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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베푼 가르침(2)
사도행전 18:9~11
우리는 지난 주일에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일년 육개월 동안 고린도교회에 전한 가르침 중에 일부를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거대 상업 도시 고린도 시에 속한 시민들이 많은 부와 권세를 소유한 까닭에 갖게 된 교만함 때문에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성도들의 교만함을 낮추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집중적으로 전하였습니다. 또한 이방 종교의 다신론의 영적 미혹이 강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한 분 하나님 유일신 교리를 매우 강조하여 가르쳤습니다. 또한 그 도시는 타락한 종교 문화에서 나온 방탕함과 성적인 무절제의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에 사도는 거룩함과 절제의 생활을 강조하여 가르쳤습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사는 세상 역시 자만하고 자기를 드높이며 온갖 미신들이 들썩이며 방탕하며 성적인 무질서가 심각한 대도시의 소비지향적이고 익명성이 보장되며 반 종교적이고 세속적인 시대 분위기가 강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마음에 새기고 유일신 신앙과 유일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앙과 성결과 절제를 중시하는 사도적 신앙을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이 마음에 간직하여 지켜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 가르침에 이어서 사도 바울이 그 거대 도시 고린도에 세운 교회,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된 고린도교회 가운데에서 1년 6개월 동안 장기간 머물면서 가르친 나머지 중요한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가르침 역시 지금 우리에게 유익하기에 귀를 기울여 잘 듣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복음 안에서 모든 차별을 무너뜨리고 모든 사람이 동일한 하나님의 한 권속이라는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18장에서 이미 보았거니와 사도 바울이 고린도 시에 들어가서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에 유대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대적하여 비방하였기에 사도는 가이오 디도 유스도라는 이방인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 집에서 예배와 가르침을 지속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르치는 고린도교회의 새로운 성도들은 대두분 이방인 출신이었는데, 그들은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과 영적 신분상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복음 안에서 차별없는 하나님의 자녀 됨에 대하여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확실하게 가르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일차 전도 여행 때에 세운 갈라디아 지방의 여러 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쳤고 그들에게 써 보낸 갈라디아서 편지에서도 이른 바와 같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라고 가르쳤습니다. 갈라디아서 3:28,29 말씀에 이르기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유대인이나 헬라인 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차별이 없고 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동일한 상속자라요 한 형제 자매라는 점을 사도는 이 고린도교회에서도 명명백백히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 18절 이하에 보면, 할례자로 부름을 받은 자나 무할례자로 부름을 받은 자거나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섬기면 되고, 무할례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자인 유대인 성도들을 본받아 할례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 간에 그 신분이 자유인과 노예 간의 갈등이 제법 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 고린도전서 7장 22절 이하에서 이르기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2:13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 가르쳤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나온 성도들은 사도 바울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거한 자들은 종이건 자유인이건 상관없이 주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된다는 것도 깨닫게 하였던 것입니다. 고린도에서는 자유인들과 노예간의 계급 차별이 극심했기 때문에 이러한 가르침은 매우 혁명적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남자와 여자의 극심한 차별도 없애는 가르침도 전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11 이하의 말씀에 보면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고 말씀하였습니다. 당시의 사회는 매우 극심한 가부장적 사회였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은 매우 뜻밖의 가르침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당시 고린도 시 안에는 빈부 차이가 극심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부자와 가난한 자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부자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은 죄인이요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 없는 가난한 심령을 가진 자요 가난한 자는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온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요 영원한 천국의 영광을 소유한 부자인 까닭에 서로 간에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가치관, 세계관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가는 곳마다 차별과 억압, 편견들을 타파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요 하나님의 한 백성이요 소중한 하늘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이루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차별 많고 고통 많고 사람들 간에 벽이 많고 한계가 많은 이 세상의 지옥 속에 오직 유일한 해방구는 예수님을 믿는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후일에 그렇게 견고하던 로마 세계가 도덕적 타락과 부자와 가난한 자의 극심한 갈등과 노예와 자유인들 간의 무서운 갈등과 폭동 속에서 흔들리며 무너져갈 때 교회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 몰려드는 피난처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부자와 가난한 자, 여자와 남자, 민족과 나라와 혈통 간에, 지역 간에 수많은 차별과 갈등과 미움이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갈등과 미움과 차별을 뛰어넘어 하나 되게 하며 진정한 자유와 사랑과 평안을 불러 일으키는 유일한 원동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와 사랑의 복음입니다. 우리 나라와 전 세계 모든 나라와 모든 사회가 치유가 정말로 필요한 상황입니다. 오직 복음만이 이러한 갈등과 차별을 끝내게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으로 더욱 충만하고 기도 많이 합시다. 교회 공동체가 바로 이러한 온전한 사랑과 용서와 겸손 속에서 사랑으로 하나 되게 만드는 모든 이들의 피난처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주님의 참 복음으로 온 몸과 마음이 충만하게 사로잡힌 사람들이 됩시다. 그리하여 우리로 말미암아 모든 상처받고 억압받고 차별받고 고통겪는 이들이 치유받고 회복되고 하나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와 평안을 얻는 주님의 손길들이 됩시다.
둘째로, 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헌금과 구제에 대한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헌금 생활에 대하여, 구제 생활에 대하여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편지로나 사람을 보내서 헌금 생활, 특별히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구제 헌금을 모아 보내는 일에 대하여 권면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연보 문제에 대하여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대표를 보내어 문의하였던 것을 대답한 편지에서도 이 점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을 통하여 사도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헌금과 구제 생활에 대하여 자세하게 가르쳤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했던 이유는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는 부자들도 많이 있었고 가난한 노예 출신 교인들도 있었지만 교세가 매우 컸고 그래서 그들이 드리는 헌금을 통하여 마침 유대인들이 겪고 있는 큰 기근의 위기 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사도가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구제 헌금에 대한 지속적인 권면 때문에 적지 않은 오해를 사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이 그러한 헌금을 모아서 개인적으로 착복한다는 비방까지도 들을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가 그러한 오해를 풀어가면서 그들에게 계속하여 헌금 생활과 구제 생활에 대하여 잘 풀어서 가르친 까닭은 그것이 그들에게 유익하고 복이 되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그는 구제와 헌금 생활을 신앙의 진실함으로 평가했습니다. 고린도후서 8:8 이하의 말씀에서 이르기를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고린도후서 8:8~10)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진지하게 오해를 받아도 나직한 목소리로 계속하여 사랑으로 설득하여 구제와 헌금 생활을 하도록 계속하여 권면한 것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받은 자로서 진실한 신앙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자에 대한 사랑, 이것이 주님이 세상에 찾아오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기꺼이 죽으신 이유입니다. 죄로 인하여 저주와 사망 아래 고통을 겪고 영원한 불못에 떨어지는 우리를 살리시려고 아무 것도 그리울 것 없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기를 비어 사람이 되셨고 자기 생명까지 내어줌으로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어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를 복음 안에서 부요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입고 구원받고 복을 받은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감격과 감사함으로 받은 축복을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이 신앙의 진실함을 입증하는 열매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헌금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고린도전서 16:1 이하에 이르기를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을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도록 하라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고린도전서 16:1~3)
라고 하였습니다. 매주 첫날 안식후 첫날이라는 말이니까 매주 토요일 다음 날인 지금의 주일을 가리킵니다. 사도는 매주 주일에 예배로 모일 때에 각 사람이 수입을 따라 드려서 교회에서 모아서 그것을 가지고 작정했던 예루살렘 유대인 성도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전달하도록 하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매주 첫날 수입을 따라 각 사람이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은 일차 전도 여행 때에 갈라디아 교회들에게도 가르친 바이기도 한 내용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헌금들과 구제의 헌금들과 또한 선교의 헌금들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18 말씀에서 말씀하였으며, 그 드린 것에 대하여 이르기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고 축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구제와 감사와 선교를 위한 헌금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태복음 6:19~21)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부모님께도 드리는 기쁨이 있고 사랑하는 친구에게도 작은 선물을 드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줌으로써 행복과 만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우리가 입었으며 늘 하나님의 공급해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매일 입고 살아감으로써 그 은혜에 대하여 이렇게 감사함을 표현하는 기쁨이 있을 때 우리 신앙이 건강하고 진실하고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드림이 아니요 적은 것을 드릴지라도 주님은 그 드림을 인하여 기뻐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한 과부가 두 렙돈 동전 곧 지금 시세로는 약 2천원 정도의 헌금을 성전의 헌금 궤에 드렸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 돈궤를 바라보시다가 그 과부의 헌금을 보시고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큰 울림이 됩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누가복음 21:3,4)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형편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있는 것으로 드리시면 될 것이요 없은 것을 받지 않습니다. 헌금은 형편대로 기쁨과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이요 자원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러한 헌금은 영원히 우리의 것으로 남아 장차 천국에 가서 우리의 보물로 남아 있을 것이요 우리의 자녀들을 위한 축복의 마중물이 되어 자손들을 주님께서 풍성하게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 생활과 구제 생활은 주님과 사도들이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명하신 축복의 수단입니다.
셋째로, 주님은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성도들을 한창 가르칠 때에 그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급히 써 보낸 편지인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를 보면, 그가 이차 전도 여행 때에 기독교 종말론에 관한 가르침을 열심히 가르친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사도 바울이 그곳에서 교회를 세운 지 몇 개월 안 되었는데도 사도 바울의 종말론에 깊이 사로잡혀서 성도들 중에는 지나친 종말론자들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곧장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 몇 사람은 잘 다니던 직장도 그만 두고 교회에 모여 기도만 하고 시간 날 때는 성도님 집에 돌아다니면서 밥을 축내면서 지내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까지 그 소문이 나서 교회의 명예가 실추되고 비난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소식을 실라와 디모데를 통하여 전해 들은 사도 바울은 급히 편지를 써서 여러 가지를 권면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1,12 말씀에서 이르기를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고 하였습니다. 또한 재차 편지하여 동일한 종말론적 문제에 대하여 강조하여 쓴 데살로니가후서에서도 이르기를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시라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데살로니가후서 2;1~12)
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쓸 때가 바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사역하던 중이었음을 볼 때 당연히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뿐 아니라 주님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장차 임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세하게 가르쳤음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종말론을 가르친 내용들에 대하여 그가 쓴 고린도전후서에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니,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종말론을 가르쳤는데, 그 성도들 중에서 거짓 교사들의 영향을 받았거나 자생적인 의심과 불신을 퍼뜨리는 쓴 뿌리와 같은 자들이 일어나서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생겨났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고린도전서 15:12 말씀에 나옵니다. 이르기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나중에 에베소 교회에서 사역할 때에 고린도교회 상황을 전해 듣고 이렇게 쓴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35 말씀에서도 사도 바울은 다시 말하기를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라고 하였으니, 이것 역시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 불신앙을 가진 쓴 뿌리와 같은 자들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반박하여 퍼뜨린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 그를 믿는 자들이 죽었다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여 다시 살아나며, 살아날 때에 놀라운 영광의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을 가르쳤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가는 곳마다 이렇게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그를 믿는 자들이 장차 입게 되는 죽은 자의 부활의 영광스런 소망을 늘 전파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후일에 죽었다가 다시 부활할 때에 우리 주님께서 입으셨던 그 놀라운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여 말할 수 없는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살 것에 대하여서도 여러 모로 가르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긴박성에 완전히 몰두하여서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실 지 모른다고 완전히 현실 생활도 뒷전으로 내려놓고 일도 안하고 지내는 사람이 생겨날 정도로 사도 바울은 분명한 종말론적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설교했음이 분명합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는 사도 바울이 쓴 수많은 편지들, 그리고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쓴 여러 편지들을 종합적으로 보면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제들처럼 조급한 종말론에 빠지지 않고 차분하게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학적 토대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붙들어야 하는 종말론적 가르침이 신앙의 중심인 것은 사실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죽은 뒤에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과 즉시 함께 지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21 이하의 말씀에 이르기를,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립보서 1:21~24)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확인되는 것은 사도 바울이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가 육신으로 이 땅에서 사는 것보다 죽어서 곧장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자신에게 좋다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적으로 이 땅에서 더 남아 살면서 자녀를 위하여 돕고 기도하며 교회를 돕고 성도들을 세우는 거룩한 일을 하는 것이 유익하지만 우리 자신의 행복을 더 생각한다면 언제든지 이 세상을 떠나 죽음을 맞이하여 즉시 주님 곁에 함께 있는 것이 더 말할 나위 없이 더 큰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점은 세상의 마지막 종말의 시간이 찾아오면 우리 주님께서 지극히 큰 영광 중에 앞서 간 성도들과 천사들을 대동하여 세상에 내려오실 그 결정적인 재림의 때가 이르게 될 것인데, 그 때에는 죽은 자들의 몸이 영광스런 몸을 가진 채 무덤에서 일어나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어떠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지만, 마치 한 톨의 곡식 알이 나중에 한 단의 큰 곡식단으로 변신하듯이, 한 알의 도토리가 큰 잣나무로 변신하듯이, 한 알의 작은 새 알이 큰 독수리로 변신하듯이, 그렇게 썩어서 한 줌의 흙먼지로 된 성도의 몸이 변하여 지극히 아름답고 영원한 영광스러운 몸으로 바뀌어 주님의 영원한 나라에서 영광 중에 빛나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말론을 가르친 사도의 가르침을 우리는 우리 신앙의 핵심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믿는 복음의 가르침은 우리가 단지 이 세상에서 평안을 누리며 가족간의 화평을 도모하며 이 세상의 부와 성공을 위하여 필요해서 믿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장차 우리는 육신의 죽음으로써 끝이 나는 이 세상의 삶만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장차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죽고 난 후에 맞이할 내세가 있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은 장차 격변의 새로운 세상 곧 다시는 죄가 없고 썩음이 없고 저주가 없고 사망이 없고 눈물이 없고 전쟁이 없고 어둠과 혼돈이 없는 영원한 세상이 도래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서 영원히 통치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종말론적 미래가 너무나 확실한 것이기에 우리는 이 종말론적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소망 중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종말론적 소망이 없는 종교 생활을 하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전했던 주님의 죽음과 부활과 그를 믿는 자들의 영혼 구원과 천국과 장차 주님의 영광스러운 재림과 심판과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의 실존을 우리도 확실히 믿고 이 진리 위에 굳게 섭시다. 우리가 죽은 뒤에 즉시 우리 영혼이 주님 나라에 들어가며, 거기서 영광과 안식을 누릴 것이며, 장차 주님이 그 정한 때가 되어 세상에 다시 올 때에 우리도 그 날에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썩은 몸도 다시 썩지 아니할 몸을 입고 주님과 함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왕노릇하며 살게 될 것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소망을 가진 자는 더 이상 세상 죄를 짓고 살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썩을 육신만을 위하여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도 결코 게으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종말론적 가르침을 담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성도들에게 단단히 일러준 실천적 교훈들을 들어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이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사도가 가르친 이 종말론적 전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 늘 소망 중에 살아갑시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좀 부족한 것이 많더라도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더 좋은 것, 더 영원한 것, 더 참된 것, 나에게 속한 영원한 더 좋은 것들이 장차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생각하고 소망을 가지고 기쁘게 살아갑시다. 또 남보다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해도 그것에 너무 빠지지 말고 다 쓰고 살려고 하지 맙시다. 있는 자들은 없는 것같이 살고, 아내 있는 자들은 아내 없는 자같이 살고, 매매하는 자들도 물건을 다 쓰지 못할 것같이 살라고 사도가 가르친 말씀을 기억하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큰 부자였으나 천막 생활로 만족하면서 저 하늘 본향을 늘 사모하며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눈을 들어 하늘 본향을 늘 바라봅시다. 죄를 멀리하고 친구를 잘 가려 사귀고 지금도 열심히 주님과 교회를 섬기지만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며 살아갑시다. 우리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고 장차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복되고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