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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1
#예수 #그리스도 #인성
구원협약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하나님의 세 위격과 맺으신 것이고,천지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창조하신 것이며,동산에서 아담을 부르시고 판결하신 분은 그리스도의 인성이시다.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고 접대를 받으신분은 그리스도의 인성이시고,야곱과 밤새 씨름을 하신분은 그리스도의 인성이시며,
모세에게 등을 보여주신분은 그리스도의 인성이시다.기드온과 마노아 부부에게 나타나셔서 제물을 받으신분은 그리스도의 인성이시고,선지자 에스겔과 다니엘에게 나타나신 인자는 그리스도의 인성이시며,태초에 하나님이라 불리시며 하나님과 같이 계신 말씀은 그리스도의 인성이시다.
#요한계시록 #Revelation 17:9-10
음녀를 태운 짐승의 일곱 머리는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을 대적하는 온갖 다양한 세력들과 권모술수를 의미하는 것 같다. 교회와 성도들은 다양한 시대나 지역에 따라 애굽이나 앗수르처럼 폭압적인 방식으로, 앗수르처럼 신성모독적인 방식으로, 바벨론처럼 포로나 인질을 다루듯이 좌지우지 하는 방식으로, 바사처럼 유화적인 방식으로, 헬라처럼 지성과 학문의 방식으로, 로마처럼 법과 제도의 방식으로 공격을 받는다. 교회 내의 음녀와 같은 목사와 교인들은 참된 목사와 성도들을 공격할 때 일곱 머리와 같은 방법을 쓴다. 음녀와 같은 교회는 짐승의 일곱 머리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므로 짐승이 자기 머리에 태워 앉혀 세상의 부귀영화와 권력을 누리게 한다. 국교로 지정된 교회나 정부와 지나치게 유착된 교회들이 주로 이런 음녀의 모습을 보인다.
#20200721
#레위기 #Leviticus 13:9-28
#문둥병 #나병
9 사람에게 나병이 들었거든 그를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10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피부에 흰 점이 돋고 털이 희어지고 거기 생살이 생겼으면
11 이는 그의 피부의 오랜 나병이라 제사장이 부정하다 할 것이요 그가 이미 부정하였은즉 가두어두지는 않을 것이며
12 제사장이 보기에 나병이 그 피부에 크게 발생하였으되 그 환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졌으면
13 그가 진찰할 것이요 나병이 과연 그의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다 희어진 자인즉 정하거니와
14 아무 때든지 그에게 생살이 보이면 그는 부정한즉
15 제사장이 생살을 진찰하고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 그 생살은 부정한 것인즉 이는 나병이며
16 그 생살이 변하여 다시 희어지면 제사장에게로 갈 것이요
17 제사장은 그를 진찰하여서 그 환부가 희어졌으면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그는 정하니라
자기가 나병에 걸린 줄 모르고 있다가 주위 사람이 발견하여 제사장의 진찰을 받은 사람은 오래 된 나병이라 판단을 받게 되는데 비록 그는 나벙으로 부정하더라도 오랫동안 미미하게 걸린 것이어서 별도로 격리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미미한 국소적 나병이 아니라 전신에 퍼진 나병이면 도리어 제사장은 그 백성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정결하다고 판단했다. 이 증상이 나병 초기에 보이는 피부의 백화현상일 수도 있고 나병으로 인해 문드러진 피부일 수도 있다. 전신 나병 환자가 왜 부정하지 않고 정하다고 판단을 받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회복 가능성이 1도 없는 절대적인 절망과 모든 사회와 단절되는 절대적인 고립과 오로지 하나님만이 고치실 수 있다는 절대적인 소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병환자에게 보이는 생살은 보통 사람의 겉피부가 아니라 나병으로 인해 문드러져 피부가 벗겨진 안쪽 살을 의미한다. 이 생살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고통을 안겨주지만 나병 환자는 통각이 둔해져서 환부에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게다가 전신 나병 환자로서는 그렇게나마 생살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것도 매우 긍정적인 증상으로 여기게 된다. 그래서 그로서는 비록 전신 나병으로 정결하다고 판단 받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생살이 생겨서 부정하다고 판단받는 것을 더 선호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생살이 나병에 잠식되면 그는 다시 전신 나병 환자로서 정결하다는 판단을 받게 되는데 이는 그에게 더 큰 절망감을 안겨줬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순수하게 절망적인 전신 나병을 앓고 있다 하더라도 그 또한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임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의 전신이 아무리 나병으로 썩어 문드러지더라도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므로 아이러니하게도 전신 나병 환자는 육신이 후패해가는 속도만큼 영혼이 완전해감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의 나병도 육신의 나병과 같이 자기도 모르는 새에 가랑비에 옷젖듯이 서서히 진행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바람직하지 못한 습관이나 중독 성향의 습관이 그러하다. 그런 습관들은 초반에는 작은 것부터 시작하다가 조금씩 횟수도 늘어나고 범위도 증가하게 되어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는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가버리게 된다. 술, 담배, 이성 관계, 도박, 도벽, 폭력 등이 그러하다. 그래서 교회의 지체 중 누군가가 나병과 같이 이러한 깊은 죄에 오랫동안 빠져있으면 그는 자기 스스로의 의지로 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다른 지체들이 그의 신앙회복을 위해서 담당 목회자에게로 인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오랜 나병 환자를 주위 이웃이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가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목회자로부터 충분히 신앙상담을 받고 죄에서 돌이킬 수 있어야 한다. 육신의 나병 환자는 치유나 회복을 기대할 수 없지만 신자는 아무리 심각한 죄에 빠져있다 하더라도 혼자서는 어려워도 신앙의 형제들이나 목회자들의 도움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돌보심으로 얼마든지 치유가 가능하다. 물론 심각하게 훼손된 신앙의 치유와 회복에는 지난한 과정이 소요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그 과정을 감내해야 한다. 육신의 나병은 절망만을 안겨주지만 영혼의 나병은 예수 그리스도로 치유될 수 있다는 소망이 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그 영혼이 과연 전신 나병에 걸린 자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그는 삼촌 아브라함과 함께 있을 때에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적잖이 본받았으나 소돔과 고모라에 거주하면서 그 도시들의 패역함 때문에 자기의 영혼이 거의 나락으로 떨어질 정도로 상하였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소생 불가해 보이는 롯 조차도 의롭다고 여기시고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심판 가운데서 그와 가족들을 구원하신다. 그의 영혼은 심각하게 훼손되었어도 그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의인이었던 것이다.
여리고의 창녀 라합은 이에 대한 가장 적절하고 좋은 예가 아닐까 싶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도 아니었고 오히려 이스라엘에 의해 멸망당할 이방 족속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녀는 여리고에서도 고귀한 신분이 아니라 온갖 남자들에게 자기의 성을 매매하는 비천한 창녀에 불과했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이보다 더 심각하게 훼손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그런 멸망당할 이방 족속의 창녀에 불과한 라합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어 그 멸망당하는 가운데서 홀로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의 일원으로 편입된다. 사실 라합에게 있어서는 그저 목숨을 부지하고 이스라엘의 일원이 되는 것만으로도 평생 감지덕지 할만했을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여성으로서는 도저히 어느 남자에게도 매력이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그런 라합을 유다 지파의 족장인 살몬이라는 남자가 사랑하여 아내로 삼은 것이다. 살몬의 친족들이나 지인들은 그런 살몬더러 정신이 나갔다고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 없다고 하지 않았을까. 라합 자신도 그런 살몬이 진심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살몬의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기 뜻대로 라합을 사랑하고 아내로 맞아들였을 것이다. 라합으로서는 살몬의 아내가 되는 것만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놀랍게도 그녀에게 보아스라는 아들을 주신 것이다. 그녀는 이미 여리고에서 오랜 기간의 창녀 생활로 인해 수많은 남자들에게 몸이 유린되면서 임신과 출산을 기대할 수 없는 손상된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그런 라합에게 임신과 출산의 은혜를 베푸셔서 보아스라는 아들을 주시고 궁극적으로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게 하신다.
유다 왕국의 히스기야 왕의 아들인 므낫세 왕은 북이스라엘 아합 왕에 버금갈 정도로 사악한 왕이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므낫세의 죄악이 너무 커서 유다 왕국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 하셨고 열왕기서의 기록자는 므낫세의 악행만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과연 그의 영혼은 스스로 전신 나병에 내던졌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역대기서에서는 그런 사악한 므낫세가 타국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후부터는 하나님께 완전히 돌아서서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했다고 기록한다. 이것이야말로 완전하게 썩어 문드러진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받은 좋은 예이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교만함으로 7년 동안 그의 양혼이 짐승 수준으로 망가져서 야수처럼 생활하게 되는 비참한 징계를 받는다. 그러나 그 징계의 기간이 끝난 후에는 다시 자기 왕권을 회복함과 더불어 하나님을 믿는 신앙까지 가지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다스리는 왕국의 모든 지역에 자기의 어인을 찍은 공적인 조서에 다름아니라 자기가 믿는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는 글을 써서 보낸다.
예수님께서 복음 사역을 하시면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치유하시며 구원하신 수많은 병자들과 죄인인 세리와 창녀들과 십자가에서 신앙을 고백한 한 강도 모두는 영혼의 전신 나병을 치유받은 탁월한 예들이다.
18 피부에 종기가 생겼다가 나았고
19 그 종처에 흰 점이 돋거나 희고 불그스름한 색점이 생겼으면 제사장에게 보일 것이요
20 그는 진찰하여 피부보다 얕고 그 털이 희면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 이는 종기로 된 나병의 환부임이니라
21 그러나 제사장이 진찰하여 거기 흰 털이 없고 피부보다 얕지 아니하고 빛이 엷으면 제사장은 그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22 그 병이 크게 피부에 퍼졌으면 제사장은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 이는 환부임이니라
23 그러나 그 색점이 여전하고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이는 종기 흔적이니 제사장은 그를 정하다 할지니라
피부의 종기도 나병을 유발시키는 원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괴롭힌 애굽과 언약궤를 탈취한 블레셋에 악성종기 재앙을 내리신 것은 2차로 나병의 재앙을 내리신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즉 악성종기 재앙을 당한 애굽과 블레셋은 그 종기가 아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거기서 연속해서 나병에까지 집단으로 걸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피부의 종기가 나았다가 나병이 생기는 경우는 종기 상처가 완전히 나을 때까지 잘 관리하지 않고 그럭저럭 괜찮겠다 싶어서 부주의하게 내버려두었을 수도 있다. 종기 상처에서 나병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려면 무엇보다도 종기가 완전히 나을 때까지 철저히 치료하고 다 나은 후에도 그 상처 부위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것이 최선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죄를 지을만한 상황을 어찌어찌 잘 넘겼다고 해서 방심하는 순간 그것보다 더 큰 죄가 영혼을 파고들어 더 심한 죄를 짓게 만든다. 귀신들린 사람이 어찌어찌 귀신을 쫓아내긴 했는데 성령과 복음으로 자기 영혼을 채우지 않고 내버려두면 쫓겨난 귀신이 물없는 곳을 떠돌아 다니다가 다시 그 사람의 영혼이 깨끗하게 청소된 것을 보고서 자기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더 들이게 되어 처음보다 일곱배나 더 악화된다.
24 피부가 불에 데었는데 그 덴 곳에 불그스름하고 희거나 순전히 흰 색점이 생기면
25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색점의 털이 희고 그 자리가 피부보다 우묵하면 이는 화상에서 생긴 나병인즉 제사장이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은 나병의 환부가 됨이니라
26 그러나 제사장이 보기에 그 색점에 흰 털이 없으며 그 자리가 피부보다 얕지 아니하고 빛이 엷으면 그는 그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27 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만일 병이 크게 피부에 퍼졌으면 그가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은 나병의 환부임이니라
28 만일 색점이 여전하여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고 빛이 엷으면 화상으로 부은 것이니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은 이는 화상의 흔적임이니라
치명적인 나병은 화상이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것에서도 생길 수 있다. 단지 화상을 좀 입었을 뿐이었는데 그 상처가 덧나서 일상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나병으로 확진된다면 당사자로서는 왜 이런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야 했는지 억울함과 서러움에 빠지기도 하였을 것이다. 화상 때문에 나병까지 걸린 당사자의 참담한 심정을 감히 헤아릴 수는 없지만 한 번 발병한 나병은 저절로 낫는 것도 없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억지로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참담한 상황이라는 것에 계속 비관적이고 자기연민에 빠져버리면 남은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뿐이다. 차라리 자기가 당한 현실을 직시하고 극도로 제한된 환경에서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찾아내며 위로는 하나님의 긍휼을 소망으로 간구하는 것이 현명하다. 반면에 화상 후에 제사장에게 진찰을 받고서 나병이 아니라는 판단을 받은 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는 화상을 입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게 될 것이다. 신자라 하더라도 한 때의 치기어린 실수로 치부할 수 있는 죄의 행실에 대해서 어떤 이는 나병과 같은 매우 심각하고 비참한 결과를 맞기도 하고 어떤 이는 반대로 그런 안좋은 결과를 가까스로 벗어나기도 한다. 안좋은 결과를 맞이한 신자는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하고 절망스럽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그 결과를 되돌릴 수는 없으므로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려서는 안되고 자기가 마땅히 받아아 할 징계로 여기며 하나님의 긍휼을 겸손히 바라야 한다. 반대로 안좋은 결과를 피해간 신자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다시는 그 치기어린 실수의 죄를 짓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여야 한다.
지혜자는 간음하는 것은 숯불을 품에 품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숯불을 품으면 반드시 데일 수 밖에 없듯이 간음을 저지르면 반드시 그 영혼을 죄로 지지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한 번의 간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에 나병이 생길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20190721
#담임목사 사임 절차
한국 교회에서 '담임목사'라는 지위는 적어도 그 교회에서만큼은 공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최고 직분자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청빙하거나 위임하려면 온갖 심혈을 기울여 후보자를 파악하고 전 교회가 기도하며 투표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는 담임목사가 교회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그 교회를 그리스도의 명을 받아 이끌어 가는 가장 큰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담임목사가 개인적이건 교회적이건 어떤 이유로 말미암아 부득이하게 목회 중간에 사임을 해야 하는 경우에도 청빙/위임만큼의 중요성과 교회 내 공적인 절차를 따라야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담임목사가 그저 혼자서 많은 기도로 고민했다고 해서 아무런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사임을 표명하는 것은 자기의 직분과 위치를 망각하고 교회에 너무나 무책임한 직무유기를 하는 것과 같다.
담임목사가 사임을 표명하려면 우선은 사임을 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교회에 공적으로 투명하고 진정성 있게 공개/공유하는 것이 먼저다. 더군다나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교역자 범죄를 은폐하고 무마하려다가 호된 사고를 겪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를 반면교사 삼기 위해서라도 그러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담임목사로서 더이상 교회 사역을 할 만한 능력이 되지 않음을 절감해서인지, 목회 기간 동안의 과오들에 대한 양심의 거리낌 때문인지, 다른 더 좋은 목회 제안을 받아서인지 등의 사유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다음으로는 당회나 공청회 또는 제직회 등의 교회 내 공적 모임에서 사임 사유의 적절성을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그 사유가 지극히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사임 절차를 진행하면 되거니와, 그렇지 않다고 판단되면 설령 담임목사가 사임하고자 한다 하더라도 교회의 권위로 이를 차단하고 막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사임을 돌이킬만한 어떤 협의점이 있는지를 적극적으로 모색하여야 한다. 만약에 교회 공회의에서 담임목사의 사임을 인정했다면 마지막으로는 담임목사를 청빙/위임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전교인 투표로 최종적으로 사임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아무리 담임목사가 사임하고자 하고 공회의에서도 통과되었다 하더라도, 교인들의 의사를 가장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담임목사의 사임에 대해서 교회 내에서 이런 일련의 과정과 절차를 거쳐야만이 그나마 담임목사의 공백으로 인한 혼란과 상호 오해를 최소화 하고 은혜 가운데서 헤어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