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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락원(城樂園).
..........성락원(城樂園)................
서울 성북구 성북동 조선 후기 정원.
지정면적 : 1만 4407㎡(명승 제 35호)
성락원은 뒤에 산등성이를 등지고
좌우에 청룡·백호 산줄기 벌려선 형국
입구에 2 계류가 모이는데 山門 같은 계곡.
계류 암벽에 새겨진.,雙流洞天(쌍류동천)각자.
이궁(離宮)은 태자궁(太子宮)’이나
‘세자궁(世子宮)’을 달리 이르던 말.
성락원은 조선황실.,'마지막 태자궁'.
'이궁(離宮)' 또는 '별궁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 3. 30 ~ 1955. 8. 16)은
조선 왕족, 대한제국 황족 종실이며 고종의 다섯째 아들.
고종 후궁 귀인 장씨(貴人 張氏) 소생으로 본관 전주(全州).
휘는 강(堈)이며,
초명 이평길(李平吉),
호는 만오(晩悟)이다.
성락원은 조선 철종때 이판 심상응의 별장이었다가
그후, 35년간 의친왕(義親王)이 이궁(離宮)으로 사용.
의친왕 이강(1877. 3. 30 ~1955. 8. 16)은 조선의 왕족,
의친왕 이강의 망국의 한이 깃든.,성락원.
성락원은 계류를 중심으로 좌청룡, 우백호 산세.
지금은 좌청룡 산세는 옹색하게 유지되고 있지만
우측은 외국 대산관이나 부호들의 주택지대로 변모.
옛 시문에 나오는 옛 모습의 ‘청산일조(靑山壹條)’나
‘청산수첩(靑山數疊)’ 노송 숲은 현재 찾아 볼 수 없다.
성락원(城樂園)으로 가는 길.
한양도성 사소문 중 하나 동소문(혜화문)을 나서면
성북천이 흐르는데 삼선교 아래를 흐르는 개울이다.
.....................성북천(城北川)....................
서울 성북구 성북동 북악산 동쪽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청계천으로 합류하는 지방하천.
일명 안암천(安岩川) 이곳은 1960년대까지 물이 맑아
복숭아를 재배하고 빨래터하던 곳이었으나, 1960년대 말
총 3.66km 구간에서 복개가 이루어져 수질이 악화된 곳이다.
지금은 삼선교 이남에서 복원을 진행하여
한성대입구역 앞부터 청계천 합류부까지가
생태하천으로 복원, 상류로 올라가면 선잠단.
............................................................
성북천은 현재 복개되어 차도로 바뀌었지만
이 시내를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선잠단이 위치.
다시 이곳에서 북쪽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성락원.
의친왕이 35년 동안 사용했던 별장이다.
조선시대 사대부가 소유했던 별장은 별서.
제왕의 별장은 별궁, 혹은 이궁이라 하였다.
상해임시정부로의 망명이 좌절된 후
평생 배일정신을 잃지 않고 일제의 감시 속에
이곳에 살던 의친왕은 어떤 소회에 젖어 있었을까?
조선시대 선잠단.
길상사에서 내려오는 길.,선잠단.
선잠단(先蠶壇)으로 가는 큰길을 따라 3분 정도 가면
오른쪽에 높은 축대에 홍살문이 서 있고 선잠단 설명판.
조선시대 왕이 농사짓는 시범을 보이고,
왕비는 누에 치는 시범을 보였다는 곳이다.
........................성락원 찾아 가는 길...........................
지하철 4호선 한성대역 6번 출구로 나와 50m 앞 버스정류장.
버스 2112번을 타고 세번째 정거장 홍대부속중고등학교 하차.
..................................................................................
성북동.,시인 조지훈 기념 건축조형물.
버스 정류장 옆 보도에는.,낮은 석축대 & 의자들.
설명판을 읽어보니.,詩人 조지훈 기념 건축조형물.
조지훈(趙芝薰)은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
조지훈은 이곳 성북동에서 32년간 살았다는데,
그 집은 헐리고 다세대주택이 들어섰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조형물로 그 사실을 대신한 것일까?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조지훈 시인의 대표적인 시로 알려진.,승무(僧舞)
이곳 조형물에는 '낙화(洛花)'라는 시를 실려 있다.
낙화(洛花) - 조지훈 詩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성락원(城樂園).
낙산 아래 계류 주변에 조성한.,별서정원.
두 개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에.,쌍류동천.
동천(洞天)이란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하는 어휘.
.
'심산유곡 경치 좋은 곳.,동천(洞天)
명승 제35호. 지정 면적 1만 4407㎡.
성락원 입구에 ‘雙流洞天(쌍류동천)’
글자가 계류 암벽 위에 새겨져 있다.
‘雙流洞天
쌍류동천 안으로는 용두가산(龍頭假山).
성낙원 내원(內園)을 감싼 인공조산(人工造山).
200∼300년 된 느티나무· 음나무· 참나무 숲이 울창.
내원에는 계류의 암벽 밑에 소(沼)를 조성.
장축 16m, 단축 약 12m이며, 물깊이 약 1.5m.
소 주위는 자연 암벽과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류 북쪽 암벽에는 인공 조성한 수로 및 3단폭포
제일 위 폭포는 낙차 15㎝로, 직경 30㎝, 깊이 15㎝
석구(石臼: 돌절구)에 떨어지며 중간폭포 낙차 30cm.
.
제일 밑단의 폭포는 낙차 150㎝로 가장 큰데,
직경 80㎝, 깊이 20㎝의 돌절구에 떨어졌다가
소(所) 안으로 넘쳐 흘러들어가는 풍경이 백미.
.
폭포로 떨어지는 3단의 물줄기는
생동감 있는 수경(水景)을 연출하고
고요한 계곡에서 요란한 물소리를 낸다.
‘靑山壹條
이 폭포 옆 자 새겨진 전서체 각자.,‘靑山壹條(청산일조)
소 서쪽 암벽에는 행서체 각자.,‘檣氷家 阮堂(장빙가 완당)’
'장빙가'란 '겨울에 고드름이 달린 집'으로 추사 김정희 필체.
檣氷家
.,‘檣氷家(장빙가)' 각자 자연바위 위에 “影碧池 海生(영벽지 해생)”,
“百泉會不流 爲沼碧闌頭 自吾得此水 少作江湖遊 癸卯五月 孫文鶴書.
(온갖 샘물을 모아 고이게 하니 푸른 난간머리에 소가 되었네.
내가 이 물을 얻은 뒤부터 강호놀이를 하네. 계묘 5월 손문학 씀).
'영벽지' 초서체 각자는 '해생' 호를 가진 사람이 해서체로 쓴 오언시.
계묘는 1843년(헌종 9)
성락원 소 명칭.,‘영벽지’
影碧池
'영벽지' 각자 위에 또 하나의.,전서체 각자.
“明月松間照 靑泉石上流 靑山數疊 吾愛吾盧"
(밝은 달은 소나무 사이에 비치고
맑은 샘물은 돌 위에 흐르며 푸른 산이
몇 겹 싸여있어 나는 내 농막을 사랑한다)
영벽지 소 안에는 괴석 하나를 물 속에 배치하여 놓았으며,
이 영벽지 동쪽 언덕 위에 변형된 고가 한 채가 남아 있는데,
이 집은 원래 농막의 본채로 이강(李堈)이 살았다고 전해온다.
의친왕 이강.
이 집에서 숲 속의 돌계단을 오르면 또 하나의 못(池)
영백지 위에 있는데 못 동쪽에 ‘송석정(松石亭)’ 누(樓)
못 북쪽 계류가에 ‘松石(송석)’이란 각자가 있어 원래 이
못가 바위 사이에 큰 소나무들이 울창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못으로 흘러내리는 계류는 중간중간에 작은 폭포를 이루며,
상류에는 흘러내리는 물을 집수하는 기능의 못이 하나 더 있다.
성락원은 산의 계류를 이용하여 상·중·하에 3개의 연못을 만든 곳.
성락원 내에는 샘물도 있었다
지금은 주변이 많이 오염되어
식수로 사용할 수 없어 아쉽다.
.........................................
서울 성북구 성북동.,조선후기 정원(명승 제35호)
성락원 앞 계류 쌍류동천 안으로는 용두가산에 가려
성락원 안이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사적 제378 호.)
한성 사소문 중 동소문(혜화문)을 나서면.,성북천.
삼선교 아래 개울 복개 후, 현재 차도로 바뀌었지만
이 시내를 따라 상류로 올라가다 보면 선잠단이 위치.
이곳에서 북쪽 계곡을 오르면.,성락원.
의친왕이 35년 동안 사용했던 별장이다.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은 대한제국 황족 종실.
고종 후궁 '귀인장씨'의 소생으로 고종의 5男이며 독립운동가
본관 전주(全州), 휘 강(堈), 초명 이평길(李平吉), 호 만오(晩悟).
생모 귀인 장씨는 명성황후 질투로 궐밖으로 축출되었다.
의친왕을 낳고 1900년 숙원 추증, 1906년에 귀인(貴人) 추증.
의친왕은 유년기 윤치소, 이종, 권동진 등과 필운학당에서 수학.
1910년 한일합방 직후 친왕(親王)에서 공(公)으로 강등.
이강 공이 된 그는 국권 피탈 이후 주색에 빠진 폐인행세.
일제 감시를 피해 항일 투사들과 비밀 접촉, 독립 운동 지원.
1911년 11월 33인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11월 독립선언서 서명.
독립운동가 및 상해 임시 정부 지사들과 연락하며
망명 정부가 수립되면 황족으로서의 예우를 버리고
'일개 신민'(臣民) 자격으로 정부를 받아들이겠다 약속.
그해 상복을 입고 상하이로 가려다 일본 경찰에 잡혔다.
황실인사를 망명하게 하여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고자 한
대동단(大同團) 전협(全協)등과 탈출모의하여 대내외 화제.
도중 만주 안동에서 발각되어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당시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허용되었던
한반도 내 여행의 자유를 박탈 당하는 보복을 당했다.
의친왕은 상해 임시정부에 보낸 편지가 다음 같이 전한다.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임시정부에 참가
독립운동에 몸바치기를 원한다." - 의친왕 이강 -
1919년 재판에 회부된 이후, 일본으로부터 계속해서
도일 강요를 받고 끝까지 거절하고 저항한 배일 정신.
1940년 창씨개명령이 떨어졌을 때 일데 창씨개명을 거절.
1945년 광복 후, 11월 3일 환국한 임정 요인들과 면담.
김구· 김규식 등 그러나 해방후에 정치적 의사표현 삼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후, 황실을 배척한 대통령 이승만.
망국의 황자로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가
6·25 전쟁 피난후, 1952년 휴전 후 서울 귀환.
황족의 예우가 없는 조건으로 사동궁 별궁 거주.
1955년 8월 9일 기독교(천주교)로 개종,
병석에서 장면 부통령(요한)을 대부로 영세.
의친왕(세례명 비오)는 1955년 8월 16일 별세,
종로구 안국동 별궁에서 79살의 나이로 타계했다.
능은 부황인 고종황제의 능인 경기도 남양주군 미금읍
(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내 있는 의친왕묘(義親王墓)
1975년 생모 김금덕이 위독하자 귀국한 그의 5녀 이해경.
30년 넘게 아버지 의친왕의 복권운동을 추진했으나 실패.
의친왕 손자 이원은 황태손 이구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황태손 이구의 양자로 입적되어 대한제국 황실 수장을 계승.
..............................................................................
'마지막 황손'., 가수 이석.
별장이란 제2의 주택을 의미하는데
조선 사대부가 소유했던 별장은.,별서.
조선시대 왕의 별장은 별궁, 혹은 이궁.
의친왕은 상해임시정부로의 망명이 좌절된 후
평생 배일정신을 잃지 않고 일제 감시 속에 살던
의친왕은 이곳에 머무르며 어떤 소회에 젖었을까?
철종 때 이조판서 심상응(沈相應) 별서.,성락원(城樂園).
낙산 아래 계곡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계류가에 조성한 별서.
두 개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에 위치한다고 해서., 쌍류동천.
동천이란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하는 어휘로
심산유곡의 경치 좋은 곳에 붙여지는 명칭.
쌍류동천
성북동은 도성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계곡이 깊고 산수가 아름다운 선비들의 풍류처.
그들은 수려한 이 계곡에서 몸과 마음을 수양했다.
성락원은 서울 시내에 위치한 별서정원으로는
비교적 옛날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고정원이다.
대원군의 별장 석파정과 함께 대표적인 정원 유적.
성락원의 내원 자얀바위에 각자 ‘청산일조(靑山壹條)’
각자된 시문 중에는 ‘청산수첩(靑山數疊)’이란 글이 음각.
소나무로 울창하게 뒤덮인 성락원 일대의 산세를 표현한 글.
지금 주변 산야는 모두 고급주택들이 점유
성락원은 담장 안 정원으로 바뀐 상태이지만,
조선시대 '쌍류동천'은 '신선이 산다는 별천지'
현재 성락원은 동천 진입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다.
계곡이 모두 도시화되어 골목길을 올라가야 하기 때문.
하여, 담장으로 구획된 그 안의 별장만을 감상할 수 있다.
성락원은 크게 세 곳의 소정원 구역으로 구분된다.
쌍류동천(雙流洞天), 용두가산(龍頭假山)이 있는 전원,
영벽지(影碧池)와 폭포 내원, 송석(松石)과 못이 있는 후원.
성락원 정문을 통해 진입하면 처음 만나는 공간이 전원.
이곳에는 두 줄기의 계류가 하나로 모여 흘러내리는 계곡.
이 계곡은 과거에 차도를 만들어 깊은 도랑처럼 되어 있어
현재, 전원으로서의 옛 모습을 거의 느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근래에 차도를 폐쇄.
도로를 보행로로 고쳐지면서
옛모습을 많이 되찾게 되었다.
이곳 자연바위에 각자 쌍류동천.
옛날에는 어렵게 계곡을 거슬러 올라와
성락원을 출입하는 감동이 매우 컸으리라.
계류 옆 길을 따라 용두가산 안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신선의 영역 성락원의 비경이 펼쳐진다.
성락원의 후원에 해당하는 송석정 주변의 모습이다.
송석정은 해방 이후에 지은 정자로 규모가 확장되었다.
그 앞의 못은 아래 지형이 성토되면서 많은 변형이 발생.
내원은 계곡을 그대로 이용해 만든 계원(桂園).
상류 계류의 암벽 아래 조성된 소(沼)가.,영벽지.
폭포의 좌측 자연바위에는 전서체 각자.,‘청산일조’
소 서쪽 암벽에 ‘장빙가(檣氷家)’라고 쓰여 있다.
이는 겨울에 고드름이 달려 있는 집이라는 의미로
완당(阮堂)이란 호 옆에 새겨져 있는 추사 김정희 글씨.
영벽지를 중심으로 계원의 진수를 보여준다.
계원이란 계류가 흐르는 계곡의 자연을 바탕으로
약간의 수식을 가해 만든.,조선시대 별서정원 대표양식.
영벽지 동쪽 언덕 위에는 한옥이 있는데
원래 별서의 본채로 의친왕이 기거했던 곳.
이곳을 지나 숲속 돌계단 위에 또 하나의 못.
못의 동쪽에는 근래 지은 송석정(松石亭).
북쪽 계류가에는 ‘송석’이라는 각자가 있어
이곳에 큰 소나무들이 울창했음이 추정된다.
늙은 소나무가 푸른 가지를 드리웠을.,성락원 못가.
저무는 노을과 더불어 의친왕은 우수(憂愁)에 잠겼을듯.
상해임시정부 망명사건후, 일제가 줄곧 도일(渡日)을 강요.
의친왕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 지내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후 10년이 지난 1955년 망국의 황자로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
성락원에서 79세에 타계한 의친왕의 한과 숨결이 느껴지는 고정원.
의친왕
대한제국 고종 후궁으로 본관 덕수,
고종의 5황자 의친왕의 어머니이다.
궁인(宮人)으로 있다가 아들 의친왕이 10세 되던 해 사망.
1900년(광무 4) 9월 17일(양력) 숙원(淑媛)으로 증직되었고,
1906년(광무 10) 귀인(貴人)으로 증직, 초장지는 알 수 없으나
신해(辛亥) 1911년 10월 6일 고양군 화양 모진 2리로 이장하였다가,
1965년 도시개발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 권역 내로 이장.
다시 2009년 6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권역 내 후궁 묘역으로 이장.
'귀인 장씨'., 최후에 관한 기록.
세자(훗날, 순종)는 이미 후사를 이을 수 없는., 고질.
조선왕실에서는., 왕자 리강(李堈)의 득남을 기다렸고
왕세자의 대통를 이으려고 하자 이를 탄식한.,명성황후.
신묘( 辛卯, 고종 28년 ) 겨울에 이르러 주상 고종은
상궁 장씨 소생 리강을.,의화군(義和君)으로 봉하였는데
의화군 리강은 고종과 상궁(尙宮) 장씨(張氏 ) 사이에서 출생.
리강이 태어나니 명성황후는 성내어 날카로운 칼을 짚고
장씨 처소에 이르러 창에 칼 꽂고 외치며 왈, " 칼 받아라! "
장씨는 본래 힘이 세어 곧 한 손으로 칼자루 쥐고
한손으로 창을 밀치며 나가 엎드려 목숨을 애걸했다.
모발은 흩어져 구름처럼 드리워졌고 얼굴은 가려졌다.
명성황후는 이를 불쌍히 여겨 칼을 던지고 웃으며,
" 마땅히 대전의 사랑을 받아 지금 죽이기 불가하다.
그러나 궁중에 거처하지는 못한다. " 하며 장사를 불러
결박하고 음부 두쪽 살을 도려낸 후에 밖으로 내쫓았다.
장씨는 형제들에게 의지해 10년을 살며 고생하다가 운명.
- <매천야록> 갑오(甲午) -
....................나의 아버지., 의친왕.....................
이해경 지음, 도서출판 眞 1997. 6. 발행 서적에서 발췌.
아버지는 격동의 구한말 1877년 3월 30일(丁丑年 2월 16일)
북부 순화방 사재감(司宰監)에서., 고종황제의 5남으로 출생.
이곳은 원래, 상패계 자하동에 있는 범숙의(范淑儀, 철종 후궁)
금릉위 박영효와 결혼한 '영혜옹주'의 생모.,범숙의가 살던 궁(宮).
(의친왕의 생모는 당시 상궁이었고)
(훗날, 귀인이 된.,덕수(德水) 장씨(張氏).)
(고종이 상궁장씨 출산을 위해 이곳에 숨긴 것.)
(그러나, 민비는 자신의 처소에서 일하던 장상궁이 )
(고종황제의 애기를 낳은 것을 알고, 이는 자신에 대한)
(장상궁의 크나큰 배신(背信)이라 생각해 장상궁을 불러)
(칼로 찌른 후에 애기와 함께 궁밖으로 쫓아버렸다고 한다.)
(이후 장귀인은 그때 입었던 상처로 10년간 고생하다가 죽었다.)
유년시절 아버지는 외가에서 살며
외가 외삼촌들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한편, 민비가 왕세자(순종) 다음에 낳은 대군들이
모두 유아(幼兒)시절에 죽고 왕세자 역시 몸이 허약해
후사(後嗣)가 걱정된 민비는 고종황제께 말씀을 드려서
1891년 15세 의친왕을 궁궐로 데려다가 의화군으로 책봉.
한편, 의친왕이 궁궐에 들어올때 모시고 들어온 최(崔)고직.
그는 의친왕을 어릴 때부터 양육하다시피 한 분이었다고 한다.
그는 언제나 주방 가까이 있었으며 아버지가 찾으면 즉시 대령.
아버지께서 남기신 음식을 "황송해서 못버린다."며 먹었던 충복.
.....................................................................................
위에 인용한 기록은 의친왕 이강 공의
따님 이해경씨 저술 <나의 아버지 의친왕>
1) 의친왕이 태어난 시기와 장소는 고종실록에서조차
일체 언급이 나와있지 않으므로 이 기록이 옳을듯 하다.
2) 의친왕을 잉태하여 생산하던 시기에는 그녀는
궁녀의 신분에 불과하였는데 1900년 숙원의 첩지에서
한참 높여 귀인으로 책봉, 무덤 표석에는 "귀인 장씨지묘"
그 무덤 한동안 서삼릉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장귀인 무덤 옆에는 의친왕의 묘도 함께 있었다.
의친왕 표석도 없는데 귀인장씨 무덤의 푯말을 본
이해경 씨는 그 느낌을 기록으로 이렇게 밝혀 놓는다.
"하루는 부모님 묘소에 성묘를 하기 위해
사동궁의 다른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 의친왕이
잠들어 계신 서삼릉(西三陵)을 찾았다. 그러나 그때
나의 놀라움은 형용할 길이 없었다. 추운 겨울 날씨 탓에
묘소의 주변이 삭막하게 느껴졌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서삼릉은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며 아프게 했다. "
"그당시 묘소에는 봉분 두개가 나란히 있었는데,
오른쪽은 아버지 묘, 왼쪽은 할머니 장귀인 묘였다.
두분 묘 가운데 "장귀인"이라는 커다란 비석이 있었다.
왼쪽 묘 앞에만 상석(床石)이 하나 있었고,
석등(石燈)은 세 동강이로 나뒹굴고 있었다.
또한 아버지의 묘에는 아무런 표식(標識)이 없었고
그 묘가 바로 의친왕의 묘라고 설명을 듣지 않으면
도대체 누구의 묘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가매장이지만 모자를 부부처럼 모신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왜 되돌아와서 이 꼴을 보아야 하나?
이런 비참한 꼴을 보지 않겠다고 비겁하게
도망갔던 내가 아닌가?'라는 후회스러움이
가슴에 가득했으며,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 없는
우리 가족의 처지가 너무도 한스러워, 미국에 있는
직장일로 병원에 누워계신 생모에게는 마지막 인사도
못한 채, 미국으로 되돌아 가고 말았다......<이하 생략>...
<나의 아버지 의친왕> pp. 32~34 인용.
.......<축복받지 못한 탄생>이란., 의친왕 초기 생애.......
" .....의친왕의 생모 장씨는 원래 평민의 딸로 태어났으나
궁중에 들어가 상궁이 되었는데, 일찌기 민비의 양오빠인 민승호의
편에 서서 대원군을 실각시키는데 공을 세워 민씨 척족정권 아래에서
제법 권세를 누렸는데 한때 민비와 침식을 같이 할 정도로 가까이 지냈다.
그후, 임금의 아들(의친왕)을 낳게 되면서
민비의 질시(嫉視)를 받게 되었고, 마침내는
아들과 함께 궐에서 쫓겨나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
그래서 임금의 아들로 태어난 의친왕은
공식적인 인정을 못 받고 외가에서 자랐다.
이후 생모 장씨는 의화군이 의친왕으로 책봉되면서
1900년 숙원(종4품) 1906년 귀인(종4품)으로 사후 추존.
서울창경초교, 경동 중·고등학교를 나와
한국외국어대 서반아어학과에 입학했다.
1962년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우연한 기회에 미8군 가수 채용에 합격.
이듬해 워커힐에서 영어로 사회를 보며 팝송.
그뒤 가수로 데뷔하였고 주변의 반대에도
가정 생계를 꾸리기 위해 가수로 데뷔하여
'비둘기 집' 등 방송 출연 후 정규 음반 1,2집.
비둘기 집, 두 마음, 꽃집 아가씨 등의 곡이 유명.
1966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베트남 현지에서
폭탄 파편탄으로 어깨부상으로 병원치료를 위해 귀국.
그뒤 샌디애고 김병묵 한인회장 초청으로 1979년 미국 이민.
1989년 이방자의 장례식 이후 귀국했다.
2004년 10월에 전주 한옥마을 승광재에 입주.
2005년부터 전주대학교 사학과에 객원교수로 출강.
2005.1.30. 국민일보 -전주 김용권 기자.
지난해부터 전주에 정착한 이석(본명 이해석)
자신이 태어났던 서울 사동궁(寺洞宮)과 아버지
의친왕의 모습을 소개하는 글을 한 책자에 실었다.
‘내가 태어난 곳,사동궁을 그리며’
“어린 시설 궁궐 북쪽에 있는 감나무 위에 올라가 놀다
상궁들의 호된 질책을 받았고,셋째 공주인 해경 누님이
자주 들려주던 재미있고 익살스러운 농담이 기억에 남는다”
또 아버지 나이 62세에 태어나 어린시절 아버지의 어려운 눈매에
고개도 제대로 못 든 채 행동을 했고 조금만 뛰어도 상궁과 나인들이
“아니 되옵니다”라는 눈초리를 보내 몹시 답답한 궁중생활을 했다.,토로.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뒤 “아버지가 저녁마다 약주를 드시고
방바닥을 두드리며 ‘내가 죽어야지, 내가 없어져야지’라 말하시면
옆에 있던 어머니가 ‘전하,구들장 빠지겠습니다.고정하시와요’라고
말씀하시곤 했다”며 아버지의 나라 잃은 슬픔을 회고하는 글을 남겼다.
또 “어떤 때는 육혈포를 공중에 쏘면서
‘왜놈을 몰아내야지’라고 외쳤다”며 “가련하신
아버님의 자태가 지금도 기억에 뚜렷이 남는다”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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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동 성락원 별장과 안국동 사동궁도
1945년 해방 이후 모두 사라져 버렸고 6・25가 터지자
우리 식구들은 안국동 별궁(현 풍문여고) 뒤에서 피난생활”
그는 전주 전통한옥에서 관광객들에게 ‘조선 역사알기’
황실 다례 및 예법 익히기’ ‘전통궁중한정식 체험’ 를 비롯
전주의 역사와 전통을 설명하는 문화유산 해설사를 하고 있다.
2012년 6월 14일
2014년 4월 18일
2014.9.8.
첫댓글 옛날 중학교를 성북동 근처의 학교를 다녔는데...
성락원은 접해보질 못했네요...
매일 효제동에서 출발을 하여 서울대 법대 캠퍼스를 지나 혜화동 대법원장 사택앞을 지나
성북동에 있는 학교를 걸어다녔는데..그때문에 지금도 산에 다닐 수 있지 않나 생각되는군요..
대학때는 간송의 아들되는 분한테서 동양미술사를 배운듯하고...
대학 조교시절에는 대학원장님 따라 박물관장 하시던 최순우님을 여러번 뵙기도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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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락원은 사유재산이라 문이 잠겨있는.,미공개지역.
간송미술관도 문은 열려 있는데, 관리인이 출입 저지.
'낙산~ 성북동' 성곽길따라 볼거리 먹거리가 좋더군요.
낙산 벽화마을 생맥주. 성북동 연탄불고기.등
혜화동 돌쇠떡볶이집 화덕피자도 값싸고 푸짐.
길상사 점심공양(12:00~13 :00)이 정갈.
홍대산악회에서 번개모임으로도 좋을듯.
한번 동행을 하면서 옛 추억을 듣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