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교향곡, 비틀스와 퀸의 팝송, 조용필과 BTS의 노래들. 이 모두는 조성음악이다. 서구화된 나라의 현대인들이 듣는 음악 중 99%가 조성음악일 것이다. 조성음악은 조성이 없는 음악(무조음악)과 비교하면 듣기에 편하다.
▎오늘날의 보헤미아 지역은 관광지로 유명하다.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의 음들이 다장조 음계를 구성한다. 다장조 음계를 비롯해 사장조, 바장조 등 여러 조의 음계들로 음악이 만들어진다. 조(調, key)는 어떤 곡의 세계로 인도하는 열쇠다. 다장조 음악의 열쇠는, 베토벤의 것이든 이문세의 것이든, 도, 레, 미, 파, 솔, 라, 시의 일곱 음으로 만들어졌다.
모차르트가 [교향곡 41번 다장조]에서 이 음들로 선율과 화음을 만들어냈다. 모차르트가 41번째 쓴 이 교향곡은 다장조라는 열쇠로 열려 자신의 음악적 세계를 드러낸다. 그 세계의 기조는 특정한 조, 즉 다장조의 특성이다.
여러 조의 음계가 있으며, 각각의 조는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각 조가 저마다 다른 특성들을 가진다는 점을 종합하면, 모든 조가 공통으로 가지는 일반적 특성, 즉 조성(tonality)을 말할 수 있다.
대부분의 고전음악과 거의 모든 대중음악은 각각 특정 조로 쓰였고, 그래서 저마다의 특성들을 가지지만, 그 조가 무엇이든 조라는 기제에 의해 쓰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공통점이 조성음악이다. 여러 조와 조 기반 조성음악은 근대 서구 사회의 산물이다.
이해하기 어렵다면, 한국전통음악을 들어보시라. 국악이라고 불리는 한국전통음악에는 피아노 같은 서양악기가 없다. 서양 악기가 잘 내는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의 음들을 가야금이나 거문고로 낼 수는 있다. 따라서 최근 작곡된 창작 국악 중 다수는 이 음들을 사용한다.
하지만 조선시대 국악에는 이 음들이 쓰이지 않았다. 궁, 상, 각, 치, 우 혹은 황, 태, 중, 임, 남의 이름이 붙은 음들로 구성된 5음음계가 쓰였다. (도, 레, 미, 파, 솔, 라, 시의 음들로 구성된 음계는 서로 다른 7개 음들로 구성되기에 7음음계라고 부른다.) 이런 국악은 조성음악이 아니다. 굳이 범주화하자면 비(非)조성음악 혹은 전(前)조성음악에 해당한다. 이런 음악을 들어보면 느낌이 다를 것이다.
20세기에는 무조음악(無調音樂, atonal music)도 쓰였다. 무조음악에는 조가 아예 없다. 쇤베르크 같은 현대 작곡가들의 무조음악을 들어보면 한국전통음악과도 다르고 비틀스의 노래들과도 또 다르다. 사람마다 이런 무조음악에 다양한 느낌을 가지겠지만, 대체로 생소함과 함께 불쾌감마저 느낄 것이다.
모차르트의 [교향곡 41번 다장조]는 서양의 관현악단, 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서로 다른 악장 4개로 구성된 소나타다. 각 악장에서 소개되는 선율,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화음들이 다르다. 그 밖의 여러 차원에서도 각 악장은 서로 다르다.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이들은 서로 다른 세계들이 계속 제시만 되는 음악에는 질서정연한 구조가 없다고 생각했다. 구조, 즉 전체를 아우르는 거시적 틀이 있어야 하며, 그것은 감상자에게 잘 인지되어야 한다. 모차르트의 [교향곡 41번 다장조]에서는 다장조 조성이 그런 틀이다. 베토벤의 [교향곡 6번 바장조]에서는 바장조 조성이 그런 틀이다.
[교향곡 41번 다장조]의 많은 부분이 다장조 조성에 따라 음악이 작곡됐다. 특히 1악장과 3악장, 4악장은 다장조 조성으로 시작해 (중간에 조바꿈이 되더라도 다시) 다장조 조성의 음악으로 마감한다. [교향곡 6번 바장조]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모차르트의 한참 선배였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서부터 베토벤, 슈베르트 등을 거쳐 브람스 등에 이르기까지 교향곡과 소나타를 비롯한 여러 기악 음악에서 특정 조성이라는 틀이 늘 존재해왔다. 오페라를 제외한 성악곡들에서도 조성이라는 틀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근대 이후 서양의 예술적 작곡가들은 조성이라는 틀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어떤 음악을 특정 조 기반 조성음악으로 만든다는 관념은 비틀스, 아바, 마이클 잭슨, 신승훈, 소녀시대, 방탄소년단(BTS) 등의 노래에도 녹아들어 있다. 비틀스의 [Yesterday]는 처음부터 끝까지 바장조로 쓰였고, 아바의 [Dancing Queen]은 가장조 음악이다. “너는 장미보다 아름답진 않지만…”으로 시작하는 신승훈의 [미소 속에 비친 그대]는 나장조 음악이다. EXO의 [으르렁]은 지금까지 소개한 음악과 달리 장조가 아닌, 나단조 음악이다.
아바의 [Dancing Queen]을 바장조로 노래하면 어떨까. 바장조의 [Dancing Queen]은 원래 조의 [Dancing Queen]과 모종의 특성을 공유하지만, 다른 특성도 생겨났다. 아바는 너무 높아지거나 너무 낮아진 바장조의 [Dancing Queen]을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억지로 부른다고 해도 듣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느낄 것이다. 다른 노래들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말러의 교향곡과 '보헤미안 랩소디'
▎1618년 당시 신성로마제국 내 보헤미아 왕국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지역). 신성로마제국은 나폴레옹에 의해 붕괴된 후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20세기 후반부터는 체코 영토가 된다.
어떤 음악이 어떤 조로 시작하여 다른 조로 끝나는 아주 드문 경우가 있다. 이런 음악에는 특정 조로 지속되는 구조적 틀이 없다. 그것은 조성으로서의 질서가 약화된 음악이다. 내적 일관성 혹은 정합성(coherency)에 대한 지향이 결여된 이런 음악은 자유로우나 불안한 느낌을 줄 수 있다. 이런 음악이 있다.
클래식에서는 구스타프 말러(1860~1911)의 교향곡들이 대표적이다. 팝에서는 [보헤미안 랩소디]가 대표적이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내림 나장조로 시작해 수차례 조바꿈이 있은 후 바장조로 끝난다. 말러의 [교향곡 2번]은 다단조로 쓰인 1악장에서 출발해 여러 다양한 조성을 거친 후 마지막 악장에서 내림 마장조로 마감한다. 이 곡들은 조성의 관점에서만 보면 어수선하거나 다양하다.
그런데 조가 열쇠라고 했다. 이 말이 맞는다면 이 곡들은 패러다임의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말러와 [보헤미안 랩소디]의 작곡자 프레디 머큐리는 어떤 점을 공유하기에 이처럼 이상한 혹은 파격적인 음악을 썼을까. 말러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 사람으로서, 오늘날에는 체코의 한 지역인 보헤미아 출신이었다.
보헤미아 지방의 많은 사람이 15세기에 프랑스로 이주했는데, 그들 중 다수가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 프랑스인들은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며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하는 이들, 특히 집시들을 보헤미아 지역에서 온 보헤미안 사람, 즉 보에미앙으로 불렀다. 이후 이 프랑스어는 영국에 전해져 보헤미안(Bohemian)이라는 단어가 된다.
말러는 집시 출신은 아니지만 보헤미아 사람이고, 게다가 유대인이었다. 이스라엘이 1948년에 건국되기 전 대부분의 유대인은 국적 없이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살아갔다.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에도 이런 자유로움을 표현하는 가사들이 있다.
“easy come, easy go”(쉽게 왔다 쉽게 가는), “little high, little low”(가끔 들뜨거나, 가끔 풀 죽기도 하지), “Anyway the wind blows”(어쨌든 바람은 불고), “Goodbye, everybody - I’ve got to go”(모두들 안녕히, 나는 가야만 해요). 자유로운 느낌의 가사에, 출발할 때의 조와 다른 조로 끝나는 음악이 결합한다. 보헤미아 출신의 말러가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자유로움은 불안정성일 수도 있다. 말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삼중으로 고향이 없다. 오스트리아 안에서는 보헤미안으로, 독일인 중에서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세계 안에서는 유대인으로서. 어디에서도 이방인이고 환영받지 못한다.” 황갈색 피부에 양성애자로 영국에서 활동했던 프레디도 정신적으로는 보헤미안이었을 것이다. 비록 보헤미아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프랑스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집시 소녀](1879). 전통적 집시는 히틀러의 나치 치하에서 거의 절멸됐다. 오늘날의 집시는 인종이나 지역민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로 의미가 있다. 정착하지 않고 자유로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
김진호 안동대 음악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