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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새하늘 새땅
새하늘 새땅
2023년04월16일 제 903회.
사드배치 결사반대 김천시민 촛불집회
< 기억, 약속, 책임 >
해마다 4월, 그 날이 오면
묻어둔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잊지 않겠다던 다짐과
기억하겠다는 약속은
비수처럼 파고드는 책임이 되어..
살아있는 자들의 부끄러움과..
살아남은 자들의 죄책감으로..
그래서 우리는 무얼 했는가?
그리고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
지켜주지 못했던 안타까움을
한번 더 되새기며 각오하리니
우리는 기억한다, 약속하겠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을..
(2023.04.16. 세월호 9주기)
......
** 금일 사회자는 이재호 공동위원장.
" 오늘은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9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김천촛불은 903회차 입니다. 먼저 구호를 제창하겠습니다."
"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
** 세월호 희생자들과 순국선열을 기리는 묵념.
** 민중 의례.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
** 여는 발언. 이동욱 공동위원장.
" 문재인 정부 5년을 지났고.. 윤석열 정부 1년이 지났는데도.. 세월호 사건에 대한 진상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책임자에 대한 처벌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죠..
국가의 첫번째 책무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면 국가라고할 수 없죠.. 작년에는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죠.. 그걸 보면서 국민들이 묻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국가는 어디있느냐 라고요..
국가가 국가로서의 책무를 다한다면, 안전불감증으로 인한 사고가 일어나지 말아야 할텐데.. 국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사건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엊그저께 금요일에는 세종시에서 기후정의 파업이 있었습니다. 전국에서 5천여 명이 정부종합청사 앞에 모여서 집회를 하고, 행진도 하고 시위도 했습니다.
국가에서 개발을 첫번째로 하는 사업들을 폐기하고, 함께 살자는 파업행동이었습니다. 대규모 자본과 국가, 기업이 추구하는 첫번째 목적은 돈을 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지구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것들에 대한 반성과 대책을 촉구하는 기후정의파업이었습니다. 우리 소성리 어머님들도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다시 한번 더 지구를 살리는 운동을 해야겠고요.. 사드 운동도 마찬가지로 금방 끝날 싸움은 아닙니다. 끝까지 줄기차게 해야 할 운동이고요.. 사드 배치 끝내고 주한미군 철수하는 그날까지.. 저도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투쟁~!! "
** 투쟁 발언 : 구자숙 선생님.
" 이제 사월은 내게 옛날의 사월이 아니다
이제 바다는 내게 지난날의 바다가 아니다
눈물을 털고 일어서자고 쉽게 말하지 마라
하늘도 알고 바다도 아는 슬픔이었다
남쪽 바다에서 있던 일을 지켜본 바닷바람이
세상의 모든 숲과 나무와 강물에게 알려준 슬픔이었다
화인처럼 찍혀 평생 남을 아픔이었다
죽어서도 가지고 갈 이별이었다
- 도종환 ‘화인(火印)’ 중에서 -
세월호 이전에도 사건은 많았습니다.
와우 아파트가 무너지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졌고.. 성수대교가 무너졌습니다.
대구에서는 중앙로 지하철역에서 화재가 났고.. 상인동 가스폭발 사건으로 무고한 학생들의 피해가 컸습니다.
그렇게 항상 사건사고는 우리 주변에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고.. 이태원에서도 참사가 발생했죠..
개인적인 원망과 분노가 많았었는데.. 세월호 사건이 큰 획을 긋게 된 것은.. 국가의 책임과 의무를 따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회적 재난 앞에서 국가는 어디 있었는가?!
우리의 안전과 생명과 재산은.. 국가가 지켜줘야 한다는 원칙하에 질문을 던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4월은 더이상 옛날의 4월이 아니고.. 그 바다는 예전의 바다가 아니며, 이제 우리도 더이상 예전의 우리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국가에게 양도한 것이고.. 국가는 우리에게 양도받은 권리로 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8년간 우리의 땅과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안전을 지켜달라고.. 국가를 향해 소리치며 이 광장에서 투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월호를 기리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이 외침과 다르지 않습니다.. 세월호 뿐만 아니라 이태원에서도 그렇게 많은 젊음이 죽어서는 안된다는거죠.
국가는 우리의 땅을 책임져야 하고, 우리의 생명을 지켜줘야 하고 젊은이들의 무고한 희생을 지켜줘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우리가 좀더 치열하게 싸우지 못해서일까 반성하면서.. 사드를 뽑아내고자 하는 그 힘으로 모든 곳에 따뜻한 눈길을 보내줘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투쟁~!!"
** 세번째 강의. 박석민 공동위원장님.
" 오늘은 416 9년 기억과 함께 곧 다가오는 4.19 63주년 관련 이야기 해달라는 요청이 있어 419 이야기 먼저하고 여섯 번째 평화이야기 한중수교는 영상을 보고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1960년 4.19... 경찰 발포로 서울에서만 1백여명 부산19명 광주8명 등 사망186명 부상6,026명, 정부는 서울일원과 유혈사태가 벌어진 부산·대구·광주·대전에 계엄령 선포, 계엄군(계엄사령관 송요찬)의 서울 진주 후 일단 가라앉았으나, 4·25 대학교수단데모가 이어지자 4.26 이승만 대통령 하야, 5·16쿠데타이후 '의거'(義擧)로 불리다가 문민정부부터 다시 혁명으로 명칭바뀜, 1993년 오늘 김영삼 대통령 현직대통령으로는 처음 4.19묘소 참배, 성지화 지시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국 근현대 민중운동 역사 가운데 유일하게 4.19를 ‘혁명’이라고 부르는데, 혁명은 3가지 근거를 가져야 합니다. 첫째는 어떤 권력도 스스로 물러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방식이 아닌 투쟁이 필요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두 번째 그 결과로 권력이 교체되고, 세 번째는 해당 시기 민중들의 요구가 실현될 때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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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인류가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이라 부르는데 이견이 없습니다. 4.19는 투쟁에 나선 민중들이 죽었고, 권력이 교체되었지만 민중 요구가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로 실현되지 못해 미완의 혁명이 되었습니다. 박근혜를 끌어내린 촛불혁명은 23번의 촛불집회에서 단 한명의 부상자도 없었지만 권력을 끌어내린 민중 투쟁이었고, 권력이 교체되었지만 문재인정부가 5년간 그 위대한 투쟁에서 촉발된 요구를 실현하지 못하고 보수극우적인 윤석열에게 정권을 넘겨줘 촛불혁명이라 불린 투쟁을 퇴색시켰습니다. 촛불혁명이라 부르려면 결국 우리가 싸워야 할 과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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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대통령 선거. 하필이면 유력한 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신병치료차 미국에 가서 급서하자 이승만에 반대하던 많은 국민들은 실의에 찼다. 신익희도 호남선에서 배를 쥐고 쓰러졌고 조봉암은 이승만이 죽여 버렸습니다. 이승만의 운이 너무 좋다는 탄식이 터져나왔지요.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노욕을 부린 이승만을 막대한 부정선거를 저지릅니다. 4.19를 부른 3.15 부정선거는 가히 부정선거의 세계적, 역사적 사례라 할 만했는데, 정전시키고 투표함 바꾸는 올빼미식, 야당을 찍은 투표지에 인주를 묻혀 무효로 만들어 버리는 피아노식에 3인조니 9인조니 서로 감시하며 여당표 찍는 공개투표가 감행됐고, 대리투표 유령투표 별의 별 수단이 다 동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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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부정선거 항의에 나선 마산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열 명이 넘는 학생과 시민들이 죽었고 김주열은 죽음도 알려지지 않은 채 경찰들에 의해 마산 앞바다에 수장됐다고 떠올라 4.19 투쟁의 도화선이 됩니다. 김주열의 시신이 떠올랐을 때 가장 흥분한 건 그 또래의 고등학생들이었고, 고등학생들은 마산 시내를 휩쓸었습니다. 마산에 이어 전국의 고등학생들이 먼저 교문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그 뒤를 이어 대학생들이 나섰고,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을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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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로 향하던 시위대에게 총탄이 퍼부어지고 서울에서만 100여명이 죽었고, 부산 광주 등에서도 경찰은 총을 쏘았고 학생과 시민들이 거꾸러졌습니다. 서울 시내 병원은 사상자들로 만원이었는데, 사람들은 앞다투어 달려와 부상자들을 위한 피를 뽑았고, 거리에서 병원비가 필요하다고 외치면 돈이 쏟아졌습니다. 위대한 민중 투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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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4.19 혁명, 그 시작은 바로 대구였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현재 윤석열 정부를 지지하고 지탱하는 대구와 경북, 우리는 이런 동네에 살지만 1960년 4.19는 대구에서 시작되었고 타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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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모스크바” 대구의 별명입니다. 1946년 10월의 민중봉기부터 대구 경북 지역의 좌익세는 꽤 강력했고 전쟁으로 한바탕 싹쓸이가 진행된 뒤에도 도시 분위기는 그 어느 지역에 비해서도 진보적으로 이승만 정권의 눈에 가시 중의 하나였던 ‘대구매일신문’은 대한민국 최초의 필화사건이라 할 대구매일신문 테러 사건으로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꼴통 보수신문으로 변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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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2월 28일은 일요일이었는데, 시내 고교들에 일제히 등교령이 떨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구에 많았던 섬유공장 노동자들에게는 출근령이 전달되었는데, 그 전날 토요일엔 단축수업과 조기 퇴근을 시킨 건 토요일은 자유당 대구 유세였고 일요일은 민주당 대구 유세였기 때문입니다. 찌질함의 극치는 이승만때나 지금 미국 도청사건에도 미국만 옹호하고 설명조차 못하는 윤석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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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고등학교는 갑자기 시험을 앞당겼고 대구상고는 난데없는 졸업식 송별회 연습을, 대구여고는 어설픈 무용대회가 펼쳐지는 등 떨어진 소집령에 학생들이 반발하자 그럼 영화라도 보자고 애걸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영화 <철도원(추억의 이탈리아 명화)>을 봤다고 하지요. 그중 으뜸은 대구고등학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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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고등학교 선생님들은 유달리 자연친화적으로 ‘토끼사냥’을 핑계로 제자들을 불러내 몽둥이 하나씩 들고 산자락을 뛰어다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기 뭐고? 2월 27일 토요일, 경북고등학교 학생회 부회장 이대우, 대구고등학교 학생회장 손진흥 등 대구 시내 학교 대표 7-8명이 비장한 얼굴로 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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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하면 우리는 퇴학은 물론이고 감옥에 갈낀데
감옥 갔다 와서 취직은 우예 하고 뭐하고 먹고 사노.” 그러던 그들은 ‘유정천리’노래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고 합니다. (대구일보 김풍삼 고문 증언) “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감자 심고 수수 심는” 즉 감옥도 가고 취직도 안되고 인생 조질 거 같으면 까짓거 두메 산골에 들어가 감자라도 심으면 될 거 아니냐는 것. 경상도 특유의 확인구호도 있었을겁니다. (“됐나?” “됐다!” )
교사들의 만류가 완강해 시위가 무산된 곳도 있었지만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은 거리 진출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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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고,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디 그 어느 역사책 속에 있었던가? 이 민족의 울분, 순결한 학도의 울분을 어디에 호소해야 하나?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피 끓는 학도로서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1인까지 부여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련다."(선언문 중) 대구 중앙로를 내달리면서 그들은 부르짖었다. “일어서라 동방의 횃불들아!”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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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가장 곤욕을 치른 것은 대구 고등학생들의 시위를 막을 때였다. 경찰은 곤봉을 들었지만 학생들은 토끼몰이에 쓰려던 작대기를 쳐들었습니다. 이런 낭패가 있나. 기록에는 없지만 아마 경찰들은 대구고등학교 선생님들을 무지하게 욕했을 것입니다. “언넘이 토끼사냥 한다 캐가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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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2.28 시위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습니다. 두 달 뒤 이승만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4.19 시위의 전초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이후 한국 민중운동사에서 가장 뾰족하게 정권에 맞서 싸운 학생 시위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시대를 고뇌하던 대학생이 아닌 고등학생들의 투쟁으로... 1965년 한일협정 반대 투쟁에도 고등학생들이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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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는 다른 시위로 이어지지도 않았고 시민들이 그 시위에 뛰어들지도 않았으며 이승만 정권을 여전히 강고해 보였고 학생들은 무더기로 잡혀가고 징계를 받았으며 어떤 이들은 정말로 “가련다 떠나련다”를 불러야 하기도 했지만 대구 고등학생들이 지핀 불씨는 바짝 말라 버린 들 위로 떨어져 3.15 부정선거라는 기름 세례를 받으며 불길로 화했고 불길은 들불로 타올라 이승만으로 하여금 “가련다 떠나련다 프란체스카 손을 잡고~~~”를 부르며 하와이로 가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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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8일의 대구가 없었으면 3월 15일의 마산이 없었고 3월 15일의 마산이 없었으면 4월 19일의 서울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적어도 1960년 2월 28일의 대구는 한국 민주주의의 성지 자격을 갖춘 도시였고, 1960년 2월 28일 대구는 위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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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평화이야기 여섯 번째 한중수교는 영상을 보고 이야기 이어가겠습니다.
<한중수교 동북아를 근본 재편하다>
우리는 해외에 나갈 때 어떻게 가지요? 대륙에 붙어 있는데도 비행기를 타야만 나갈 수 있는 섬나라와 다름없는 것은 데, 바로 분단 때문입니다. 기차를 타고 유라시아를 통해 유럽을 가는 날을 상상만 하지 말고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분단과 함께 이어져온 냉전은 우리나라와 민족의 삶을 근본적으로 옥좨고 있는데, 그런 면에서 한국은 소련에 이어 중국과 수교해 ‘냉전의 족쇄’를 풀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중수교에 대해 북은 냉전의 족쇄를 푸는 일로 환영만 할 수 없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북은 소련 해체 이후 중국에 생존을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미국과 수교’. 다시 말해 생존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고 있는데,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북의 핵개발은 미국도 인정한 것처럼 미국의 전쟁 적대정책의 두려움 때문으로 현재 북이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 등 거센 반발은 미국 주도의 동북아 현상을 변경하고, 미국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기 위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1992년 8월24일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한-중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에 서명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은 서로한테 총을 겨눈 한국전쟁을 포함한 냉전기의 40여년 적대를 뒤로한 일이면서 한국은 오랜 벗인 ‘자유중국’(대만)과 맞잡은 손을 슬며시 놓았고, 중국은 한국전쟁을 함께 치른 ‘혈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망연자실을 외면한 것입니다.
한-중 수교는 1990년대 초반 동북아시아 비대칭 탈냉전 과정의 마지막 전략적 선택으로 중국은 한-소 수교(1990년 9월30일)→남북 유엔 동시·분리 가입(1991년 9월17일)→남북기본합의서 체결(1991년 12월13일)→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합의(1991년 12월31일)(→북-미 및 북-일 관계 정상화 실패)의 과정이 끝날 즈음 중국은 한국과 손을 잡은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국의 손짓은 소련보다 빨랐는데, 조금전 영상에서 본 첸치천 당시 외교부장의 회고록 <열가지 외교이야기>에는 1985년 4월, 중국의 덩샤오핑은 한-중 관계를 발전시키는 게 필요하다며 “첫째, 장사를 할 수 있다. 이는 경제에 좋은 것이다. 둘째, 한국과 대만의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시기를 아무리 늦춰 잡아도 전두환이 대통령 노릇을 하던 1985년 봄 이전에 한국과 공식 외교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을 했다는 것인데, 91년 한소수교를 한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1985년 3월1일에야 소련의 최고지도자인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사실을 고려하면, 덩샤오핑의 판단이 얼마나 빨랐는지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은 1986년 가을, 북의 반대를 외면하고 적성국의 수도인 서울에서 열린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9월20일~10월5일)에 참가해 한국을 금메달 한개 차로 따돌리고 1위를 차지합니다.
이미 1986년 한-중 무역 총액(12억8900만달러)은 이미 북-중 무역 총액(5억1천만달러)의 2.5배를 넘어섰습니다.
중국은 1988년 서울올림픽에도 북의 반대를 뿌리치고 참가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과 수교가 늦어진 것은 덩샤오핑이 한-중 관계가 “매우 민감한 문제”이니, 북의 이해를 구해가며 “매우 신중하게 일을 진행”하라고 했는데, 이는 북을 설득하는 데 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국제 정세의 변화속에서 1992년 4월13~17일 방북한 양상쿤 중국 국가주석은 김일성 주석을 만나 “국제 정세와 우리의 대외관계를 분석할 때 중국은 한국과 수교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사실상 한-중 수교 방침을 통보했습니다.
김일성의 80회 생일상을 앞에 두고 폭죽 대신 ‘폭탄’을 터트린 것으로 앞서 지난번에 말씀 드린대로 중국은 1991년 5월3~6일 리펑 총리가 방북했을 때도 북에 두개의 ‘폭탄’을 안겼는데, 리펑은 “한국이 유엔 단독 가입을 신청하더라도 더는 반대할 수 없다”고 통보했습니다. 이러한 중국의 변화는 남북 유엔 동시·분리 가입을 “민족의 분열을 영구화·합법화하려는, 천추에 용서 못할 대죄”라던 북이 급작스레 태도를 바꿔 ‘외교부 성명’(1991년 5월27일)으로 ‘유엔 가입 방침’을 밝힌 결정적 이유가 됩니다.
또 하나 북을 코너에 몰아넣은 건 리펑이 ‘조-중 무역 경화 결제 방침’도 통보로 평화이야기 맨 첫 번째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설명 드린것처럼 사회주의 우호가격에 따른 물물교환식 교역을 끝낼 테니, 북이 중국 물품을 수입하려면 ‘현금’을 내라는 통보를 공식화했고 이후 조-중 무역은 1990년대 내내 날개 잃은 새처럼 수직낙하하게되고 북은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은 수교 과정에서 각각 오랜 ‘벗’인 대만을 버렸는데, 왜 그랬을까? 바로 “2천만 인구를 가진 대만 시장과 당시 13억 인구의 중국 시장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1991년에 우리 철강 산업, 특히 포항종합제철(포스코)을 살리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도 바로 대중국 철강 수출이었다”라고 <노태우 회고록> 하권, 253~254쪽에 적고 있습니다.
더불어 중국은 아시아에서 홀로 대만과 공식 외교관계를 유지하던 한국이 단교하게 했는데, 1992년 5월14~15일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제1차 한-중 수교교섭 예비회담이 열렸을 때 두 가지를 강조했다. “대만과 단교”는 ‘수교의 전제조건’으로, “북-미 및 북-일 관계 정상화 환경 조성에 한국이 적극 나서달라”는 ‘수교 조건’이 아닌 “요청 사항”으로 제기했습니다.
지금 미중 대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양안문제’ 즉 대만 문제의 중요성은 중국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에 북한은 91년 한소 수교에 대해 소련의 ‘배신’에 “딸라로 팔고사는 외교관계” ‘미제의 앞잡이’로까지 비판했지만 “순망치한”(脣亡齒寒)을 다짐하던 중국의 ‘배신’에 공개적으로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한-중 수교 직후인 1992년 10월1일 유엔 총회에 참석한 김영남 외교부장은 “중국은 자주자립 원칙에 따라 외교를 하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식대로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모든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말해 남 말 하듯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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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조-중 관계는 90년대 내내 모든 영역에서 싸늘하게 식어갔다. 조-중 무역은 1993년 8억9900만달러에서 1999년 3억2900만 달러로 급감했고, 1999년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할 때까지 1993~1998년간 조-중 수뇌부의 상호 방문이 끊기는 반면 한-중 수교 이후 한-중 관계는 말 그대로 상전벽해로 1992년 81억2800만달러이던 양국 무역은 2020년 2414억5009만달러로 30배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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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2020년 한국의 미국(1316억8000만달러)·일본(711억2069만달러)과 무역을 더한 것보다 많습니다. 물론 지금 미중대결에서 문재인, 윤석열이 미국편에서 서면서 한중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피해가 점점 커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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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수교는 동북아의 전략 지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했습니다. 한국은 소련에 이어 중국과 수교해 ‘냉전의 족쇄’를 풀었습니다. 남북관계만 안정적으로 개선된다면 한국은 사방이 꽉 막힌 ‘냉전의 외딴섬’에서 벗어나 대륙과 해양을 잇는 가교국가로 완벽하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현재 미중간 대결과 경쟁은 강대국의 패권 다툼을 넘어 한반도 8천만 시민·인민의 생명·안전·발전권과 직결된 사태로 한국은 미중간 어느 일방의 입장에 서는 것은 국익과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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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때보다 남과 북의 화해와 협력, 대화를 통해 평화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많은 우려를 갖게 되는 건 며칠 전 남북통신선이 두절되었다는 소식처럼 남과 북은 상황이 나쁜 대결적 국면에서도 대화 채널이 유지되었지만 윤석열 정부 출범이후 그 어떤 대화도 진행되지 않고, ‘적’으로 규정하고 대립하고 힘에 의한 평화만을 앞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1990년 초반 한소수교, 한중수교, 유엔 동시가입, 남북합의서 채택과 한반도비핵화 선언 등으로 한반도 정세 변화의 큰 물줄기가 형성된 이후 30년을 넘기고 있는 지금 남과 북의 고도의 전략적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태입니다.
오늘 416 9년. 9년전 가을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글을 묶어 펴낸 [눈먼 자들의 국가] 책에 박민규씨가 쓴 내용 일부입니다.
“기울어가는 그 배에서 심지어 아이들은 이런 말을 했다. 내 구명조끼 입어 ... 누구도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 누구도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는 기울어진 배에서 ... 그랬다. 나는 그 말이 숨져간 아이들이 우리에게 건네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탄 배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세월호라는 배를 망각의 고철덩이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 역사는 민중들의 투쟁으로 써내려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월호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처럼 사드가 옥죄고 있는 현재의 우리 현실을 잊지 않고 한반도 평화를 지키는 최전선에서 사드 반대 투쟁을 하는 것이야말로 이 땅의 평화를 지키는 큰 투쟁임을 다시 확인합니다. “사드뽑고 평화심자”
** 마지막 순서. 소성리 사드가수 정진석님의 무대.
" 아까도 들었던 내용이지만.. 세월호 사건은 국가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사건이었고.. 사드 배치는 그 국가를 지탱하는 폭력이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이 나라는.. 우리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세계권력으로부터 주어진 나라인 것입니다.
오늘 준비한 노래는 한곡입니다. 전교조 해직교사 정영상님을 기리는 곡인데.. 세월호에 희생된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는 노래인 것같습니다.
제목은.. 모든 꿈 사라진 그날..입니다."
★★★ 공지사항 ★★★
1. 오늘 나눠드린 약밥은 성주에서 준비해주셨습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2. 다음주 토요일 22일에는 소성리에서 14차 평화행동이 있을 예정입니다. 많은 참석 부탁드립니다.
3. 요즘 낮이 많이 길어져서 농사일로 바쁘신 농부들을 위해.. 집회시간을 30분 가량 늦추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주 부터는 오후 8시에 시작됩니다.
** 마무리 구호.
" 사드는 침략이다 / 불법사드 철거하라 / 사드가고 평화오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