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일 [연중 13주간 월요일]
창세기 18,16-33
마태오 8,18-22
<문을 좁히는 것이 잘못일까?>
“해군 특수부대는 장시간 수영에 완벽해야 합니다. 그중 하나는 야간 수영입니다.
교관은 물에 들어가기 전, 훈련생들에게 즐겁게 설명을 합니다.
수많은 상어들이 득실거리는 센클렌이라는 바다 안에서요.
하지만 그들은 장담했습니다.
아직까지 상어에게 잡혀 먹힌 훈련생은 없었다고요.
적어도 그들이 기억하기엔 말이죠.
그러나 우리가 배운 것은 상어가 우리 주변을 빙빙 돌더라도 내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헤엄쳐 도망가지 마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만약 야식에 굶주린 상어가 당신에게 돌진한다면 모든 힘을 모아서 상어의 얼굴에 펀치를 날리세요.
그러면 돌아서서 도망갈 것입니다.
이 세상엔 수많은 상어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수영을 완벽하게 하고 싶다면 상어도 다룰 줄 알아야합니다.
그러니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상어에게 등을 보이지 마십시오.”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으세요? 침대 정돈부터 하세요.” 라고 한 해군 대장의 유명한 연설 중 일부분입니다.
이 연설 안에는 상어와 정면으로 맞서 얼굴을 때릴 용기가 없다면 해군 특수부대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보통 훈련병 중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수가 30%정도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대부분은 잘 모르고 그 부대에 지원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런 훈련을 견딜 능력이 있다고 잘못 판단하고 지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특수부대에 들려는 지원자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수도회들이 입회자가 없다고 난리지만 마지막까지 지원자가 있는 곳은 엄격한 봉쇄수도원들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힘든 곳에서 버틸 때, 그만한 보람을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다보면 길거리에서 잘 일도 많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런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면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한 제자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당신을 따르기로 했으면서 아버지 장사는 왜 지내려고 하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율법학자가 함께 듣고 있었다면 기겁을 했을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에 따라 아버지 장사도 지내지 않는 아들은 율법학자의 시각으로는 인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로써 율법교사에게 당신을 따르려면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율법의 고정관념까지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함께 살고 싶어 결혼을 해도 많은 수가 이혼을 합니다.
좋은 사람을 고르고 골라 함께 사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얼마나 힘들까요?
그렇지만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어떤 것까지 견뎌야하는지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명확히 말씀하셨고 감당할 수 있겠거든 따르라고 하십니다.
백종원 씨가 진행하는 골목상권 살리기 프로그램을 보면 가끔 전문가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가게들을 만나게 됩니다.
손님에 대한 예의나 장사를 위한 기본적인 가격책정, 혹은 가장 기본이 되는 음식 실력도 안 되는데도 장사를 시작한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본인들 입장에서는 잘 될 것이라고 믿었겠지만 전문가들 입장에서는 100% 망할 수밖에 없는 가게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장사에 뛰어들 수 있는 이유는 명확한 기본규정을 알려준 사람이 주위에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알아야 망하지 않을 규정들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상황이 자주 발생합니다.
주일미사도 나오기 힘들어 냉담 하는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들을 잡기 위해 그 규정들을 더욱 낮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욱 냉담 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입니다.
더욱 잘못 알고 들어오는 신자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에 들어가려면 십일조를 철저하게 내고 주일엔 반드시 가게 문을 닫고 쉬어야한다는 것쯤은 명확히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몇 년 전 그들의 주일 예배 참례율은 80%를 넘었습니다.
천주교는 30% 이하입니다.
가톨릭교회는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그들보다 더 엄격한 규정을 지켰고 오랜 기도와 희생극기를 하여야 했습니다.
아침기도, 저녁기도를 거의 한 시간 동안 바쳐야했습니다.
현재 수도자들 수준으로 평신도들이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때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고 교세는 커져만 갔습니다.
들어오는 문이 좁더라도 일단 들어오면 철저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도록 규정과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더 예수님께서 하신 방식과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느슨하게만 해서 더 많은 사람을 받아들이면 너도나도 그 정도만 하면 되는 줄 알고 모두가 다 느슨해질 수 있습니다.
수도회는 수도자처럼 살아야하고, 성직자가 되면 또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오늘 복음말씀에서 하신 것처럼 집도 없을 것이니 알아서 자야한다고 하고 아버지 장례에도 갈 수 없다고 한다면 누가 따르려고 할까요?
그러나 그런 것까지 따르겠다고 함께 모인 이들의 자부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많이 들어오도록 문을 넓히는 것만이 꼭 좋은 것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복음말씀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1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창세기 18,16-33
마태오 8,18-22
<예수님 추종! 결코 감상적이거나 낭만적이거나 호락호락한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 혜성처럼 등장하신 예수님의 매력적인 모습에 반한 많은 사람들이 원대한 꿈과 당찬 포부를 안고 보무도 당당하게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요란스런 송별회를 몇주간이나 계속했고, 목숨바쳐 그분을 따르겠노라고, 공공연하게 사람들 앞에서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직면하게된 예수님 추종의 삶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잘 알고 계셨던 스승님의 발걸음은 바빴습니다.
오늘은 이 고을에 내일은 또 다른 고을에...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진 수많은 양떼를 생각하니 미적미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포함한 제자단의 전도여행길은 절대로 럭셔리하지 않았습니다.
안락한 이동수단은 없었습니다. 그저 걷고 또 걸었습니다.
쾌적한 숙소? 꿈도 꿀수 없었습니다.
그저 주어지는 대로, 숙소를 찾으면 이슬을 피했고, 못찾으면 노숙도 다반사였습니다.
사마리아 지방에 당도한 제자단은 갑자기 맨붕 상태에 빠졌습니다.
오랜 여행길로 인한 여독과 굶주림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랠 수 있겠지? 하는 희망으로 숙소를 청했으나, 일언지하에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한 성깔하던 야고보와 요한 사도는 얼마나 화가 났던지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시기를 원하십니까?”
(루카 복음 9장 54절)
눈물을 머금고 제자단은 밤늦은 시간에, 굶주린 배를 부여안고, 또 다른 고을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습니다.
어떤 때는 이틀이고 사흘이고, 동굴이나 바위 틈에서 노숙을 해야만 했습니다.
몇 끼니를 건너 뛰는 것은 통상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단의 고달픈 모습은 복음서 곳곳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전도 여행길에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제자들은 밀밭으로 들어가 밀이삭을 훑어 날 것으로 먹었습니다.
잔치집에라도 들어가면, 몇 끼니를 건너뛰었던만큼, 다들 눈이 휘둥그래져서 게걸스럽게 먹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먹보요 술꾼’이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 추종! 결코 감상적이거나 낭만적이거나 호락호락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을 추종함으로 인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그분을 추종함으로 인해 우리가 느끼게 될 고통과 슬픔이 한 가득입니다.
외로움과 허전함이 늘 뒤따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추종함으로 인해 겪는 고통이 크면 클수록, 그분으로 인한 것이니, 큰 기쁨으로 여겨야겠습니다.
그분으로 인해 우리가 겪는 추위와 더위, 굶주림과 갈증은 더할나위없는 영광으로 생각해야겠습니다.
그분으로 인해 우리가 인해 체험하게 되는 허전함과 쓸쓸함을 기꺼이 견뎌내야겠습니다.
언제나 그 어디에도 묶이지 않으시고 자유롭고 당당하셨으며, 극단적 청빈의 삶을 추구하셨던 예수님의 삶은,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오 복음 8장 20절)
또한 그리고 애타게 그리워하던 하느님 나라가 목전에 당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며 예수님 추종을 자꾸만 미루는 사람들을 향해 그분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긴박성에 대해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7월1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 8,18-22 : 제자 됨의 본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하신다. 이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한 배움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들에게는 비유로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더 자세히 가르쳐 주셨다. 이 제자들에게 현세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속된 것에서 거룩한 것으로,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에로 건너가라고 명령하신다. 나 자신으로부터의 끝없는 탈출이다.
그 때에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따르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율법학자는 그분이 가시는 곳을 알지 못했다. 막연한 짐작뿐이었다. 예수님은 최후의 수난과 저승에 내려가심과 하늘로 올라가심을 향해 가고 계셨다. 율법학자나 베드로나 같은 모습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요한13,36)고 하신다. 베드로는 하녀의 물음 하나에 그분을 배반하지 않았던가!
예수님은 낮은 신분으로 겸손하게 사셨다. 그분께는 정해진 집이 없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20절)고 하셨다. 그분은 차림새도 수수했다.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아무런 권한을 행사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당신 나라에 대해 알고 계셨지만 임금이 되기를 마다하셨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 주십시오.”(21절) 이 말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주님을 따르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섬기려면, 우리가 귀중하게 여기는 다른 모든 것보다 하느님을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카인처럼 둘째가는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있는 이들을 위하여“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어머니다.”(마태12,50)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가족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22절) 이 말씀은 죽은 것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는 뜻이 담겨 있다.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콜로 3,5) 이런 것들은 죽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던져버려야 한다. 몸 전체에 병이 옮지 않도록 베어 버려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당신의 것을 모두 포기하신 분이다. 당신이 하느님이심까지도 모두 버리시고 당신을 낮추신 분이시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거기에 즉 아버지의 뜻 안에 당신의 거처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 자신도 주님을 따른다고 할 때, 철저히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삶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의 뜻 안에 머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자녀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