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여기서 하고 싶은 것들
첫새벽
사바를 깨우는 종소리.
선실의 포단 위에 척량골을 곧추세우다.
아침공양때 밥 넣은 통 한쪽에
조그마한 봉지가 있어 열어보니
노릇하게 잘 익은 누룽지가 들어 있었다.
공양주 보살님의 정성이 고마워 맑은 미소가 번졌다.
오후 포행 시간,
좁은 요 위에서 하는 포행이라
처음에는 걸음걸이도 안맞고 어색했는데 이젠 저절로 적응이 됐다.
작은 걸음으로 세 걸음 떼고 네 걸음째에 돌아서는,
이른바 '네 박자' 리듬이 제법 재미있다.
여기서도 '네 박자' 법칙이 통하네
지금 이 순간의 흐름=> 삶!
좌선시 보이는 것들
하루 종일 같은 공간에서 똑같이 보이는 모습들만 보고 앉아 있다.
내눈에 보이는 모든 것.
창호지로 가려진 여닫이 문 두개.
문 위쪽에 춤춤한 문살이 있고
방충망을 붙여놓아 희미하게나마 조각난 바깓을 볼 수 있다.
앉아서 올려다보면 서까래 끝 부분이 여덟 개 보이고
암막새가 아홉 개. 수막새가 여덟 개 보인다.
오른쪽엔 후박나무 윗부분이 3분의 1 정도 질려 보이고,
가운데로 하늘이 역삼각형 모양으로 조금 보인다.
왼쪽의 후박나무잎도 겨우 헤아릴 정도다
좌선 시 보이는 것은 이게 전부다
밖에서 들리는 소음들
가끔 절 아래서 무슨 공사를 하는지 굴착기와 트럭이 오가는 소리.
이 지역이 무슨 비행 노선인지 항공기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동남아 노선쯤이나 되는지 한밤중에도 가끔 들린다.
밖에서 들리는 좋은 소리들
큰절 범종 소리. 새벽 도량석 목탁 소리.
환종 스님 사시마지 백팔예참 하는 목탁 소리.
새벽 숲 새들의 노랫소리.
논 가는 경운기 소리
후박나무 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
혜안 스님 공양 가지고 오는 발소리.
친구 벌이 인사하는 소리. 후박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낙숫물 소리
일어서면 보이는 창살밖 풍경들
무문관 앞마당에 토끼풀 몇 토끼풀 몇 무더기,.
자운영 꽃 및 숱이. 그리고 잡초들.
마당 끝에 변이는 축대.
축대 아래 양쪽으로 있는 후박니무 몇 그무.
그사이로 나지막한 동백나무와 비자나무 두어 그루.
나무 윗부분이 끝나는 곳에 강진만을 간척한 바둑판 모양의 논들.
그 논들 끝에 길게 이어진 방파제
방파제가 끝나는 오른쪽에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바닷물을 모아둔 만덕호
방파제와 닿아 있는 강진만의 바다.
바다 가운테 예쁘게 동그란 모습으로 떠 있는 죽도.
가끔 바람에 실려 오는 푸른 바다 냄새.
오후 썰물 시간이 되면 갯벌로
모두 하나가 되는 이쪽의 도암면과 바다 가운데의 죽도.
바다 건 너의 칠량면,
바다 건너 밤이 돼야 집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포구.
보름 달이 뜨면 더 멋있는 마량 천관산 줄기의 스카이라인.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서 굽어보고 있는 푸른 하늘
적어놓고 보니 그래도 볼 수 있는 것이 꽤 많다
지금 듣고 싶은, 여기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틀
덜커덩덜커덩 지나는 기차 바퀴 소리.
제주 지삿개 주상절리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
빨간 발을 가진 갈매기 울음소리.
보길도 예송리 바닷가 썰물에 돌 자갈 밀려가는 소리.
'노을이'가 들려주는 멋진 음악들.
재래시장의 왁자지껄한 삶의 소리들.
해인사 새벽예불 소리.
바람 끝을 휘감아 도는 풍경 소리
----(내가 추녀 끝에 풍경을 달자 했지만 모두 별 반응이 없었다.).
내 행자 시절 의 고단함을 달래주던 오대산 금강연 폭포 소리.
송광사 율원(비전) 앞 대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
---(바람도 대숲과 후박나무 숲을 지날 때 소리가 다르다.
---대숲은 쏴아쏴아(파도 소리 비숫).
---후박나무는 우수수우수수(비 떨어지는 소리 비숫).
아버지 보리타작하던 도리깨질 소리.
어머니가 가끔 들려주던 멋진 가곡들
---(<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가고파> 등).
먼저 간 친구가 좋아하던 노래
---(<원서 머 나이트One Summer Night>),
유년 시절 우리 집 보물 1호였던 황소에게 방 과 후
소꼴 한 짐 베서 외양간에 던져주면 맛있게 먹던 서걱서걱 소리.
끊일 듯 끊이지 않는 기도의 화신 가평 보덕사 서현 스님 목탁 소리.
적막을 가르는 해인사 선방 입선 죽비 소리.
--- (여기는 무문관이라 죽비가 필요없다.)
지금 당장 여기서 하고 싶은 것들
.*문을 활짝 열고 싶다.
*맨발로 마당을 거닐고 싶다.
*흐르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싶다.
*일직선으로 백 보만 걷고 싶다.
---(이 방에선 직선으로 네 결음밖에 못 걷는다)
*문밖 마당에 피어 있는 토끼풀을 가만히 만져보고 싶다.
*한 철 정진에 큰 위안이 되어준
후박나무를 한번 안아주고그잎도 정성껏 만져주고 싶다.
*큰절 부처님 얼굴 한번 보고 싶다. .
*무인도인 죽도에 한번 올라가 보고 싶다
*갯벌에 맨발로 폭뚝 빠지며 바닷불 있는 데까지 걷고 싶다
*산과 들을 지나온 그리운 바람을 가슴 깊이 들이마시고 싶다 .
* 비 오는 마당을 우산 없이 흡뻑 젖도록 거닐고 싶다
바닷물이 낮에만 빠지는 줄 알았는데 밤에도 빠지는가 보다.
아침에 보니 갯벌이 고래 등만큼 남아 있다.
아마 물이 가득 차면 바로 빠지고 또 들어오고를 반복하는 모양이다
정묵 스님 토굴 수리하면서
입안에 염증 난 게 두 달이 넘는데도
아직도 낫질 않고 음식 먹기가 곤란하다.
어제 저녁부터 연고를 바르고 잤는데 당분간
차도 마시지 말고 수시로 발라 집중적으로 치료해야겠다.
전에 아프던 다리도 계속 아파 요즘은
포행도 제대로 못 하고 정진도 거의 의자에 앉아서 하다시피 한다.
그나마 아플 때 쉴 수 있어 다행 이긴 한데,
빨리 좋아져야 할 텐데 격정이다.
몸이 대체로 안 좋다
공양 후 조심스레 포행하다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이제 이곳에 완전히 적응됐나 보다.
문이 잠겨 있고, 갇혀 있다는 생각조차 별로 안든다.
그냥 그러려니 한다. 길들여진다는 게 참으로 무섭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음력 5월 초사홀이다.
이곳에서는 방향이 안 맞아 산뜻한 초사흘 달 보기는 들렸다.
저녁 정진 중 뒤쪽에서 살그머니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혜안 스님이 붙이는 구내염 치료제를 사서 넣어주고 갔다.
마음 씀이 고맙긴한데 입천장이 모두 헐었으니 해당이 되려나 모르겠다.
안 되면 연고나 바르고 계속 누워 있든지 해야지, 뭐.
길들여진다는 것
무문관에 들어온 지도 이십여 일이 다 돼간다
처음 일주일은 답답하고
폐쇄된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무게로 나를 힘들게 했는데.
지금은 그런 느낌은 거의 없다.
이 공간 벌써 길들여진 것이다.
문살 너머 조각난 풍경들도 그런대로 볼만하고,
세 걸음밖에 못걷는 좁은
요 위에서 포행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매일 식은밥에 단무지를 먹는 것도 견딜 만하다
나같이 어느 곳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성격이
이런 곳에서 견딘다는 자체가 벌써 대단한 거다.
산다는 것은 '길들여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내 존재가 탄생한 그날부터 이 별을 떠나는 날까지
나와 인연한 모든 것들과 서로 길들여가며 사는 게 삶인 거다
그 길들여가는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다.
때론 뻐걱거려 서로 상처받아 아파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순풍에 돛 단 듯 잘도 맞을 때가 있다
그 '길들임'의 고전은 생텍쥐페리의 소설에서
어린 왕자가 사막에서
여우를 만나 특강을 받는 구절에 제대로 표현된 것 같다
어찌 사람을 서로 길들이고, 길들여진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서로의 가슴에 더 가까이 다가서려고 애쓰는 것이
결국 사랑하는 것이고 배려하는 것이고, 길들여지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서로에게 많이 길들여지는 게 좋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눈빛만 봐도, 목소리만 들어도
속내를 환히 알 수 있고, 마침내는 영혼까지 닮아가면
<심우도>에 나오는 입전수수入廛垂手 '의 경지가 되지 않을까
6. 13.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