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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독소전쟁(獨蘇戰爭 Eastern Front, 1941년∼1945년)
스탈린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의 독일군의 공격이 어떻게 그처럼 놀라운 정치적, 군사적 기습의 효과를 달성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이 남는다. 사실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조짐은 상술하였듯이 충분히 많았다. 스웨덴에 있는 공산주의자 철도 노동자나 폴란드 저항군, 그리고 많은 정보원들이 동쪽에서 독일군이 독-소 국경 지방에 대규모로 집결하고 있음을 알려 왔다. 그리고 독일군이 고도 정찰 비행 중에 소련 영공을 침범한 사례가 300회를 넘었고, 외교적인 항의가 반복되었으나 독일 측은 별다른 대응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또한 독일 정보원과 독일의 후원을 받는 우크라이나 게릴라들이 1941년 봄에 소련 서부를 교란시켰으며,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관은 6월 16일에 필수 인원을 제외한 모든 인력을 본국으로 후송했으며, 6월 21일에는 소련이 지배하는 항구에 독일 상선이 단 1척도 정박하지 않았다. 일단 이러한 파멸적인 상황이 스탈린의 완고하면서도 맹목적 사고 때문이었다는 일반적인 해석을 받아들이기는 쉽다. 그가 종종 적의 공격 의도에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적의 공격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들을 무시하는 지도자의 전형으로 언급되어 왔다.
스탈린은 전쟁의 징후를 알고도 무시했다
후대의 많은 연구자들은 스탈린은 '진심으로' 히틀러가 '양면전쟁'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영국 공군이 소련의 바쿠 유전에 대해 폭격을 검토할 정도로 소련은 독일에게 많은 전쟁 자원을 공급했다. 아마도 스탈린은 소련이 독일에 전쟁 물자를 계속 공급하는 한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한 스탈린은 히틀러에게 독일 경제에 없어서는 안 될 희귀 광물을 제공하면서, 소련과의 전쟁이 임박하면 독일에게 중요한 인센티브를 박탈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소련은 1939년부터 독일이 침공한 1941년 6월까지 94만여 톤의 석유 및 석유 제품을 보냈고, 16만 톤의 망간 단괴와 2만 3천 톤의 크로뮴 광석과 여타 대량의 자원을 독일에 제공했다. 2차출처 실제로 최후의 화물 열차는 독일이 공격을 개시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국경을 넘어갔다. 독일 점령 하의 유럽과 일본에 산재한 소련 간첩들은 독일의 공격 징후를 1년 전부터 계속 보고했지만, 스탈린은 이런 정보가 오히려 독일의 역공작이 아닐까하고 의심했다. 게다가 무솔리니의 삽질로 독일의 공세가 이집트, 그리스-유고슬라비아 쪽으로 확대되자 스탈린은 히틀러의 의중은 소련 공격이 아니라 수에즈 운하 확보라고 확신하고 말았다. 이때는 히틀러가 대놓고 소련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면서 유고슬라비아의 쿠데타도 유대-볼셰비키들이 수작을 부린 것이라 주장하고 있었는데도 그러했다.
히틀러는 소련 공격 준비 명령을 이미 내린 후에도 소련을 안심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낚시를 내걸었다. 전쟁 1년 전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히틀러는 몰로토프에게 "대영제국은 이미 망했소. 소련이 독일/이탈리아/일본 3국 동맹에 가입하면 인도 제국을 나눠 주겠소."라고 제안한다. 이때 이미 히틀러는 소련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으며, 따라서 이는 단순한 낚시라고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 영민한 몰로토프는 이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독일의 동유럽 동맹 세력 확장에 대해서 항의했다. 특히 당시 막 끝난 겨울전쟁으로 소련에 영토를 빼앗긴 핀란드와 몰도바를 빼앗긴 루마니아가 독일 측에 붙었다. 또한 하필이면 그날 영국 공군이 베를린을 폭격하여 몰로토프는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함께 방공호로 대피했다. 그때 몰로토프가 한 말이 걸작이다. 몰로토프: "대영제국이 망했다고 한다면 지금 떨어지고 있는 폭탄은 누구의 것이오?"
스탈린의 문제는 히틀러를 너무나 '정상'으로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사실 영국에 남은 마지막 희망을 꺾어버릴 의도에서 소련을 굴복시킨다는 히틀러 자신만의 논리는 사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믿기 힘들 만큼 복잡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영국을 공격하는 편을 택하지 소련을 공격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굉장히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탈린은 단지 독일에게 자원을 공급해 주고 독일 정찰기가 소련 위를 날아다녀도 자극하지만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스탈린은 독일이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 굉장히 고심했고, 그래서 전쟁의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 전쟁 1달 전부터는 독일의 침공 징후가 확실했는데도 소련군에 경계경보를 내리는 것을 주저했다. 게오르기 주코프의 회고록을 보면 당시 국방장관인 세묜 티모셴코 원수와 총참모장인 자신은 계속 경계령 발동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그게 오히려 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결국 하루 전인 6월 21일에야 경계령을 내렸으나, 그때는 이미 독일군 특공대들이 소련군 제1선 부대들의 통신망을 절단하여 명령이 전달조차 되지 않았다. 이것만 봐도 스탈린은 히틀러가 정상적이라는 기본 전제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는 명분이나 우발적 충돌만 억제하면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위에서 말했던 대로 월경해서 정찰 활동을 하는 독일의 정찰기나 정찰 부대에 대한 대응도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마음대로 국경을 넘나들며 소련군 상황을 정찰할 수 있었고, 이는 소련군의 초반 참패를 초래했다.
물론 스탈린처럼 히틀러가 양면전쟁을 벌이는 일에 도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정상이다. 비록 2차 대전 초반에 프랑스를 항복시키면서 적어도 육군은 소련 쪽으로 집중할 수 있을 듯이 보였지만 이탈리아 왕국 덕분에 북아프리카 전역이 개전했고 이탈리아군을 보조하면서 영국군을 격퇴하라고 보낸 에르빈 롬멜은 아예 공세로 돌아서 지원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히틀러는 10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희대의 또라이였고 스탈린만 그걸 모르고 (혹은 믿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사실 스탈린뿐만 아니라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이나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도 앞서 있었던 오스트리아 병합이나 뮌헨 협정의 주데텐란트 강탈 등에서 히틀러가 희대의 전쟁광이라는 것을 모르고 협상에 임하다가 피를 봤다.
스탈린은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럴 리가 없다며 현실부정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나중에 가서는 정신을 부여잡고 소련을 지휘하긴 하지만 노발대발 화를 내기도 하고 독일이 왜 침공하겠냐며 전전긍긍한 것을 보면 이전까지는 정말로 히틀러가 소련과 전쟁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스탈린에겐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스탈린은 절대로 히틀러를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히틀러가 단시간에 독일 민족들을 통합하고, 독일 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던 독일 공산당을 완전히 전멸시킴과 더불어 유럽의 거의 대부분을 순식간에 정복하는 광경을 보면서 히틀러를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개인적으로는 히틀러를 존경하기까지 하고 있었다.
게다가 히틀러도 자신과 비슷해서 남의 뒤통수를 후려갈겨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원래 동족이 서로를 잘 파악하는 법. 스탈린도 정치판에서 구르고 구르다 못해 대숙청까지 저지른 인간인 만큼, 히틀러에 대한 대비를 하긴 했다. 위에서 말한 '스탈린 선'이 바로 그것.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까지만 해도 (그리고 그 이후도 잠시 동안이나마) 독일에 대항할 만한 강력한 육군력을 보유한 적수는 없었으며,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배했다고 해도 영국이 딱히 상륙할 것도 아닌 이상 독일의 패권을 위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즉, 독소전이 개시되어도 딱히 양면전쟁이라고 말하기 뭣하다.
게다가 소련과 겨울전쟁으로 맞붙은 다음 이를 빠득빠득 갈고 있는 핀란드가 추축국으로 붙었으니 장기적으로 뭔 생각인지 아주 뻔히 보이는 상황. 유럽의 최강국이자 패권 국가가 된 독일을 앞에 두고, 또한 보여준 전쟁 실력을 보고, 거기에 핀란드 등의 움직임을 보고 그 의심 많은 스탈린이 전쟁이 터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나 전쟁에 대한 준비를 안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래서 스탈린은 자신의 이름을 직접 딴 스탈린 선을 독일 앞에다 구축하려 했다.
그런데 '스탈린 선'은 독소전 최대의 오산 중 하나로 꼽힌다. 일단 폴란드 함락 이후에 만들어졌으니 만들 시간이 부족해서 미완성이었다. 또한 원래 폴란드 국경에 짓고 있는 방어선을 포기하고 새로 만들게 되면서 대숙청 이후의 빈약한 장교단으로 새로운 방어 작전을 짜야 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주둔하게 된 소련군들은 그동안 훈련하던 지역이 아니라 새로운 지형으로 오게 되었으니 당연히 역량이 감소했다.
만약 스탈린 선이 계획대로 완성되었다면 독일이 맞닥뜨릴 소련은 대숙청 이후로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복구된 군대와 스탈린 자신의 이름을 딴 강력한 방어선과 그곳에 있는 패권 국가인 독일에 대응할 만한 (나름 정예) 병력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원래 짓던 폴란드의 방어선까지 탄탄하게 2중으로 갖추었을 수도 있다. 스탈린 또한 전쟁을 싫어하는 인물도 아니며, 독소 불가침 조약은 누구나 있을 수 없는 조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학자들 중에서는 독소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히려 '준비된 소련의 선제 공격'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최소한 미국에게 털리는 중에 뒤치기는 했을 듯하다. 이 경우에는 서부전선에서 미국과 영국에게 털리는 와중에 양면전쟁이 개시된다.
당연히 소련 입장에선 대 독일 전쟁 계획이 없다고 하면 약화된 군과 없다시피 한 방어벽을 가진 채 떠오르는 태양인 독일과의 전쟁은 극구 피해야 할 것이다. 대 독일 전쟁 계획이 있다면 이쪽도 당연히 시간을 끌어야 한다. 이건 많은 시간도 아니고, 겨우 3~5년 정도만 있으면 대숙청의 여파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몰로토프가 회상한 바에 따르면 스탈린은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1943년에는 전쟁을 할 준비가 마련된다."라는 스탈린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스탈린이 독일에 선제 공격 가능성을 내 주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전쟁을 피한 것은 이러한 까닭일 것이다. 소련에게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쟁을 피하고 어떻게든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가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스탈린 입장에서도 별 수 없었다. 물론 이런 상황 자체가 대숙청을 벌여서 어쩔 수 없던 거지만. 그리고 말 그대로 소련은 군수산업이 1943년부터 정점을 찍기 시작하면서 독일군을 압도적인 물량으로 파쇄시키기 시작한다. 다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는데 독일군이 동유럽에서 저지른 학살로 그 장비들을 이용할 군인 수 자체가 감소해버렸다(...)
스탈린이 보여준 우유부단함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이유들도 있다. 우선 스탈린은 독일의 다른 적인 영국과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그 외에 폴란드와 같은 저항 조직들이 소련을 전쟁에 끌어들이려 거짓된 정보를 제공한다고 우려했다. 게다가 대숙청으로 인해서 소련의 중요 인재들이 쓸려나가서 소련의 정보 작전 능력은 굉장히 축소되었으며, 소련의 정보 장교들은 만약에 스탈린의 생각에 거슬리는 보고를 하게 될 경우에는 죽을 것이 빤히 보였다. 거기다 보고가 스탈린이나 히틀러를 자극할 것을 지나치게 우려했기 때문에 전쟁 발발 가능성을 담은 보고서들을 주작질로 왜곡시켜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한마디로 스탈린이 원하는 보고서만을 보낸 것이다. 이는 독재정권의 고질적인 문제로 스탈린뿐만 아니라 히틀러와 역사적인 독재자들이 모두 그랬으며, 중요한 상황에서 패착을 맺는 요인이 된다.
게다가 독일 측의 기만책도 스탈린의 결정을 주저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우선 바다사자 작전이라는 영국 침공 계획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가리는 바람잡이 역할로 사용되었는데,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가 동부에서 창설된 부대는 사실은 영국의 정보부를 기만하기 위한 것이며, 독일은 바다사자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영국 폭격기와 정찰기가 닿지 않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정보를 소련 측에 보란 듯이 알렸다. 특히 1941년 6월의 신문 기사에는 선전 장관이였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영국 침공이 임박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물론 괴벨스는 배포된 신문을 바로 마치 소련이 보란 듯이 회수해 버렸는데, 이 행동의 목적은 이것으로 자신들이 정말로 영국을 공격하려 한다는 역정보를 흘리기 위해서 이러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괴벨스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중요 군사 정보를 실수로 흘린 것처럼 위장하여 나치당 내에서 불명예를 얻은 것처럼 행동하였다.
한편 유고슬라비아 침공과 그리스 침공 또한 스탈린의 오판에 기여했다. 이는 그 동안 동부에서 독일의 새로운 부대가 편성된 이유를 그럴 듯하게 설명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바르바로사 작전 자체를 연기시킨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원래 독일의 계획이었던 1941년 5월 15일에 독일이 침공할 것이라는 올바른 정보를 제공했던 정보원들이 이야기했던 날에 공격을 감지할 만한 어떤 낌새도 없이 그냥 지나가 버렸다. 그러자 스탈린은 제대로 낚여서 정보원들을 신뢰하지 못하였다. 이전부터 스탈린은 크고 작은 독일 침공 징후 보고가 계속되자 히틀러한테 전보를 보냈다. 대표적으로 1941년 3월 8일 "귀국이 소련을 친다고 하는 첩보가 들어오고 있고, 귀국 군대가 자꾸 동쪽으로 오는데 우리가 뭘 잘못했습니까?"하고 스탈린이 히틀러한테 전보를 보냈다. 히틀러는 3월 10일 보낸 답신에서 "우리가 동쪽으로 군대를 보내는 것은 그리스 및 유고슬라비아쪽을 ‘정리'하기 위함이며 소련이 우리의 계획을 도와준다면 발칸 반도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될만한 장소를 제공하겠다."며 역으로 스탈린 입이 귀에 걸릴 페이크를 쳤다. 그리고 4월에 히틀러가 유고슬라비아-그리스 침공을 감행했고, 문제의 5월 15일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그러자 스탈린은 히틀러의 말을 믿어버리게 됐다.
6월 하순이 되자 그 동안 보고되었던 수많은 위험 징후가 거짓으로 판명되면서 정보원들은 더 이상 스탈린과 그의 참모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 스탈린이 전략적 관점에서 허를 찔렸다는 사실이 보다 확실하게 이해가 된다. 그리고 1년 전부터 리하르트 조르게를 비롯한 스파이들이 정보를 보내왔다는 것 때문에 스탈린이 고집이 세고 무식한 지도자로 보이지만 저 말은 다르게 생각해보면 스파이들이 1년 동안 보내왔던 정보들은 거의 대부분 틀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엄청나게 많고 어지러운 징후들 사이에서 눈앞에 닥친 위험을 가려내는 것은 말이 쉽지 실제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서 알 수 있듯이 러시아를 침공하려고 했을 때에는 러시아의 라스푸티차와 동장군을 우려하여 봄, 아니면 아무리 늦어도 초여름에는 러시아를 침공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발칸 반도에서 이미 시간을 허비해서 봄과 초여름이 지나 한여름이 되어 버리면 독일군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마침 1941년 이 해의 봄에는 유난히 비가 많이 오는 등 라스푸티차가 오래 지속되었다. 이 때문에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군도 '만약 독일이 침공한다면 라스푸티차가 끝나는 즉시 공격을 행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유고슬라비아-그리스 침공 등으로 인해 소련 침공 자체가 연기되고, 곧바로 여름이 되자 스탈린은 "적어도 이번 해에는 들어오지 않겠지"라는 생각으로 독일군이 소련 내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안심해서 마음을 놓아 버린 것도 상당한 영향이 있었다.
게다가 1941년의 소련의 육군과 공군은 이제 막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조직과 지휘부, 장비, 훈련 병력 배치, 방어 계획 모두가 바뀌던 중이었다. 이 시기에는 괜히 공격에 나섰다가는 불안정한 상태의 군대가 공중분해되기 십상이기에 군이 완성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허나 스탈린에게는 운이 나쁘게도 히틀러는 자신의 군대가 최상의 전력에 근접하고, 맞닥뜨리는 적이 가장 취약한 시점을 선택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독일의 선제공격은 비교적 탁월한 선견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젠가 한 판 붙어야 할 적이 최고의 상황을 스스로 마련해 준 것.
요약하자면 스탈린이 대숙청이라는 희대의 삽질로 소련의 군사력 역량을 잔뜩 날려먹긴 했지만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스탈린은 언젠가 한판 붙을 것을 예상은 했고 나름 대응하려 했다. 그러나 독일의 노련한 교란 작전에 속아넘어갔고 독일군이 라스푸티차와 동장군을 우려하여 겨울에는 오지 못할 것이라 여겼기에 1941년 가을에 쳐들어올 것을 예상하는 데 실패했다. 또한 대숙청의 여파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탈린은 시간이 필요했고 이 때문에 독일에게 최대한 배려하는 길을 택했으나 이는 커다란 재앙이 되었다. 만약 전쟁이 터지지 않거나 몇 년 늦게 터졌다면 스탈린의 도박은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독소전쟁을 1941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시작해 버렸고, 스탈린에게 시간이 필요했다는 약점을 놓치지 않았다.
전쟁 초기 소련의 도박은 실패했고, 독일의 도박은 성공하는 것으로 보였다.
3.1. 연합국
• 소비에트 연방
• 유고슬라비아
◦ 유고슬라비아 왕국 (1941~)
◦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1944~)
• 투바 인민 공화국
• 체코슬로바키아 제2공화국 망명 정부 (1943~)
• 폴란드 동부군 (소련 측이 폴란드 포로를 모집해 조직한 폴란드 인민군)
• 루마니아 왕국 (1944년 이후)
• 불가리아 왕국 (1944년 이후)
• 체코슬로바키아 (의용군)
• 핀란드 (1944~)
• 자유 프랑스 (노르망디-니에멘 비행연대)
• 영국 (항공 지원국)
• 미국 (항공 지원국)
• 캐나다 (물자 지원국)
3.2. 추축국
• 나치 독일
• 이탈리아 왕국
• 핀란드 (1944년 이전)
• 루마니아 왕국 (1944년 이전)
• 헝가리 왕국
• 러시아 인민 해방 위원회
• 크로아티아 독립국 (의용군)
• 스페인국 (의용군)
•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의용군)
독소전쟁의 특징
• 유례가 없는 대규모의 병력 동원 - 서부전선의 경우 가장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만 하더라도 연합군과 독일군 양측에서 야전군 병력들을 동원했고 아르덴 대공세 때가 되어서야 1개 집단군 규모의 병력들이 서로 맞붙었다. 그 유명한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도 몇 개 사단 규모의 아프리카 군단을 지휘한 수준이었다. 반면, 독소전쟁은 집단군 단위의 군 병력들이 총동원되었으며 특히 소련군은 어마어마한 피해에도 끊임없이 사단을 편성해 10개 전선군(집단군)을 투입했을 정도였다. 조공이나 기만 작전만 하더라도 몇 개 야전군 단위에서 1개 집단군 병력들이 동원되어 전투를 치루었을 정도로 독소전쟁의 규모는 차원이 달랐다.
• 대규모 기동전 - 독일군은 대부분의 전차와 항공기들을 동부전선 방면에 투입했으며 소련은 어마어마한 공업 생산력 그리고 랜드리스로 마련한 수 많은 전차와 항공기들을 전부 독일 전선 방면으로 투입했다. 이러한 상황이다보니 중일전쟁이나 서부전선에선 꿈도 못꿀 수천대 단위의 전차들이 동원되는 대규모 전차전이 여러 번 벌여졌으며 또한, 기동 전력들이 총동원되다보니 병력의 기동 범위도 크게 넓어졌다. 그 덕에 독일군이 독소전쟁 이전에 보여주었던 전격전과는 차원이 다른 기동전이 벌여졌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군은 300만 명의 소련군을 섬멸하며 1500km의 거리를 진격해 모스크바 코앞까지 도달했으며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소련군은 단 2개월 만에 집단군 단위의 독일군 병력들을 갈아버리며 700km를 주파했다. 이러다보니 지휘관들의 작전 역량도 크게 발달했다. 독일군의 경우 임무형 지휘체계를 통해 하위 지휘관들이 자유롭고 창의적인 전술을 구사해 소련군의 반격을 격퇴했으며 소련군은 대숙청 이후 사실상 마비된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작전술을 부활시켜 대규모의 병력들이 전선을 돌파해 독일군의 종심으로 침투할 수 있었다.
• 대규모 화력 - 소련의 경우 포병을 중시하는 탓에 수 많은 카츄샤 다연장로켓과 곡사포들이 공세 이전에 독일군 방어선에 준비 포격을 가했고 포병사단까지 편제되어 각 제대에 연대급 단위 하위부대가 배속되는 형태로 운용되기도 했다. 이러다보니 독일군은 소련군의 어마어마한 포격에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독일의 경우도 소련의 주요 대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전투를 할 때 가용가능한 항공기들을 총동원해 초토화시켰고 그래서 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를 비롯한 소련의 주요 도시들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서부전선과는 차원이 다른 고화력의 전투가 벌여지다보니 주요 전장이었던 독일 동부 도시와 폴란드, 소련의 주요 도시들이 완전히 쑥대밭으로 전락했다.
• 역사상 유례가 없는 총력전 - 양측의 지도자들은 권위주의적인 독재자였고 자신의 목숨과 정권을 위해서라도 승리하기 위해 그야말로 국가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소련은 '어머니 러시아'와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모든 인민들이 나서야 한다고 선전했고 자기 가족과 자기 땅을 침범한 적은 막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던 대다가 독일군의 학살 만행을 본 소련인들은 너도 나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 대도시에서 벌여진 주요 전투마다 소련 인민들이 나서서 방어진지 공사를 도와주었으며 시골의 경우 청야전술을 실시해 그동안 수 백년 동안 대를 이어 살아오던 마을들을 스스로 불태워 없애버려 독일군이 물자를 현지 조달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일부 민간인들은 총기를 들고 파르티잔이 되어 독일군을 괴롭히고 다녔다. 우랄로 이전된 군수공업단지에선 모든 노동자들이 총동원되어 군수무기들을 생산했고 여군들은 100만 이상이 동원되어 단순히 지원 부대 뿐 만 아니라 저격수, 전차병, 조종사 등 일선 전투병과에 배치되어 맹활약했다. 심지어 범죄자들도 형벌부대에 배치되어 독일군의 총알받이가 되었다. 독일의 경우 강탈한 프랑스의 열차 3분의 2를 동부전선 방면에 투입했고 비시 프랑스로 부터 막대한 전쟁자금을 뜯어 냈다. 다른 점령지에서도 해당 점령지의 자원과 국부를 몽땅 동부전선에 투입했고 그 과정에서 점령지들은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전쟁 막바지가 되자 장애인과 노인, 심지어 어린이까지 몽땅 동원해 히틀러 유겐트, 국민돌격대에 집어넣어 소련군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다.
6. 전쟁이 남긴 것
6.1. 엄청난 인명 피해와 잿더미가 된 두 나라
거의 60년 동안 전 세계에 참사들이 더 쌓인 뒤에도 여전히 소련인들이 겪었던 고통을 그저 듣기만 해도 상상력이 마비되어 보잘것없게 된다.
- 리처드 오버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385
소련은 세계 2위 경제대국이자 공업대국이었고 독일 역시 세계 3위 경제대국이자 고도화된 공업 국가였다. 이렇게 모두 국력이 강한 강대국이었고 당시 양국지도자 모두 인명경시 사상이 강한 상태에서 총력전이 벌어졌으니 당연히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매년 독일의 한 위원회는 구 동독 지역과 서부 러시아를 방문하여 매년 3~4만명 가량의 독일군 유해 발굴을 하고 있다. 독소전에서 독일군은 300만명이나 죽었지만 아직 그 1/4도 안 되는 71만명의 유해밖에 돌아오지 못했다.
러시아에선 민간 봉사자를 중심으로 소련군 유해를 발굴 중인데, 2014년에 600개의 발굴 그룹이 참여하여 50만명의 병사를 찾아 다시 이장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13.7%밖에 되지 않는 유해밖에 돌아오지 못했다.
소련은 전쟁 중 공식적인 수치로 2,900여만 명이 사망했으며, 이는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2차 세계 대전 사망자 5,000만 명의 60%에 달하는 수치다. 인구가 적지 않았던 40년대 일제강점기하의 한반도 인구가 2,500만 명, 세계 인구는 25억 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일반적인 인구를 가진 국가가 소멸할 정도의 인적 피해를 입은 것이다.
소련에서 동원된 남녀 3,450만 명 중 약 84%가 죽거나, 다치거나, 사로잡혔다. 민간인 약 2천만 명, 군인 약 1,128만 명이라고 하는데 이 수치라면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1941년 6월 22일부터 베를린이 함락되어 사실상 독일이 끝난 45년 4월 30일까지 '''하루 평균 민간인 약 1만 4천명, 군인 6,500명이 죽었다. 하루 평균 2만 명이 넘는 수치다.
역사학자 제프리 A. 호스킹(Geoffrey A. Hosking)에 따르면, 소련인은 높은 사망률로 인해, 1940년대 말의 젊은이는 적었고, 1939년 이후 소련이 예측한 인구인 4,500만-5,000만 명보다 적을 정도로 전체 손실은 높았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여초 현상이 대단히 심각하게 발생했는데 종전 후 소련 인구 중 10대 후반~40대 남녀 성비가 4:7이었다, 인구손실은 1950년대 베이비붐으로 대강 해결했지만 영향이 꽤나 오래 갔으며, 1930년대-40년대에 출생한 사람 가운데서 한창 자랐을 때 아버지 없이 자란 경우도 많다. 물론 오랜시간이 흐르며 여초현상은 대강 해결되었지만, 음주문화의 영향으로 현재도 러시아는 상당히 심각한 수준의 여초국가이다.
게다가 소련은 전쟁으로 모스크바 서쪽의 거의 모든 기간 설비와 공업 시설이 파괴되었으며, 농지와 마을, 인프라의 파괴도 심각했다. 도시 1,710개, 촌락 70,000여 개, 2,508개 교회, 31,850개 산업 시설, 4만 마일(64,373.76km)의 철도, 4,100개 철도역, 4만 개의 병원, 8만 4,000개 학교, 4만 3,000개 도서관이 초토화되었다. 집을 잃은 인원은 2,500만 명 정도였고, 약 국부의 1/3 이상이 손실되었다. 가히 멸망되지 않은 것이 정말로 기적인 나라 같다.
이처럼 나치독일은 소련에서 민간인 학살, 강간을 넘어 아예 그들의 공동체를 파괴하고 절멸을 시키려고 했다. 독소전쟁 동안 민간인만 하루 평균 1만 4천명, 도합 2천만명 이상 독일군에 의해 학살당했고, 심지어는 학살된 사람들이 한 곳에 묻혀서 해골과 시체로 지층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독일의 전쟁범죄는 심하고 차원을 달리 했는데 이는 단순히 나치독일이 슬라브 민족을 지배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그들 모두를 없애버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또한 수많은 소련의 여성들이 독일군에게 강간을 당했는데, 이런 소련군의 범죄를 다루는 독일 영화 베를린의 여인에서는 "독일군이 소련에서 한 일의 1/10만 소련군이 해도 독일인은 다 죽는다"는 대사가 있을 정도다.
소련군의 군사적 피해도 막대했다. 전차, 돌격포, 자주포만 9만 6500대를 손실했으며 3만 7000여대의 기타 기갑 차량도 손실했다. 항공기도 10만 2600대를 손실하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소련은 어마어마한 생산력으로 무기들을 계속 생산하고 거기다가 미국과 영국의 랜드리스를 통해 군사력과 전투력을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특히 우랄로의 산업 이전을 통해 소련 군수공장들은 안전하게 대규모의 전쟁 장비들을 생산할 수 있었고 연합군에게 전략 폭격을 두들겨 맞아 초토화되가는 독일의 군수 공업 역량보다 당연히 우위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러한 역량을 기반으로 소련군은 나치 독일에 대한 반격을 성공하다 못해 나치의 심장부 베를린까지 점령할 수 있게 되었다.
나치 독일에게는 이 전쟁은 말 그대로 파멸로의 행진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국방군 총 사상자 1,348만 명 중 80%인 1,075만 명이 소련과의 전쟁에서 사상당하거나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추산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약 320만 명으로 추산되는 독일군 전사자 및 기타 사망자 중에 280만여 명이 소련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거나, 포로 수용소에서 죽었다.
후술되는 전쟁범죄 항목에 소련측 만행도 독일이 까발린게 아니라 나중에 미국, 영국의 역사학자들이 밝혀낸 것들이며 소련측의 만행은 정작 독일도 굳이 꺼내려고 하지 못했던 민간사안이었던만큼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채 묻어갔기에 조사하면 더 나올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생긴 비극이라 당시 연합군측에서도 소련군의 범죄에 동조적이었다. 나치패망 얼마전 힘러가 휴전 특사로 소련군의 만행을 연합군에게 알리며 소련군 통제를 부탁했으나 당시 영국군 몽고메리가 독일이 소련에 저지른 만행을 언급하며 힘러의 제안을 비웃으며 거절했을 정도.
서독 정부 통계청에선 1958년, 조사 결과 222만의 독일 민간인이 소련군의 군사작전, 전쟁범죄, 강제노동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다른 공식 통계 자료에서도 최소 200만 이상의 독일 민간인이 소련군에 의해 살상당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는 연합군이 독일 본토 항공전으로 살상한 독일 민간인 63만명보다 훨씬 많은 수치이다. 이외에도 전후 NKVD가 운영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4만 3000명의 독일인이 사망했다. 거기다가 연합군의 전략폭격으로 인해 이미 초토화되었던 베를린을 비롯한 동부의 주요 독일 대도시들은 소련군의 어마어마한 준비 포격 세례와 공습 그리고 소탕 작전에 의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쾨니히스베르크는 도시의 90%가 파괴되고 소련군에 의해 독일 주민들이 쫒겨나야했다. 베를린은 도시의 80%가 파괴되고 인구도 반토막이 나야 했다. 이외에도 슈테틴은 도시의 65%, 산업시설의 95%가 파괴되고 다른 동부 독일 도시들도 연합군의 폭격과 소련군의 군홧발 아래에 전체 도시의 50~80%가 초토화되었다.
군사적 손실도 막대했다. 소련 측 통계자료에 의하면 독일군은 전차 4만 2000대와 자주포/대전차포/박격포 37만 9400문, 항공기는 7만 5000대를 상실해야 했다. 독일측의 공식 자료에서도 1941년 부터 1944년 까지 3만 3000대의 기갑 차량이 손실되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장비 손실량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이러다보니 안그래도 비효율적이고 소련에 비해 다품종 소량 생산 일색이었던 독일의 전쟁 수행능력에 일격을 가했으며 거기다가 연합군의 전략폭격으로 군수공업 단지가 초토화되면서 수 많은 장비를 잃어도 또 그만큼 생산해 회복하는 소련과 달리 독일의 장비 손실은 결코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하고 서부전선이 형성되자 독일은 양면 전쟁을 감당하지 못하고 몰락할 수 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