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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문인협회 괴산 탐방
일시:2016년 4월 19일 화요일
장소:충청북도 괴산 정인지 묘소, 홍명의 문학비, 고산정 제뭥대, 홍명희 생가, 산막이 옛길, 연풍순교성지, 연풍초등학교, 풍낙헌
* 충북 괴산 정인지 묘소
서초문인협회의 봄 문학기행은 괴산 탐방이다. 서초구민회관 앞에서 버스가 서초문인들을 태우고 출발했다. 먼저 간 곳은 괴산에 있는 정인지 묘소다. 정인지의 묘소는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에 있다. 충청북도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학역재(學易齋) 정인지(1396∼1478) 는 조선 조선 초기의 대학자이며 정치가였다. 태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7대의 임금을 섬기면서 네 차례의 공신에 오른 문신이다. 태종 14년(1414)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고려사, 용비어천가, 태조실록 등 각종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다. 세종의 고명으로 집현전 제학·부제학 등 벼슬을 지내면서 성삼문·신숙주·최항 등과 같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 크게 공을 세웠다. 그 후 각 조, 즉 이(吏)·공(工)·예(禮)·병(兵)의 판서를 거쳐서 판중추부원사가 되었다. 세종 때에는 집현전 학사로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공을 세웠다. 단종 1년(1453) 계유정란 때 세조를 도와 공을 세워 1등공신이 되고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단종∼성종 연간에는 학덕을 갖춘 정치가로서 민심을 진정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계유정난의 공신으로 하동부원군에 봉해지고, 문성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후 수양대군의 참모로 활동하여 우의정에 오르고, 공신의 호와 하동부원군의 봉군을 받았다. 세조의 즉위로 영의정이 되어 국사를 잘 처리하였다. 세조의 숭불을 반대하다 부여로 쫓겨난 일이 있었으나 바로 소환되었고, 성종의 즉위와 더불어 순성명량경제좌익공신의 호를 받았다. 학문이 해박하여 모든 일에 거칠 것이 없었으며, 세종의 천문과 역산(曆算) 진흥의 뜻을 받들어 대소간의규표(大小簡儀圭表) 및 흠경보루(欽敬報漏)를 제작하였다. 저서로는 학역재집이 있다. 묘역 안에는 특별한 시설이 없고 묘 아래에 세워졌던 서거정이 글을 지은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없어져서 1958년에 다시 세웠다. 묘역에는 봉분이 2기가 있고 그 앞에 대리석으로 만든 묘비 1기가 세워져 있다. 네모진 비대석 위에 위쪽이 개석이 없는 둥근 모양으로 되어 있다. 비면에는 강희맹이 지었다고 전하는 비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앞면은 식별이 가능하나 뒷면은 마모되어 알아보기 어렵다. 묘비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이 있고 좌우로 문관석과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다. 묘 아래에는 서거정이 비문을 지은 신도비가 있었으나 유실되어 1958년 다시 세웠다. 조선 전기 묘소의 양식 모습을 알 수 있는 유적지다. 그의 부인 묘소가 뒤에 있다. 우리는 정인지 묘소 입구에서 하차하여 건물과 내경을 잠시 보고 긴 계단을 걸어서 묘소로 올라갔다. 두 개의 묘소가 있는데 앞에 있는 묘가 정인지 묘소이고, 뒤에 있는 것은 그의 부인 묘소다. 4월의 아름다운 풍경이 정인지의 역사적 족적을 더욱 빛내주고 있다.
* 충북 괴산 홍명희 문학비
홍명희 문학비 앞에 왔다. 2000년에 괴산 제월리에 ‘벽초 홍명희 문학비’가 세워졌다. 허름한 터에 덩그러니 벽초 홍명희 문학비라는 대라석 비석 하나만 세워져 있다. 1996년 11월부터 홍명희의 고향 충청북도 괴산과 청주에서 매년 10월경 홍명희 문학제가 열려왔다. 홍명희(洪命熹)[1888~1968]는 1888년 충청북도 괴산에서 태어났다. 호는 벽초(碧初)다. 출생 이후부터 청년 시절까지 괴산에서 거주하였으며, 장년이 된 1921년에 상경한 이후부터는 서울에 살았다. 그러다가 1939년 말에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 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으로 이주하여,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창동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당시의 집은 6·25 전쟁으로 불타버렸다. 일제 강점기 최대의 역사 소설의 하나로 손꼽히는 '임꺽정'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 소설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어린 시절에 한학을 수학하다가 일본에 유학한 홍명희는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해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 홍명희는 소년지에 폴란드 시인 니에모예프스키의 산문시 '사랑'을 번역·소개하는 등, 최남선·이광수와 함께 신문학 운동에 일조하였다. 그는 이광수, 최남선과 함께 한국문학의 3대 천재로 기록되고 있다. 1912년에 출국하여 상하이에서 동제사에 참여하였으며, 싱가포르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다가 1918년에 귀국하였다.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충청북도 최초의 만세 시위를 주도한 관계로 투옥되어 1년여 동안 수감되었다. 출옥 후에는 서울로 이주하여 한때 휘문 학교와 경신 학교 교사, 조선 도서 주식회사 전무로 근무하였으며, 1924년 동아 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듬해 시대 일보로 옮겨, 1926년에 시대 일보 사장이 되었으며, 그해 시대 일보가 경영난으로 폐간되자 정주 오산 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한편 신사상 연구회, 화요회, 조선 사정 조사 연구회 등 사상 운동 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것을 기반으로 1927년 신간회의 결성을 주도하여, 조직부 총무 관사직을 역임하였다. 1929년 12월에는 신간회 민중 대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만 2년여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1928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 일보에 '임꺽정'을 연재하여 일약 인기 작가로 부상하게 되었다. 일제가 친일 협력을 강요하던 1940년대 초반, 홍명희는 일제 당국에 맞서 일체의 사회 활동을 중단하고, 창동에서 지조를 지키며 은둔 생활을 하였다. 8·15 광복 후인 1946년에 조선 문학가 동맹 중앙 집행 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1947년에 민주 독립당을 창당하고 당 대표로 취임하고, 그해 12월 민족 자주 연맹을 결성하여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48년 4월에 평양에서 열린 남북 연석회의에 참가한 후 귀환하지 않고 북에 잔류하였다. 북한에서 내각 부수상, 조선 최고 인민 회의 상임 위원회 부위원장, 과학원 원장, 조국 평화 통일 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홍명희의 대표작인 '임꺽정'은 1928년 11월부터 '조선 일보에 연재되었다. 그 후 홍명희는 투옥이나 신병 등의 이유로 몇 차례 중단을 겪으면서도, 1940년까지 10여 년에 걸쳐 '임꺽정'을 연재하였으며, 조선 일보가 폐간하자 1940년에 조광으로 지면을 옮겨 한 차례 게재되었으나 말미의 일부가 미완성인 채 중단되었다. 연재 당시의 순서에 의하면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 의형제편, 화적편의 5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중 의형제편과 화적편이 조선 일보사 출판부[1939~1940]에서 4권으로, 을유 문화사에서 6권[1948]으로 간행되었으며, 사계절사[1991]에서 전편이 10권의 교정본으로 출간되었다. 조선 중기에 지방의 도둑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그 행적이 단편적으로 기술되기도 한 임꺽정의 이야기를 방대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식민지 현실의 모순 그 자체보다도, 봉건 제도의 모순 아래서 고통 받는 하층민들의 일상적인 삶과 투쟁을 그리는 데 치중하고 있다. 이를 위해 조선 시대의 풍속·제도·언어 등을 탁월하게 재현하여 민족 문학적 개성을 잘 살리고 있으며, 다양한 신분의 하층민들을 등장시켜 각기 개성 있는 성격으로 형상화하며, 일상적인 장면들을 중심으로 극도로 정밀한 세부 묘사를 보여 주고 있다. 민중사를 중심으로 한 사실주의적 역사 소설을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황석영의 '장길산'을 비롯한 광복 이후의 역사 소설들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임꺽정 이외에도 홍명희는 언론사에 재직하는 동안, 동서고금의 이색적인 지식을 소개한 칼럼을 연재하였으며, 이를 모아 1926년에 조선 도서 주식회사에서 학창산화(學窓散話)를 간행하였다. 또한 프로 문학 단체 카프(KAPF)의 기관지에 해당하는 '문예 운동' 창간호에 프로 문학의 역사적 필연성을 논한 평론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 평론 '대(大) 톨스토이의 인물과 작품'을 위시하여, 논문·칼럼·대담 등 다양한 형태의 글들을 발표하였다. 홍명희는 현재 평양시 형제산 구역 신미동에 위치한 애국 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홍명희는 1928년부터 임꺽정을 집필했으니 괴산에서 살 때는 작품활동과 큰 연관이 없다. 하지만 선생의 강인한 품성과 문학성 감성을 키워준 것은 고향 괴산의 자연이다. 제월리 집 부근에 그가 즐겨 찾던 제월대가 있다. 그는 제월대 아래를 흐르는 괴강 물줄기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사색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 그곳 고산정 제월대 아래에 그의 뜻을 기리는 문학비가 세워진 것이다. 제월리 집에서 '벽초 홍명희 문학비'가 있는 제월대까지는 약 1km 거리다. 제월대 주차장 한쪽에 문학비가 서 있다. 홍명희는 월북과 북한에서의 행적 등으로 인해 문학비 건립 자체를 놓고 찬성과 반대 의견이 강하게 대립했다. 1998년에 문학비를 세웠으나 철거됐고, 이후 협의를 거쳐 200년에 지금의 자리에 다시 문학비를 건립하게 됐다. 문학비 글씨는 신영복이 썼다. 중국 상해에서 박은식.신채호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했으며, 1919년 괴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일과 항일운동단체인 신간회를 결성한 일, 1928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소설 '임꺽정'을 연재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임꺽정은 조선시대 백정 임꺽정을 주인공으로 당시 백성들의 삶을 잘 묘사한 대하소설이다. 조선일보 연재 당시에도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글의 분량이나 내용으로도 다른 작품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최고의 대하소설로 인정받았다. 해방 직후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했지만, 월북 이후에는 작품은 물론 홍명희라는 이름도 입에 올릴 수 없게 됐다. 그로인해 문학관도 세우지 못한 것이다. 월북문인 작품 해금 조치에 따라 1980년대 중반 다시 출판되면서 많은 인기를 끌었다. 문학비 앞에는 고산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정자로 올라가는 길에 소나무 숲이 비경이다. 정자에 올라서면 괴강 물줄기가 굽이치며 흐르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이곳이 제월대다. 문학비 앞에 제월대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우리는 이곳을 지나 홍명희의 족적을 따라 고산정 제월대로 향했다.
* 충북 괴산 고산정과 제월대
고산정과 제월대는 벽초 홍명희 선생의 자취가 남아 있는 유적이다. 우리는 홍명희 문학비 앞에서 제월대 표지석을 보고 산길을 따라 이곳에 왔다. 절벽 위에 고선정이라는 정자가 오롯하게 서 있다. 정자 아래로 괴강이 아름답게 흐르고 있다. 괴강 강물에 낚싯대를 드리우던 그의 그림자를 찾는다. 제월대는 충북의 자연환경 명소로 지정된 곳이다. 소나무 우거진 숲에 정자가 있고, 절벽 아래 괴강 물줄기가 굽이쳐 흐른다. 이 모든 풍경을 제월대라고 부른다. 제월대에 있는 고산정. 원래 이름은 만송정이었다. 고산정에서 바라본 괴강 물줄기 멀리 산들이 솟았고 그 품에 들이 펼쳐진다. 그 모든 풍경을 괴강 물줄기가 감싸고 흐른다. 이 풍경을 고산정에 오르면 볼 수 있다. 제월대 절벽 위에 선 고산정은 선조 29년에 충청도 관찰사 유근이 세운 정자다. 유근은 이곳에 만송정과 고산정사를 짓고 광해군 때 낙향하여 은거했다. 숙종 2년에 고산정사는 불타 없어지고 만송정만 남았는데 이를 두고 고산정이라 불렀다. 괴강이 여울을 이루며 흐른다. 절벽 위에 나무 두 그루가 기울어 자란다. 그 아래 강기슭에는 여울은 물거품을 만들어내며 강물에 서식하는 모든 생명을 돕는다. 홍명희도 저 여울의 물살 비경을 보았을 것이다. 정자를 둘러보고 산을 따라 조금 내려가니 소나무와 정자와 괴강이 더욱 고귀한 풍경을 선사한다. 홍명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 소중한 탐방이다.
* 충북 괴산 홍명희 생가
홍명희 생가는 괴산읍 동부리에 있다. 홍범식 고택인데 이곳은 작가 홍명희(1888~1968)가 태어난 곳이다. 이 고택은 2002년 충청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중수, 복원되었다. 충북 괴산군 괴산읍 일대는 소설 임꺽정을 지은 벽초 홍명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항일 독립만세 운동으로 옥살이를 했고 언론인, 소설가, 사회운동가로도 활동한 분이다. 그는 월북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그 이름조차 입에 올리면 안 되는 월북문인이 되었다. 소설 임꺽정은 월북문인 해금 조치에 따라 1980년대 중반 국내에 다시 소개되어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여기는 홍명희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산천, 괴산이다. 주변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홍명희의 아버지 홍범식은 금산군수로 있던 1910년에 일본이 나라를 강제로 빼앗자 자결한 인물이다. 고택 옆에는 홍명희의 아버지 홍범식의 뜻을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비석을 앞을 지나 고택 대문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조선 영조 때인 173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1800년대 중반에 증축했고, 1920년에 주인이 바뀌었다. 생가는 전형적인 중부지방 양반집의 건축 양식이다. 문간채와 행랑채가 있으며 중문이 안채와 사랑채를 나누고 있는 구조다. 정남향으로 지어진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6칸의 'ㄷ'자형이다. 안채 앞에 -자형 광이 있어 위에서 보면 ㅁ자 형태로 보인다. 사랑채는 홍명희 등이 1919년 3월 19일 일제에 항거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어났던 괴산만세운동을 준비한 곳이기도 하다. 홍명희 생가는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가 선생의 생가를 복원해야 한다는 뜻이 모아지면서 1997년 '홍범식·홍명희 생가 보전위원회 괴산 모임'이 만들어졌다. 이후 복원을 위한 꾸준한 노력 덕분에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약 3,300m2 대지에 안채, 사랑채, 아래사랑채, 중문, 대문채, 장독대, 광채, 김치광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집은 건축사적 중요성도 있지만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충북 최초의 만세운동 본거지라는 점에서도 문화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재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14호로 지정됐다. 고택은 돌담과 기와지붕이 어우러져 그 자체로 따듯한 정서를 자아낸다. 뒷마당에 곡식을 담아두던 뒤주와 장독대 항아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전시되어 맀다. 그가1924년 서울로 이사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도봉구에서는 홍명희가 살았던 도봉구 창동 244-1번지에 표지판을 세우고, 홍명희의 집터를 비롯하여 송진우, 김병로, 정인보 등 일제 강점기 창동에 은둔했던 독립운동가와 시인 김수영, 계훈제, 영화배우 문예봉 등 도봉에 거주하였던 현대사 인물들의 집터를 돌아보는 도봉 현대사 인물길을 만들어 업적을 기리고 있다. 아버지와 함께 그의 족적을 잘 드러내고 있는 고택이다. 대문 입구에는 '임꺽정로'라는 팻말이 붙러 있다. 주변의 도로명 주소가 임꺽정로인 것 같다. 집안을 돌아보니 상당히 부잣집 규모다, 본채를 비롯한 사랑채, 곡식창고 등 부속 건물이 많다. 그가 월북하였다는 것으로 그 동안 잘 알지 못했던 분인데 이번 괴산 탐방에서 자세히 알게 되어 흐뭇하다.
* 충북 괴산 산막이 옛길
산막이 옛길은 그 이름에서부터 고운 정취가 느껴진다. 우리는 괴강 강변에 잇는 버섯요리 식당에서 참나무 버섯 전골로 중식을 마치고 산막이 옛길을 산책했다. 조선 후기부터 연하구곡(煙霞九曲)으로 불리며 명승지로 이름 높았던 계곡을 따라 오솔길이 있었는데 괴산댐 건설로 이 일대가 수몰되면서 계곡 주변의 산 중턱으로 새로운 오솔길을 내었는데 그 길을 산막이 옛길이라고 부른다. 길이는 약 3.9km이며 괴산호수 서편으로 이어져있다. 조선 중기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노수신(1515~1590)의 고택이 남아 있는데 그의 후손인 노성도(1819~1893)가 연하구곡 일대의 풍광과 어우러지는 수월정(水月亭)이라는 정자를 건립하면서 유명해졌다. 하지만 수월정은 괴산댐 건설로 수몰될 처지에 놓이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이건한 것이다. 산막이 옛길은 2011년 11월에 일반에게 개방되었으며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다. 괴산군 최고의 명소가 되었다. 산막이 옛길은 괴산수력발전소에서 시작하며 차돌바위 선착장을 지나 참나무 연리지, 소나무 출렁다리, 정사목, 호랑이굴, 매바위, 앉은뱅이 약수터, 얼음바람골, 호수전망대, 괴산바위, 괴음정, 마흔고개, 다래숲 동굴, 진달래동산, 물래방아, 산딸기길을 지나 산막이선착장에서 이른다. 괴산댐에는 유람선이 운행되며 괴산수력발전소가 있다. 소나무 사이로 놓은 출렁다리가 아슬한 비경을 선사한다. 꽤나 긴 나무판 다리가 줄로 이어져 있어 출렁거리며 사람들을 아래로 이끌어 간다. 그리고 괴산 호수 주변이 상당히 아름답다. 유람선도 물 위를 왕래한다. 산 곳곳에 흔들의자도 설치하여 둘이 앉아 담소를 나누기에 좋다. 우리 부부도 흔들의자에 앉아 간간이 쉬며 산과 호수를 감상했다. 다시 오고 싶은 괴산의 훌륭한 산책 탐방지다.
* 충북 괴산 달천 괴강
충북 괴산을 촉촉히 적시며 흐르는 괴강은 이번 괴산 탐방에서 자주 보았고, 강물 위 다리도 여러번 넘어 다녔다. 폭 20m, 길이 123km의 긴 강이다. 달래강, 또는 감천(甘川), 달천이라고도 한다. 충주시에서 남한강 상류에 합류한다. 보은군 속리산 서쪽에서 발원하여 보은군의 북쪽을 지나 괴산군 동쪽을 흐르고, 동진천, 음성천 등과 합류, 충주시를 지나 남한강에 흘러든다. 충북선 철도가 충주시에서 달천을 가로지른다. 남한강의 발원지 달천은 국토의 중심부인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발원하여 동진천, 음성천 등과 합류, 충주시 가금면을 지나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속리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화양동계곡과 선유동계곡, 쌍곡계곡들에서 바위에 부딪치며 흘러 한결 정제된 물이어서 무척 결이 부드럽고 깨끗하다. 이 달천의 물은 조선시대 오대산 우통수, 속리산 삼파수 등과 함께 조선 3대 좋은 물로 알려져 왔다. 달천을 따라 펼쳐지는 아름다운 관광지는 아름다운 자태로 사람들을 맞이한다. 옛날 성리학의 대가 우암 송시열선생이 풍류를 즐기며 주인됨을 자처했다고 하는 화양동계곡과 퇴계 이황이 절묘한 경치에 반해 9개월 동안 이름을 지었다는 선유동계곡에서는 곳곳에서 부드럽고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금강산의 아름다운 일부를 옮겨 놓은 듯하여 불리워지는 소금강은 깨끗함이 완벽에 가까울 정도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달천의 비경에 반해 수많은 학자와 문인들이 즐겨 찾아 지금도 많은 곳에서 그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 우암 송시열선생이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암서재 주위 바위사이에는 노송이 울창하고 밑으로 흐르는 맑은 물이 더할 수 없는 경치를 엮어내고 있다. 세계 최초의 학생용교과서인 동몽선습을 집필한 박세무 선생의 정신과 혼이 담겨있고 있는 애한정, 조선 선조때의 충청도 관찰사 서경 유근 선생이 이곳의 풍광을 사랑하여 은거하였다는 고산정(孤山亭)에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쓴 호산승이라는 편액과 웅화가 쓴 고산정사기라는 명문이 쓰여져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의 주장 충무공 김시민과 문숙공 김제갑의 위패를 봉안하고 순국의 넋을 기리고 있는 충민사가 자리잡고 있다. 달천을 흐르는 물은 소백산맥으로 굽이굽이 이어지는 괴산의 아름다운 산과 들에서 흐른다. 때묻지 않은 대자연의 순수를 간직하고 있는 괴산의 35 명산은 달천의 깨끗함과 함께 소중한 가치를 부여한다. 괴산의 명산 중에는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도명산, 저 멀리 당나라의 전설이 전해올 만큼 예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낙영산과 칠보산, 군자산, 보배산 등은 등산 애호가들이 사랑하며 즐겨 찾는 특별한 산행의 기쁨을 맛보고 있다. 또한, 국내기술로 설계 시공한 최초의 수력발전용 댐인 괴산댐이 달천을 가로질러 만들어졌으며, 괴산댐은 높이 28m, 길이 171m의 콘크리트 중력댐으로 괴산군 칠성면, 문광면, 청천면의 3개 면에 걸쳐있다. 이처럼 깨끗한 물과 산자수려한 청정자연 속에서 생산되는 농특산품 중 괴산의 청결고추는 품질이 아주 좋다. 괴산군에서는 역사유적 및 쉼터 등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휴양형 관광코스인 그린투어 (Green Tour) 를 개발하여 운영하고 있다. 우리는 괴산 강변에 있는 버섯요리 식당에서 맛있는 버섯전골요리롤 중식을 했다. 산막이 옛길에 오르며 괴산수력발전소가 설치된 괴산호수도 보고, 하산하여 이동 중에도 괴강을 보았다. 괴강 위의 다리를 건너서 왔다. 아름다운 강이다.
* 충북 괴산 천주교 연풍 순교성지
괴산 천주교 연풍성지는 조선 정조15년(1791) 신해교난 이후 연풍 땅에 은거하여 신앙을 지켜가던 교인 추순옥, 이윤일, 김병숙, 김말당, 김마루 등이 순조 1년(1801) 신유교난 때 처형당한 자리다. 1974년부터 천주교회에서 성역화한 곳이다. 성지 내에는 연풍향청 건물과 높이 8.5m의 십자가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순조 13년(1813) 연풍현 병방골에서 태어난 교인으로 고종 3년(1866) 충남 보령군 오천면 갈매못에서 순교한 한국천주교 103聖人의 한사람인 루까 황석두의 입상과 묘가 있다. 왼쪽에는 순교현양비를 세웠으며 문앞에는 처형석을 유물로 전시하고 있다. 성지에 있는 연풍향청은 향청 이 후 헌병주재소, 경찰지서 등으로 쓰이던 건물이었으나 천주교회에서 구입하여 연풍공소의 예배소로 사용하고 있다. 서녘으로 저물어가는 햇살을 받으며 찬란하게 빛내는 성지였다. 갈매못 성지는 내 고향 보령 오천 항구 곁에 있는 천주교 순교성지다. 그곳도 작년에 국제펜클럽에서 보령 탐방으로 가 보았다. 그래서 더욱 애절한 가슴으로 보았다. 곳곳을 볼아보며 종교역사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 충북 괴산 연풍초등학교
연풍초등학교는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삼풍리에 있는 공립초등학교다. 연풍 천주교 성지 안에 있다. 우리는 성지를 탐방한 후, 조금 걸어서 이곳에 왔다. 100주년 타임캡술과 탑도 있다. 1909년 8월 31일 사립연명보통학교로 인가 되었다. 1912년 4월 1일 연풍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였다. 1996년 3월 1일 연풍초등학교로 개칭하였다. 1998년 11월 19일 군지정 방과후 교육활동 시범학교 운영보고를 하였으며, 2001년 3월 1일 충청북도 교육청 지정 체육교육시범학교를 2년간 운영하였다. 2008년 2월 21일 제 95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교훈은 '사랑을 간직하고 꿈을 가꾸는 어린이'이며, 교목은 느티나무, 교화는 장미이다. 특색사업으로 연풍인 자긍심 갖기와 1인 1재능 기르기를 시행하고 있다. 나는 초등학교에 근무한 교사였다. 공주교육대학교를 졸업한 후 충남 천안시 신안초등학교에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1차로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평택에서도 교직생활을 했다. 그래서 나에게는 더욱 정겨운 초등학교다. 역사 깊은 교정을 둘러보았다. 넓은 운동장도 있고 한쪽에는 관아였던 풍낙헌 옛 건물이 있다.
* 충북 괴산 풍낙헌
괴산 연풍 천주교 성지에서 이동하여 성지 가까이에 있는 연풍초등학교를 보고, 초등학교 곁에 있는 풍낙헌을 보았다. 풍낙헌은 옛 관아 건물로 조선 화가 김홍도가 이곳에 5년 간 머물렀던 곳이다. 김홍도는 정조 때의 화가다. 그는 현감으로 이곳 충북 괴산 연풍현의 관아 동헌이었던 이곳에서 집무를 보았던 것이다. 김홍도의 족적을 만난 소중하고 보람된 탐방지다. 이곳을 마지막으로 서초문인협회의 봄 문학기행 괴산 탐방은 마루리 되었다. 서둘러 귀가 길에 올랐다. 죽전 휴게소에서 서초문협 회장님이 베풀어 주신 간단한 석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부부는 함께 서초문인협회 이사이어서 동행함으로 더욱 행복하고 아름다운 문학 나들이다. 나는 교직, 남편은 금융계 젊었을 때는 각자의 직장에서 근무하다가 퇴직 후에는 제2의 길에서 문학이라는 목표를 향해 동행하고 있다. 서로에게 큰 고마움을 느끼며 함께 문학할동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우리 문인부부는 사는 날까지 문인의 사명에 충실하여 한국문학사에 미력하나마 기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