봉헌은
고요함으로
이어진다.
삶의 풍랑
속에서도
함께하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이 계시기에
겁내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풍랑처럼
일어나는
모든 것을
나누길 바라신다.
참된 나눔은
고요하다.
나눔으로
믿음은 더욱
깊어진다.
풍랑의 체험은
주님을 깨닫는
은총의 체험이
된다.
사랑의 교훈은
나눔의 교훈이다.
삶의 역사에서
체험했던
세찬 풍랑도
제자리를 잡듯
고요해졌다.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는
주님께서는
실은 우리 믿음을
꾸짖으신다.
믿음도 사나운
바람처럼 봉헌의
이 여정을 거치며
하느님을 드러내는
고요가 되고
기쁨이 된다.
우리의 삶에
나의 삶에
풍랑을
다스리시는
주님이 계심을
믿는다.
겁낼 것 없다.
이것이 삶이다.
주님을 마침내
만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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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 26)
두려움과
믿음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살아갈 용기가
필요하듯
믿음이 필요한
우리의 시간입니다.
큰 풍랑의
위기 뒤에
더더욱 커지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인생이라는
여정안에서
피할 수 없는
풍랑의 시간입니다.
큰 풍랑을 통해
믿음을 배우고
믿음을 얻게 됩니다.
풍랑도 믿음이
되게 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큰 풍랑은
고요하게 하시고
약한 우리의 믿음은
강하게 하십니다.
고요와 풍랑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십니다.
겁내야 할 것은
큰 풍랑이 아니라
우리의 약한 믿음입니다.
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부릅니다.
풍랑 속에서도
믿음은 있습니다.
우리의 강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나운 풍랑이
실은 고요하고
강한 믿음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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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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