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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동백에 투숙하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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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에 투숙하다]
이관묵 시집 / 시작시인선 0238 / 천년의 시작(2017.08.10)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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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에 투숙하다
이관묵
이 집을 빈방이 혼자 사시도록 고쳤다 어느 날 마음이 수평선을 데리고 몰려오거나 눈사람이 추위를 사 들고 아무 길이나 들어서더라도 마중 나가 집 앞까지 모셔오도록 오는 길을 여럿 풀어놓았다 대문 옆 파도 소리 심어놓고 요즘 부쩍 건강이 좋지 않은 빈방 간병도 부탁해놓았다 빈방 혼자 밥 잡수시는 창살 무늬를, 뒤늦게 집 나간 바깥 들어와 며칠 묵었다 가는 바람의 주소를 붉게 익은 동백들이 환하게 비추었다 문밖에 환하게 켜놓은 동백 전구
집 꼴이 좀 돼가는지 지난여름 불볕에 타 죽지 않은 모과나무 그늘도 묵고 있었다 매일매일 밤도 와서 묵고 간다고 한다 여기서 나고 자란 저녁연기 술에 취해 게걸거리다 그냥 돌아가게 허공에 디딤돌이라도 놓아야겠다 나를 무단 방류했던 길바닥도 분실되지 않도록 뜯어다 걸어두어야겠다
내년 봄엔 생각 다 쳐버린 나를 한 그루 앞뜰에 심었으면 좋겠다
꽃 아래 누워 뼈를 뜨겁게 지지고 싶다
늙은 높이
이관묵
구름으로 낙향하리
구름에다가 구름 한 채 지으리
잎 진 미루나무
네가 바라보는 곳을 나도 보기 위해
네 그늘 밑에 내 그림자를 쌓아두리
추위가 한철 살다 가는 높이를 나도 가져야 하리
네가 바라보는 곳을 나도 보기 위해
네 높이를 한 뿌리 얻어다 기르리
푸른 무릎
이관묵
오를 때 보았다
산 벚꽃 아래
꽃잎이 바위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고 있는 것을
내려올 때 보았다
두 쪽으로 쩍 갈라진 바위덩어리
그 위에 낭자한 핏자국들!
저 마음 곁에
내가 데리고 간 길들을 무릎 꿇리고
내 삶을 무릎 꿇리고
(…)
무릎과
무릎에 뜬 새벽달과
무릎으로 걸어가 도달하는 하늘을 반죽해서
마음 한 채 짓고 싶다
다른 곳은 말고 저 마음 곁에
하늘 시詩
이관묵
오늘은 혼자 시골집에 들러
벽을 헐고 하늘을 곱게 갈아 끼웠다
하늘이 울창하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덜컹거리지 않도록 굵은 철사로 동여맸다
나는 가끔 새를 입고
하늘이라고 믿었던 곳까지 걸어가
생각에 잔뜩 하늘을 묻히고 왔다
무자서無字書
이관묵
밤늦도록
흰 종이 들여다보고 있으니
옛 선비가 유배지에서 아내에게 보냈다는 편지
겉봉 열어보니 흰 종이뿐이었더라는
흰 두루마리에 빼곡히 써 내려간 흰 글씨뿐이었더라는
허공 한 한 폭을 좍 찢어 밀봉해 부친
그 편지 생각난다.
흰빛의 언어
침묵을 곱게 빻아 염한 유골함
곁
이관묵
신혼아, 마음이 너의 거처니라
모처럼 고생해 장만한 마음
전용면적 좁더라도 살면서 늘려가거라
낡고 옹색한 무소 가죽의 고집 들여놓기는 불편할 거다
원목 무늬 추위나 들여놓거라
마음도 오래 쓰면 덜컹거리고 고장이 잦단다
손질해가며 살아라
어느 날
문밖에 언 발을 찾아와 문 두드리면 마음이 깊어질 거다
한 칸 내주어라
평생 혼자 걸어서는 닿지 못하는 걸음일 수 있다
너의 곁을 무료로 내주어라
곁은 곁에 두어야 번식하는 거다
혼자 눕지 말거라
시 고용雇傭하다
이관묵
지하철 1호선 서울역 승강장
스트린도어의 시들이 재복차림으로 침침하게 서 있다 청마도 목월도 침침하게 서 있다 맨 뒤 용래 선생도 쪼그리고 앉아 훌쩍이고 있다 시들의 유일한 노동은 두 팔로 시를 열었다 닫는 일, 시의 방에 들어가 몸 덥혀 나오는 한순간을, 시에 갇혀 덜컹덜컹 흔들리며 이쪽 삶에서 저쪽 삶을 건너가는 한 송이의 시간을,
시들이 지키고 있다
출입문 시들지 않게 보살피고 있다
시가
시가
시가
시끌벅적한 삶의 문지기라니!
방금 도착한 발에게 추운 목례를 건넨다
방금 벽을 후려치는 주먹에게 언 문을 열어준다
비정규직으로 고용된 시들
이따금 파업에도 동참하는 시들
연금도 없이 노후에 고생하는 시들
저 시들의 자택自宅은 어디일까
낮잠
이관묵
사내가 다가와
“한 푼 도와줍쇼” 한다
들고 간 캠핑용 매트리스만한 일요일 꺼내 펼쳐 주었더니
금방 누워 코를 곤다
접었다 편 두 평짜리 일요일
참 푹신하다
오, 푸른 잠
삶 한 개피 피우다 떨어뜨린
재[灰]
발의 비망록
이관묵
칠십 년 대였지요
선배 시인 모시고 충정로 옛 현대시학사 사무실에 세 들어 사는 시 찾아 갔다가 발 한 쌍을 얻어다 길렀어요 평생 반려가 될 동물이니 잘 길들여보라고. 시의 입구는 항상 응달, 시 찾아가던 발이 언 땅바닥 빙판에 자주 미끄러지거나 비좁은 목조 계단을 디디고 올라가다가 헛디디곤 했지요 처음엔 발이 야생이어서 말을 잘 듣질 않았어요 그때마다 발을 꾸짖거나 채찍을 가했지요 때로는 울안에 가두어 놓고 며칠 굶기기도 했어요 발이 시 찾아 디디는 보폭에 익숙해질 때까지 길들이는 데 평생이 걸리네요 지금은 내 눈치만 살피며 함부로 내딛지 않아 다행이지만 시 앞에 다가가려면 주눅이 들었는지 늘 엉거주춤한 꼴이 밉상입니다 발 보호단체에선 벌써부터 발을 야생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맹렬이 주장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푹푹 빠지던 진창길 비틀비틀 끌고 다니거나 늦은 밤 눈길 떠메고 오느라 고생 많았던 발이에요 그러니 제가 평생 사육한 발을 함부로 돌려보낼 순 없지요 평생 정든 탓도 있지만 지금 돌려보낸다고 저놈이 야생의 무리 속에 잘 적응하고 지낼 지도 보장할 수 없고요 그러나 언제까지 제가 붙잡아 둘 수는 없어요 제가 죽고 나면 아무도 거두어 줄 사람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할 텐데…….
아무도 살지 않는 칠십년대는 이제 폐가가 되겠지요
불빛 유택幽宅
이관묵
모임에 나가 밥 먹으며 우리는 어떤 죽은 이에 대해 논했다
각자 아는 만큼 그의 삶과 인간을 들추었고 우리가 방치했던 비주류의 추위와 생화 같은 노래를 거품째 들이켰다 그의 유고집 같은 우울한 질문들은 마른안주
파할 무렵, 그의 헐벗음은 형광등 불빛을 받아 봉분처럼 뿌옇게 부풀어 올랐다 밥집 지하 방의 둥그렇게 환한 불빛은 결국 죽은 이의 유택幽宅이었고 그의 푸른 눈썹과 분실한 맨발을 음각하고 있는 우리는 모두 그의 묘비였다 무덤 앞에 세워진 나지막한 검은 빗돌들, 누구는 궁서체로, 누구는 예서체로, 혹은 한자로 혹은 한글로 뒤섞여 게걸거리고 앉아 있는 쓸쓸한 묘비들,
다들 탈퇴한 삶에 빚지고 살아왔구나
응달
이관묵
택배가 도착했네
손에서 손을 건너온 먼 손
한 박스의 손
손이 손에게 말했지
(부재중 경비실에 맡겨주세요)
아무리 말을 걸어도 응답이 없더군
경비실 응답에 버려진 응달
내게 도착한 불룩하게 밀봉된
잠 뜯어보려고
잠에 묻은 응달을 탁탁 터네
검은 부재 곁을 오래 기다리다가
손도 경비실에 응달을 맡기고 가는군
흰 시간 4
이관묵
어떤 울음이 앉았다 갔을까
어떤 바닥이 저녁을 두들겨 팼을까
공원의 빈 벤치
내가 가끔 낮술 먹다
마음 과음하고 비틀거리며 털썩 걸터앉았던
흰 시간
혹은 울음이었던
혹은 바닥이었던
흰 시간
감잎 몇 장 곱게 붙여 놓았다
소인 찍힌 우표처럼
내게 배달된 시간이
발신지 없는 한 통의 소포뭉치였다니
흰 시간
박스 채 뜯어보았다
새들이 발자국 꾹꾹 눌러 쓴 짤막한 안부
하늘에서 일용직으로 근무하는 구름
밥 차 기다리는 잎 진 나무그늘
그리고 죽을 때까지 쓰고도 남을
흰 시간
죽은 뒤 모두 불질러버릴
절판된 사람들
이관묵
책상도 없이 맨바닥 폈다 덮는다
무릎 높이에서 여치가 울다 가고 오늘은 책도 재운다
책꽂이에 수북이 밤이 꽂혔다
사람이 자꾸 틀린다
사람을 타고 항해하다 사람에 좌초한 삶을 틀리고
틀린 삶을 또 틀리고 다시 반복해서 읽어도 또 틀린다
어떤 손이 나를 꽂혀 있던 자리에 도로 꽂아놓는다
읽다가 말고 빈 케이스만 꽂아놓는다
어제였다
국밥집에 헌 시집 같은 사람들 만나 국밥을 먹었다
누군가 읽다 제자리 꽂아놓은 절판된 사람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난해한 사람들
읽다 말고 침 묻혀가며 얼굴 몇 장 접는다
사람 덮고
사람 끄고
허공 농장
이관묵
손을 부러뜨렸다
그 통증 산에 놓고 왔어야 하는 건데
수리하는 데 최소한 6개월은 걸린다며 칭칭 묶어 허공에 걸어놓는 것 아닌가
오래 써먹은 손 고장 날 때도 되었지
손이 일구던 허공은 이미 폐농지
……빈 숟가락질, 식은 악수, 삿대질, 추운 이별, 움켜쥔 주먹, 다급한 손짓, 열 손가락 넘기지 못하는 셈, 헛손질, 부스럭거림……
제때 출하 못 해 썩어버린 칠십 년 근들
허공이 캐다 묻어버린 허공
헐값에 처분해야 하나
수국
이관묵
그때 나였던 얼굴
담장에 기어올라 발돋움 하고
먼 집 밥 냄새 맡던
그때 나였던 얼굴
한 송이 꺾어
시 쓰는 책상머리에 꽂아 놓았다
한 때는 저 얼굴에 기차가 지나가기도 하고
누군가 천둥을 심어 놓기도 했지
시가 좀 환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밥 냄새 나지 않는 시를 위해
시의 제단에 밥상 차려 놓고
고봉밥 같은 얼굴 모셨다
한때 나였던 너에게
답장을 쓰려고 편지지 앞에 앉아
몸을 흔들어 본다
깡통 같은 몇 개 찌그러진 말들이 덜컹거린다
병病 이후以後
이관묵
장기간 시간 사용료 체납했더니
당장 시간 공급 끊겠다고 계고장을 보내왔다
그간 물 쓰듯 펑펑 썼다
아까운 줄 모르고
염치없이
누가 어디 불법으로 빼돌려 파는 유사 시간 없을까
많이는 필요 없고
몇 리터만
봄
이관묵
만개한 산벚꽃
저 화염火焰에 타죽으려고
길이 길을 들쳐업고 올라온다
길이 길을 불구덩이 속에 집어 던지고
저 혼자 가고 있다
푹 꺼진 등처럼
연기처럼
욕지도.1
이관묵
어젯밤
민박집에서 혼자 밥 먹다 내다본 수평선
쓰러져 내 곁에 함께 누운 수평선
꽁꽁 묶어 차에 실었다
묵직하다
통영에서 대전까지 내내
나는 나를 무시로 동여매며 왔다
수평선 엎지를까 조심하며
수평선
거실 벽에 걸어두고 길렀다
삶 좀 아득해지려고
시를 굶기다
이관묵
삼시 세끼야
삼시 세끼야
시 자주 찾아가 머리 들이박지 말아라
입 자꾸 짓찧지 말아라
시는 요즘 금식 중이다
불면은
시가 틈틈이 농사지은 구황작물
한 박스 다듬어 보내마
겨우내 두고 먹어라
따뜻한 네모
이관묵
먼 산이 내모난 창으로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
내가 따뜻해지는 걸 네모나게 들여다보고 있다
혼자 순댓집에 들러 막걸리 한 대접 마시고 막 들어온 내 잠도
네모나게 들여다보고 있다
산은 나를 네모 안에 들여놓고
막스 브루흐의 <콜 니들이>를 수도꼭지처럼 틀어놓고 지그시 눈 감은
나를 네모 안에 들여놓고
배 위 어린 손자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나를 네모 안에 들여놓고
산은 나를 네모나게 읽는다
네모 안이 우물처럼 깊다
시 찜질
이관묵
헤세 시집을 읽다가 갈피에
붉은 단풍잎 한 장을 끼워 놓았다
시가 사는 방에 가을이 몸 지지려 왔다
가을을 쬐려고 시들이 모였으나
제가 들고 온 통증이 더 뜨거웠다.
시 앞에 쪼그리고 앉은 가을이 쭈글쭈글하구나
갈 데도 없거니와 가고 싶은 곳도 없어
나도 마음 데리고 여기 와서
한철을 처박혀 있었다
그러나 빛깔이 좀처럼 들지 않는다
삶이 힘없이 구겨진다
등 뒤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시는
잠깐 들러 쉬었다 가는 주막이 아니야
문 걸어 잠그고 진땀 내며 견디라고
시는 나를 견디고……
나는 시를 견디고……
삶이 뜨거워지면 곱게 색이 들겠지
타 죽을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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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잎 진 미루나무
네가 바라보는 곳을 나도 보기 위해
네 높이를 한 뿌리 얻어다 기르리
- 시 「늙은 높이」에서
2017년 8월
이관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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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묵 詩集 [※동백에 투숙하다※]
[ 해설 ] -
시라는 이름의 부도浮屠
이성천 문학평론가
1.
이관묵의 새 시집『동백에 투숙하다』는 느린 호흡으로, 천천히 읽어야 한다. 마치 고즈넉한 사찰에서 부도浮屠 탑돌이를 하듯, 그의 시는 반복적으로 되새김질해가며 읽어야 한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이관묵의 일부 시편들은 은유와 환유의 기법을 꾸준하게 활용하는 탓에 읽는이의 손쉬운 접근을 사전에 차단한다. 제법 낙차가 큰 유사성과 인접성의 배열 원리에 바탕을 둔 그의 시어들은 종종 의미의 분절현상을 야기하는데, 이 점이 독자로 하여금 신중한 접근 태도를 가져가게 하는 것이다. 그 의미의 분절현상이란 가령, 이런 것이다. “사람이 불자/사람이 꺼진다”(「사람이 분다」), “탈퇴한 삶에 빚지고 살아왔구나”(「불빛 유택」), “무장해제되어 수감된 모자 말 걸어본다”(「검은 비」), “우리가 기억의 석탄층에 매장해버린 흰 시간”(「흰시간 2」) 혹은 “시들의 자택自宅”(「시 고용하다」) 등등. 이외에도 낯선 주체의 적극적 도입 및 선禪적 표현을 방불케 하는 과감한 진술, 또한 읽을수록 삶의 연륜이 우러난다는 점도 우리가 그의 시집 주변을 자주 맴돌게 하는 빼놓을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관묵의 시편들을 차분하게 반복적으로 살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정작 이런 것들이 아니다. 독자가 이관묵의 시를 두고 일종의 ‘부도 탑돌이’ 방식의 독법을 취해야 하는 보다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시가 우리 삶의 정신적 위안으로 작용한다는 저 오래된 예술적 정의와 관련된다. 다시 말해 시는 우리 시대의 진솔한 언어의 ‘사리舍利’를 모아놓은, 이른바 말의 부도浮屠라는 서정 장르의 고전적 품격과 관계가 깊다. 실제로 이번 이관묵의 시는 물질문명의 부박한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자본주의 세계에서 삶의 실제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삶의 본래성을 향한 ‘생각’과 ‘마음’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환기하며, 어떤 의미에서 “부도浮屠”로서 서정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금번 이관묵의 시집에 사람과 삶, 인생과 자연의 근원을 향하는 마음과 생각의 흔적이 유독 두드러지는 까닭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70년대 등단 이후, 어느덧 “칠십이 다 된”(「식물성 물음」) 시인은 이즈음에도 스스로를 시에 유폐시키며 인생의 참된 가치와 삶의 고유한 원리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시는 나를 견디고……/나는 시를 견디”(「시 찜질」)는 고투의 과정을 통해, “흰빛 몇 과顆 간신히 수습해 봉안한 쇠락한 시의 부도浮屠”(「눈사람 부도浮屠」)를, 참신한 비유와 감각적인 언어를 동원하여 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2.
시가 말의 부도浮屠라면, 그것이 동시대 진지한 언어의 사리를 모아놓은 정서적 집적물이라면 필연적으로 시는 사유의 문제로 확산될 수밖에 없다. 말(언어)은 인간의 사유체제가 구체적으로 발현된 종합적 양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관묵 시세계가 의식/무의식의 차원에서 “시의 부도”를 운위한다는 것은, 그의 시가 이미 진지한 사유의 영역에 집결해 있음을 의미한다. 즉 이관묵 시인에게 시란 인생의 진실을 추구하는 말[言語]들의 부도浮屠이며, 이는 곧 본래적 삶에 대한 생각과 마음과 정신의 사리를 “봉안한” 사유의 부도이기도 한 것이다.
구름으로 낙향하리
구름에다가 구름 한 채 지으리
잎 진 미루나무
네가 바라보는 곳을 나도 보기 위해
네 그늘 밑에 내 그림자를 쌓아두리
-「늙은 높이」부분
나는 가끔 새를 입고
하늘이라고 믿었던 곳까지 걸어가
생각에 잔뜩 하늘을 묻히고 왔다
-「하늘 시詩」부분
시집의 도입부에 순차적으로 위치한 이 작품들에서 “구름”과 “잎 진 미루나무”의 “늙은 높이”와 “잔뜩 하늘을 묻힌” “생각”이 지시하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그것들은 화자의 마음이 투영된 객관적 상관물일진대, 여기에는 무욕의 삶과 정신의 고양을 추구하는 시인의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다. “낙향”과 “추위”의 시어에서 암시되는 시의식의 결연함, “비바람이 몰아쳐도 덜컹거리지 않도록 굵은 철사로 동여맸다”라는 시구의 중의성. ‘~하리’와 같은 미래형 종결어미의 반복적 사용 등은 이런 사실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사물을 접목하여 마음의 순정성과 삶의 본원적 “높이”를 갈망하는 시편들은 이번 이관묵의 시집에서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무릎과/무릎에 뜬 새벽달과/무릎으로 걸어가 도달하는 하늘을 반죽해서/마음 한 채 짓고 싶다”고 고백한「푸른 무릎」이 그러하고, “꽃 아래 누워 뼈를 뜨겁게 지지고 싶다”던「동백에 투숙하다」가 그러하며, 역시 “꽃”에 대한 관조와 소묘를 통해 염결한 마음의 자세를 기도한「산수유」가 여기에 속한다. 이 시들은 대체로 일상의 부질없는 “생각 다 쳐버린 나”(「동백에 투숙하다」)로 거듭나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을 대변한다. 뿐만 아니라 자연의 본성을 지속적으로 환기함으로써, 이기적 문명의 논리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된 현대인들의 삶에 반성적 사유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그런가 하면, 시인의 마음과 그 마음의 흐름을 재치 있게 그려낸 다음의 작품도 있다.
마음을 인출해서
마음을 대출받아
혼자 강둑에 앉아 구름 바라보는 데 썼다
나 기다리다 지친 산 벚꽃에게도 조금 송금했다
쓰고 좀 남으며
나이야
네가 언 발로 걸어 오른 심산유곡
고산 침엽수림 같은 두문불출
몇 평 사주고 싶다
거기서 평생 묵묵부답 모시고 혼자 살거라
-「고사관운도孤士觀雲圖」전문
「고사관운도孤士觀雲圖」는 이관묵의 마음 상태를 투명하게 제시한 작품이다. 그러므로「고사관운도」는 노년에 접어든 시인의 심리적 자화상이라고 불릴 만하다. 유의할 점은 이 시에서 시인의 마음이 최종적으로 도착한 장소이다. 의미맥락상 그것은 “인출”과 “대출” “송금”이 유추하는 일상적 삶의 단계에서, “구름”과 “산벚꽃”과 “심산유곡 고산 침엽수림”의 자연지대를 거쳐, 다시 삶의 현장으로 회귀한다. 이는 시인이 자신의 분신 격으로 설정한 “나이”에게 “두문불출”과 “묵묵부답”의 삶을 권유하는 장면을 통해서도 재차 확인된다. 결국 이 시는 헛된 욕망이 부유하는 현실 생활세계에서 자연의 본연한 이치를 기억하며 살아가려는 시인 의식의 표출로 볼 수 있다. 시제가 지시하듯 이「고사관운도」는 비록 외롭고 고단한 작업일지언정 인생의 기원적 의미를 지속적으로 추적하고자 하는 시인 마음의 풍경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이관묵 시인에게 자연은 그 자체로 맹목적 동경의 대상이 아니다. 그보다도 시인에게 자연은 오늘날의 삶에서 인간과 세계의 근원적 질서를 숙고하게 하는 매개적 존재로 인식된다. 자연공간을 배경으로 거느린 적지 않은 그의 시편들이 어느 것 하나 초월과 달관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 원인도 이 점과 긴밀하게 연계된다. 결과적으로 이관묵의 자연은 인생의 고유한 의미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마음의 경유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왜냐하면 이 대목은 그간에 자연 상실의 불안감을 자연 예찬이라는 단순한 방법으로 일관되게 표출해온 그 흔한, 일부의 ‘자연시’들과 이관묵의 시세계가 갈라서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거듭 강조하는바, 이관묵의 시세계에서 자연은 인간과 세계의 근원을 음미하고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마음의 순례자이자 경유지로 포섭된다. 그러기에 그의 시에서 자연은 역설적이게도 상실의 마음이 “투숙”하고 있거나 삶의 핍진성이 오버랩되는 경우가 많다.
3.
이관묵의 자연이 현재의 실상을 자각하는 마음의 경유지였기에 그의 시는 다시 삶의 장소로 귀환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래서 시집의 곳곳에는 “삶이 점점 유실되고 있다”(「흰그림자」)거나 “삶, 고장이 잦다”(「갓길」)라고 되뇌는 실존의 목소리가 자주 들려온다. 또한 “칠십이 다 된 놈들 대여섯 둘러앉아/삼겹살을 뒤집는”(「식물성 물음」) 익숙한 현실의 장면이 유출되기도 하고, 개별 존재들이 지나온 과거 삶의 굴곡과 그늘을 표상한 “흰 시간”(「흰시간」)의 내력이 연속적으로 소개되기도 하며, “방금 배달된 일요일 뒤적거리”(「일요일」)는 평범한 일상 속 시인의 모습이 목격되기도 한다. 이와 아울러 “늦은 밤/비와 독대”(「빗소리」)하는 일, 비 오는 “초겨울 헝가리 부다페스트 외곽”의 동상 곁에서 “모처럼 내가 나에게 말 걸어보”(「검은 비」)는 자기 내면과의 상상적 대화, “밤 늦도록/흰 종이 들여다보고 있는”(「무자서無字書」) 행위, 하물며 “잠 안 자는 잠”의 “불면”(「잠 안 자는 잠」)과 그로 인한 뒤척거림 등도 시인으로서의 개성적인 삶의 단면을 보여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새벽 두 시를 수리하고
새벽 두 시의 불면을 개축하고
잠의 성단에 사람 몇 자루 켜두었다
촛불처럼
오늘밤은 등이 휜 내 기도가 환해질까
천 년 전 왕유는
내게 중국산 무심과
원산지가 표시되지 않은 가을비를 보내주었다
천 년 묵은 개축자재!
폐가 직전의 새벽 두 시
수리하는 데 한번 써보라고
내가 매일 맞이한 삶(生)은 무심
사람을 만지작거리면 왜 그게 시가 될까
사람이 불자
사람이 꺼진다
사람에게 구원받고 싶다
-「사람이 분다」전문
이관묵의 시가 섣부른 초월을 경계하고 현실의 삶을 절대적 진원지로 삼고 있다면 이 과정에서 “사람”의 문제를 당연히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이관묵에게 시는 “사람을 만지작거리는” 작업이고 “사람에게 구원받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드러내는 마음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구심점에 포석한「사람이 분다」는 이러한 이관묵 시의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이 작품은 중국 당나라 때의 시불詩佛 왕유의 “무심”과 그의 시집 속 “가을비”를 효과적으로 차용함으로써 시적 의도를 선명하게 부각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천 년 묵은 개축자료”로 지칭된 “무심”과 “가을비”는 “내 기도가” 필요한 “사람”과 달리, 한결같이 “환해질”수 있는 것들이다.
한 가지, 이 시에서 “사람이 불자/사람이 꺼진다”라는 시적 전언은 여전히 의미 윤곽이 분명하지 않다. 다만, “잠의 성단에 사람 몇 자루 켜두었다”라는 진술, 시인의 “기도”와 “사람”이 대척지간에 놓여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루어 추측이 가능하다. 아마도 이 부분은 타자와의 갈등, 더 나아가 인간의 고유성을 망각한 현대 일상인(homo quotianus)들의 이기심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소외현상에 대한 안타까움과 비판적 회의의 뜻으로 이해해봄 직하다.
모임에 나가 밥 먹으며 우리는 어떤 죽은 이에 대해 논했다
각자 아는 만큼 그의 삶과 인간을 들추었고 우리가 방치했던 비주류의 추위와 생화 같은 노래를 거품째 들이켰다 그의 유고집 같은 우울한 질문들은 마른안주
파할 무렵, 그의 헐벗음은 형광등 불빛을 받아 봉분처럼 뿌옇게 부풀어 올랐다 밥집 지하 방의 둥그렇게 환한 불빛은 결국 죽은 이의 유택幽宅이었고 그의 푸른 눈썹과 분실한 맨발을 음각하고 있는 우리는 모두 그의 묘비였다 무덤 앞에 세워진 나지막한 검은 빗 돌들, 누구는 궁서체로, 누구는 예서체로, 혹은 한자로 혹은 한글로 뒤섞여 게걸거리고 앉아 있는 쓸쓸한 묘비들
다들 탈퇴한 삶에 빚지고 살아왔구나
-「불빛 유택幽宅」전문
“인간을 들추어”내는 시적 작업은「불빛 유택」에서도 계속된다. 시상의 유연한 전개와 상징 시어의 적절성이 단연 돋보이는 이 시는 “어떤 죽은 이”와 “그의 삶”을 추모하는 자리의 정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이에 따라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일단 엄숙하면서도 암울하다. “우리가 방치했던 비주류의 추위와 생화 같은 노래”, 즉 불우했던 망자의 삶이 회고의 주된 내용으로 주어져 있으며 그 한 켠에 “그의 유고집 같은 우울한 질문들”이 “마른안주”처럼 곁들여져 있는 탓이다. 특히 “그의 헐벗음은 형광등 불빛을 받아 봉분처럼 뿌옇게 올랐다”와 같은 대목은 묘한 환각성마저 불러 오는데, 이는 “밥집 지하 방의 둥그렇게 환한 불빛은 결국 죽은 이의 유택”이라는 시구로 이어지며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음울하고 쓸쓸한 정조로 몰아가는 데 일조한다.
한편, 이 시가 간직한 또 다른 미덕은 작품의 후반부로 갈수록 다의적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모두 그의 묘비였다 무덤 앞에 세워진 마지막 검은 빗돌들, 누구는 궁서체로, 누구는 예서체로, 혹은 한자로 혹은 한글로 뒤섞여 게걸거리고 앉아 있는 쓸쓸한 묘비들”이라는 문장은 읽는 이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수용될 여지가 있다. 이 구문에는 망장에 대한 추도의 감정과 함께 삶과 죽음의 거리를 최소화함으로써 궁극에는 그 경계를 무화시키려는 시적 암시가 “음각”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관묵의「불빛 유택」은 삶과 죽음의 이분법적 사고를 지양하는 철학적 판단이 예비되어 있다고 하겠다. 시인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탈퇴한 삶”이라는 마지막 구절에는 죽음을 삶의 연장선상에서 일원론적으로 바라보는 인식론적 전환의 사유가 투사되어 있다.
4.
다시, 이관묵 새 시집『동백에 투숙하다』는 천천히, 되새김질해가며 읽어야 한다. 여전히 그의 시는 인간과 세계의 기원을 추구하는 비의적 기능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시란 변함없이, 일상의 적막한 풍경과 마주하면서도 우리 삶의 정체성과 소중한 가치를 환기하고 재생하는 마음의 작업으로 여겨지는 까닭이다.
지하철 1호선 서울역 승강장
스크린도어의 시들이 제복 차림으로 침침하게 서 있다
청마도 목월도 침침하게 서 있다 맨 뒤 용래 선생도 쪼그리고 앉아 훌쩍이고 있다 시들의 유일한 노동은 두 팔로 시를 열었다 닫는 일, 시의 방에 들어가 몸 덥혀 나오는 한순간을, 시에 갇혀 덜컹덜컹 흔들리며 이쪽 삶에서 저쪽 삶으로 건너가는 한 송이의 시간을
시들이 지키고 있다
출입문 시들지 않게 보살피고 있다
시가
시가
시가
시끌벅적한 삶의 문지기라니!
방금 도착한 발에게 추운 목례를 건넨다
방금 벽을 후려치는 주먹에게 문을 열어준다
비정규직으로 고용된 시들
이따금 파업에도 동참하는 시들
연금도 없이 노후에 고생하는 시들
저 시들의 자택自宅은 어디일까
-「시 고용雇傭하다」전문
「시 고용雇傭하다」는 현 단계 이관묵이 생각하는 시의 역할과 위상을 암묵적으로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해학과 풍자의 미학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시는 얼핏보면, 이관묵의 시세계에서 다소 이질적인 작품으로 비춰질 수 있다. 진정한 삶의 덕목들을 적시하며 서정시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온 이전의 시편들과 달리, 이 작품은 오늘날 서정시가 처해 있는 누추한 현실을 ‘의뭉스럽게’ 조명하고 있는 탓이다. 이를테면 “시들의 유일한 노동”이 “스크린 도어”를 “열었다 닫는 일”로 고정되어 있다든지, 또는 “제복” “비정규직” “파업” “연금” 등의 단어가 연상시키는 현실의 질서에 시가 편입되었거나 “고용”(종속)된 모습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와 더불어 “청마도 목월도 침침하게 서 있다”거나 “맨 뒤 용래 선생도 쪼그리고 앉아 훌쩍이고” 있는 “지하철 1호선 서울역 승강장”의 측은한 풍경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냉소와 조롱(혹은 자책과 연민)의 포즈가 동반된 이 장면들에는 시詩의 근본정신을 망각한 채, 일상 문법의 차원에서 그것을 <도구적>으로 활용하는 물질만능주의의 세태에 대한 안타까움이 감지된다. 아울러 “시가/시끌벅적한 삶의 문지기”로 전락한, 다시 말해서 예술마저도 ‘교환가치’로 운용되는 오늘날의 <기계적> 현실에 대한 고발정신이 내재한다. 해학적 감각으로 구성된 이 시가 일순간, 우울함과 씁쓸함의 정서로 점철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정이 이러할 때, “저 시들의 자택自宅은 어디일까”라는 시인의 물음은 당연한 수순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 질문은 심층적 차원에서 시인 자신에게 재차 되돌려질 수 있을 법하다. 그렇다면 과연, 이관묵 시인이 생각하는 “시들의 자택”은 어디인가. 나아가 이관묵에게 오늘날 서정시의 위의는 어떠해야 하는가.
시는
삶에 꽂아놓은 무통 주사
-「몸으로의 출가」부분
“시는/삶에 꽂아놓은 무통 주사”라는 저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인 시구를 굳이 “입원해서 큰 수술받았”던 시인의 개인사적 체험으로 국한시켜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관묵에게 시는 “사는 게 아니라 그냥 견디는 나날”(「몸으로의 출가」)은 물론, “사람 덮고 사람 끄고”(「절판된 사람들」)하는 순간, 또 생의 시원을 향한 ‘마음’이 생동하는 시간이라면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예방과 치유의 형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시란, 부질없는 욕망의 환각만이 팽배해진 오늘날의 현실에서 결핍된 삶을 보상하고 위무하는 치유의 방편이자, 인간의 정체성과 세계의 고유성을 보존하는 진정한 “삶의 문지기”로 수용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새시집『동백에 투숙하다』가 삶의 면역력이 갈수록 약해지는 일상의 구석구석에서 ‘비판적 입법 기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며 서정시의 본령을 환기한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이런 그의 시는 우리의 사유를 끊임없이 자극하여 말의 부도로서 서정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오고 있다.
지금 이관묵 시인에게 시는, 이렇게 “고용”된다. 또 그렇게 ‘사유의 탑돌이’를 유도하며 그의 시는 ‘거주’한다. “칠십년대” “충정로 옛 현대시학사 사무실에 세 들어 사는 시 찾아”(「발의 비망록」)간 이후, 이제껏 시인이 지독한 “시묘살이”(「새벽달」)를 자청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모두가 여기서 연원하는 것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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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이관묵에게 시는 “사는 게 아니라 그냥 견디는 나날”(「몸으로의 출가」)은 물론, “사람 덮고 사람 끄고”(「절판된 사람들」)하는 순간, 또 생의 시원을 향한 ‘마음’이 생동하는 시간이라면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예방과 치유의 형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시란, 부질없는 욕망의 환각만이 팽배해진 오늘날의 현실에서 결핍된 삶을 보상하고 위무하는 치유의 방편이자, 인간의 정체성과 세계의 고유성을 보존하는 진정한 “삶의 문지기”로 수용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새 시집『동백에 투숙하다』가 삶의 면역력이 갈수록 약해지는 일상의 구석구석에서 ‘비판적 입법 기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며 서정시의 본령을 환기한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이런 그의 시는 우리의 사유를 끊임없이 자극하여 말의 부도로서 서정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오고 있다.
― 이성천.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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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묵 시인∥
∙ 1947년 충남 공주 출생
∙ 197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시집으로『수몰지구』『변형의 바람』『저녁비를 만나거든』『가랑잎 경』『시간의 시육』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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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 보도 자료 / 출판사 서평❚
짙은 서정성으로 우리 삶에 정신적 위안을 안겨다 주는 이관묵 시인의 시집『동백에 투숙하다』가 시작시인선 238번으로 출간되었다. 1978년『현대시학』으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이번 시집에서 사람
과 삶, 인생과 자연의 근원을 향하는 마음과 사유의 흔적을 아름다운 언어로 빚어내고 있다. 인생의 참된 가치와 삶의 고유한 원리를 진지하게 탐구하여, 참신한 비유와 감각적인 언어로 세계를 형상화 해내는 작업은
이관묵 시인이 삶의 진실을 찾아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성천 문학평론가는 “새 시집 『동백에 투숙하다』가 삶의 면역력이 갈수록 약해지는 일상의 구석구석에서 ‘비판적 입법 기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며 서정시의 본령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특히 이런 그의 시는 우리의 사유를 끊임없이 자극하여 말의 부도로서 서정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오고 있다.”라고 평했다. 우리는 이제 결핍으로 가득한 현실을 위무하는 이관묵 시인의 치유로서의 시 쓰기에 주목해야 할 때다.
❚책 소개❚
짙은 서정성으로 우리 삶에 정신적 위안을 안겨다 주는 이관묵 시인의 시집『동백에 투숙하다』는 사람과 삶, 인생과 자연의 근원을 향하는 마음과 사유의 흔적을 아름다운 언어로 빚어내고 있다. 인생의 참된 가치와 삶의 고유한 원리를 진지하게 탐구하여, 참신한 비유와 감각적인 언어로 세계를 형상화 해내는 작업은 이관묵 시인이 삶의 진실을 찾아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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