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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04월20일(토요일) 연천군 [숭의전지&연천 당포성&임진강 주상절리&연천 전곡리유적] 탐방일정
탐방지 : 연천군 [숭의전지&연천 당포성&임진강 주상절리]
탐방코스: [숭의전 버스 정류장~(127m)~숭의전지~(2.4km)~연천 당포성~(3.5km)~임진강 주상절리~(1.7km)~동이리 종점 버스 정류장] (km)
탐방일 : 2024년04월20일(토요일)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3시간23분 소요)
06:00~08:00 구산역에서 6호선 지하철을 타고 동묘앞역으로 가서 1호선으로 환승하여 동두천중앙역으로 이동 [2시간 소요]
08:00~08:03 동두천중앙역 3번 출구로 나와서 동두천중앙역3번출구 정류장으로 이동 [3분, 87m 이동]
08:03~08:30 동두천중앙역3번출구 정류장에서 숭의전 정류장으로 가는 52번 버스 승차 대기
08:30~09:22 52번 버스를 타고 동두천중앙역3번출구 버스 정류장에서 숭의전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52분, 52개 정류장 이동]
09:22~09:24 경기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에 있는 숭의전 버스 정류장에서 탐방출발하여 경기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 382-27 번지에 있는 숭의전지로 이동 [2분, 127m 이동]
09:24~10:00 숭의전지 탐방
[연천 숭의전지(崇義殿址)는 조선시대에 전조(前朝)인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게 했던 숭의전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은 원래 고려 태조 왕 건(王 建)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었던 곳으로 1397년(태조 6)에는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숭의전의 시초이다. 사당 건립 이후 1399년(정종 1년)에는 왕명에 의해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충경왕, 元宗), 충렬왕(忠烈王), 공민왕(恭愍王)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후 1425년(세종 7)에 이르러 조선의 종묘에는 5왕(五王)을 제사하는데 고려조의 사당에 8왕을 제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4왕만을 봉향토록 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명(복지겸;卜智謙, 홍 유;洪 儒, 신숭겸;申崇謙, 유금필;庾黔弼, 배현경;裵玄慶, 서 희;徐 凞, 강감찬;姜邯贊, 윤 관;尹 瓘, 김부식;金富軾, 김취려;金就礪, 조 충;趙 冲, 김방경;金方慶, 안 우;安 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정몽주;鄭夢周) 등을 배향토록 하였다. 1452년(문종 2)에는 고려 현종의 먼 후손을 공주에서 찾아서 순례(循禮)라는 이름을 내린 후 부사(副使)를 삼아 그 제사를 받들게 하고 토지와 노비를 내렸다. 숭의전은 조선시대 1605년(선조 38), 1727년(영조 3), 1789년(정조 13), 1868년(고종 5), 1908년(순종 2) 등 총 5차례에 걸쳐 개수(改修)와 중수(重修)를 반복하였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중에 전소하였으며, 이를 1972년에 사적으로 지정하고 다음해에 재건하게 되었다.
현재 재건된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숭의전(崇義殿, 4왕의 위패를 모신 곳)을 비롯하여 배신청(陪臣廳, 고려 16공신의 위패를 모신 곳), 이안청(移安廳, 위패를 잠시 모셔 두는 곳), 전사청(典祀廳,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 하는 곳), 앙암재(仰巖齋, 제례 때 사용하는 향, 축, 폐등을 보관하고 제사에 참여하는 제관들이 제례준비를 하며 머무는 곳) 등 5동의 부속건물과 내신문(內神門), 외신문(外神門), 협문(夾門) 3동, 운조문(雲鳥門) 등 6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부속건물들은 모두 돌담장으로 둘러져 내부가 잘 보이지 않으며 앙암재와 전사청은 각각 별도로 독립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마전군 읍지(麻田郡 邑誌)에 의하면 1899년 당시 숭의전은 지금 재건된 것보다 규모가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즉, 당시는 18칸 규모의 정전과 배신청, 이안청, 향배청, 전사청, 주방 등의 건물과 2개의 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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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의전지(崇義殿址)는 조선시대에 전조(前朝)인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게 했던 숭의전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은 원래 고려 태조 왕 건(王 建)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었던 곳으로 1397년(태조 6)에는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숭의전의 시초이다. 사당 건립 이후 1399년(정종 1년)에는 왕명에 의해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충경왕, 元宗), 충렬왕(忠烈王), 공민왕(恭愍王)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후 1425년(세종 7)에 이르러 조선의 종묘에는 5왕(五王)을 제사하는데 고려조의 사당에 8왕을 제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4왕만을 봉향토록 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명(복지겸;卜智謙, 홍 유;洪 儒, 신숭겸;申崇謙, 유금필;庾黔弼, 배현경;裵玄慶, 서 희;徐 凞, 강감찬;姜邯贊, 윤 관;尹 瓘, 김부식;金富軾, 김취려;金就礪, 조 충;趙 冲, 김방경;金方慶, 안 우;安 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정몽주;鄭夢周) 등을 배향토록 하였다. 1452년(문종 2)에는 고려 현종의 먼 후손을 공주에서 찾아서 순례(循禮)라는 이름을 내린 후 부사(副使)를 삼아 그 제사를 받들게 하고 토지와 노비를 내렸다. 숭의전은 조선시대 1605년(선조 38), 1727년(영조 3), 1789년(정조 13), 1868년(고종 5), 1908년(순종 2) 등 총 5차례에 걸쳐 개수(改修)와 중수(重修)를 반복하였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중에 전소하였으며, 이를 1972년에 사적으로 지정하고 다음해에 재건하게 되었다.
현재 재건된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숭의전(崇義殿, 4왕의 위패를 모신 곳)을 비롯하여 배신청(陪臣廳, 고려 16공신의 위패를 모신 곳), 이안청(移安廳, 위패를 잠시 모셔 두는 곳), 전사청(典祀廳,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 하는 곳), 앙암재(仰巖齋, 제례 때 사용하는 향, 축, 폐등을 보관하고 제사에 참여하는 제관들이 제례준비를 하며 머무는 곳) 등 5동의 부속건물과 내신문(內神門), 외신문(外神門), 협문(夾門) 3동, 운조문(雲鳥門) 등 6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부속건물들은 모두 돌담장으로 둘러져 내부가 잘 보이지 않으며 앙암재와 전사청은 각각 별도로 독립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마전군 읍지(麻田郡 邑誌)에 의하면 1899년 당시 숭의전은 지금 재건된 것보다 규모가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즉, 당시는 18칸 규모의 정전과 배신청, 이안청, 향배청, 전사청, 주방 등의 건물과 2개의 문이 있었다.]
[패망한 고려 왕조의 종묘가 왜 이곳에?
박성호 기자
오마이뉴스 기사 입력일 : 2021. 6. 17.
[연천여행 2편] 숭의전지에 가다.. 코로나 시대의 여행은 역사 이해를 높이는 계기로 삼아야
여행 중에 어떤 유적들을 만날 때면 호기심을 가지고 그곳의 역사를 들춰보게 된다. 나와는 다른 시간대를 살아 어떤 교감도 없지만 지금의 나 혹은 우리를 있게 한 선조들의 삶을 상상해 본다.
오월 초순 연천 여행을 다녀와서 지난 기사에 소개했던 고구려 시대 성인 '당포성'이나 한반도의 지질학적 역사를 보여주던 '임진강 주상절리'도 그러했고 이번 기사에서 소개할 고려 왕조의 종묘격인 '숭의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종묘에 비하면 보잘 것 없어 어떤 방문자들은 한줌의 기억 거리도 가져가지 못하겠지만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개국 역사를 조금 안다면 숭의전은 진한 기억으로 남게 된다.
초라하지만 의미 있는 유적지 '숭의전지'
당포성에서 임진강 하류 쪽으로 조금 내려가다 보면 절벽 위에 비운의 왕국 고려의 종묘격인 숭의전(연천군 미산면)이 자리하고 있다. 숭의전으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 '어수정(御水井)'이라는 약수터가 있다.
임금이 물을 마신 곳임을 의미하는 어수정은 사실 한반도 여러 곳에 있다. 동두천 어수정은 조선 태조가, 여주는 단종이, 그리고 이곳 연천은 고려 왕건이 물을 마신 곳이다. 한반도에 어수정이 몇 개나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어수정에서 걸어서 백여 미터만 올라가면 돌담으로 구분된 3개 구역에 잘 보존된 한옥 다섯 동이 나타난다. 한 시대를 풍미한 왕조의 종묘라고 하기엔 너무 보잘 것 없는 규모와 시설이다. 왼쪽부터 제례 때 사용하는 향, 축, 패 등을 보관하고 제관들이 제례를 준비하는 동안 머무는 앙암재(仰巖齋, 재실)가 있고, 담장 너무 바로 옆에 제수를 준비하고 제기들이 보관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전사청은 원래 조선시대 나라 제사와 증시(贈諡) 등을 관장하던 기관으로 전사관(典祀官)이 배치되어 제사에 소홀함이 없도록 관리를 하는 관청이다. 조선 정부가 패망한 고려의 종묘를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 태조 왕건과 세 왕의 위폐가 모셔진 숭의전(崇義殿), 숭의전의 위폐를 잠시 모셔 두었다는 이안청(移安廳), ㄱ자로 건물 배열이 바뀌는 자리에 고려 공신 16인의 위폐가 모셔진 배신청(陪臣廳)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조선의 태조(이성계)가 1397년(태조 6년)에 고려 태조(왕건)의 사당을 이곳에 지었고 이후 고려의 네 임금을 모시는 사당 즉 고려의 종묘가 되었다는 단편적인 상식을 가진 채 접한 숭의전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패망한 고려의 일부 왕족과 대신들이 왕건의 신위를 돌로 만든 배에 실어 개성 인근 예성강으로 나갔다고 한다.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하다가 결국 날이 저물어 배를 묶어 놓고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배를 묶은 쇠줄은 다 썩어 없어지고 배도 사라져 버렸다. 강을 이 잡듯이 뒤지다 결국 지금의 숭의전 자리인 임진강 잠두봉 아래에서 배를 찾게 되고 그리하여 이곳에 신위를 모셨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전설일 뿐 아무래도 자신의 왕조를 멸망시킨 이씨가 만들어준 숭의전에 대해 못마땅했던 일부 왕씨들이 만들어 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재실 '앙암재'라는 명칭에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태조 왕건의 명복을 빌던 원찰(願刹) '앙암사(仰巖寺)'라는 절이 이곳에 있었기에 조선 태조가 이곳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정종 1년에 왕건을 포함하여 혜종·성종·현종·문종·원종(충경왕)·충렬왕·공민왕까지 여덟 왕의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고 세종과 문종 때 중건을 했다. 숭의전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도, 고려 공신 16인의 위패를 함께 모신 것도, 충청도에서 왕씨 성을 가진 후손 왕순례를 찾아 부사라는 벼슬을 주어 이곳을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게 한 것도 문종이었다고 한다.
조심스레 숭의전의 돌계단을 올라 안을 보니 태조(왕건)의 영정과 위패는 정면에, 다른 세분의 위패는 좌우에 모셔져 있다. 세종 7년 당시 아직은 건국 초기여서 조선의 종묘엔 네 분의 왕(아마 태조의 부친과 태조, 정종, 태종)만 모셔져 있는데 고려 종묘에 여덟 왕을 모시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논란이 일어 이때부터 태조와 현종, 문종, 원종으로 축소했다고 한다.
좌우간 패망한 고려 왕조의 종묘가 이곳에 만들어지고 지켜지게 된 사연이 단순하지는 않아 보인다. 배신청에는 정몽주, 강감찬 등 개국 공신이거나 아니면 홍건적 등 전란의 위기에서 고려를 지킨 인물들이 모셔져 있다. 개국 공신뿐만 아니라 고려 말기 인물까지 고루 분포시킨 걸로 봐서, 조선 조정이 숭의전의 고려 종묘 기능은 제한했지만 공신을 기리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자원봉사하시는 여성분이 정전 앞 가운데 돌계단은 사용하지 않는 계단이며 마당에서 숭의전으로 오를 때는 우측으로, 참배를 하고 내려올 때는 좌측 계단을 사용해야 한다는 설명을 해주신다. 발을 옮길 때도 왼발과 오른 발을 번갈아 움직이지 않고 오른 발이 디딘 단을 왼발이 따라 디디는 식이어야 한단다. 세 개의 문으로 구성된 삼문도 가운데는 혼이 드나드는 문일 뿐 산 사람은 사용하지 않으며, 제를 드리는 사람들은 동입서출(東入西出) 원칙에 따라 밖에서 보아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고 왼쪽 문으로 나와야 한다.
삼문으로 나와 임진강 쪽으로 나서면 벼랑 위에 향토문화제로 지정된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수령이 오백년이 넘는 범상치 않은 나무들이다. 문종이 숭의전을 중건하던 1452년에 왕씨의 후손이 심었다고 하는데 전사청의 부사로 임명된 왕순례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다.
안내판에는 느티나무에서 '웅' 하는 소리가 나면 그 해에는 눈이나 비가 많이 왔었고, 까치나 까마귀가 모여들면 마을에 경사나 초상이 났다는 얘기가 보인다. 흔한 얘기지만 그렇게 느티나무는 숭의전을 지키는 신물로 신성화 되었을 것이다.
'숭의전지'의 우여곡절
앙암재를 제외하곤 세월의 풍파가 느껴지지 않기에 찾아보니 원래 건물들은 한국 전쟁 때 유실되었고, 1970년대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전쟁으로 전각이 소실된 후 1973년 왕씨 후손들이 정전을 복구 했으며, 나라 돈을 지원받아 1975년에는 배신청을, 1976년에는 이안청을 그리고 이듬해 2월 삼문(三門)을 신축했다. 좌우로 나란한 건물의 배치가 조선의 사당에서 찾아보기 힘든 경우여서 70년대 복원 과정의 엄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글들도 눈에 띄었다.
왜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건의 사당을 지었을까? 첫 번째 이유는 여러 역성혁명의 역사에서 발견되듯이 새로운 권력이 빠르게 나라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조선 태조는 조선의 종묘에 공민왕을 모심으로써 새로운 권력이라기보다 고려 권력의 승계로 포장하려 했다.
태조는 고려말 임금인 우왕과 창왕을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였던 신돈의 자식이라고 간주하고 자신이 섬긴 마지막 임금은 공민왕이었다고 백성들에게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공민왕을 이씨 조선의 종묘에 모시고 실제로 창왕을 폐위하고 자신이 세운 공양왕(고려 20대 왕 신종의 7대손)으로부터 선위를 받는 식으로 임금에 오르기도 했다, 왕건의 사당을 연천에 지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두 번째는 역사적 상상력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조선 태조 이성계의 사람 됨됨이다. 새로운 왕조는 구 왕조의 흔적을 지우고 구세력의 씨를 말리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왕씨 중에는 옥(玉)씨나 주(主)씨로 성을 바꾼 이들도 있었고 '두문불출(杜門不出)'의 유래도 결국 고려 유민의 비극적 사건이다.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부조현이라는 고개에 조복을 걸어두고 광덕산에 들어가 '두문(杜門)'이라는 마을을 만들어 살면서 '새 왕조에 출사를 하지 않고'(不出) 있던 고려 충절 72분이 있었는데 마을에 불을 질러 몰살시켰다고 한다. 이른바 두문동 화재 사건이다.
비록 영조 때에 처음 비석을 세워 72현을 기리게 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두문동의 비극은 시대를 거치면서 이미 영조 재위 시절에 눈덩이처럼 부풀려진 이야기일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새 왕조가 들어서기 위해 수많은 피 부림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선 태조가 비록 백성과 나라를 구하기 위해 역성혁명을 일으켰지만 평생 섬겼던 왕씨 왕가나 죽은 이들에게 최소한의 예를 갖추려 했을 수도 있다.
게다가 두문동 사건으로 불필요한 참극까지 벌어졌으니 역사가 태조 임금을 아무리 냉혈한으로 몰더라도 실제로 인간인 그에게도 괴로움과 고뇌가 일지 않았을까 싶다. 숭의전은 권력을 안정화시키려는 현실 정치의 결과물이자 태조 이성계의 인간적 참회였을 지도 모를 일이다.]
10:00~10:40 경기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778 번지에 있는 연천당포성으로 이동
10:40~11:10 연천당포성 탐방
[기나긴 한반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땅, 연천
박성호 기자
오마이뉴스 기사 입력일 : 2021. 5. 31.
반복되는 긴장의 역사 현장 - 당포성
당포성(시적 468호)은 외관상으로 탄성을 자아내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동벽의 일부만 남아 이곳이 중요한 성이었음을 혼자서 버겁게 증명하고 있다. 이 일대를 정비하고 관광 안내를 한 것도 얼마 되지 않는 분위기다.
동벽의 강 쪽 상단부에 전망대를 꾸며놓았고 바로 옆에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어 아래에서 보면 상당히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성의 풍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거리쯤에 전망대와 함께 조성된 듯한 관광안내소가 만들어져 있었지만 아직 사용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연천 방문의 해(2020-2023)를 기해서 야심 차게 준비했다가 코로나를 만난 게 아닌가 싶다. 다행히 안내하는 이는 없어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관광안내판이 아쉬우나마 여행객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다.
당포성은 임진강과 당개 나루터로 흘러드는 하천이 형성한 삼각형 모양의 절벽 위에 만들어진 고구려 성으로 강에 접해 있는 두 면은 절벽 자체가 성벽 역할을 하고 있고, 나머지 한 면만 성벽을 쌓아 올린 아주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한강 유역을 빼앗겨 후퇴한 고구려는 6세기 중엽부터 120여 년 동안 임진강을 남쪽 국경으로 삼아 하류에서 상류 방향으로 덕진산성, 호로고루, 당포성, 무등리보루 등 10여 개의 성을 배치했다.
당포성은 강이 크게 굽어 흐르면서 물살이 느려져 도강이 가능한 여울목으로 신라군이 양주 쪽에서 북상하여 개성으로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전략요충지이다. 고구려가 만든 성이지만 신라 땅이 된 이후에도 성벽을 수리하여 사용되었다.
그래서 성 내부에서는 고구려 기와와 함께 신라 기와들도 출토되었다고 한다. 관광안내소는 개점 휴업 상태지만 당포성을 둘러보는 이들은 간간이 눈에 띄었다. 임진강과 성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동벽 전망대에 올라보니 성의 특징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참고로 동벽의 성벽이 그냥 저수지의 둑처럼 흙담만 보이는 것은 고증 결과에 따라 석축 바깥에 점토로 보강을 했기 때문이다.
당포성은 임진강 주상절리를 성의 한쪽 벽으로 사용하기에 결국 주장절리와 어우러져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자연이 빚어낸 놀라운 풍광에 역사 이야기까지 보태지면서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올 가치는 더 풍성해진다.
아이러니한 것은 당포성 근처에 우리 국군이 사용하는 참호나 방어진지들이 눈에 띈다는 점이다. 수천 년 전 한반도가 여러 국가로 나뉘어 서로 작거나 큰 전쟁을 치르고 겨우 통일이 되어 하나의 나라가 되었는데 어느새 우리는 다시 분단국가가 되어 그 당시 방어 지점들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싶다.
최초의 당포성은 북쪽의 고구려군이 사용하던 방어 시설이어서 양주 방면에서 북상하는 적을 방어하는 역할을 주로 했지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임진강을 건너 양주 방면으로 남하하는 적을 방어하는 역할도 했다고 한다.]
11:10~12:00 경기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817 번지에 있는 임진강 주상절리로 이동
12:00~12:20 임진강 주상절리 탐방
[기나긴 한반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땅, 연천
박성호 기자
오마이뉴스 기사 입력일 : 2021. 5. 31.
기록으로 알 수 없는 한반도의 역사 - 임진강 주상절리
당포성 전망대에서도 임진강 주상절리의 풍광을 감상 할 수 있지만 조금만 발품을 더 팔면 눈이 즐겁고 가슴이 벅찰 정도인 자연의 경이로움을 맛볼 수 있다. 당포성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임진강 주상절리(동이리 소재) 전망대가 그곳이다.
당포성에서 임진강을 따라 상류로 두어 번 정도 굽이쳐 오르는 지점인데, 전망대에서 좌우로 머리들 돌리면 그야말로 어떤 화가도 흉내 낼 수 없는 12폭 병풍이 펼쳐졌다. 땅 위의 이런저런 푸른 나무들을 떠받치고 있는 땅속의 모습이 마치 칼로 베어낸 듯 단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망대 안내판에 의하면 이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지질시대의 암석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한반도의 형성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한반도 지질교과서로 불린다고 한다. 또한 현무암으로 된 주상절리는 대부분 바다에서 발견되는데 강에서 발견된다는 점이 특이하단다.
동이리는 북동쪽 철원 방면에서 내려오는 한탄강과 북쪽에서 내려오는 임진강이 만나는 삼각지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데 한탄강을 타고 내려오던 용암이 이곳에서 임진강을 거슬러 일부 올라갔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대략 이런 설명을 머리에 두고 건너편 주상절리를 보니 이해되는 부분도 있지만 복잡해지는 부분이 더 많았다. 안내판에 표시된 주상절리의 형성 과정은 용암이 강을 따라 흐르면서 식어서 현무암 지대를 형성하게 되고 그 위로 다시 물이 흐르면서 침식 작용이 일어나 좌우로 주상절리를 형성하는 강이 다시 생기는 식이었다.
그런데 용암이 굳어진 현무암층 위로 다시 물이 흘러 점점 넓은 강을 형성한다면 결국 침식 작용인데, 일반적인 침식은 유속이 빠른 중심부가 깊게 파이고 유속이 느린 강의 좌우 가장 자리는 덜 침식되어 얕아지기 마련이다.
왜 이곳은 여름철 갈라진 논바닥 마냥 좌우 강둑이 주상절리와 같은 절벽을 형성하는 것일까? 이 정도는 지질학도가 아니라면 충분히 가져볼만한 의문이기에 안내판의 주상절리 형성 과정을 고개만 끄덕이기는 힘들었다.
용암으로 메꿔져 평평해졌지만 다른 평지와는 결속력이 다른 현무암 길을 따라 지층 아래로부터 어떤 힘이 작용하여 크랙이 생겼고, 이로 인해 땅 속 현무암 응결 체인 주상절리가 드러나는 게 아닐까 하는 추론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 역시 지질학에 대한 지식이 짧으니 품을 수밖에 없는 의문이겠지만 이런 의문은 결국 안내판의 정보가 누구나 충분히 이해 가능한 수준으로 정리되지 않아서 일 것이다.
참고로 바닷가에서 발견되는 주상절리는 풍화 작용의 결과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용암이 바닷물과 만나면서 급격히 응고되어 강도가 높은 외벽을 형성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느린 속도로 응고되면서 수축과 팽창을 반복한 내부는 다면체의 결정들을 형성하게 되는데 바닷물의 풍화 작용으로 외벽이 깎여 나가면서 안쪽의 다면체 결정들이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의문이 남으면 또 어떠하리. 요즘 서점을 가보면 지리 혹은 지질학에 대한 교양서들이 생각보다 눈에 많이 띈다. 나의 임진강 주상절리 방문은 결국 그 책들을 꼭 몇 권 사 봐야겠다는 지적 호기심의 발동으로 이어지는 긍정적인 발걸음이 되고 말았다.]
12:20~12:45 경기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에 있는 동이리종점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25분, 1.7km 이동]
12:45~13:15 동이리종점 정류장에서 농협사거리 정류장으로 가는 81번 버스 승차 대기
13:15~13:27 81번 버스를 타고 동이리종점 정류장에서 농협사거리 정류장으로 이동 [12분, 2개 정류장 이동]
13:27~13:40 농협사거리 정류장에서 전곡리선사유적지 정류장으로 가는 61, 81-1, 82, 82-3, 56-3 버스 승차 대기
13:40~13:43 버스를 타고 농협사거리 정류장에서 전곡리선사유적지 정류장으로 이동 [3분, 2개 정류장 이동]
탐방지 : 연천군 연천 전곡리유적
탐방코스: [전곡리선사유적지 버스 정류장~(419m)~연천 전곡리선사유적지~(1.5km)~뚝배기양평해장국 연천전곡점] (km)
탐방일 : 2024년04월20일(토요일)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1시간42분 소요)
13:43~13:49 경기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에 있는 전곡리선사유적지 정류장에서 탐방출발하여 경기 연천군 전곡읍 양연로 1510 번지에 있는 연천전곡리선사유적지로 이동 [6분, 419m 이동]
13:49~15:00 연천 전곡리선사유적지 탐방
[연천 전곡리유적(漣川 全谷里遺蹟)
문화재 지정 사적 제268호
건립시기 구석기시대(전기)
성격 생활유적
면적 77만 8,296㎢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양연로 1510 외
요약 :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에 있는 석기시대 구석기의 주먹도끼·긁개·석핵 등이 출토된 생활유적. 사적.
목차
개설
내용
의의와 평가
개설
사적 제268호. 지정면적 778,296㎢. 1978년에 당시 동두천 주둔 미군인 보웬(Bowen, G.)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고, 1978년에서 1983년까지 6차례, 1986년에 한 차례의 발굴 조사가 있었다.
중부 충적세 후기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유적은 현재 전곡읍 남쪽 한탄강이 감싸고 도는 현무암대지 위에 분포해 있다. 전곡읍에서 한탄강 유원지를 연결하는 도로의 양편으로 북서쪽에 제1지구, 남쪽으로 서편이 제2지구, 동편이 제3지구이다. 제4지구는 제1지구의 강 건너편 대지 위에 분포해 있다. 지도상의 위치는 동경 127°03′, 북위 38°01′에 해당된다. 현재까지의 발굴은 모두 제2지구에서 실시되었다.
내용
1) 지질 및 연대
전곡리 일대는 추가령지구대의 서남부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경기변성암류인 편마암과 화강암이 선캠브리아기에 형성되어 지질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전곡리의 동북편으로 연천과 철원 사이의 지역에는 중생대동안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응회암·현무암·역암 등이 형성되어 있다. 동남편으로는 대보거정화강암류가 중생대 쥐라기에 분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곡리 일원을 포함한 한탄강 연안지역에는 신생대 제4기에 분출된 현무암이 분포하고 있다. 이 현무암은 철원·평강지역에 산재하는 소분화구로부터 급격하지 않은 분류(噴流)의 양상으로 흘러 고기(古期) 한탄강·임진강을 따라 하류인 문산까지 진출해 있다. 용암류층은 상류에서 6매, 하류인 문산에서 1매가 보이며, 유적이 있는 전곡리에서는 2매가 관찰되고 있다.
전곡리의 2매는 포타슘·아르곤 연대측정결과, 하부의 것은 대략 60만년 전후, 상부의 것은 30만년 전후에 분류된 것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이 현무암층들을 전곡 현무암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브루네스 정지자기기(正地磁氣期)에 해당되고 있다.
전곡 현무암 분출 전의 고기 한탄강의 퇴적은 현재의 한탄강을 따라서 현무암 아래에 미고결의 사력층으로 나타나 백의리층으로 부르고 있다. 현재의 한탄강은 원래 현무암 분출 후 넓게 형성된 하상 위를 한동안 흐르면서 하상의 바닥을 이루고 있던 현무암을 침식해 결국 오늘날의 한탄강으로 안정하게 되었다.
전곡 현무암은 냉각시 수축의 차이로 인해 발달하게 된 주상절리 등의 구조로 균열이 있어서, 서리작용과 집중호우의 기후현상이 특징인 한반도 중부지방에서 짧은 기간동안 침식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현무암대지 위에 존재하는 구석기 포함의 퇴적물은 한탄강이 대지 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기간 동안에 형성된 것이다.
빠른 속도의 현무암침식과 현무암이 30만년 전경에 분출된 것으로 본다면, 대지 위의 구석기 포함층의 형성연대는 적어도 20만년 전후 이하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이는 전곡리 유적의 적색점토가 18∼21만 년 전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보는 중국 뤄촨(洛川) 뢰스층의 적색토대와 연결될 수 있는 점으로도 뒷받침된다. 이러한 연대관과는 별도로 퇴적층의 발열형광법(thermolumines-cence dating method)에 의해 얻어진 약 4만 5000B.P.를 유적의 연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2) 퇴적층
퇴적층은 지점에 따라 1m 미만의 깊이에서 6∼8m 내외의 깊이까지 드러나고 있다. 제2지구의 발굴에서는, 동편 언덕에서 점토층으로만 이루어진 퇴적층이 있고, 서편의 강쪽 능선에서는 두터운 굵은 모래층이 점토층 아래에 드러나고 있다. 이 모래층은 다시 미세사층을 덮고 있다.
이 회색 또는 황색의 미세사층은 제2지구 서편에 버려진 유로(流路)에 형성된 우각형호가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모래퇴적은 당시 이 지역의 유로가 활동적이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일부 사질층에서는 유물집중층이 드러나고 있으며 이는 유수에 의해 재퇴적된 것으로 판단된다. 점토퇴적물은 유수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범람원 퇴적으로 보이는데 유물의 집중이 산발적으로 관찰되고 있다.
한탄강이 현무암대지 위에서 퇴적층을 형성하고 있는 동안 단속적으로 고인류가 출현해 사냥과 채집을 하는 구석기 유적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퇴적층 속의 유물은 일부 지질학적인 변동으로 재퇴적되었거나 퇴적시에 지표수 그리고 지중에서 벌레와 식물뿌리 등 생물학적인 요인에 의해서 변형되어 현재 고인류의 직접적인 행위파악이 가능한 생활면은 보이지 않고 있다.
3) 유물
7차에 걸친 발굴에서 3,000점 이상의 석기가 출토되었고 이보다 많은 수가 지표에서 채집되었다. 석기는 주로 석영맥암과 규암을 이용한 것이 거의 대부분이며 이 외에 현무암·편마암·운모편암도 소량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재료들은 거의 모두 당시의 하상에 존재하던 강자갈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1m 정도 크기의 냇돌도 있다.
가장 특징적인 석기는 아슐리안형의 주먹도끼(hand-axe)들로 양면가공된 것과 외면가공된 것이 있다. 평면이 타원형인 것과 첨두형인 것이 모두 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몸통이 두텁고 큼직한 박편흔으로 덮여 있어서 아프리카의 상고안(Sangoan) 석기공작과 지형적 유사성이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주먹도끼 외에도 가로날도끼와 뾰족끝찍개(pick) 등의 대형 석기가 존재하고 있다. 찍개(chopper)는 양면가공과 외면가공의 것들이 있는데 대부분 냇돌 또는 냇돌조각으로 만들었다. 다각면원구는 상당히 구에 가까운 것에서부터 불규칙다면체까지 여러 가지 모양이 있는데 대부분 한쪽 면에서 삼면까지 자연면이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소형 석기로는 긁개가 주류를 이루고 소량의 첨두기와 홈날석기 등이 채집되었다. 긁개는 직선날·볼록날·오목날 등의 형식이 보인다. 몸통이 두툼하고 급경사인 볼록날의 긁개가 보다 정형화한 형식이다. 일반적으로 소형 석기들은 집중가공된 것이 적어서 제작상의 별다른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
석핵은 2, 3매의 박편을 떼어낸 변형된 냇돌 또는 즉시석핵(casual core)에서부터 보다 정형화한 반원추형 석핵에까지 다양하다. 즉시석핵류가 정형화한 형태의 것들보다도 훨씬 많다. 다량의 박편을 떼어낸 경우라 하더라도 일정 타격면을 반복 또는 규칙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불규칙하게 박편제작한 경우가 훨씬 많다. 박편제작이나 가공에는 직접타격법(돌망치를 사용한)이 주로 사용되었다. 주먹도끼 또는 가로날도끼 등의 대형 석기제작을 위한 대형 박편의 제작에는 대석법도 사용되었다.
박편은 대부분 천석의 자연면 평면이나 박리흔 평면을 이용해 떼어냈으며 소수의 다각모서리 타격면(facetted striking platform)이 보이나 조정타격법으로 볼 수는 없다. 많은 수의 박편이 배면(dorsal face)에 자연면이 남아 있고, 박리각이 100∼105°와 110∼115° 두 범위에 집중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동일한 타격면을 2차까지만 사용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발굴에서 채집된 석기 중 다듬은 석기는 대체로 5∼15% 내외이다. 약간의 석핵과 박편이 존재하고 대형 또는 소형의 석편과 부스러기가 많은 수(80% 내외)를 차지하고 있으며 소량의 자연천석도 존재한다.
주먹도끼 등 양식적으로 발달한 석기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기법으로는 비정형과 즉시성의 석기양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는 석재의 제약성과 함께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온대환경의 적응과정에서 이루어진 결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전곡리에서 발견된 아슐리안형 석기들은 1970년대 말까지 이러한 석기의 존재유무로 동아시아와 아프리카·유럽으로 구석기문화를 2분하던 모비우스의 학설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증거이다. 이로써 세계 구석기학계의 고인류의 문화적인 발전과정에 대한 이해에 새로운 면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도 구석기공작에 대해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들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한반도 내에서는 빈약한 전기 구석기공작 이해에 풍부하고도 획기적인 자료가 되었을 뿐 아니라 중부 홍적세동안 고인류의 서식양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전곡리 유적조사를 계기로 한탄강·임진강 유역에 대한 4기 지질학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를 토대로 유적의 형성과정에 대한 고찰이 제고됨으로써 구석기연구의 방법론 발달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15:00~15:25 경기 연천군 전곡읍 평화로 599-1 1층에 있는 뚝배기양평해장국 연천전곡점으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5:25~16:10 뚝배기양평해장국 연천전곡점에서 식사
16:10~16:20 전곡역 1번 출구까지 도보로 이동 [10분, 561m 이동]
16:20~16:40 전곡역에서 동묘앞역으로 가는 1호선 전철 승차 대기
16:40~19:00 전곡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동묘앞역으로 가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구산역으로 이동 [2시간20분 소요]
연천군[숭의전지&당포성&임진강 주상절리]
위치도
연천 전곡리선사유적지 안내도
연천 전곡리선사유적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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