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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의 관직제도(官職制度)를 보면, ‘대륙(大陸)’이 보인다. [1]
[1차(次) 정리 분(整理 分)]
2023년 06월 13일
○ ‘옛 조선(朝鮮)’의 삼한시대(三韓時代)는 곧 “마한(馬韓)+진한(辰韓:秦韓)+변한(弁韓:卞韓)”등의 78개 나라가 경쟁(競爭)하던 시절(時節)을 말하는 것이고, 이어지는 삼국시대(三國時代)는 “고구려(高駒驪)+백제(百濟)+신라(新羅)”의 세 나라가 경쟁(競爭)하고 있던 봉건왕조(封建王朝) 시대(時代)를 말하는 것이다.
사실적(史實的)으로는 ‘사국시대(四國時代)’라고 보아야 한다. ‘가야(伽耶)=가야(伽倻)’【紀元, 前後(?)-562年】의 5∼7개의 작은 나라들이 낙동강(洛東江) 서(西)쪽 땅에 있었다고 해설(解說)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問題)”는 : 『삼한(三韓), 삼국(三國) 또는 사국(四國)이든 이 왕조(王朝)들이 어디에서 기원(起源)하고, 어디에서 흥성(興盛)했고, 어디에서 소멸(消滅)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게 핵심(核心)이다. 이걸 모르면서 역사(歷史)를 논(論)할 수는 없는 일이다.】
➊ 이를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에서 바라보면 : “낙동강(洛東江) 서(西)쪽의 큰 나라였던 마한(馬韓)【54∼55개국】과 낙동(洛東)의 진한(辰韓 : 秦韓)【12개국】, 또 변한(卞韓 : 弁韓)【12개국】사이에 끼어있는 조그만 땅에 6개 또는 7개 나라가 6 백년(百年)이란 오랜 세월(歲月) 동안 옹기종기 모여살았다”는 설명(說明) 자체(自體)가 웃기는 이야기다. ‘모순(矛盾)덩어리’라는 애기다.
➋ 이것을 ‘고전(古典) 원전(原典)’의 기록(記錄)에 따라 대입(代入)해 보면 : 『마한(馬韓)과 변한(卞韓 : 弁韓)과 진한(辰韓 : 秦韓)의 남(南)쪽 땅에 ‘가야(伽倻)’가 아닌“왜(倭)가 있었다.”』는 고전(古典)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은 뭐냐? 는 것이다.
‘6개 또는 7개 나라’가 6 백년(百年)이란 오랜 세월(歲月) 동안 옹기종기 모여살았다는 ‘가야(伽倻)=가야(伽耶)’는 어디로 사라져버렸나? 닭(鷄) 잡아먹고 오리발을 내미는 건가? 누구처럼!
【반도(半島) 땅에 이러한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은 없었다. 냉전(冷戰)의 산물(産物)인 열강(列强)들의 단합(團合)으로 태어난 ‘신생(新生)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 정권(政權)을 차지한 권력자(權力者)들이 권력쟁취(權力爭取)를 위해 ‘일제(日帝) 하수인(下手人)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인 매국사학자(賣國史學者)들과의 야합(野合)과 의무교육(義務敎育)이라는 달콤한 솜사탕 발림으로 무지몽매(無知蒙昧)한 국민(國民)에게 세뇌(洗腦)를 가한 것이다. 정권(政權)과 야합(野合)하였으니,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당한 것이다. 곧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의 “붓장난”에 놀아난 것이고, 정권(政權)은 권력장악(權力掌握)을 위해 적당(適當)히 이용(利用)해 먹은 것이다. 이건 지금도 진행형(進行形)이다.】
➌ 이러한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의 반도조선(半島朝鮮) 논리(論理)에, 원전(原典) 기록(記錄)을 대입(代入)해 보면 : 〈한반도(韓半島) 남부(南部) 땅에, 옛 삼한(三韓)과 왜(倭)가 땅을 맞대고, 옹기종기 사이좋게 모여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또 가야(伽耶)는 어디에 있었다는 말일까?〉 이들에 말에 따르면 : ‘오늘날의 경상남도(慶尙南道)와 전라남도(全羅南道)의 토박이들은 왜(倭)들의 후예(後裔)들이란 말이 된다?
또 낙동강(洛東江)과 마한(馬韓) 사이의 낙서(洛西) 땅에 살고 있는 토착민(土着民)들은 옛 가야(伽倻)의 후손(後孫), 후예(後裔)들인가? 도대체 뭔가?
➍ 낙동(洛東)의 동(東)쪽 땅, 금수(禽獸)를 생식(生食)하며 신장(身長)이 3, 4장(丈)에 이른다던 장인국(長人國)의 후손(後孫), 후예(後裔)들은 지금도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慶州) 동(東)쪽 수십(數十) 리 산악(山岳)과 계곡(溪谷) 속에서 살고 있는가?
➎ 또한 삼한(三韓)과 땅을 맞대고 수백(數百) 년(年)을 함께 살았던 ‘왜(倭)’는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시(當時)의 ‘왜(倭)’는 삼한(三韓)에 동화(同化)되었다는 것인가? 이러한 이들이 현세(現世) 21세기(世紀)의 ‘토착(土着) 왜구(倭寇)’란 말일까?
아니면 가야(伽耶)의 후손(後孫)들이라는 말일까? 누가 이러한 질문(質問)에 답해줄 수 있을까?
➨ “남북한(南北韓) 7,700만(萬) 누구도 이에 답(答)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두가 사이비(似而非) 사가(史家)들에 의해 놀아났기 때문이다. 놀아났다는 것 자체(自體)도 모르는데 무슨 재주로 이런 질문(質問)에 답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반도조선(半島朝鮮)을 주창(主唱)하는 학자(學者)들을 우리는 쓰레기,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라고 부르는 것이다”
(1) 後漢書 : 《馬韓 : 其南界近倭,亦有文身者. 弁辰 : 弁辰與辰韓雜居,其國近倭,故頗有文身者. : 마한(馬韓) : 그 땅의 남(南)쪽 지경(地境 : 境界) 가까이 왜(倭)가 있어, 또한 문신(文身)을 한 자(者)도 있다. 변진(弁辰) : 변진(弁辰)은 진한(辰韓)과 섞여 사는데, 그 나라 가까이에 왜(倭)가 있어, 그런 까닭에 문신(文身)한 자(者)들이 있다.》고 하였다.
(2) 三國志 :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 :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南)쪽에 있는데, 동(東)쪽, 서(西)쪽은 바다로 한계(限界)하고, 남(南)쪽은 왜(倭)와 접(接)하고 있는데, 사방 4천리 정도이며, 세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마한(馬韓)이요, 둘째는 진한(辰韓)이요, 셋째는 변한(弁韓)이다.》라고 하였다.
(3) 通典 : 《馬韓,後漢時通焉.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 馬韓在西,五十有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辰韓 : 男女近倭,亦文身 : 후한(後漢) 때에 통하였다. 세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마한(馬韓)이요, 둘째는 진한(辰韓)이요, 셋째는 변진(弁辰)이다 : 마한(馬韓)은 서(西)쪽에 있는데 54개 나라요, 그 북(北)쪽에는 낙랑(樂浪), 남(南)쪽에는 왜(倭)와 이어져 있다. 진한(辰韓) : 왜(倭)가 가까이에 있어 역시 남녀(男女)가 문신(文身)을 하였다.》고 하였다.
➨ 대표적(代表的)인 사서(史書)의 예(例)를 들어본 것이다. 그렇다면 『삼한(三韓)의 남(南)쪽 땅에 있었다는 “왜(倭)는 누구냐?”하는 것이고, 그들은 어디로 증발(蒸發)해버렸는가? 또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하는 것이다.
➏ 그들 “왜(倭)”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동화(同化)되어 한족(韓族)이 되었는가?
➐ 삼한(三韓) 즉(卽) ‘마한(馬韓)·변진(弁辰)·진한(辰韓)’의 남(南)쪽 땅 곧 “왜(倭)”가 살고 있었던 땅은 어디로 사라졌나? 천지개벽(天地開闢) 또는 엄청난 용암분출(鎔巖噴出)과 지각변동(地殼變動)으로 인하여 남해(南海) 해중(海中)으로 수장(水葬)되었나?
이러한 몇 가지 질문(質問)은, 아주 합리적(合理的)인, 보편타당(普遍妥當)한, 상식적(常識的)인 질문(質問)이다. 이러한 것에 답(答)할 수 없다면, 『나는 ‘사이비(似而非) 학자(學者)“요』라고 스스로 고백(告白)하는 것이다.
못 믿겠다! : 그럼 ’남해(南海) 수중(水中) 탐색(探索)‘을 해보자. 과거(過去) “왜(倭)”의 도시(都市)를 발굴(發掘)해보자. 흥미진진(興味津津)한 뉴스거리가 출토(出土)될 것이 아닌가? 꼬리를 흔들며 지나가시는 견공(犬公)께서도 비웃을 일이다.
➨➨ 대표적(代表的)인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을 예(例)로 들어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록(記錄)을 역순(逆順)으로 따라가 보자.
(4) 後漢書 :《倭在韓東南大海中,依山島為居,凡百餘國.其地大較在會稽東冶之東,與朱崖﹑儋耳相近,故其法俗多同. : 왜(倭)는 한(韓)의 동남(東南) 큰 바다【또는 동(東)쪽과 남(南)쪽】가운데에 있는데, 산(山)과 섬(島)에 기대어 살며, 백여 나라가 있다. 그 땅은 회계(會稽) 동야(東冶)의 동(東)쪽에 있고, 주애(朱崖)와 담이(儋耳)와 서로 가까워 그들의 많은 법(法)과 풍속(風俗)이 같다.》고 하였으니,
➨ 『그들이 있었다는 땅(地)에 대한 기록(記錄)을 따라 “역순(逆順)”하여 따라가 보자』
➑ 〈회계(會稽) 동야(東冶)의 동(東)쪽, 주애(朱崖)와 담이(儋耳)와 서로 가깝다.〉고 했으므로, 『이곳의 북(北)쪽과 서(西)쪽과 서북(西北)쪽 땅에 삼한(三韓)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회계(會稽), 동야(東冶 : 冶山) : 주애(朱崖), 담이(儋耳)』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현대(現代)의 것이 아닌 ’전한(前漢)=서한(西漢)‘ 때의 것을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들 삼한(三韓)이니, 삼국(三國)이니, 사국(四國)이니 하는 조선왕조(朝鮮王朝)들의 기원(起源)이 ’전한(前漢)=서한(西漢)‘ 때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漢書卷六.武帝紀第六 [五] 應劭曰:二郡在大海中崖岸之邊.出真珠,故曰珠崖. : ‘前漢書 武帝紀 6’의 주석(註釋)[5] 편을 보면 : 응소(應召)가 이르기를, 2군【담이(儋耳)와 주애(朱崖)】은, 큰 바다 가운데 애안(崖岸)의 가장자리로, 진주(珍珠)가 나오는데, 주애(朱崖)라고 일렀다. 張晏曰:異物志二郡在海中,東西千里,南北五百里. : 장안(張晏)이 이르기를 : 이물지(利物志)에서 2군(郡)은 바다 가운데 있는데, 동서(東西)가 천리(千里), 남북(南北)이 5백 리다. 臣瓚曰:茂陵書珠崖郡治瞫都,去長安七千三百一十四里.儋耳去長安七千三百六十八里,領縣五. : 신(臣) 찬(瓚)이 이르기를 : 무릉서(武陵書)에, 주애군(珠崖郡)은 심도[瞫都 : 경주(瓊州)]에서 다스리는데, 장안(長安)까지 7,314리이다. 담이(儋耳)는 장안(長安)에서 7,368리 떨어져 있으며, 현(縣)이 5개이다.》라고 하였다.
“7,000리”라는 말은 곧 약(約) ‘2,800km’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오늘날의 해남도(海南島) 경주(瓊州)는, 경(京 : 長安)으로부터 겨우 1,600km【4 千里】 떨어져 있을 뿐이다. 겨우 절반(折半)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7,300리 또는 7,400리’【약(約) 2,800km 정도】를 가려면 오늘날의 베트남[Vietnam] 최(最) 남단(南端) 서(西)쪽 끝 지방이다.【메콩강(Mekong, 江) 삼각주(三角洲) 남단(南端)】
이러한 거리(距離) 개념(槪念)으로 보면 : ‘주애(朱崖)와 담이(儋耳)’는, 해남도(海南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오늘날의 “베트남[Vietnam] 최(最) 남단(南端) 서(西)쪽 끝 지방”이다. 【메콩강[Mekong, R] 삼각주(三角洲) 남단(南端)】
➤➤➤ “이러한 땅에 왜(倭)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삼한(三韓)의 땅은 이들 왜(倭)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었다는 것이니, 바로 중원대륙(中原大陸)의 광활(廣闊)한 땅에 삼한(三韓)의 영역(領域)이었다는 것이다.
또 이들 삼한(三韓)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는, 낙랑(樂浪)과 대방(帶方), 구려(駒驪), 맥(貊), 서북방(西北方)에는 부여(夫餘) 등이 토착(土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 오늘의 주제(主題)는, 위에서 설명(說明)한 여러 원전(原典)의 기록(記錄)과 함께 아래의 해동역사(海東繹史) 백제(百濟)의 관직제도(官職制度) 편을 보면서 :
옛 조선왕조(朝鮮王朝) 중에서도 백제(百濟) 관직제도(官職制度)를 살펴보면 : 백제(百濟)의 특이(特異)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특징(特徵)은, 고구려(高駒驪) 및 신라(新羅)와는 전혀 다른 “흉노(匈奴) + 고대왕조(古代王朝)”의 것과 똑같다는 점이다.
백제(百濟)는 정말 고구려(高駒驪)의 분파(分派)였는가? 각색(脚色)된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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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동역사(海東繹史) 제30권 / 관씨지(官氏志) 1 / 관제(官制) 1 : [본문(本文)] [출처:고전번역원]
《백제(百濟)의 관직 제도에는 16품계(品階)가 있다. 좌평(左平)은 5명으로 1품이고, 달솔(達率) -살펴보건대, 《책부원귀(册府元龜)》에는 대솔(大率)로 되어 있다.- 은 30명으로 2품이고, 은솔(恩率)은 3품이고, 덕솔(德率)은 4품이고, 한솔(扞率)은 5품이고, 나솔(奈率)은 6품이고, 장덕(將德)은 7품이고, 시덕(施德)은 8품이고, 고덕(固德)은 9품이고, 이덕(李德) - 살펴보건대, 《책부원귀》에는 이덕은 계덕(季德)이라고도 한다고 되어 있다.- 은 10품이고, 대덕(對德)은 11품이고, 문독(文督)은 12품이고, 무독(武督)은 13품이고, 좌군(佐軍)은 14품이고, 진무(振武)는 15품이고, 극우(克虞) -살펴보건대, 《책부원귀》에는 극우는 극상(克喪)이라고도 한다고 되어 있다.- 는 16품이다. 은솔 이하의 관원은 일정한 정원이 없으며, 각각의 부서가 있어서 여러 가지 사무를 나누어 관장한다.
내관(內官)으로는 전내부(前內部), 곡부(穀部), 육부(肉部), 내략부(內掠部), 외략부(外掠部), 마부(馬部), 도부(刀部), 공덕부(功德部), 약부(藥部), 목부(木部), 법부(法部), 후관부(後官部)가 있고, 외관(外官)으로는 사군부(司軍部), 사도부(司徒部), 사공부(司空部), 사구부(司寇部), 점구부(點口部), 객부(客部), 외사부(外舍部), 주부(綢部), 일관부(日官部), 도시부(都市部)가 있다. 도성(都城)에는 1만 호가 거주하며, 오부(五部)로 나뉘어져 있는데, 상부(上部), 전부(前部), 중부(中部), 하부(下部), 후부(後部)로서, 5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다. 《후주서》
백제의 관직 제도는 16품계가 있다. -살펴보건대, 《후주서》와 같다.- 장리(長吏)는 3년마다 한 번 교체한다. 기내(畿內)는 오부(五部)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부(各部)에는 오항(五巷)이 있으며, 사인(士人)들이 산다. 《수서》
○ 백제가 설치한 내관(內官)에는 내신좌평(內臣佐平)이 있어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고, 내두좌평(內頭佐平)이 있어 재정을 관장하며, 내법좌평(內法佐平)이 있어 예의(禮儀)를 관장하고, 위사좌평(衛士佐平)이 있어 위병(衛兵)을 관장하고, 조정좌평(朝廷佐平)이 있어 형옥(刑獄)을 관장하고, 병관좌평(兵官佐平)이 있어 외방에 있는 병마(兵馬)를 관장한다. 《구당서》
박사(博士) -《일본기(日本紀)》에, “백제 초고왕(肖古王) 19년(184)에 고흥(高興)을 박사로 삼았다. 백제는 개국 이래로 문자가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서기(書記)가 있게 되었다.” 하였다.-
오경박사(五經博士)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 “계체천황(繼體天皇) 때 백제의 오경박사 단양이(段揚爾), 고안무(高安茂)가 왔다.” 하였다.-
역박사(曆博士), 의박사(醫博士) -《화한삼재도회》에, “흠명천황(欽明天皇) 13년(552)에 백제의 역박사와 의박사가 왔다.” 하였다.-
대사(臺使) -《송서(宋書)》에, “원가(元嘉) 27년(450, 비유왕 24)에 백제 왕 여비(餘毗)가 국서(國書)를 올려 사사로이 대사(臺使) 풍야부(馮野夫)를 서하태수(西河太守)로 삼은 것을 추인해 주기를 청하였다.” 하였다.-
장사(長史) -《송서》에, “경평(景平) 2년(424, 구이신왕5)에 백제 왕 여영(餘映)이 장사(長史) 장위(張威)를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고 하였다.-
사마(司馬) -《후위서(後魏書)》에, “연흥(延興) 2년(472, 개로왕18)에 백제 왕 여경(餘慶)이 사마(司馬) 장무(張茂) 등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렸다.” 하였다.-
참군(參軍) -《남제서(南齊書)》에, “영명(永明) 8년(490, 동성왕12)에 백제 왕 모대(牟大)가 참군(參軍) 회매(會邁)를 파견하여 표문을 올렸다.” 하였다.-
부마도위(駙馬都尉) -《후위서》에, “연흥(延興) 2년(472, 개로왕18)에 백제 왕 여경(餘慶)이 관군장군 부마도위 불사후 장사(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 여례(餘禮)를 파견하여 표문을 올렸다.” 하였다.-
우현왕(右賢王), 좌현왕(左賢王), 관군장군(冠軍將軍), 정로장군(征虜將軍), 보국장군(輔國將軍), 용양장군(龍驤將軍), 영삭장군(寧朔將軍), 건무장군(建武將軍) -《송서(宋書)》에, “대명(大明) 2년(458, 개로왕4)에 백제 왕 여경(餘慶)이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리면서 행 관군장군 우현왕(行冠軍將軍右賢王) 여기(餘紀), 행 정로장군 좌현왕(行征虜將軍左賢王) 여곤(餘昆)ㆍ여휘(餘暉), 행 보국장군(行輔國將軍) 여도(餘都)ㆍ여예(餘乂), 행 용양장군(行龍驤將軍) 목금(沐衿)ㆍ여작(餘爵), 행 영삭장군(行寧朔將軍) 여류(餘流)ㆍ미귀(麋貴), 행 건무장군(行建武將軍) 우서(于西)ㆍ여루(餘婁) 등 11명에게 관작을 내려 주기를 청하였다.” 하였다.- [본문인용(本文引用) –끝-]》
➨ 위의 본문(本文) 설명(說明) 중에서 :
(1) 우현왕(右賢王) : 우현왕(右賢王)이라는 칭호(稱號)는 조선사(朝鮮史)에서 백제(百濟)가 유일(唯一)한 것인데, 본시(本是) “우현왕(右賢王)”이라는 칭호(稱號)는 흉노(匈奴)의 봉호(封號), 관호(官號)로, 흉노(匈奴)의 말로 “도기(屠耆)”이며, 우도기왕(右屠耆王)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어질다(賢)는 표현(表現)인데 이것을 번역하면 ‘우현왕(右賢王)’이 되는 것이다.
헌데 이러한 흉노(匈奴)의 봉호(封號)를 백제(百濟)가 사용(使用)했다는 말은, 백제(百濟) 역시(亦是) 본래(本來) 흉노(匈奴)에서 기원(起源)한다는 뜻이다?
【宋書 卷97:世祖大明元年,遣使求除授.詔許.二年,慶遣使上表曰:臣國累葉,偏受殊恩,文武良輔,世蒙朝爵.行冠軍將軍右賢王余紀等十一人.忠勤宜在顯進,伏願垂愍,並聽賜除.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余紀為冠軍將軍.以行征虜將軍左賢王余昆,行征虜將軍余暈並為征虜將軍.以行輔國將軍余都,余乂並為輔國將軍.以行龍驤將軍沐衿,余爵並為龍驤將軍.以行寧朔將軍余流,麋貴並為寧朔將軍.以行建武將軍於西,余婁並為建武將軍.】
예(例) : ‘사기(史記) 이장군전(李將軍傳)’에 의하면 : 이광(李廣)이 천산(天山)에서 ‘흉노(匈奴) 우현왕(右賢王)’을 공격(攻擊)했다고 하였다.
(2) 좌현왕(左賢王) : 좌현왕(左賢王)이란 칭호(稱號)도 마찬가지로 본시(本是) 고대(古代) 흉노(匈奴)의 봉호(封號), 관호(官號)로, 좌도기왕(左屠耆王)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흉노(匈奴)의 귀족(貴族)이다.
이러한 흉노(匈奴)의 봉호(封號), 관호(官號)를 백제(百濟)가 사용(使用)했다는 말은, 백제(百濟) 역시 본래(本來) 고대(古代)의 흉노(匈奴) 출신(出身)이었다는 뜻이다?
예(例) : 한서(漢書) 무제본기(武帝本紀)에 의하면 : 원수(元狩) 4년[紀元前(BC) 119]에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이 ‘좌현왕(左賢王)’과 접전(接戰)을 벌였다고 하였다.
사기(史記) 흉노(匈奴) 전에 의하면 :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 : 표요(嫖姚)]은, 대군(代郡)으로부터 2,000여 리를 나가 ‘좌현왕(左賢王)’과 접전(接戰)을 벌여, 7만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으니, 좌현왕(左賢王)이 그의 장수(將帥)들과 같이 도주(逃走)하였다. 그리고는 낭거서산(狼居胥山)에 올라 하늘에 제사 지내고 한해(瀚海)에 임하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 그렇다면 “좌현왕(左賢王)”이라는 흉노(匈奴) 최고(最高)의 봉호(封號), 관호(官號)를 썼던 “백제(百濟)”의 진정(眞正)한 정체(正體)는 뭐냐? 하는 것이다.
(3) 관군장군(冠軍將軍) : 관군장군(冠軍將軍)이란 칭호(稱號)에서 “관군(冠軍)”이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관군장군(冠軍將軍)이라는 명칭(名稱) 역시(亦是) 고대(古代)의 대륙왕조(大陸王朝)에서 사용했던 관호(官號)인데,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을 찾아보면 :
대륙(大陸)의 옛 지명(地名) “관군현(冠軍縣)”을 말한다고 하였는데, “관군(冠軍)”이란 말은 “탁월(卓越)한 군공(軍功)을 세운 자(者)에게 내려준 고대(古代)의 장군(將軍) 명칭(名稱)”이라고 하였다.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關於中國古地名的一個城市,請見冠軍縣.冠軍表示軍功卓越勝於其他的人.也是古代將軍的名號. ➤ 冠軍縣[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冠軍縣,中國古縣名。治所在今河南省鄧州市西北張村鎮冠軍村一帶。西漢元朔六年(前123年)漢武帝因霍去病出征匈奴,功冠諸軍,所以割穰縣的「盧陽鄉」和宛縣的「臨駣聚」地為冠軍侯邑。[1]後漢永元四年(92年),漢和帝封竇憲於冠軍。魏、晉仍為冠軍縣,屬南陽國。宋、齊俱屬南陽郡。後魏因之。隋屬鄧州。唐朝武德二年(619年)5月,馬元規等人在冠軍縣與朱粲交戰,大敗朱粲。10月,馬元規又同鄧州刺史呂子臧合力征剿朱粲,朱粲敗後率殘部倉皇潰逃,馬元規未聽取呂子臧的話,沒有乘勝追擊朱粲,使得朱粲得有喘息之機。朱粲很快又招募到群眾參軍,618年在冠軍稱帝,號楚,建元昌達。貞觀元年(627年),併入新城縣。➤ 霍去病墓 / 霍去病墓住於冠軍村西,據明代《嘉靖鄧州志》記載,墓底平面呈圓形,高7米,底直徑30米】
冠軍將軍 [太平御覽 卷二百三十九.職官部三十七] :《史記》曰︰楚義帝,以宋義爲卿子冠軍。《漢書》曰︰武帝以霍去病徵匈奴,功冠三軍,封冠軍侯。《魏志》曰︰正始中,以文欽爲冠軍將軍、揚州刺史。《晋起居注》曰︰武帝泰始七年,詔曰︰議郎胡奮開爽忠亮,有文武才幹,歷位外內,涉練戎事,威略之聲著于方外,其以奮爲冠軍將軍。《齊書》曰︰劉悛嘗從駕登蔣山,上數嘆曰︰「貧賤之交不可忘,糟糠之妻不下堂。」顧謂悛曰︰「此况卿也。世言富貴好改其素情,吾雖有四海,今日與卿盡布衣之適。」悛起,拜謝,遷冠軍將軍。
여례(餘禮) : [出處 : 고전번역원 주(注)] 백제 개로왕(蓋鹵王) 때의 왕족이다. 472년(개로왕18)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남진(南進)을 막기 위해 군사 원조를 요청하러 북위에 가서 효문제(孝文帝)에게 표문을 올렸으나 실패하였다.《三國史記 卷25 蓋鹵王本紀》
위(魏)나라의 인장은 문흠(文欽)의 관군장군인(冠軍將軍印), 만총(滿寵)의 양무장군인(揚武將軍印)이 있다. [고전번역원 : 임하필기 제3권 금해석묵편]
(4) 정로장군(征虜將軍) : 정로장군(征虜將軍)이란 역시(亦是) 대륙(大陸)의 왕조(王朝)에서 사용(使用)했던 장군(將軍)의 명칭(名稱)으로, 대명률(大明律)에서는 :
“정로장군(征虜將軍)ㆍ정만장군(征蠻將軍)ㆍ진삭장군(鎭朔將軍)”과 같은 따위로 군사를 동원(動員)하여 외번(外蕃)을 정벌(征伐)ㆍ엄습(掩襲)하거나 반역(叛逆)한 적도(賊徒)들을 잡아들인다.【大明律集說附例 卷2, 43 : 朝廷及在外總兵,如征虜征蠻鎭朔將軍之類,調兵征討掩襲外蕃,及收捕反逆賊徒】고 하였다.
예(例) : 대표적(代表的)인 인물(人物)로 후한(後漢) 때 정로장군(征虜將軍)을 지낸 제준(祭遵)이 있다.【征虜將軍《東觀漢記》曰︰祭遵爲征虜將軍,廉潔奉公,光武嘆曰︰「安得憂國奉公如祭征虜者乎?」《魏志》曰︰太祖以臨淄侯植爲征虜將軍,遣救曹仁,呼有所敕而植醉,于是罷之。又曰︰南陽周太好立功,善用兵,以爲征虜將軍。沈約《宋書》曰︰征虜將軍,世號金紫將軍。[太平御覽 卷二百三十九.職官部三十七]】
제준(祭遵)이 죽자 광무제(光武帝)가 “어떻게 해야 ‘제(祭) 정로(征虜)’처럼 나라를 근심하고 공사(公事)를 받드는 자(者)를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後漢書 卷20 祭遵列傳] 고 전해진다. [출처 : 고전번역원]
(5) 보국장군(輔國將軍) : 한조(漢朝)로부터 시작된 무관(武官)의 관위(官位)로, 삼국(三國) 때는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으로, 당송(唐宋), 금원(金元) 때도, 명청(明淸) 때는 종실(宗室)에게 주었던 작위(爵位)의 이름이었다.
예(例) : 【북사(北史)에 “신라는 가라국(迦羅國)의 부용국이다.” 하였고, 남제서(南齊書)에 “건원 원년(AD 479)[駕洛國 질지왕(銍知王) 29년]에 가라국(加羅國) 하지왕(荷知王)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쳐 오자 보국장군 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에 제수하였다.” 하였다. 본국왕(本國王)이 있고, 또 분국(分國)이 있었다는 뜻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輔國將軍[太平御覽 卷二百三十九.職官部三十七] :《晋書》︰王導爲輔國將軍。導上箋曰︰「昔魏武,達政之主也;荀文若,功臣之最也,封不過亭侯。倉舒,愛子之寵,贈不過別部司馬。以此格萬物,得不局迹乎! 王隱《晋書》曰︰王爲輔國將軍。又曰︰羊琇以輔國將軍、開府儀同三司。
(6) 영삭장군(寧朔將軍) : 영삭장군(寧朔將軍)이란 관위(官位) 또한 대륙왕조(大陸王朝)의 무관(武官) 이름인데, 조조(曹操)가 최초(最初)로 두었다고 전해진다.
예(例) :《명제(明帝) 태시(泰始) 3년[장수왕(長壽王) 55년]에, 위나라 동래태수(東萊太守) 국연승(鞠延僧)이 그의 무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성(城)에 웅거하여 공물을 바치러 오는 고구려(高駒驪)의 사신을 억류하였다. 이때에 유회진(劉懷珍)이 동해(東海)에 있으면서 영삭장군(寧朔將軍) 명경부(明慶符)와 용양장군(龍驤將軍) 왕광지(王廣之)를 보내어 국연승을 쳐서 항복시키고 고구려의 사신을 경사(京師)로 보내었다.[南齊書]》라고 하였다.
(7) 건무장군(建武將軍) : 建武將軍《魏志》曰︰太祖以夏侯惇爲建武將軍。又曰︰文帝善孟達姿才容觀,以爲建武將軍。 [太平御覽 卷二百四十.職官部三十八 雜號將軍下]
(8) 용양장군(龍驤將軍) : 용양장군(龍驤將軍) 역시 무관(武官)의 이름으로, 양진(兩晉)과 남북조(南北朝) 때의 장군(將軍)의 칭호(稱號)라고 전해지는데, “용양(龍驤)”이란 수군(水軍)을 말하는 것으로, 대표적(代表的)인 인물(人物)은 서진(西晉)의 ‘용양장군(龍驤將軍) 왕준(王濬)’인데, 수군(水軍)을 이끌고 오(吳)나라를 정벌하여 금릉(金陵)을 함락(陷落)시킨 고사(古事)가 전해지고 있다. [晉書 卷42 王濬傳] [출처 : 고전번역원]
또 중국역사대사전(中國歷史大辭典)에서도 위의 설명(說明)과 마찬가지로 : “拜益州刺史王濬為龍驤將軍,派他造船備戰”이라고 하였다.
➤ 〈행용양장군(行龍驤將軍) 목금(沐衿)ㆍ여작(餘爵) 또 건위장군(建威將軍) 여력(餘歷)을 행용양장군 매로왕(行龍驤將軍邁盧王)으로〉라고 한 것을 보면 : 당시(當時)의 백제(百濟)는 오늘날 우리가 추측(推測)하기 어려울 정도(程度)의 수군전력(水軍戰力)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즉(卽),
➊ 《송서(宋書)에, 대명(大明) 2년(458, 개로왕 4)에 백제 왕 여경(餘慶)이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리면서 행 관군장군 우현왕(行冠軍將軍右賢王) 여기(餘紀), 행 정로장군 좌현왕(行征虜將軍左賢王) 여곤(餘昆)ㆍ여휘(餘暉), 행 보국장군(行輔國將軍) 여도(餘都)ㆍ여예(餘乂), 행 용양장군(行龍驤將軍) 목금(沐衿)ㆍ여작(餘爵), 행 영삭장군(行寧朔將軍) 여류(餘流)ㆍ미귀(麋貴), 행 건무장군(行建武將軍) 우서(于西)ㆍ여루(餘婁) 등 11명에게 관작을 내려주기를 청하였다.》하였다. [번역문 출처 : 고전번역원]
➋ 《남제서(南齊書)에, “영명(永明) 8년(490, 동성왕12)에 백제 왕 모대(牟大)가 표문을 올려 ‘가행 영삭장군 면중왕(假行寧朔將軍面中王) 저근(姐瑾)을 행 관군장군 도장군 도한왕(行冠軍將軍都將軍都漢王)으로, 건위장군 팔중후(建威將軍八中候) 여고(餘古)를 행 영삭장군 아착왕(行寧朔將軍阿錯王)으로, 건위장군(建威將軍) 여력(餘歷)을 행 용양장군 매로왕(行龍驤將軍邁盧王)으로, 광무장군(廣武將軍) 여고(餘固)를 행 건위장군 불사후(行建威將軍弗斯侯)로, 선위장군(宣威將軍) 회매(會邁)를 행 광무장군(行廣武將軍)으로 삼았으니, 정식으로 인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이를 허락한다는 조서를 내리고, 아울러 장군(將軍)의 호를 하사하였다.”》하였다. [번역문 출처 : 고전번역원]
➤ 『사막지대(沙漠地帶)의 정벌군(征伐軍) 기보(騎步) 출신(出身)의 소정방(蘇定方)과 수군(水軍)을 보내 백제(百濟)를 쳐 승리했다는 당(唐), 수십만(數十萬)의 기마군단(騎馬軍團)을 보내 백제(百濟)를 쳤다는 북로(北虜), 이들은 대륙(大陸) 백제(百濟)를 친 것이지, 바다 건너 반도(半島) 땅에는 그림자도 비출 수 없는 자(者)들이다.』
이러한 예(例)는 아주 상식적(常識的)인 역사(歷史) 내용(內容)이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이러한 사실(史實)이 “반도(半島) 조선(朝鮮)에 오면 : 신(神)과 박수[博數: 남자무당]들의 이야기로 변질(變質)되어버린다.” 우리의 선조(先祖)들이 신(神)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이건 모두 일백(一百) 년 이상(以上)의 세뇌공작(洗腦工作)에 당해 사고(思考)조차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조선사(朝鮮史)에서는 그렇다는 뜻이다.】
용양장군(龍驤將軍)은 수군장군(水軍將軍)이다. 여러 명의 수군장군(水軍將軍)이 있었다는 말은, 여러 곳에 수군진지(水軍陣地)를 구축(構築), 진(陣)을 치고 있었다는 말과 같다. 반도(半島) 서남(西南) 땅, 어디에 엣 백제(百濟)의 수군(水軍) 진(鎭)이 있었을까?
흔적(痕迹)도, 내려오는 고사(古事)도,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口傳)도, 그 무엇하나 찾을 길이 없잖은가? 한글로 만들어진 해설서(解說書) 안에서만 ”백제(百濟)는 반도(半島)에 있었다“고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냐?
이걸 누가 만든 것일까? 바로 식민(植民) 사학자(史學者)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불쌍한 반도(半島) 백성(百姓)들을 위해??? 이건 꿈(夢)에서도 없는 이야기다. 바로 일본제국주의자(日本帝國主義者)들을 위해 일제(日帝) 하수인【下手人 : 일제(日帝) 학자(學者)들】들과 이들과 야합(野合)한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또 이걸 애지중지(愛之重之) 가슴에 품고 지금까지도 펴보지 않는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정권(政權)도 마찬가지다. 신생(新生) 독립국(獨立國)으로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이미 그 시간(時間)으로 보면 변명(辨明)일 뿐이다. 시간(時間)은 얼마든지 있었다는 뜻이다.
이래서 ‘조선사(朝鮮史)와 한국사(韓國史)’는, 구별(區別)되어야 하고, 구별(區別) 될 수밖에 없다. ‘한국사(韓國史)는, 열강(列强)들에 의한 식민사(植民史)일 뿐이다.’
○ ”백제(百濟)가 한반도(韓半島) 서남(西南) 땅에 있었다“는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들의 조선사(朝鮮史) 해설(解說)은, 00(00)을 멸(滅)하고, 0000(0000)해도 시원치 않을 대역죄(大逆罪)를 피할 수 없다.
19세기 말(末)로부터 지금(只今)까지 1백여(百餘) 년(年) 동안 일제식민(日帝植民) 사학자(史學者)들과 도굴(盜掘)꾼들이 무지막지(無知莫知)하게 도굴(盜掘)을 하였다. 이들의 도굴목적(盜掘目的)이 바로 반도(半島) 땅에 ‘옛 조선(朝鮮)’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단 한 개의 증거(證據)도 찾아내지 못했다.“ 즉(卽) 반도조선(半島朝鮮)을 증명(證明)해 내지 못했으며, 반대(反對)로 이들은 이곳 땅을 도굴(盜掘)하고 그곳에 반도(半島) 삼국(三國)을 어정쩡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헌데 오늘날의 수준(水準) 낮은 학자(學者)들이 무슨 재주로 이걸 밝혀낼 수 있겠는가?
해방(解放) 이후(以後) 지금까지도 당시(當時)의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과 그들의 후배(後輩)들, 동료(同僚)들과 함께 반도(半島) 땅 많은 곳을 헤집고 파헤쳤다. 그래서 그곳에서 삼한(三韓)이나 백제(百濟)가 있었다는 증거(證據)를 찾아내었는가? 한마디로 미친 짓만 했잖은가? 지금 2023년 06월도 마찬가지다. 여기저기에서 발굴(發掘)이니 뭐니 하면서 국고(國庫)를 탕진(蕩盡)하고 있잖은가? ‘백제(百濟)’의 ‘제(濟)’ 자(字)라도 찾아냈는가?
○ 서남방(西南方)의 해양종족(海洋種族)이며, 옛 조선(朝鮮)의 울타리(藩國)를 자청(自請)했던 이들이 서세(西勢)의 궐기(蹶起)와 함께 기독교(基督敎)를 앞세운 공략(攻掠)에 쉽게 무너진 왜(倭)는, 이들의 하수인(下手人)이 되어 조선(朝鮮)을 짓밟고, 일만(一萬) 년 조선(朝鮮)의 찬란(燦爛) 역사(歷史)에 치욕(恥辱)을 안겼다.
우리는 사실(史實)【역사적(歷史的)】의 진실(眞實)을 알 필요가 있다.
이것도 모자라 서세(西勢)들과 함께 조선(朝鮮)을 해체(解體)하는데도 하수인(下手人)이 되었고. ➊ 반도(半島) 땅은 일제(日帝)가 식민지배(植民支配)하는, ➋ 필리핀[Philippine] 땅은 미합중국(美合衆國)이 식민지배(植民支配)하는 은밀(隱密)한 모의(謀議), 비밀협약(秘密協約)을 맺었다. 이러한 사실은 극비(極祕)로 캐비넷[cabinet]속에서 극비밀(極祕密)로 취급(取扱)되다가 현대(現代)에 이르러 알려진 것이다.
➤ ➌【가쓰라-태프트 협정(일본어: 桂・タフト協定)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가쓰라-태프트 협정(일본어: 桂・タフト協定) 또는 태프트-가쓰라 밀약(영어: Taft–Katsura agreement)』은,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하는 문제를 놓고, 1905년 7월 29일 당시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내용주 1]와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가 도쿄에서 회담한 내용을 담고 있는 대화 기록이다. 이 기록의 내용은 미·일 양국이 모두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1924년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기록에는 서명된 조약이나 협정 같은 것은 없었고, 일본-미국 간 관계를 다룬 대화에 대한 각서(memorandum)만이 있었다.
각서에 따르면 일본 제국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 통치를 인정하며, 미국은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침략하고 한반도를 '보호령'으로 삼아 통치하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 (중략(中略). 그러나, 미국은 러시아와 일본제국 사이에 포츠머스 강화 조약이 열리기 전에 이미 대한제국의 자치능력을 부정하고 일제가 한반도 지역을 식민지배하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 들어맞는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었으며,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이를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이 밀약은 대한제국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배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배를 상호 양해한 일종의 신사협정이었고, 이 합의로 대한제국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차단한 일제는, 같은 해 11월 17일 대한제국에 을사조약을 강요했으며, 미국은 이를 사실상 묵인했다.[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➍ 【애치슨 라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애치슨 라인 선언(Acheson line declaration, 애치슨 선언)’은 ‘1950년 1월 12일’에 발표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에 의해 발표된 선언이다. 여기서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은, 그 선언에서 발표된 미국의 동북아시아에 대한 극동방위선을 의미한다. 1950년 1월 10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의 비밀회담에 참석한 애치슨은,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타이완의 동쪽 즉,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라고 말하였다. 중략(中略). 더욱이 한반도는 당시까지만 해도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하게 됐다는 것이 후일의 평가다.
‘애치슨’의 이같은 선언 이후, 대한민국의 임병직 외무부장관은 즉시 주한 미국대사인 존 무초를 불러 애치슨 선언의 진의를 해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또 장면 대사에게 훈령을 보내 애치슨 발언의 경위를 신속히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애치슨은 한국이 미국의 극동방위권에서 제외된 이유에 대해 한마디 회답도 보내주지 않았다. 이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애치슨의 선언에 그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일제(日帝)와 미국(美國)은 조선(朝鮮)을 해체(解體)하고, 반도(半島) 땅으로 이동(移動)시키고도 모자라, 일제(日帝)에 의한 반도(半島) 땅의 식민지배(植民支配)를 승인(承認), 지들은 필리핀【옛 왜(倭)의 거점지(據點地)였기 때문에 일제(日帝)로부터 승인(承認)을 받은 것이다.】 지배권(支配權)을 확고(確固)하게 얻는 계기가 된 것이다.
➨➨➨ 『이에 따라 반도(半島) 땅은 일제(日帝)의 강압(强壓), 강점(强占)으로 이어졌고 식민지배(植民支配)로 이어졌다. 후(後), 본토(本土)에 원폭(原爆) 2기의 투하(投下)로 무조건 항복(降伏)이 선언(宣言)되었고, 여기에 반도(半島) 땅은, ”일제(日帝)+미국(美國)+소련(蘇聯)+중국(中國)“등의 열강(列强)들에 의한 신탁통치(信託統治)와 남북(南北)으로 분할(分割)이 된 것이다. 』 이게 팩트(Fact)다.
그리고 1948년 미국(美國)으로 대표(代表)되는 서구(西歐)의 간판스타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을 앞세운 남한단독정부(南韓單獨政府) 수립(樹立)이 이어졌으나, 미국(美國)은 1950년 01월 12일 “에치슨 라인”이리는 방위전략(防衛戰略)을 발표(發表)하면서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타이완의 동쪽 즉,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라고 발표(發表)하였다. 신생독립국(新生獨立國) 대한민국(大韓民國)을 이 방위선(防衛線)에서 제외(除外)해버리자, 소련(蘇聯)과 북한(北韓)은 은밀(隱密)하게 군사력(軍事力)을 증강(增强)하고, 군대(軍隊)를 남하(南下), 침략(侵略)한 것이 바로 ‘6.25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시발(始發)이다.
미국(美國)을 욕할 필요(必要)는 없다. 양육강식(弱肉強食)의 국제관계(國際關係)속에서 힘[國力]이 없는 종족(種族)·부족(部族)·국가(國家)들은, 강대국(强大國)에 동화(同化)되거나, 흡수합병(吸收合倂)되거나 소멸(消滅)될 수밖에 없다.
➨ 문제(問題)는 자신(自身)들의 국가이익(國家利益)을 극대화(極大化)시키기 위해 기획(企劃)되고, 만들어진 일들을 미화(美化)하고, 칭송(稱頌)하며, 미사려구(美辭麗句)를 동원(動員)해 현혹(眩惑)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한제국(大韓帝國)과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백성(百姓)들이 “하 불쌍하여 양키들이 도왔는가?” 지들의 국가이익(國家利益)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나? 정확(正確)한 역사적(歷史的) 진실(眞實)을 알자는 것이다』
성조기(星條旗)를 흔들며 “아! 아버지”하는 이런 어리석은 국민(國民)이 되지는 말자는 것이다. 우리 국가이익(國家利益)에 ‘친미(親美)와 친일(親日)’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건가? 언제 이들이 다시 반도(半島) 땅을 내팽개치는 정책(政策)이 나올지는 누구도 모른다. 대만(臺灣) 즉 타이완[Taiwan]을 보면 대한민국(大韓民國)이 보인다.
필요(必要)할 때는 안으려 하지만, 불필요(不必要) 또는 국가이익(國家利益)에 큰 메리트[merit]가 없다고 판단(判斷)되면 언제든지 사석(死石)이 되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미국(美國)이라는 강대국(强大國)은, 반도(半島) 땅을 두 번이나 투기(投棄)한 전력(前歷)이 있다.
대만(臺灣) 곧 타이완[Taiwan]은 불행(不幸)한 일이지만 결국(結局)은 중국(中國)에 의해 무력(武力), 흡수합병(吸收合倂)될 것이 뻔한 사실(事實)이다.
우리는 지금 안녕(安寧)하신가? 결국(結局) “일본(日本)을 지키기 위한 총알받이”가 되어가는 중이다.
세계(世界)의 경찰국가(警察國家)라고 자칭(自稱)하는 미국(美國) 측에서는, “열도(列島)는 최후(最後)의 방어선(防禦線)”이다. 이게 무너지면 미국(美國)의 본토(本土)가 직접(直接) 노출(露出)되며, 아세아(亞細亞)를 잇는 교통선(交通線)이 마비되기 때문이고, 이는 국가이익(國家利益)의 절반(折半) 이상(以上)을 소실(消失)하는 엄청난 사건(事件)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신생(新生) 독립국(獨立國)을 “총알받이”로 사용(使用)하기 위해서 “최대(最大)의 미군기지(美軍基地)”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게 마냥 좋은 일일까? 총알받이의 역할(役割)을 한다는 것은 결국(結局), 국민(國民)들의 희생(犧牲)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많은 기득권(旣得權) 세력(勢力)들의 처자식(妻子息)들은 미국(美國) 시민권(市民權)을 획득(獲得)해 놓고 있다. 그 이유(理由)가 뭘까?
결국(結局) 『총알받이로 죽어가는 것은 힘없는 불쌍한 민초(民草)와 그 자식(子息)들 뿐이다』
기득권(旣得權)층들인 집권세력(執權勢力)의 인물(人物)들은 수십(數十), 수백(數百) 미터의 지하(地下) 벙커(bunker) 속에서 생존(生存)할 것이며, 또한 호위군(護衛軍)의 엄호(掩護) 아래 후방(後方)으로 도주(逃走)할 것은, 너무도 뻔한 사실(事實)이다.
과거(過去)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을 보면 훤히 내다보인다. “걱정하지 말라. 서울(Seoul) 시민들이여!” 해 놓고 호위군(護衛軍)과 함께 한강(漢江) 다리를 건너 남(南)쪽으로 도주(逃走)하자마자, 공병대(工兵隊)를 시켜 한강(漢江) 다리를 폭파(爆破)하지 않았는가! 그러한 일이 재발(再發)하지 말라는 법(法)이 있는가!
‘배신(背信)’이란 처음 망설이는 것이지, 두 번, 세 번은 눈감고도 한다고 하잖은가! ‘윤석열’을 보면 실감(實感) 나지 않는가!
서울(Seoul)이 위험(危險)하다 판단(判斷)되면 누가 가장 먼저 한강(漢江) 다리를 건너 도주(逃走 : 逃亡)할까? ‘전진(前進)을 위한 한 발 후퇴(後退)’라는 미사려구(美辭麗句)를 남겨 놓고 말이다. 바로 집권세력(執權勢力)의 우두머리인 대통령(大統領)과 그 부하(部下) 놈들일 것이다. 이건 100% 팩트(fact)다.
➨ 기득권(旣得權)층에도 끼지 못하고, 뭐가 뭔지 분간(分揀)하지도 못하면서, 기득권(旣得權) 세력(勢力)들을 옹호(擁護)하며, 지지(支持)하는 ‘자기만족(自己滿足), 정신승리(精神勝利), 자아도취(自我陶醉)’에 취하는 많은 어리석은 국민(國民)들은 억울(抑鬱)할 일이 없다. 자신(自身)이 한 일의 업보(業報)이니 때문이다.
세상(世上)은 변화(變化)와 개혁(改革)을 요구(要求)한다. 허지만 기득권(旣得權)층들은 이것을 두려워한다. 지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旣得權)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이다. 이런 자(者), 이런 무리(群)들을 위해 민초(民草)들이 왜 희생(犧牲)하는 거지?
➤ 아무리 무지무식(無知無識)한 무지몽매(無知蒙昧)한 민초(民草)들이라고 하더라도 ‘뭐가 뭔지’ 진실(眞實)을 알자는 취지(趣旨)로 긴 설명(說明)을 한 것이다.
미국(美國)이 아무리 몸부림을 치더라도 중국(中國)은, 결국(結局) 반도체(半導體)를 자립(自立)할 수 있을 것이고, 대만(臺灣) 타이완[Taiwan]은, 강제(强制) 흡수합병(吸收合倂)될 것이다.
그다음, 타켓(Target)은 한반도(韓半島)가 될 것임은 너무도 분명(分明)한 사실이다. 그때 가서 후회(後悔)해 본들 무엇을 하겠는가? 그래서 오늘이 중요(重要)한 것이고 유비무환(有備無患)이 요구(要求)되는 것이다.
오늘의 ‘윤석열’ 정권(政權)에서는 기대(期待)와 희망(希望)이 없다. 다음 정권(政權)에게 희망(希望)을 걸어 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준비기간(準備期間)이 너무도 짧아 너무도 아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무능력(無能力)과 무책임(無責任)으로 똘똘 뭉친 진짜 ‘어리바리’한 정권(政權)을 48.6%【16,394,815표】의 국민(國民)들이 만들어 놓았으니 말이다.』
➤ 차기(次期) 정권(政權)은, 진짜 준비(準備)된 정권(政權), 국가(國家)와 7,700만 민족(民族)을 위한 냉정(冷靜)하고 계산적(計算的)이며 국가이익(國家利益)을 극대화(極大化)할 수 있는 능력(能力)과 책임감(責任感)을 갖춘 정권(政權)의 탄생(誕生)을 기다려 본다.
※애치슨 라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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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왜(倭)“는, 반도(半島)의 36년 식민지배(植民支配)와 노동력(勞動力) 강제동원(强制動員) 등과 강제점거(强制占據), 식민지배(植民支配)의 진혹(嗔惑)했던 사실(事實)들에 대해 사과(謝過)한다거나 반성(反省)하지 않는 것이다.
이들 『”왜(倭)“의 입장(立場)은, 정당(正當)한, 합법적(合法的)인 절차(節次)에 의해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當然)하게도 반성(反省)할 일도 없고, 사과(謝過)할 일도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은 허수아비 나라(國家)였고, 힘(國力)이 없으니 양육강식(弱肉强食)의 생태(生態)계에서 먹힌 것은 니네들의 잘못이지, 그게 어떻게 왜(倭)의 잘못인가?〉하는 것이다.
더불어 『니네들 국민(國民)들 속에 지금도 일제통치(日帝統治)【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시절(時節)】때를 칭송(稱頌)하고 있는 국민(國民)들이 있고, 전국(全國) 각 곳에 친일주의자(親日主義者)들이 많이 있잖은가! 왜 우리에게 반성(反省)하고 사과(謝過)하라고 하는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이게 ‘일본(日本) 당국(當局)’의 속마음이다.
이들 왜(倭)의 우익정권(右翼政權)은 결코 반성(反省)과 사과(謝過) 같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미국(美國)과 함께 한 밀약(密約)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미합중국(美合衆國)’을 뒷배로 세워 놓은 것이다. 한국인(韓國人) 들이어! 진실(眞實)을 알고 정신(精神)을 좀 차리자!
여기에 ‘윤석열’과 같은 역사인식(歷史認識)이나 민족의식(民族意識)이 희박(稀薄)한 친일주의자(親日主義者)가 나타나니, 가해자(加害者 : 倭)가 ‘피해자(被害者) 코스프레’【피해자(被害者)가 아닌 사람이 오히려 피해자(被害者)인 척하는 것을 비유적(比喩的)으로 이르는 말】를 해대는 것이다. ‘윤석열’은, ‘문재인’ 정권(政權)에서 일약(一躍) 출세가도(出世街道)를 달린 자(者)다. 그러나 『자신(自身)의 사적(私的) 복수심(復讐心)과 검찰조직(檢察組織)을 지키기 위해, ‘피해자(被害者) 코스프레’를 해대고, 여기에 보수(保守) 언론(言論)들의 욕망(慾望)으로 만들어낸 허수아비로, 하룻밤을 자고 났더니 대통령(大統領)이 되어 있더라』하는 어처구니없는 인물(人物)이다. 그럼 국민(國民)은 뭔가, 개돼지인가?
【피해자(被害者) 코스프레(コスプレ) : 어떠한 잘못을 저지른 자(者)가 그 책임(責任)을 모면하기 위해 해당 사안의 피해자(被害者) 또는 기타 다른 자(者)에게 책임(責任)을 덮어씌우고 자신(自身)이 오히려 희생자(犧牲者)인 척 가장하여 동정심(同情心)을 유발(誘發), 상황(狀況)을 자신(自身)에게 유리(有利)하게 만들고자 하는 연속적인 행위들을 말하는 신조어 : 국어사전】
‘피해자(被害者) 코스프레(コスプレ)’를 아주 적절(適切)하게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하는 자(者)들이 바로 옆 나라 일본(日本) 아이들이다. 제2차세계대전(第二次世界大戰)의 한 주역(主役)이었던 ‘일제(日帝)’가 ‘원폭(原爆) 두 발’에 무조건 항복(無條件 降伏), 백기투항(白旗投降)했다. 그리고는 적당(適當)한 시간이 지난 후, 이들은 ‘원폭(原爆) 피해자(被害者)’라면서 ”피해자(被害者) 코스프레(コスプ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日本) 정부(政府) 차원(次元)에서 시작(始作)된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원자력발전소(原子力發電所)에서 폭발(爆發)과 함께 엄청난 방사능(放射能) 누출사고(漏出事故)가 터졌다. 지진대(地震帶)에 만들어 놓은 원전(原電)이다. 방사능(放射能) 오염수(汚染水)를 별도(別途) 처리(處理)하여 보관(保管) 후 여러 차례 재처리(再處理) 과정(過程)을 거치지 않고, 지들 돈을 아끼기 위해 해양생태(海洋生態)계에 방사능오염수(放射能汚染水)를 무단(無斷) 투기(投機)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이 또한 ‘피해자(被害者) 코스프레(コスプレ)’의 일종(一種)이다.
『바다(海)로 방사능오염수(放射能汚染水)를 무단방류(無斷放流)하겠다는데, 니들이 뭘 어쩔건가!』 하는 것이고, 여기에 ‘윤석열’ 정부(政府)가 손을 들고 짝짜꿍하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피해자(被害者) 코스프레(コスプレ)“는, 많은 사람들과 넓게는 인류(人類)에게 재앙(災殃)을 안겨주는 것이다. 【‘생태(生態)계에 많은 영향(影響)을 미쳤다’는 후일(後日)의 결과(結果)가 나온다면 :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에서 파평윤씨(坡平尹氏) ‘윤석열’은 ”신(新)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 1위 자리에 오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 ***** 이러니 이 나라가 지금 이 모양이 된 것이다. 도대체 1년 동안 뭔 일을 했나? 온갖 술수(術數)로 권력(權力)을 장악(掌握)하는 데만 혈안(血眼)이 되어 있고, 엉뚱하게도 부부(夫婦)가 사는 관저(官邸) 꾸미기에 정신이 팔려있고, 국가(國家)를 방위(防衛)하는 심장부(心臟部)를 밀어내고 근무처(勤務處) 만들기에 수천(數千)억 원의 국고(國庫)를 탕진(蕩盡)하고 있을 뿐이다.』
”이 나라의 대통령(大統領) 임기(任期)는 겨우 5년뿐이다“ 헌데 이렇게 국가방위(國家防衛)의 심장부(心臟部)를 밀어내고 자신(自身)의 근무처(勤務處) 꾸미기에 혈안(血眼)이 될 수 있을까? 이제 3년 몇 개월(個月) 후엔 아무짝이 쓸모없는 건물(建物)이 될 것이 너무도 뻔한 이야기다. 겨우 4년 몇 개월(個月) 대통령(大統領) 한 사람을 위해 ”수천(數千)억 원의 국고(國庫)를 탕진(蕩盡)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란 이야기다” 이건 정상적(正常的)인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수십(數十), 수백(數百) 번씩 외치는 자유(自由)에 이것도 포함(包含)되는 건가? 이건 정상적(正常的)인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 또 ”피해자(被害者)가 무릎을 꿇고 가해자(加害者) 가랑이 밑을 기어들어 간다“는 것은, “무조건 투항(無條件 投降)이요, 무조건 항복(無條件 降伏)”인 것이다“ 이런 ‘어리바리한 민족(民族)’에게 미래(未來)가 있겠는가? 누가 가해자(加害者)고, 누가 피해자(被害者)인가?
이게 ‘통 큰 결단(決斷)’인가? 백기투항(白旗投降)이자 무조건 항복(無條件 降伏)이다. 물론(勿論) 결단(決斷)은 결단(決斷)이다. 문제(問題)는 누구를 위한 결단인가 하는 것이다. 『애국애족(愛國愛族)? 일본(日本)을 위한? 대한민국(大韓民國)을 위한? 어떤 결단(決斷)? 도대체 누굴 위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가정(假定)이지만 생각해 보자 : 우리 동해안(東海岸)에 건설(建設)되어 있는 원전(原電) 가까운 곳에서 지진(地震)과 그에 따르는 쓰나미등의 불의지재(不意之災)로, 원전(原電) 폭발(爆發)과 함께 대규모(大規模) 방사능 유출(放射能 流出) 사고(事故)가 터지고, 엄청난 량(量)의 방사능 오염수(放射能汚染水)를 동해(東海)로 무단방류(無斷放流)한다고 했을 때, ‘일본(日本)과 미국(美國)’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건 상상(想像)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이래서 ”식민국(植民國) 체제(體制) 하(下)에서 무늬만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으로 살고 있는 것이고, 정신승리(精神勝利)에 빠져 스스로 의지(意志)가 없으니 그게 더 큰 문제(問題)다.】
‘가해자(加害者)와 피해자(被害者)’라는 입장(立場)은, 지구(地球)가 거꾸로 돌아도 변할 수 없는 팩트다. 출세가도(出世街道)를 달린 자(者)가 어떻게 피해자(被害者)인가?
7,700만 국민(國民)들께서는 ‘왜(倭)=일본(日本)’의 주장(主張)에 대해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고 자신(自身)있게 말할 수 있나? ”친일(親日)도 친일(親日) 나름이고, 친일(親日)에 앞서 극일(克日)이 앞서야 하는 것이다. 지하(地下)에 영면(永眠)하고 계신 수많은 투사(鬪士)들이 놀라 벌떡 일어날 일이다.
2023년 06월 13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미국과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
이들을 무시한 외교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수천만 국민들에게 '불행'만을 안겨줄 뿐이다.
어느 한쪽을 패싱하는 외교는 대한민국에 있어 엄청난 국가이익을 스스로 버리는 꼴이 된다.
"통일" 참 좋은 말이다.
'자유통일'이니 '적화통일'이니 하는 말들을 자주 써먹는다. 헌데 이런 말을 아주 써먹는 놈들을 보면 :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는, 국민들을 개돼지 취급하며, 사고할 줄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국민으로 취급한다.
누구맘대로 "자유통일인가?"
누구맘대로 "적화통일인가?"
"자유통일이든, 적화통일'이든 위의 "미국과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 네 나라의 승인없이는 불가능한 구조다.
정치계절만 닥치면 자유통일이니 적화통일이니 하면서 국민들을 개돼지 취급하는 놈들이 있다. 바로 머저리같은 일부 정치인들이다.
니들 맘대로 통일이 된다면 대한민국은 벌써 통일이 되었을 것이다.
"미국과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는 통일보다는 현상유지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누구맘대로 통일인가? 그래서 4강외교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다.
헌데 지금 대한민국 외교는 안녕하신가?
뭐가 뭔지 몰라 허우적거리고 있을 뿐!. "무능력과 무책임만이 난무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