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1일, 우리 나라가 2006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약체 몰디브에게 0-0 무승부를 기록하는 대이변이 일어났을 때 지구촌 반대편에서는 우루과이가 2006 월드컵 남미예선에서 '만년 꼴찌후보', 베네수엘라에게 홈에서 3-0으로 패배하는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 두가지 경기결과를 보면서 필자는 '움베르투 코엘류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과 후안 라몬 카라스코 우루과이 대표팀 감독의 처지가 비슷해지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베트남, 오만에 이어 3번째 쇼크를 안겨다 준 코엘류 감독과 '철벽요새'라고 불리던 센테나리오 구장에서 3골이나 내주며 완패한 카라스코 감독이 자국팬들과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은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으며 축구협회에서도 경질설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자리가 위태로워진 이 두 명 중 먼저 해임통보를 받은 것은 다름 아닌 카라스코 감독이었다.
카라스코가 해임통보를 받은 것은 베네수엘라 경기가 끝난 후 1주일만이었다. 4월 7일, 우루과이 축구협회의 고위관계자 5명은 만장일치로 카라스코의 해임안을 통과시키며 그의 경질을 발표했다. 그가 처음으로 임명될 때가 작년 4월 23일경이었음으로 그는 결국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는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카라스코의 체제의 우루과이를 살펴보며 과연 그의 도전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왜 실패하였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 카라스코가 지휘봉을 잡기까지 1957년생인 후안 라몬 카라스코는 선수시절,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우루과이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스페인, 브라질, 베네수엘라, 멕시코 리그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리그 경험이 있는 축구인이었다. 그의 선수생활은 무려 43살이 넘어서도 계속되었는데 2000년 우루과이 2부리그에서 갓 올라온 작은 클럽 로차 FC의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바로 2002년 우루과이 1부리그에 있던 중소클럽 페닉스의 감독을 맡으면서이다. 매년 중하위권에 있던 이 팀을 카라스코는 순식간에 리그 3위권이내로 진입시킨 뒤 2003 남미 클럽대항전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진출권을 따낸다. 특히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예선전에서 멕시코의 명문팀인 크루스 아술을 6-1로 대파하면서 카라스코의 인기는 절정에 달한다.
카라스코가 페닉스의 지휘봉을 잡으면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을 무렵, 우루과이 축구협회는 공식 감독자리는 비어있었다. 우루과이에게 월드컵 티켓을 안겨다 주었던 '뚱보' 빅토르 푸아가 세네갈과의 마지막 조별예선 경기를 치른 이후 사임을 선언하고 물러났기 때문이다. 감독이 공석인 상태에서 2003년 2월 칼스버그컵에 나가기도 했던 우루과이는 이후 후보들을 조금씩 좁혀 나가기 시작한다.
당시 언론들은 유력한 감독 후보로 우루과이 명문팀 나치오날 감독을 역임했던 우고 데 레온, 2002년 아르헨티나의 명문 보카 후니오르스 감독을 맡았던 오스카 타바레스, 전 파라과이 대표팀 감독 세르히오 마카리안, 그리고 카라스코를 지목했다. 경력이 화려한 타 후보들에 비해 본격적인 지도자 경력이 2년도 채 안되는 카라스코가 우루과이 국가대표 감독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은 당시 그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말해주는데 식을줄 모르던 카라스코 열풍은 결국 4월 26일 우루과이 축구협회로 하여금 그를 새 감독으로 임명하게 만든다.
카라스코가 감독으로 임명되었을 때 팬들은 기대반 우려반의 심정이었다. 중소클럽이었던 페닉스를 상위권으로 진출시키면서 보여준 화끈한 공격축구가 기대라면 감독 경력 2년에 불과한 풋내기가 우루과이 대표팀 감독이라는 중책을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 또한 공존할 수밖에 없었다.
2006 독일 월드컵 남미예선을 경험은 부족하나 현재 상승세를 타고 있는 인물에게 맡기기로 한 우루과이 축구협회의 선택은 당시로 보았을 때는 실로 엄청난 도박이었다. 카라스코가 임명되었을 때 한 우루과이 기자는 "카라스코는 우루과이 축구역사상 가장 성공한 감독이 되거나 가장 실패한 감독, 둘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 카라스코의 포부와 변화 카라스코가 감독으로 임명되자 축구계에서는 너도나도 우루과이 축구에 큰 변화를 예상했다. 흔히 짠물축구로 대변되는 우루과이는 플레이가 전반적으로 거칠며 무차별 공격이 아닌 상대방의 약점만 집요하기 찌르는 공격 스타일을 보여왔다. 취임일성에서 카라스코는 이러한 전통을 180도로 바꿀 것을 공언하며 우루과이를 화끈한 공격축구를 구사하는 팀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카라스코의 변화는 여기저기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는 일단 예비 명단을 발표할 때부터 공격수부터 줄줄이 나열했다.(한때 공격수만 11명이 포함된 명단을 발표하기도 했다.) 4백과 3백을 혼용하되 전방에 3톱을 세우고 그 밑에 한명의 공격형 미드필더를 세우는 전술, 즉 매우 공격적인 3-3-1-3과 4-2-1-3을 사용할 것을 예고하기도 했다.
선수 선발에서도 국내파 선수들에게 좀 더 관심을 기울이겠으며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 선수는 경험과 실력이 뛰어나도 선발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독단적인 카리스마와 직설적인 언행으로 알려진 카라스코의 불같은 성격은 이러한 변화를 실행하는데 가장 큰 힘이었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결과에서도 잘 나타난다. 빅토르 푸아 체제 (2001년 2월~2002년 6월)에서 26경기 33득점(경기당 1.3골)을 했던 우루과이는 카라스코 체제에서는 (2003년 4월 ~ 2004년 4월) 13경기(올림픽 대표팀 경기 제외) 29골을 기록하며 경기당 2.2골이라는 한층 향상된 공격력을 보여줬다. 일단 카라스코는 자신의 말은 확실히 실천한 셈이다.
초기 성적 또한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다. 첫 데뷔전인 한국과의 원정경기에서 2-0의 승리를 거둔 카라스코는 월드컵 예선에서도 파라과이에 1-4로 패할 때까지 5승 1무 1패라는 호성적을 거뒀다. 특히 월드컵 남미예선 첫 상대였던 볼리비아에게 다섯골을 뽑으며 완승했을 때 우루과이는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우루과이에서 홈경기에서 5골을 넣은 것은 1999년 코스타리카전 이후 약 4년만의 일이었다.
▶ 카라스코가 내리막길을 걸었던 이유 그러나 초기 거둔 이러한 호성적에도 불구하고 카라스코는 결국 해임당하고 말았다. 대부분 감독의 경질 사유는 성적이지만 카라스코의 경우에는 성적 이외의 크고 작은 여러문제가 조금씩 쌓이다 베네수엘라전 패배로 한꺼번에 겉으로 표출된 것이 원인이었다.
물론 이전까지 아홉번 경기를 가져 한번도 패하지 않았던 베네수엘라전 패배의 충격도 컸지만 이것이 실제 감독 경질로 승화되기까지는 크게 세가지 이유가 있었다. 카라스코가 이 세가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우루과이 대표팀 감독은 카라스코였을지 모른다.
우선 첫 번째 실수는 선수 선발과 기용에서 축구팬들의 반발을 너무 많이 샀다는 점이다. 부임 초기 카라스코는 파비앙 카리니, 파울로 몬테로, 왈테르 판디아니, 알레한드로 렘보, 다리오 로드리게스, 구스타보 바렐라 등 한일 월드컵 대표팀의 주축 혹은 유럽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는 선수들을 제외한 대신 마르셀로 소사, 마르틴 리게라, 헤르만 오르노스, 카를로스 부에노, 루이스 로메로, 알레한드로 라고, 구스타보 무누아 등 당시만해도 자국 리그에서 활동했던 선수들 위주로 팀을 구성했다. (이들중 소사, 리게라, 오르노스 등은 시즌 후 유럽진출에 성공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좋은 선수들을 제쳐두고 팀을 구성한 카라스코에게 팬들은 당연히 궁금증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유럽파를 뽑았더라도 클럽에서 벤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선수들이 대표팀에서 선발 출장하는 사태가 생기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표팀의 선수 구성은 비교적 안정을 찾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버렸다.
경험있는 베테랑들을 놔두고 신예 파블로 무노스를 주장으로 임명하며 팀 분위기를 묘하게 만들기도 했으며 거친 플레이를 지양한다는 이유로 상대 선수에게 거친 반칙을 가하거나 경고를 받으면 즉시 해당 선수를 교체하는 다소 지나친 처사를 보인 것도 안팎의 반발을 샀다. 팬들의 이해 수준을 넘어선 급격한 변화를 추구한 카라스코의 이러한 행동들은 대표팀과 자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팬들의 지원은 고사하고 비난의 강도만 커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두 번째 실수는 카라스코 본인의 지나친 자만심이다. 히딩크 감독도 언젠가 한번 얘기했지만 아무리 강팀이라도 자만심에 빠지면 제대로 된 경기를 하기 어렵다. 하물며 남미 중위권팀인 우루과이의 수장이 자만심이 빠져있으니 그 결과는 뻔할 수밖에 없다. 카라스코는 가끔 정도를 넘어선 발언으로 팬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데 브라질전을 앞두고 상대 감독에 대한 도발이 목적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파레이라보다 축구를 더 잘안다."라는 발언으로 남미 전체에 파장을 가져오더니 나중에는 자신을 가르켜 세계 20위 안에 드는 감독이라 자화자찬하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말 뿐 아니라 행동에서도 그의 무례함은 똑같았다. 예정된 기자회견에 불참하기를 밥먹듯이 했으며 기자들의 질문에도 무성의한 답변을 예사로 하며 언론을 적으로 돌리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자신의 경질을 가져온 베네수엘라와의 경기 전날에는 선수단 모임조차 대충 끝낸 후 신문을 읽으며 소일하고 있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남미에선 드물게 야구의 나라로 알려져있지만 최근 일부 선수의 귀화 등으로 전력 보강에 힘쓰고 있는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감독부터가 이렇게 풀어져 있었느니 우루과이가 졸전을 펼친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루과이의 2004 올림픽 남미예선 탈락도 빼놓을 수 없는 잘못이다. 재정이 넉넉하지 못한 남미의 대부분 나라가 그러하듯이 카라스코 역시 국가대표팀 감독과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겸임하였는데 비록 브라질, 칠레, 파라과이라는 강호들과 한조에 편성된 불운이 있긴 했지만 베네수엘라 등 약체를 상대로도 단 1승도 거두지 못하였고 공격축구를 표방했으면서도 단 3골에 그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월드컵 남미예선 4라운드에서 브라질 상대로 패배의 위기에 몰려있다가 극적으로 3-3 무승부를 만들어내며 파라과이에게 당한 1-4 패배의 치욕을 씻었던 카라스코의 인기도 올림픽 본선 진출 실패로 하향세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이후 벌어진 자메이카와의 평가전에서 0-2로 패하면서 결국 경질을 피하지 못하였다.
지금까지 언급한 경기 외적인 요인 외에 경기 내적으로는 공격을 강조한 탓인지 우루과이 특유의 강인한 수비력이 실종된 것도 짚고 넘어가야할 대목이다. 어느 구기 종목이든 공격과 수비, 어느 한쪽만 뛰어나서는 결코 좋은 팀이라 할 수 없다. 공격과 수비의 균형과 공수 전환이 매끄럽게 이뤄지는 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카라스코는 클럽 감독 시절에도 이미 수비가 약하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페넥스팀은 리그 막판 3경기에서 10골을 헌납하기도 했다.
카라스코 재직 당시 우루과이 대표팀 수비진은 전술적인 사안, 즉 3백 혹은 4백 같은 문제와는 무관하게 집중력 저하가 실점과 직결되는 모습이었다. 물론 이러한 부분은 감독보다는 선수들이 비난을 받아야 할 사안이지만 선수 선발과 기용에 대한 최종 책임은 감독에게 있으며 특히 수비에게 필요악이라 할 수 있는 거친 플레이와 반칙을 지나치게 금한 이가 다름아닌 카라스코라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루과이가 대량실점한 경기인 파라과이전과 베네수엘라전에서 수비진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는 골장면만 봐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실점 상황이 골키퍼 혹은 수비와의 1:1 상황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후반 체력저하와 함께 집중력이 흔들리는 모습이 두드러졌는데 파라과이전에서 후반 20분만에 세골을 내주는 등 한번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는 양상을 띄었다. 선수들에게 안정을 줄 수 있는 리더의 부재도 아쉬운 대목이다.
▶ 글을 마치면서 한일 월드컵에서 각각 한국팀과 브라질팀의 성공과 함께했던 히딩크나 스콜라리의 사례도 있긴 하지만 카라스코의 실패를 보면서 역시 한나라의 고유한 축구스타일을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고정관념을 깨고 우루과이 축구를 바꾸려 했던 카라스코의 도전정신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영국 BBC에서 축구칼럼니스트로 활동중인 팀 빅커리(Tim Vickery)는 자신의 칼럼인 'Uruguay face Brazil crunch'에서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카라스코의 시도를 많은 감독들이 따라한다면 축구는 보다 흥미로울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흥미롭고 재미있는 축구가 언제나 축구팬들을 만족시킬 만한 결과를 도출하진 못한다는 것이다. 수비 축구와 공격 축구로 성공과 실패를 맛본 축구 역사상 숱한 팀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