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란 원래 그런 것’ 보여준 148회 디 오픈
제 148회 디 오픈이 열린 북아일랜드의 로열 포트러시 골프코스는 당대 최고의 골프영웅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추락의 아픔을, 많은 뭇별들에겐 기회의 문을 열어 희망과 용기를 안겨 주었다.
디 오픈이 왜 디 오픈인가를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 로열 포트러시는 골프의 천태만상을 비장함이 담긴 파노라마로 펼쳐 보였다.
비와 바람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진행된 2라운드에서 언뜻언뜻 화면에 잡힌 타이거 우즈의 표정은 더이상 비참해 보일 수 없었다. 첫날 7오버파로 컷 통과가 회의적이었음에도 빗속의 갤러리들은 당대 최고의 골퍼에게 박수와 환호를 아끼지 않았으나 우즈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첫 홀 버디를 시작으로 6, 10, 11번 홀에서도 점수를 줄여나가면서도 어쩔 수 없는 미스 샷으로 스스로 전날의 7오버파를 없었던 일로 돌리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그의 얼굴엔 북아일랜드의 먹구름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다.
우즈는 2라운드에서 1언더파를 쳤으나 합계 6오버파로 컷 탈락했다. 4월 첫 메이저인 마스터스에서 우승한 그는 PGA 챔피언십 컷 탈락, US오픈 21위, 마지막 메이저 대회인 디 오픈에서 컷 탈락으로 올해의 메이저 레이스를 마감하고 앞으로의 골프 여정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만만찮은 숙제를 떠안았다.
북아일랜드의 영웅 로리 매킬로이의 컷 탈락은 더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68년 만에 디 오픈을 개최한 조국 그것도 고향에서 개인 통산 다섯 번째 메이저 사냥에 나선 세계 랭킹 3위 매킬로이의 컷 탈락은 비누방울이 터지듯 허무했다.
우승 확률은 가장 높았고 집에서 30분 거리의 로열 포트러시 골프코스는 그의 홈코트였다. 16세 때 61타를 쳐 코스레코드를 세우기도 했으니 그와는 천생연분이나 다름없었다.
홈팬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으며 첫 홀 티잉그라운드에 올라설 때까지만 해도 그는 이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을 것이다. 골프코스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꿰고 있는 그가 첫 홀에서 천길 낭떠러지로 추락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1번 홀 양쪽이 OB구역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그는 이 홀의 희생양이 되었고 결국 컷 통과에도 실패했다.
양쪽 OB구역을 왔다갔다 하다 쿼드러플 보기를 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무리하다 마지막 홀에서는 트리플 보기를 내고 8오버파 79타라는 부끄러운 스코어로 1라운드를 마쳤다.
1라운드를 마친 뒤 “나를 때려 주고 싶다”고 스스로에게 분노를 표출했던 그는 2라운드에서 심기일전, 7개의 버디(보기 1개)를 잡으며 데일리 베스트 스코어를 만들었지만 1라운드의 8오버파 덫을 벗지 못하고 한 타 차이로 컷 통과에 실패했다.
홈팬들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매킬로이에게 기립박수를 보냈고 그도 웃음으로 홈팬들에게 답례했지만 첫 라운드에서 그가 겪은 추락은 평생의 회한(悔恨)으로 남을 것이다.
얼핏 이번 디 오픈이 유독 타이거 우즈와 로리 매킬로이에게 가혹했던 것으로 비칠 수 있으나 리더보드를 살펴보면 ‘골프란 원래 이런 것이구나’하고 깨닫게 된다.
우즈와 매킬로이의 컷 탈락을 상상하지 않았듯 필 미켈슨, 아담 스콧, 이언 폴터, 브라이슨 디솀보, 잭 존슨, 마쓰야마 히데키, 게리 우드랜드, 제이슨 데이 등 우승후보들의 컷 탈락도 믿기지 않는다.
2001년 디 오픈 우승 등 PGA투어 통산 13승으로 한 때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던 데이빗 듀발(47)은 첫날 7번 홀(파5)에서 바닥없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그는 첫 번째 공과 두 번째 공을 잃어버렸고 남의 공을 치는 실수를 하는 등 타수와 벌타 등을 합쳐 9오버파 총 14타를 쳤다. 1, 2 라운드 합계 27오버파를 쳤으니 최하위는 당연히 그의 차지였다.
덕분에 골프팬들은 ‘노뉴플 보기(Nonuple bogey)’라는 생소한 용어를 알게 되었지만 듀발로서는 이런 악몽이 없을 것이다.
2011년 PGA투어 카드를 잃고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는 그는 이 대회 우승자 자격으로 참가했다가 악몽에 휘둘렸으니 골프의 무상함이 그의 가슴을 훑었을 것이다.
유러피안 투어 통산 11승의 괴짜 골퍼 미겔 앙헬 히메네스(55·스페인)는 13오버파로 컷 통과에 실패, 골프 팬들을 아쉽게 했다.
꽁지머리에 시가를 사랑하는 그는 배불뚝이에 변칙적인 스윙으로 가장 골프선수답지 않으면서도 롱런 하는 불가사의함으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골프에선 골프 팬의 사랑도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늘이 있으면 양지도 있는 법.
2라운드 현재 공동 1위인 J.B. 홈즈, 셰인 로우리를 비롯해 토미 플리트우드, 리 웨스트우드, 카메론 스미스, 저스틴 로즈, 브룩스 켑카, 조던 스피스, 존람, 맷 쿠차, 더스틴 존슨, 웹 심슨, 헨릭 스텐슨, 리키 파울러, 잰더 쇼플리 등 그럴만한 자격과 이유, 열정이 있는 선수들이 컷을 통과한 것은 팬들에겐 큰 위안이자 희망이다.
특히 누구나 스윙을 닮고 싶어 하는 남아공의 어니 엘스(49)의 컷 통과는 아마추어들에겐 희망의 불빛이다. 큰 키에 매력적인 중년 신사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그는 여전히 아마추어 골퍼들이 꿈꾸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8명이 출전한 한국 선수 중에는 안병훈(2언더파), 박상현(1언더파)이 컷을 통과했고 마흔다섯에 디 오픈은 물론 유럽 땅을 처음 밟은 황인춘도 공동 58위(1오버파)로 컷을 통과, 생의 절정기를 만끽하고 있다.
‘골프에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디 오픈의 나머지 라운드에서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