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10월 16일, 문중의 시제였다. 나는 우리 문중의 15대 종손이다.
문중에서는 적어도 100년 전에 종산(宗山)과 위토(位土) 마련하고, 일가 중에서 위토를 경영하여 그 일부로 분묘의 관리와 문중의 제사에 대한 비용과 준비를 맡도록 했었다. 종산(宗山)에는 15대조 할아버지 이하 많은 분들이 모셔져 있으며, 그 묘소를 관리하기 위한 묘전(墓田)과 문중의 제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제전(祭田)을 마련해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대가 변하고 종토(宗土), 즉 종산과 위토를 관리 경영하던 사람은 죽고, 그 후손이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한심스러운 것은, 과거 종토를 개인이 임의로 처분하지 못하도록 3,4명의 각 지파 적장자들의 명의로 등기를 내 놓은 것이 나중에 문제가 되는 경우다. 이 등기 권리자들이 모두 사망하고 나면, 민법상으로는 상속의 대상이 되며, 따라서 세금을 물어야 하고, 심지어 등기권리자들끼리 법정 싸움도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권리자들 가운데 어떤 놈이 종토를 팔아 먹고 튀려고 하는 경우는 그야말로 이전투구가 될 가능성도 크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법에는 문중도 일종의 느슨한 형태의 법인(法人)으로 인정하는 조항이 들어가게 되었다. 좀 어렵게 말하자면, 비영리 공익법인에는 개인의 결사체인 비영리 사단법인과 기부금으로 조성되는 재단법인이 있는데, 우리나라 민법은 사단법인과 재단법인의 교집합 형태, 즉 동일 의지를 갖는 개인들의 집합체인 사단법인이 비영리 재단법인을 동시에 설립하여 총합적으로 운영하지는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형태가 가능하다면 세제 혜택이 주어지는 비영리 법인이 재산 은닉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들은 각종 재단을 세워서 사적으로 활용하는 예도 흔한 것 같다. 특히 학교를 운영하는 학교 법인의 경우, 땅 투기를 하여 돈을 불리는 예는 많이 있는 것 같고, 나도 직접 보고 겪어보기도 했다.
비영리 법인과 관련하여 지적할 또 하나는 운영진을 친족으로 구성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 재단법인의 경우에도 이사진에 특수 관계인 비율에 대한 제한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중에는 이러한 제한이 있을 수가 없다. 애초에 친족으로 구성된 사단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문중이라는 것은 혈연관계에 의해서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사단법인이면서 종중의 재산을 운영할 수 있는 재단법인의 성격을 동시에 갖게 되는 것이다. 문중은 기부금을 받을 수 있으며, 문중 명의의 재산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문중의 화합을 도모하는 것을 미풍양속으로 보고, 이를 권장하기 위해 재단법인의 성격도 부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물론 지나치게 큰 재정을 허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민법상 문중이라는 것은 상당히 느슨하면서도 일정 정도의 혜택을 주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 집안은 원래 시제를 준비하는 일을 맡은 사람이 죽고, 그 후손은 그 의무를 다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이면서도, 위토는 경영하여 자기 배를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거의 10-20년 동안 제대로 시제를 지내지 못했다. 최근에는 추석전에 이뤄지는 벌초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선조들의 묘소가 완전히 풀숲이 되고 낙엽이 썩어서 퇴비 냄새가 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 최근 개발 호재를 타고 땅값이 오르자 땅을 팔아먹을 궁리를 하고 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최근에는 문중 멤버들이 직접 노동력을 제공하여 벌초를 하곤 했다. 올해는 문중의 몇 사람과 또 한 사람이 돈을 모아서 제수를 준비했다. 거의 20명에 가까운 문중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 물론 날짜가 일요일에 닿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나오지는 않은 것 같다. 이것에 대해서는, 저 앞에 이야기한 크리스챤센(Christiansen)의 조직의 경영 양태 중에서 culture tool로 경영되어야할 조직이, pride나 spontaneous action이 없어서 조직 붕괴 상태로 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결국 가문에 대한 자부심의 회복이 절실한 것 같다. (이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모종의 액션을 준비중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조직의 완전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일정부분 power tool이나 leadership tool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삼천포를 빠진 듯한데, 암튼 저 위에서 "또 한 사람"이란 분은 내가 '대부(大父)'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大父의 사전적 의미는 할아버지와 같은 항렬인 유복지친 외의 남자 친척. God fother가 아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항상 시제 축문을 작성하고, 두루마기를 입고 참석을 하셨으나, 제대로 시제를 모시지 못했던 것이 한이 되셨을 것이다. 시제는 먼저 산마다 산신제를 지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산신제 축문을 읽어 본 것이 그 언제였던가? 우리 집은 증조할아버지의 뜻으로 기제사에서 축을 읽는 것을 생략하고, 잔을 올리는 것도 1헌이 그쳐왔다. 그런데 그 大父가 산신제 축문과 할아버지들 축문을 모두 작성해 왔다. 그 까닭은 외지에서 제사 지내러 온 사람들을 배려해서였다. 시간도 원래 자정에 지내던 것을 9시로, 나중에는 8시로 당기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제수를 공들여 준비한 우리 어머니(宗婦)의 노고가 빛이 바랜다는 것이다. 이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우리 아버지와 大父는 산을 옮길 때마다, 우선 산신제를 지냈다.
시제를 지내는데 얼마나 제수가 많이 들길래 따로 농토를 마련하기까지 하나 하고 의아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 시제를 지내는 것은 거의 동네 잔치나 마찬가지였다. 과일, 부침개, 과자는 모두 높이 쌓았으며, 적도 상당히 컸다. (환갑 잔치상 앞에 놓인 높게 쌓아 올린 음식들을 생각하면 된다.) 그것에 비하면 이번에 장만한 음식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사과, 배, 밤, 대추, 감이 있었고, 산자와 다식이 있었고, 포는 있는데 식혜가 빠졌다. (식혜는 마트에서 팔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식혜는 국물이 아니라 식혜밥을 말한다.) 적은 물론이고 전도 없었다. (적은 구운 고기, 전은 부침재를 말함.) 나물과 장도 없다.
그러나 돌아가신 할아버지들이 조촐하게 나마 상을 받아 잡수신 것도 오래되었다면 정말 형편없는 집안이라 할 것이다.
大父는 약주로 두견주를 마련해 왔다. (나중에 음복을 하는데 맛이 좋더라.)
일단 강신을 하고, (처음에 제주가 술을 따라서 상석 앞에 세번 뿌리는 것을 말한다. 아마 혼백이 술냄새를 맡고 오시라는 뜻일게다.)
독축을 했다. (축문을 읽었다는 말이다.)
초헌, 아헌, 종헌 이렇게 삼헌을 올리고, 첨잔까지 한 다음, 일동 재배를 했다.
앞서 말했거니와 우리 집안은 (문중이 아니라) 독축과 아헌, 종헌을 생략해 왔다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모든 절차를 따져서 시행하는 것이 상당히 인상이 깊었다.
그런데 이것은 새발의 피였다.
보통은 여기서 음복과 철상을 하게 된다.
내가 어려서 (초등학생 때) 시제를 참석했을 때, 음복은 별다른 의식이 없이 제사를 지낸 후손들이 퇴주잔에 남은 술을 마시는 것이 전부였다고 생각된다. 증조할아버지가 "철상~"이라고 외치던 소리가 아직도 쟁쟁하다.
그런데 나도 그 다음에 일어난 사태는 경험해 보지 못했다.
제사를 주관하던 大父가
"제주는 서쪽을 보고 앉으시오." 하더니, 제삿상에 올려 놓았던 술잔을 건넨다.
제주인 우리 아버지께서 그것을 받으시더니 옆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면서 술을 마신다.
이 절차는 나에게는 정말 충격적이었는데, 아버지가 마치 일종의 퍼포먼스를 하는 배우처럼 느껴졌다.
9대에서 파가 갈렸는데, 그 지파에서는 원래의 의식 절차를 보존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종가(宗家)에서는 시대와 타협하여 그것을 변형시켰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의식을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즉 아버지가 어렸을 때만해도 의례가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 大父라는 분은 나만큼 배우지는 못한 분인 것 같은데,
이것은 옳은 일이라는 신념이 강한 분으로 보였다.
나중에 따로 상의할 일이 있었는데, 그 때 "문중의 화목"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이 분에게 발산되는 강력한 포스(force)는 그의 행동에서 나왔다.
산신제를 지내고 와서 시제를 모셔야 하는데, 뒤에서 참례자들이 잡담을 나누고 있다.
大父는 '이제 제사를 지내자"는 말을 하지도 않고, 일단 앉더니 아버지와 함께 강신을 하고, 바로 독축 모드로 들어간다.
그러자 이내 잡담은 멈추고 의식이 집전되기 시작한다.
산소를 옮길 때마다 상차림도 이 분 몫이라, 상당히 분주하면서도 하나하나 챙겨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 분은 마지막까지 감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제 제수로 사용한 음식은 원래 버리는 것이 아니라, 시제에 참례한 분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런데 사실상 "먹다 남은 음식"을 요즘 사람들 누가 가져가겠는가?
(원래의 의미는 음복의 개념인데, 飮福이라는 것은 '복을 마신다'는 것이다. 조상들이 잡수신, 즉 흠향하신 음식은 후손들에게는 복(福) 덩어리라는 개념이다. 그러니 그 복을 나누어 갈 권리가 제사에 참여한 후손들의 권리이기도 한 것이다. 歆饗이란 돌아가신 조상, 즉 신명(神明)이라 함.)
어쩃든 이 大父는 혼잣말로 '이건 어머니 갖다드리고..."라고 하면서 약간의 과일 등을 싸 놓는다.
나중에 나의 종조부께서 제수로 쓰지 않고 남아 있는 과일 등을 大父에게 드리라고 하였더니, 두 번 사양을 한다.
종조부께서 '집에 어머님 갖다 드리라.'고 말하자. 그제사 받는다.
겸양의 예절은 세 번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어머님 드릴 것을 먼저 챙겨놓는 것은 원래 우리나라에서는 상식적인 행동이다.
게다가 아직 관청에 문중으로 등록을 하지 못한 우리 문중을 등록되도록 하는 절차나, 법무적인 일에도 상당히 능숙하며,
참석한 문중 사람들에게 싸인이나 도장을 받아야 하는 절차에서 그들을 확신시킬 수 있는 핵심이 강조된 짧은 설명.
이렇게 저렇게 살펴봐도, 상당히 인상적인 인물인 것 같다.
이상을 종합하여, 내 마음 속에 내린 결론.
宗家가 왜 그렇게 보수적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
무슨 의식에 대한 절차 하나라도 변경하는 것은 종가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래야 하나?
그것은 그렇지 않으면 문중이 와해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편의에 따라 뭔가 하나라도 없애거나 변경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내 생각이 이 글로 전달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종가는 문중의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중심이 흔들리면, 전체가 흔들린다.
이것이 나의 보수(保守)에 대한 인식임을 깨닫는다. (현대의 정치적인 보수는 이와는 다른 것이다.)
문중의 의례를 치르는데, 상당히 번거로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예전에 모든 제수를 직접 준비하던 시대도 아니고, 마트에 가서 사오는 시대인데, 뭐가 어려울 것이 있겠는가? 모두 생각하기 나름이다. 다만, 의례라는 것, 영어로 리추어(ritual)이라는 것은 내 느낌으로는 퍼포먼스(performance), 우리 말로는 궂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렇다고 거기에 "허례"라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조직을 결속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퍼포먼스인 것이다. (그렇다고 종가에도 變通이 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 大父와 같은 의지와 행동을 바보스럽다고 볼 수 없다. 그는 오히려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것이다.)
추기:
1. 제삿상 차리는 법:
일단 조율리시(棗栗梨枾)를 백본(back-bone)으로 하고, 그 다음에 홍동백서(紅東白西), 좌포우혜(左脯右醯)를 적용한다.
뭔 소리냐고? 일단 우리가 보았을 때 맨 앞줄을 보면, 대추, 밤, 배, 감을 등뼈로 삼아 가운데 놓고, 그 다음에 사과와 같은 붉은 색 과일은 동쪽에 산자와 같은 흰색 음식은 서쪽에 놓는다는 것이다. 뭘 잘 모르는 집안에서는 보통, 사과와 배의 위치가 뒤바꿔 있다. (왜 그렇게 되는지 잘 생각해 보라.)
2. 시제 날짜 결정법
윗대 할아버지들이 잡수시고 나서 아랫대 할아버지 들이 잡수시도록 장유유서를 지켜서 날짜를 잡는다.
보통 음력 10월에 치른다. 대수가 낮은 집안에서는 가끔 음력 11월에 돌아올 때도 있다. 겨울이라 상당히 춥다.
# by 도원 | 2007/11/28 20:47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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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시대가 변하더라도 지켜나가야 할 절대적 가치가 항상 존재하죠. 조상님께 대한 예를 올리는 것 만큼은 언제라도 원형을 최대한 유지하며 지켜가야할 절대적 가치라고 생각됩니다.
항상 시제 준비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저의 집안에서도 시제에 필요한 것을 준비하느라 작지만 전답을 준비에 놓은것을 어릴때 들은 기억이 나는데, 엊그제 참석해 보니 그 문제는 함구령이 떨어젔는지, 아무도 거론을 하지 않습니다. 내년에는 제가 그 문제를 밝혀 볼까 합니다. 위의 글중에 보수적이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맞다고 봅니다. 배울것이 많아 감사합니다.
문중재산은 후손들이 관심을 갖지 않으면 불순한 자들에게 넘어가 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