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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리틀 도교의 조동종 사찰 젠슈지
(Zenshuji 禪宗寺) 건물과 소토 젠 종단
LA 다운타운 리틀도쿄, 아티스트 디스트릭트 한복판에 위치한 젠슈지(Zenshuji 禪宗寺)는 도심 속의 작은 일본이라 불린다. 낮은 지붕의 건물은 일본 전통 건축물의 요소를 빌어와 현대적으로 단장한 스타일이 장중한 직선미를 보여준다. 속세 한가운데서 중생들과 함께 성불하겠다는 큰수레 불교(대승불교)의 철학이 절터와 건물 형태에서도 엿보이는 건축물 구조다.
정원 입구에는 곡선이 아름다운 여래상이 왼손에 연꽃 봉우리를 들고 이심전심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방문자들을 반겨준다. 그 제단 앞에는 오늘 아침에 봉헌한 듯, 싱싱한 꽃이 한 다발 놓였다. 여래상 오른쪽, 작은 지붕이 드리워진 열린 공간에는 여섯 개의 동자상이 죽 늘어서 있다. 아직 바람이 찬 날씨에 행여 동자들이 감기라도 걸릴까, 배려한 어느 신심 깊은 신도의 보살행일까. 동자상의 머리에는 빨간 베레모, 그리고 목에는 빨간 목도리가 둘러져 있어 보는 이들의 웃음을 자아낸다.(주: 애기동자 상이 아니고, 지장보살이다. 일본에서는 유산된 아기나 어릴 때 죽은 아기를 위해 지장보살에게 모자를 씌어주거나 옷을 입히는 관습이 있다)
젠슈지는 일본의 천태종, 진언종 등 13개의 대표적 종파 가운데 조동종(曹洞宗, Soto Zen)에 속한 사찰. 일본 본토 불교계에서 소토 젠(조동종)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가볍지 않다.
남가주에 이민 온 일본인들의 숫자가 늘어감에 따라 그들의 종교적 요구도 이와 비례해 커가기 시작했다. 기댈 곳, 의지할 곳 없었던 일본인 초기 이민자들은 머나먼 타국에서 그들의 정신과 영혼에 위안을 줄 수 있는 구심점, 그들만의 사찰을 갖기 원했다. 이 요구에 부응하고자 세워진 사찰이 바로 젠슈지다. 젠슈지는 1922년, 토요키치 나가사키 부부의 사택에서의 창립법회를 시작으로 출범했다. 일본 소토 젠 본부에서 파견된 초대주지는 호센 이소베(Hosen Isobe). 그로부터 4년 후인 1926년, 바로 그 사택 터에 젠슈지 사찰이 세워졌고 현재 모습을 갖춘 건물은 1969년에 봉헌되었다. 건립기금은 뜻있는 신도들의 성금으로 조성되었다. 내년이면 벌써 창립 90주년을 맞는 젠슈지는 남가주 일본인 불교 커뮤니티의 심장이자 상징이다.
북미대륙 최초의 소토 젠 사찰인 젠슈지는 60년간 북미 지역의 소토 젠 불교 본부로서의 역할도 함께 담당했었다. 지난 30년간 북미대륙에서 소토 젠 불교가 급성장함에 따라 소토 젠 센터 본부는 국제교육센터(International Education Center)를 두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템플로 옮겨졌다.
소토 젠 종단은 도겐 젠지(도겐 선사)와 케이잔 젠지(경산 선사)의 지혜로 밝혀진 붓다의 가르침을 북미대륙에 전파하는 것을 미션으로 삼고 있다. 소토 젠 명상 수행에 대한 미국 주류 사회의 관심은 빠른 속도로 늘어갔다. 오늘날 미국인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불교가 바로 소토 젠 종단이다. 현재 소토 젠 종단은 북미지역에 43개의 분원, 하와이 지역에만도 10개의 분원을 두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약 300여 분원이 있다. 총 53개의 북미 지역 분원에 파견되어 있는 스님은 300여 명. 스님들은 모두 일본 소토 젠 종단에서 모셔와 절에서 급여를 드린다. 절의 재정은 신도들의 보시, 펀드레이징 이벤트 등으로 조성되지만 항상 만족할 만한 수준에는 못 미친다.
남가주 분원으로는 롱비치에 롱비치 부디스트 미션, 몬테벨로 시에는 소젠지 부디스트 템플이 있으며 북가주에는 몬테레이 소토 젠 템플, 버클리 젠 센터 쇼가쿠지, 샌프란시스코 젠 센터 호씬지 등이 있으니 상당한 교세다.
지난 60년간 북미 지역의 소토 젠 불교 본부였던 젠슈지에는 참선이 무엇인지 알고자 찾아온 주류사회 인구가 날이 갈수록 늘어갔다. 이에 따라 실제 참선수행을 시도해볼 수 있는 명상실에 대한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젠슈지는 법당 아래 넓은 공간에, 일본 본토에 있는 에이헤이지 수도원의 명상실을 그대로 재현한, 아름다운 명상실을 들여놓는다. 이 명상실을 짓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전통 건축물 장인들이 대거 태평양을 건너와 이곳 젠슈지에서 작업을 했다. 참선 수행에 참가했던 이들은 이곳에서 행한 참선 수행이 숨가쁘게 돌아가는 도시 생활 속에서 찾은 고요한 오아시스와 같다고 입을 모은다.
선종사의 최초의 미국인 주지 다이가쿠 루메(Daigaku Rumme)
이제까지 젠슈지를 거쳐간 주지스님은 9명으로 모두 일본 본토에서 파견된 일본인 스님들이었다. 현재의 제 10대 다이가쿠 루메(Daigaku Rumme)는 일본인이 아닌 최초의 미국인 주지스님이다. 지난 해(2010년) 4월 젠슈지에 주지로 부임하기 전까지 루메 스님은 샌프란시스코의 젠 센터에서 7년간을 일했었다. 비 일본인 주지를 선임한 것은 참선에 관심을 갖고 젠 센터를 찾는 미국인들이 증가하는 트렌드를 읽어낸, 일본 소토젠 본부의 파격적인 결정이다.
6피트가 넘는 장신, 푸른 눈빛의 이 미국인이 어떤 인연으로 일본 불교계를 대표하는 스님이 되었는지 호기심이 발동한다. 조용히, 느릿느릿하게 풀어놓는 그의 라이프 스토리는 흥미진진했다.
기독교 선교사인 아버지를 둔 덕에 그는 11세 때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았다. 17세 고등학교에 들어간 그는 교토로 수학여행을 떠났던 추억을 들려준다. 그전에도 일본 불교 사찰과 스님들을 본 적이 있었지만 교토에서 본 아름다운 절과 스님들의 평화로운 미소는 그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특히 다이토치(대덕사)의 다이센인(대선원)의 아름다움은 그후로도 오랜 세월, 그의 존재를 흔들어놓았다.
그렇게 불교와 인연을 맺으면서 그는 고뇌하기 시작했다. 나의 아버지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일본인들의 믿음을 바꾸어 기독교로 개종ㅣ키는 일 과연 올바른 것인가? 유난히 키가 껑충한 이 벽안의 소년은 남모르는 고민들로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갔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아이오와에서 대학을 다닌다. 전공은 역사와 프랑스어. 대학에서도 그의 사색은 계속되었다. 그가 대학에 다니던 1960년대와 70년대 초, 세계는 늘 그렇듯 격동기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은 세계의 평화를 지킬 수 있는 나라는 오직 미국뿐이라는 듯, 남의 나라 사정에 개입해 전쟁을 일으키고 자국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미국이 개입한 간섭의 댓가 가운데 베트남 전쟁은 가장 커다란 실수요, 수치로 기억된다.
“내 세대의 젊은이들은 정부, 사회, 기독교에 대해 무척이나 비판적이었습니다. 특히 기독교에 대한 안티가 컸어요. 어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무자비한 종교, 그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계속되는 전쟁으로 불안감이 팽배한 가운데 젊은이들은 반전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그 시대 반전운동의 기수 가운데는 히피라는 새로운 집단이 있었다. 히피들의 우상이었던 비틀즈 멤버들이 1965년 인도로 명상여행을 떠났던 사건은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명상이 대체 무엇인가, 하는 궁금증을 심어주었다. 이미 일본 불교를 통해 명상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던 그에게 명상을 하고 자연친화적인 생활방식을 가진 히피들은 더없이 이상적으로 다가왔다.
1972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난관에 봉착한다. 역사학을 전공한 많은 이들이 교단에 서지만 그에겐 교사가 되는 것도 시덥잖아 보였다. 차라리 히피가 된다면 우리들만의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곧 우리들만의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전에 우선 나 자신부터 이해하고 내 마음에 평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깨달음에 도달했다.
명상에 대한 책을 수북히 쌓아두고 읽던 그는 1974년, 그의 고향 같은 일본으로 다시 건너갔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를 보낸 곳이어서 그런지 전 일본의 문화와 일본인들이 익숙하고 좋습니다. 올해 제 나이 환갑, 제 인생의 거의 반에 해당하는 27년을 일본에서 살았으니까요. 일본어도 잘 합니다. 일본의 문화는 자연과의 조화를 이상으로 여겨요. 음식, 다도, 꽃꽂이 등 모두 은은하고 미묘한 아름다움이 있죠. 또한 형이상학적인 것보다는 일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일본인들의 모습이 제게는 늘 감동을 주곤 했습니다. ”
그는 1976년 호신지라는 사찰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일본에서 그렇게 바라던 것을 했지만 일본 사찰에서의 수행이란 것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사실 절에 살면서 수행하는 건 일본인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생소한 언어와 기후, 음식, 문화 등 그가 극복해야 할 장애는 산 너머 산이었다. 무릎을 꿇거나 가부좌를 틀고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것도 고통이었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속한 고유의 문화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스승은 기독교 선교사를 아버지로 둔 그가 출가를 하겠다고 찾아오자 재가불자로서 수행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냐며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라고 권면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진정으로 출가를 원하는가를 다시 한 번 심각하게 물어보았다. 6개월 후 다시 스승을 찾아가 더할 수 없이 진지하게 출가를 원하노라고 말씀드렸다. 결국 스승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 ‘산정상’이라는 의미를 지닌 ‘다이가쿠’라는 법명과 함께 그의 출가를 받아들였다. 1978년의 일이었다.
그는 불교를 ‘환상적이고 깊이가 있으며 멋진 종교’라고 표현한다. 다른 문화와 만나 본래의 가르침을 바꾸지 않으며, 현지 문화를 수용할 만큼 자기경계에 사로잡히지 않는 종교가 어디 그리 흔한가.
“불교 수행은 부처님이나 인도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 대한 공부입니다. 나는 무엇인가? 라는 궁극적 질문에 대한 궁극적 답을 구하는 것이죠. 소토 젠의 개조인 도겐 젠지의 가르침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공부를 하다 보면 세상 만물이 바로 나라는 것을 깨닫고 작은 자아를 잊게 된다. 작은 자아를 내려놓은 진정한 자아는 곧 대우주와 하나다.’ 이런 가르침을 만나고 출가해서 진정한 자유를 얻은 건 행운입니다. 이에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가 옆나라인 한국 방문 길에 올랐던 것은 1977년. 이웃나라인데도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로웠던 여행이라고 그는 추억한다. 가장 강렬한 기억은 강인하고 자기 의견을 잘 표현하는 한국 여인들이었다고. 일본불교의 거목이 된 루메 주지스님. 그 인연이 한국과 연결되었더라면 그는 한국 불교의 중심인물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주 수요일 쉬는 날이면 그는 나또, 두부, 미소 된장 등 음식재료를 구입하고 한 달에 한 번은 빵도 굽는다. 또 노스 캐롤라이나에 계시는 어머니와 전화통화도 하고 친구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가 거주하는 곳은 리틀 도쿄의 아파트. 젠슈지 절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선종사 법당 내부와 법회 그리고 프로그램 소개
젠슈지는 아름다운 절이다. 사찰 외부는 물론, 일본식으로 꾸며진 젠 가든, 그리고 법당 내부도 바라보는 눈이 즐거울 정도다. 바깥은 이미 살펴보았고 이제 법당 내부를 들여다보자. 금빛 조명기구는 신라 왕관보다 화려한 자태로 제단 중앙에 매달려 은은한 불빛을 내뿜는다. 붉은 비단에 금박을 물린 천을 무대처럼 드리운 제단은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그 한 가운데 연꽃 위 좌정한 세존의 금상이 보인다. 등 뒤의 광배는 그의 초월적 존재로서의 아우라를 느끼게 한다. 제단 좌우로는 한국의 민화적 요소가 가득한 오방색의 목조 꽃조각이 바쳐져 있다. 그 양쪽으로는 소토 젠의 창시자이자 정신적 지주인 도겐 젠지와 케이잔 젠지가 근엄한 얼굴로 앉아 있다. 제단 앞, 스님들이 법회 때 앉으시거나 절하는 방석도 자색, 금색으로 화려하게 단장되어 있다.
지하로 내려가면 커다란 홀이 나오고 한쪽 구석으로 부엌도 들어서 있다. 일본인들도 쌀을 주식으로 하는 아시아인들이라는 점에서 우리와 정서가 비슷해서일까. 법회가 끝나면 함께 점심식사와 차를 나누고 친교의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일본사람들은 함께 식사하는 것을 참 좋아해요. 가끔씩은 법회 때문에 절에 나오는 건지, 밥 먹으러 나오는 건지 혼동될 때가 있다니까요.”
북어처럼 깡마른 주지스님이 웃으며 말한다. 주로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신도들 모두의 식사를 이곳 부엌에서 준비해 함께 먹는다니, 우리 절과 별반 다른 게 없단 얘기다.
농담처럼 말씀하셨지만 젠슈지가 최근 당면한 문제는 그것이다. 이곳에 등록된 신도 수는 약 200가구. 그들은 매해 정해진 회비, 또는 보시를 내고 이곳의 소식들을 받아보며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조상의 제삿날에는 절에 오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매달 마지막 일요일에 열리는 법회에는 고작 40명 정도가 참석할 뿐이다. 이들은 대부분 평생을 절에 다닌 70, 80대 노인층들이다. 지나가다가 호기심에, 인터넷이나 다른 매체를 통해 하루 들리는 외국인들도 가뭄에 콩 나듯 있긴 하다.
“1세대 신도들의 자녀들은 절에 오지 않습니다. 초창기 신도인 이민 1세대 가운데에 2차 세계대전 때 희생된 사람들도 많아 오히려 초기보다 신도 수가 줄었지요. 리틀도쿄 주변에 모여살던 이들이 이제는 가디나 지역에 더 많이 거주하다 보니 30분씩 운전해가며 절에 찾아오기도 쉽지 않은 가봐요.”
이래저래 절에 나오는 이들은 점차 줄어든다는 얘기다.
법회는 가능하면 짧게 한다. 법문을 포함해 50분~1시간 정도. 노인층들의 집중력이 이보다 더 긴 법회시간을 견뎌내기 힘들어 하기 때문이다. 법문은 두 가지 언어로 하는데 주지스님은 영어로, 그리고 다른 스님은 일본어로 설법하신다.
다시 건물 지하로 들어가보자. 홀과 부엌을 지나면 명상실이 나온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참선수행에 관심을 갖는 미 주류사회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실제 참선수행을 체험해볼 수 있는 명상실을 이곳에 지은 것이다. 일본 본토 에이헤이지 수도원의 명상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젠슈지의 명상실에 들어서면 불교신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한 번쯤 명상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중앙에는 아름다운 불상이 세워져 있고 다다미 바닥에 방석이 놓여 있다. 참선 중 찾아오는 수마를 쫓기 위한 주장자와 의식을 집중시키는 타악기도 보인다. 일본 전통 건축물 장인들의 빼어난 솜씨는 명상실 곳곳에서 발견된다. 미주현대불교 독자들도 한 번쯤 방문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곳이다.
참선에 참가하는 이들은 한 회에 약 12명 정도. 구성은 일본인과 미국인이 각각 반 정도를 차지한다.
참선(자젠, Zazen 본래의 의미는 좌선이지만 보다 넓은 의미에서 참선으로 옮겼다) 클래스는 매주 토, 일, 월요일 사흘간 행해진다. 토요일은 오전 6시 30분에 참선을 시작해 7시 10분에는 걷는 명상을 하다가 다시 참선에 들기를 반복, 오전 8시에 마친 뒤 함께 죽으로 아침 공양을 드린다. 일요일 참선 클래스는 오전 8시에 시작된다. 25분 뒤에는 함께 걷는 명상을 하고 다시 참선실에 앉는 것이 8시 35분, 오전 9시면 일요법회를 하기 위해 모든 명상을 마치고 9시 30분에는 함께 참선 뒷정리를 한다. 월요일에는 오전 6시 30분에 시작해 7시 10분에는 걷는 명상, 다시 7시 20분경 참선에 들었다가 8시면 마치고 5분 뒤부터 다과와 함께 질의 응답 시간을 갖는다. 주지스님은 초보자들에게 일요일 클래스에 참가할 것을 권했다. 다른 요일보다 약간 시간이 짧기 때문이란다. 매달 한 번씩 참선의 날(A Day of Zazen) 행사가 열리는 날에는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 또는 그에 준하는 시간 동안 거의 하루 종일 가부좌를 틀고 앉아 깊게 선정에 드는 연습을 한다. 참선 클래스는 일반인에게 열려 있다. 참가를 원하는 이들은 젠슈지 사무실로 전화하면 된다. 준비물은 가능하면 짙은 색의 편안한 옷. 반바지는 절대 금물이다.
“참선은 선종 수행의 핵심입니다. 해탈을 구하지도 망상을 쫓지도 않으며 그저 고요히 앉아 있는 것입니다. 선의 스승들은 수행자들에게 세상 만물이 모두 그대로 있도록 그저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만 가르쳤습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던 것도 참선 가운데서였지요. 그래서 2500년 동안 똑같은 수행이 제자들 사이에 행해진 겁니다.”
주지스님은 많은 이들이 ‘선’을 매우 어렵게 생각하는데 실은 아주 명쾌한 가르침이라고 말씀하신다. 한자로 선은 존재의 한 점을 의미한다. 하나인 만물, 우리들의 진정한 내면, 마음의 평화, 나와 남이 하나임을 깨닫는 것이 참선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것이다.
참선 클래스 외에도 젠슈지에서는 신도들, 그리고 종교와 문화에 관심있는 일반인들을 위한 다양한 액티비티를 제공한다. 우선 불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행사들을 소개한다. 불교 교양 강좌가 월 1회, 불교교리입문은 월 2회 열리며 불경 사경회는 매주 한 차례 있다. 스님이 직접 사경한 작품을 보여주는데 이건 조선시대 선비의 글씨보다 더욱 멋들어지다. 붓글씨로 쓰인 불경 원본 위에 얇은 화선지를 대고 베끼는 것인데 이런 과정을 반복하는 가운데 삼매에 들기도 하고 붓다의 가르침을 더욱 깊이 깨닫기도 한다고.
또한 젠슈지에는 일본의 문화를 배울 수 있는 클래스가 여럿 있다. 일본어 강좌는 매주 토요일 오전 9시 30분과 오전 11시 두 차례 마련된다. 그밖에도 서예교실, 다도교실, 꽃꽂이 교실, 타이코 북 클래스, 어르신들을 위한 컴퓨터 교실과 에어로빅 클래스까지 그야말로 커뮤니티 문화센터라 해도 될 정도의 다양한 강좌를 마련하고 있다. 무엇보다 압권은 가라오케 나이트.
“사찰이 지나치게 세속화된다는 비판도 있지만 신도들이 절을 더 친근하게 여기게 만드는 도구요, 방편이라 생각합니다.”
주지스님도 승복을 입고 가라오케 나이트에 참가한다. 나이 드신 노보살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편이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가라오케 나이트에는 약 15~20명 정도가 참가한다. 스님도 일본 노래 3곡을 입에 쥐가 나도록 연습했다. ‘키타쿠니노하루(북녘의 봄)’, ‘니하타블루스’ 등 1960년대, 그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들었던 엔가들이 그의 주요 레퍼토리다. 팝송은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한 신도가 다가와 “스님, 밥 딜런 노래 한 번 듣고 싶어요.” 하더란다. 밥 딜런은 한때 히피 문화에 심취했던 스님이 가장 좋아하는 팝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신도들의 자녀를 위한 어린이학교는 주 2회 열리고 어르신들은 시니어 불자 연합회(SBA -Senior Buddhist Association)를 통해 더욱 친목을 도모할 수 있다. 연간행사로는 카지노 나이트, 골프 토너먼트, 피안회 등의 행사가 있다.
또한 일본의 전통 명절과 페스티벌을 축하하는 이벤트도 마련하고 있다. 매해 2월 초, 이곳에서는 콩 던지기 의식을 주최한다. 이는 복을 가져다주고 악귀를 물리친다는 일본 전통 신앙에 뿌리를 둔 의식. 7월 둘째 주말에는 오본 카니발을 개최한다. 이는 조상들을 위한 여름 축제로 다양한 일본문화를 한 곳에서 맛볼 수 있는 행사다.
주지스님은 자주 일본을 방문한다. 올해 1월에도 다녀왔고 이번 달에 가야하는데 일본 대지진 때문에 방문이 취소되었다. 이곳에서도 일본 대지진 희생자들을 위한 천도제를 지냈고 LA 일본인 불자 연합회에서도 합동으로 의식과 함께 모금운동을 벌였다.
“절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으면 좋겠어요. 참선에 관심이 있는 미국인 커뮤니티와 일본인 커뮤니티를 발전적으로 통합하는 것이 이곳 주지로서의 제 비전입니다.”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 일본. ‘그들이 사는 모습과 그들의 정신적 세계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구나, 일본은 하나의 불법을 믿는 진정한 이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아주 작은 일본, 젠슈지의 문을 나서는 오후, 리틀도쿄는 이전보다 조금 더 친숙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젠슈지 주소, 123 S. Hewitt St, Los Angeles, CA 90012. 전화 (213) 624-8658 www.zenshuj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