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02 주일낮설교 / 충만교회 민창근 목사
마 12:9-13, 막 3:1-5, 눅 6:6-10 / 구덩이에 빠진 양
(마 12: 09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10 한편(便)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訟事)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막 3: 01 예수께서 다시 회당(會堂)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02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訟事)하려 하여 안식일(安息日)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0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04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05 저희 마음의 완악(頑惡)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回復)되었더라
눅 6: 0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會堂)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0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訟事)할 빙거(憑據)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08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0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 무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回復)된지라)
* 공관복음서에 함께 기록된 비유들을 말씀드린다(9번째).
* 오늘 말씀은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에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 때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은 사건 다음에 위치해 있는 말씀이다. 밀이삭을 잘라 먹은 일과 손마른 사람을 고쳐주신 사건이 모두 안식일에 일어난 일로 연관이 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말씀들을 주시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계속 다른 말씀들에서 예수님과 충돌하다가 이 안식일 사건들을 통하여 예수를 죽여 없애려는 계획을 짜게 된다.
밀 이삭은 잘라 손으로 비비어 호~ 하고 불어 먹게 되는데, 자르는 것은 추수행위이고, 손으로 비비는 것은 타작하는 것이고, 호~ 하고 부는 것은 정미(精米)하는 행위였다.
신 23:25에는 시장할 때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잘라먹는 행위가 허용(許容)되고 있다. 따라서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먹은 행위 자체는 결코 죄가 되지 않지만, 그 일을 안식일에 행했다고 하는 문제가 발생된 것이다.
유대인들의 율법주석서 미쉬나(Mishina)에 따르면 '안식일에 어린양이 한입에 넣을 남큼의 이삭을 잘라 취하는 것도 죄가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M. Sabbath,7:4).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것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예수님은 두 가지를 예로 들었다.
1) 다윗이 배고플 때 제사장들만이 먹는 진설병을 먹었다고 했다. 당시 제사장이었던 아히멜렉은 율법의 규정을 어기면서도 다윗과 그의 소년들에게 떡을 주었다.
→ 배고픈 자를 외면치 않고 사랑과 긍휼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2) 제사장들은 성전안에서 안식일에 제일 바쁘게 일하므로 안식을 취하지 못하지만, 이것은 주의 일을 하는 것이기에 죄가 없는 것이고 인정한다.
→ 따라서 안식일의 주인되시는 주의 일을 위해 다니는 제자들의 행위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문제에 이어, 안식일에 병고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예수님은 회당으로 가셨다. 아마 예수께서 자주 드나드시던 가버나움의 회당으로 추정되는데, 회당은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기와 학사 에스라 통치시기에 성전과 율법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된 유대인들을 위해 설립된 것으로, A.D.70년 예루살렘이 파멸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예루살렘 안에서 약 480여 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회당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따라서 경건한 유대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의 경우 그는 매일 회당을 방문하였으며, 모든 유대인들은 안식일과 절기 때에는 반드시 회당을 방문하곤 하였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종교 사회의 중심지로서, 결정짓거나 특정한 사실을 발표, 공표하거나, 서약을 행하거나, 재판을 행하거나 죄인을 석방하는 등의 공적인 일을 위한 회합(會合) 장소였다. 한마디로 회당은 율법을 연구, 가르치는 학교와 기도의 처소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지방 법정으로서의 역할까지도 감당하였다.
* 회당에는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손 마른 상태를 묘사한 헬라어 '엑세람메넨'은 완료 수동태 분사형으로서, 이는 그의 신체 장애가 선천적인 것이기보다 후천적인 것으로, 어떤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근육이 마비되고 손이 말라 버려 활동력이 완전히 상실된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Robertson, Vincent).
다시 말하면 이 사람은 뇌의 손상으로 인한 중풍이 아니라 피의 순환이 불순함으로 손의 근육기능을 상실한 자를 가리킨다(왕상 13:4).
다른 성경들에는 '마른손'(KJV, RV,SRB.OAB.JB), '마비된 손'(TEB, GNB), '오르라든 손'(NIV, 공동번역), '불구된 손'(LB)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말 표현으로는 팔이 꼬부라져 붙거나 팔뚝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곰배팔이'가 정확하다고 한다.
누가복음에는 마른 손이 오른손이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교부 제롬(Jerome, Wordsw. & White's edition of the Vulgate, A.D.383)이 나사렛파(the Nazarenes)와 에비온파(the Ebionites)에서 쓰는 묵시 복음서(Apocryphal Gospel)와 외경 히브리 복음서(Hebraerevangelium)에서 인용한 자료에 의하면 이 사람은 예수님께 자신은 '손으로 벌어먹고 사는 석공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보자 자신이 수치스럽게 구걸하지 않도록 자신의 병을 치료해 줄 것을 호소했다고 전한다.
어쨌든 말라 비틀어진 이 손은 결국 그의 장애상태가 심각하며, 그것으로 그의 삶이 위축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만일 그가 가장이라고 한다면 그것으로 인해 그 가정에 큰 위기가 있었을 것이다.
한편 신학자 랑케(Lange)에 의하면 이 사람은 우연히 그 회당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의 대적자들에 의해, 주를 모함하고 송사하기 위한 '악의적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 특별히 불려왔다고 한다.
회당의 바리새인들, 누가복음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 나오는데, 이들은 계속 예수님을 고소할 증거와 명분을 찾고 있었고, 기회만 있으면 예수님을 정식재판에 회부(reference)하려고 노력했다.
서기관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 제사장 계층에서 율법 해석을 목적으로 하여 등장하게 되었다. 그 당시는 율법이 모든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으며, 율법 해석을 목적으로 등장한 서기관들은 문필가로서 이스라엘의 성문서를 해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수집하는 데에도 몰두하였다.
(참고 ; 성문서 - '케투빔'이라 하는데, 시가서(〈시편〉·〈잠언〉·〈욥기〉), 메길로트 또는 두루마리들(〈아가〉·〈룻기〉·〈애가〉·〈전도서〉·〈에스더〉), 예언서(〈다니엘〉), 역사서(〈에즈라〉·〈느헤미야〉·〈역대기 상〉·〈역대기 하〉)의 4부분으로 나뉜다. 케투빔은 예배의식에 쓰이는 시,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시, 지혜문학, 역사, 묵시문학, 짧은 이야기, 낭만적인 이야기 등 여러 가지 글들을 모은 것이다. 이 글들은 BC 6세기초 바빌론 유수 전부터 BC 2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AD 2세기에 케투빔 전체가 정경으로 인정되었다. 토라(율법서)와 느비임(예언서) 전체가 정경으로 인정된 것과는 달리 케투빔은 각각의 책마다 대중성을 근거로 정경을 정했다.)
게다가 서기관들은 필사자들, 편집자들 그리고 성경의 순수성을 수호하는 자들로서 사람들의 대단한 신망과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바리새인은 헬라의 세속 문화로부터 유대교를 순수히 보존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마카비 시대 때 생겨난 소위 '하시딤' 혹은 '하시디안'이라는 경건 집단의 후예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애초의 선한 동기와는 무관하게 날이 갈수록 형식과 위선에 치우치게 되었다.
→ 손마른 자의 영적 의미는
1) 우리의 중요한 손이 마르지 않도록 하라!
손은 인간 행위의 상징이요, 힘과 능력의 상징이다. 따라서 깨끗한 손은 깨끗한 행위, 더러운 손은 불의한 행위의 상징이고, 피묻은 손은 잔인한 손이고, 마른 손은 힘없는 손이며, 바른 손은 권세와 능력의 상징이다.
또 손은 삶의 현장에 두루 쓰이는 온갖 의미와 가르침을 찾고 수용해들이는 인간의 능력이요 힘이요 그 확신이며 소유(所有) 그것이다. 그러니까 손이 건강하면 주의 가르침을 열심히 익히며, 갈무리하여 이웃 사랑의 삶을 잘 사는 것이 믿음의 구체적인 능력이며, 영향력이다.
따라서 주의 말씀을 잘 배우려하지 않는 자, 배우고 아는 것을 행하려 하지 않는 자, 믿음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자, 이웃사랑과 섬김을 하지 않는 자도 모두 영적 손마른 자다.
→ 손이 마르지 않게 해야 한다!!
2) 손이 마르면 자기 자신과 이웃에게 부담을 준다.
손이 마르면 나 자신의 일을 못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입어야 하고, 빌어먹는 수치를 당해야 한다.
→ 우리는 우리의 손을 잘 사용해야 한다. 찬양과 기도의 손, 봉사의 손, 사랑의 손, 선행의 손, 열심히 일하며 사는 손, 선교의 손... 은혜롭게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에게도 유익을 주는 손이 되도록 해야 한다.
3) 손이 마르면 시험꺼리가 된다.
문제 많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이용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처럼 왜곡된 편견,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고, 선한 주의 일을 비방하는 영적 삐딱이가 되지도 말아야하지만, 그들에게 이용당해서도 안된다.
→ 오히려 주의 역사에 사용되어지도록 하라. 은혜의 일에 사용되어지도록 하라.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질문을 한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엿보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아시고 오히려 질문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질문을 하셨다.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 질문은 두 가지 점을 생각하는 것이다.
1)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자비로운 것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합법적인가?"라는 질문이다.
바리새인들의 조상의 유전에 의하면, 만일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울 경우라면 안식일일지라도 의사는 그 사람의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Mishnah, Yomah 8:6 ; Mek Exod 22:2 ; 23:13).
또 어떤 사람 위에 집이 무너질 경우 생명이 위협을 받으므로 구조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 밑에 깔린 자가 이미 죽은 것이 판명되면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그 구조 작업이 연기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문제는 목숨이 위태로운 정도의 경우란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의 경우, 즉 중풍이든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에서든 손에 힘이 없어지거나 손이 말라버린 상황은 그것이 결코 시각을 다투어 치료를 받아야할 만큼 위급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제기한 질문의 출발점이 되었다.
2) 진퇴양난 - 병자를 고치면 고의적으로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이 되고, 병자를 안 고치면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스스로 깨게 되는 것이다.
* 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안식일에 동물이 구덩이에 빠졌을 경우 쿰란 공동체(사해의 서북단 연안에서 약 1km 떨어진 폐허와 그 부근의 지명이다. 소위 `사해 사본'의 발견과 그에 잇따른 발굴 조사에서 그 역사가 분명해졌다.)는 동물 스스로가 구덩이에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널판지를 넣어 줄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이보다 더 적극적인 보호 규정을 제시하고 있다. 즉 그들은 일차적으로 웅덩이에 빠진 동물이 그 웅덩이에서 안식일을 무사히 지낼 수 있을 정도의 음식을 넣어주며, 이차적으로는 그 동물의 목숨이 위험할 경우는 사람이 직접 그 동물을 끌어낼 것을 규정하고 있다(Maimonides, Talmud).
또 A.D. 1C경의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환자들을 간호하는 것을 허락하는 율법에 대해서 상세히 논의한 바 있었다고 한다(Mishnah Eduyoh 2:5 ; M. Sabbath 6:3 ; Mek Exod 22:2 ; 23:13).
중요한 것은 한 마리 양과 한 인간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당연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며,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생각되어지는 존재로서 양에 비해 사람이 훨씬 더 중요하다.
시 144편 - 03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04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을 택하시고 구하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만일 안식일에 동물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훨씬 의롭고, 당연한 행위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은 다만 규정된 법규만을 지키려 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선을 행해야 한다고 하심으로써 율법의 규정을 뛰어 넘으셨다.
예수님의 관심은 안식일이 선을 행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악을 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가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여기서 선은 바로 불쌍한 자들에게 자비(mercy)를 베푸는 일과 연관된다.
따라서 안식일에는 세속적 관심에 대해서는 쉬어야 하지만, 하나님과 인간 생명과 관련된 선한 일에 대해서는 열심으로 일을 해야하는 것이다.
→ 주일 지킴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주의 일에 열심을 내라(예배와 긍휼).
*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질문하니, 저희가 잠잠하였고, 막 3: 05에 저희 마음의 완악(頑惡)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셨다고 하였다.
'완악함'이란 마치 대리석처럼 단단히 굳어버린 완고한 마음 상태를 일컫는다.
마음이 굳어지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올바른 행동도 할 수 없는 것이다.
→ 완악한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은혜롭게 변화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완고함을 보시고, 세 가지를 하셨다.
1) 근심하다. - '근심하사'란 '함께'란 뜻의 '쉰'과 '걱정하다'는 뜻의 '뤼페오'의 합성어로서,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함께 염려하는 측은한 마음을 의미한다.
→ 완고한 마음은 주님을 걱정하게 하는 것이다.
2) 노하셨다. - '노하심으로'란 마치 이글거리는 눈으로 보듯이 매우 분노하신 상태를 암시한다.
이렇게 마가는 예수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다. 마가복음 10:14에서도 제자들이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예수님이 만져주시기를 바라며 데리고 오니 제자들이 꾸짖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분히 여기셨다고 되어 있다.
주님의 분노는 부정과 부패에 대한 정의의 분노를 말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고, 사랑의 분노라고도 한다.
→ 완고한 마음은 주의 노하심을 받게 된다.
3) 둘러보셨다. - '둘러보시고'는 주로 많은 목격자들이 있음을 보여 줄 때 사용된 용어로(34절; 5:32 ; 9:8 ; 10:23 ; 11:11) 순간적으로 쭉 한번 둘러보신 것이지만, 주님이 한 사람 한사람 얼굴을 쳐다보며 눈을 맞추면서 올바른 반응을 나타내지 못함에 대해 꾸짖고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 완고한 마음은 주의 꾸짖음을 받는다.
*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예수님은 손마른 자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였다.
1) 이것은 명령이다.
(눅 6:8)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일어나 서라 할 때 그는 일어나 섰고, 손을 내밀라 했을 때 내밀었다.
손마른 자는 결단해야 한다. 순종하여 고쳐주실 것을 믿고 일어나, 내밀 것인가? 아니면 불순종할 것인가?
→ 믿음의 역사는 순종할 때 일어난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난다.
순종할 때 치유가 일어난다. (예) 나아만 장군
순종할 때 은혜가 임한다. (예) 삭개오야 내려오라!, 깊은 곳에 던져라!, 오른쪽에 던져라!
주님께 따지지 말고 순종하겠다고 하라!
2) 치유는 안수나 만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이루어졌다.
빛이 있으라! - 주의 말씀으로 이루어졌음을 믿어라.
세상이 주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기에, 세상의 모든 것은 말을 알아듣는다.
바람과 물결보고도 명령하시지 않는가.
(예) 힌두교인들에게 선교하러 간 두명의 선교사가 강을 건널 때 다가오는 악어에게 명령
(예) 물도 사람의 말을 알아들음. 기도를 알아들음.
→ 말씀에는 능력이 있다.
우리의 말에도 능력이 있다. 말대로 되고, 믿음대로 된다!
생활속에서 주의 말씀으로 명령하라!
3) 치유는 조용한 곳에서 둘만의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회당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이루어졌다.
확실한 증거와 목격자가 있다.
→ 내 신앙의 확실한 간증이 있는가....개인적인 영적 체험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적인 영적체험도 갖도록 힘을 써라!
즉 예배시간, 집회시간, 기도시간......은혜체험을 사모하라. 역사가 일어난다.
* 누가복음에는 안식일에 병고치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더 나온다.
누가복음 13장에는 회당안에 18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인이 있었는데, 고쳐주셨다. 회당장이 분을 내니 예수님은 "15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 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고 하였다.
누가복음 14장에는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갔는데, 주의 앞에 고창병이 든 한 사람이 있었다. 고창병은 심장에 결함이 있거나 신장이 병들었을 때 발생한다고 한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얼굴이 부어 오르며 팔과 다리도 크게 부어 올라 살갗이 물러지는 증상을 띠게 된다.
예수님은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에게 오히려 물으셨다.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저희가 잠잠하니 예수님은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05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06 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지 못하니라"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