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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1월26일 월요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수도회] 복음을 선포하는 자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2티모 1,1-8
† 복음 루카 10,1-9
티모테오 성인과 티토 성인은 바오로 사도의 제자요 선교 활동의
협력자였다. 티모테오는 에페소 교회를, 티토는 크레타 교회를 맡아
돌보았다. 바오로 사도는 그의 서간 여러 곳에서 이들을 칭찬하고 있다.
또한 바오로 사도의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 둘째 서간’과
‘티토에게 보낸 서간’에는 성직자와 신자들의 지침에 도움이 되는 권고가
많이 담겨 있다.
★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옥중 서간을 통해 박해와 투옥의
두려움을 이겨 내게 하시는 분의 은사를 불태우라고 독려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아직 제대로 훈련되지 못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이 도구와 방법이
되시겠다는 의지를 피력하신다. 그리고 추수할 일꾼들을 불러오라고
특별히 당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오로지 당신의 능력만을 의지하라고
당부하셨다. 우리 시대에는 우울증과 조울증, 알코올 의존증, 게임과 도박
중독 등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성과 제일주의 시대의 필연적
현상이다. 치유와 심리 상담에 관한 책들도 쏟아져 나온다.
성모님의 발현지 ‘메주고리예’ 지역에는 ‘체나콜로’라는 마약 중독
청소년들의 공동체가 있다. 이 공동체의 특징은 전문 상담사나 의사나
약물 치료 없이 오직 기도와 노동, 공동생활로 성모님께 의탁하며
치료하는 것이다. 먼저 들어온 선배가 후배를 보호하고 기도해 주며
수호천사가 된다. 퇴소 후 재범률이 감호 치료에 비하면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세계 80여 곳의 이 공동체에 각국 정부는 앞다퉈 지원하고 싶어
하지만 창설자 엘비라 수녀는 이를 거절한다. “정부가 관여하면 상담사와
의사가 오게 되고 그들은 약물을 투여할 것이다. 그런 시설은 지금도
많다.” 사랑이 없어 생긴 병은 사랑으로 고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포박하여 자발적인 물신의 노예로 만드는 악령을
주목하자. 하느님의 법에서 이탈된 삶으로 생긴 병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에 치유가 있다. 환락의 도시, 광기의 경쟁, 과학 기술의 우상, 금융
산업화 시대에 얻어맞고 부서진 상처를 무엇으로 치유하는가? 무소유,
섬김, 노동과 기도가 있는 공동체의 삶에 진정한 치유가 있다. 상처도
좋은 삶을 살면 흉터가 사라지면서 창조성이 솟게 된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자의식이 분명하다면 소비문화와 이기와 탐욕의 악령을
추방하는 능력을 이미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의무가 있다. 오늘도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의 능력을 영접하라!
- 매일 미사 -
◈ [수도회] 나눔의 기쁨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1월26일 월요일(뉴튼수도원 77일째)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2티모1,1-8 루카10,1-9
제1독서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 1,1-8
또는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토서 말씀입니다. 1,1-5
복음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9
나눔의 기쁨
강론을 정정하는 지금 미국시간은 1.25일 주일 오전11:45분, 성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낸 직후입니다. 주님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십니다.
한국은 한참 잠잘 시간이지만 주님은 깨어 미국에서 축일 미사를
집전하십니다. 이 또한 저에겐 신비체험입니다.
주일이지만 바오로 사도는 여기 뉴튼수도원의 주보성인이기에 축일
미사로 봉헌했습니다.
-다마스쿠스 성문 앞 영광스러운 정복을 노래하자.
교회의 박해자, 사울이 왔을 때
위협과 해악은 꿈틀거렸고, 그는 먹이를 찾는 굶주린 늑대와 같았다.
그러나 보라! 목자는 그를 만났고, 그를 신속히 묶어버렸다. 오늘!-
입당송 영어 성가도 힘차고 은혜로웠습니다.
주님의 최고의 기쁨은 미사를 통해 당신 자신을 나누는 기쁨입니다.
어제 주님은 흰눈을 가득 내려 주셔서 수도원을 찾은 아이들과
눈덮인 들판에서 나눔의 기쁨을 선사하셨습니다.
나눔의 주님이십니다. 나눔의 기쁨을 빼면 주님의 기쁨은 없습니다.
사람은 섬이 아닙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사람도 될 수 없습니다.
이미 사람 '인(人)'자 안에서 최소한 둘의 공동체적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은수처와 같은 여기 뉴튼수도원 외딴 곳에 살고 있는 부부만 봐도 사람
'인(人)'자 공동체를 실감합니다. 부부 아닌 혼자라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둘이 함께 하기에 그 고독한 환경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사와 수녀가 살고 있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아, 형제님은 수도원 원장이고 자매님은 부원장이라고 그러세요.“
형제와 크게 웃으며 나눈 덕담입니다.
하나와 둘의 공동체 간의 차이는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새삼 사람은 관계를 떠나 살 수 없는 관계의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참 나의 발견, 참 나의 실현도 관계의 깊이와 함께 갑니다.
관계의 기쁨, 나눔의 기쁨입니다.
슬픔은 나누면 나눌수록 줄어들고 기쁨은 나누면 나눌수록 커집니다.
지니는 기쁨보다 나누는 기쁨이 더 큽니다.
나눌 때 진정 내 것이 됩니다. 그러니 나누는 자가 진정 부자입니다.
관계 중의 관계가 주님과의 관계요 나눔중의 나눔이 주님을 나눔입니다.
제 강론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강론이요 주님을 나누는 강론입니다.
관계의 욕구, 나눔의 욕구는 얼마나 근본적인지요!
이런 욕구의 표현이자 매개체가 인터넷이요 핸드폰입니다. 인터넷의
강론을 통해, 핸드폰의 카톡을 통해 주님을 나눌 때의 순수한 기쁨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어제도 뉴튼수도원에 온 이후 가장 많은 카톡을 보냈습니다.
어제의 화창했던 봄 풍경 같은 분위기와 오늘의 설경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아름다움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 역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합니다.
이런 아름다움의 간접적 체험도 우리 마음을 감동시켜 순수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아름다움으로 표현됩니다. 방금 새벽에 강론을
쓰는 중에도 그 멀리 한국에서 카톡메시지가 2개 도착했습니다.
-"어서 오시어 처방전 주세요. 지쳐가요.“-
-"신부님 안녕하세요. 비안네가 휴가 마치고 어제 복귀했어요."-
"비안네 건강하고 휴가 잘 있다 갔나요? 아, 방금 사진이 도착했네요!
참 좋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인터넷과 핸드폰의 카톡 역시 하느님 주신 참 좋은 현대판 기적입니다.
이역만리 미국 궁벽진 사막 같은 수도원에서도 한국의 친지들과 실시간
소식을 나누다니요!
오늘 복음의 제자들 무욕의, 무소유의 사람들이지만 누구보다도 부자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과의 깊은 관계로 주님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혼자의 파견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지니고 주님과 함께의 파견입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 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라.“
계속 이어지는 주님의 간곡한 당부입니다.
내 마음대로 파견이 아닌 주님으로부터의 파견입니다. 텅 빈 가난이
주님으로 가득차니 텅 빈 충만의 부자가 되어 파견되는 제자들입니다.
관계중의 관계가 주님과의 관계요, 선물중의 선물이 주님의 선물입니다.
주님을 선물할 때 평화요 치유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누구나 지닐 수 있는 주님이요 누구나 나눌 수 있는 주님입니다.
새삼 주님과 깊은 사랑과 믿음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사랑하는 테모테오에게 하신 말씀은 그대로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주님은 매일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이런 은총을 주시어
당신을 나누는 복음적 삶에 항구하게 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복음 묵상 - 복음을 선포하는 자세
2015년 나해 1월26일 월요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
루카 10,1-9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1,8)
복음을 선포하는 자세
유다인 어머니 에우니케와 그리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티모테오는
47년경에 개종하여 15년 동안 바오로 사도의 선교활동에 참여했다
(사도 16,1-4). 그는 온갖 어려움 중에도 바오로 사도의 전교여행에
함께하면서 박해 중인 테살로니카 신자들을 격려하고, 코린토
신자들에게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전하는 등 복음선포에 자신의
모두를 바쳤다. 그는 바오로 사도가 체사레아에서 투옥되고 또 로마로
이감될 때에도 거기에 있었다. 그 후 그는 에페소로 가서 그곳의 초대
주교로 봉사하였다. 그는 디아나를 공경하는 이교 축제를 공식적으로
반대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그리스인으로 안티오키아 출신인 티도는 성 바오로에 의해 개종한 후,
그의 비서가 되어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는 바오로 사도의
훌륭한 친구로서 동료 선교사이자 제자였으며, 행정가요 평화의
건설자였다. 코린토 교회에 문제가 생겼을 때 바오로 사도의 부탁을 받고
파견되어 불리한 입장에 있었음에도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였다. 그 후
그는 바오로에 의하여 크레타의 주교로 축성되어 바오로 사도의 복음선포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 뒤 그는 달마티아를 방문한 뒤 크레타로 돌아와서
선종한 듯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이 지녀야 할 중요한 점들을 알려주신다. 첫째는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10,4)는 것이다. 이는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처음부터 아예 하느님이
아닌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먼저 필요한 돈과 능력과 성과를 따지고 있지
않은지. 하느님을 전하는 것은 사랑을 전하는 것일 수 없다. 그렇다면
복음을 선포하기에 앞에 진정 내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있는지,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있는지, 가난한 영의 정신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야 하리라!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선포해야 할 것은 평화, 해방과 자유
(병자의 치유), 하느님 나라의 선포임을 가르쳐주신다(10,5-9). 우리는
기도, 선행, 말씀, 교리교육, 봉사, 병자 방문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교회의 선교 사명을 실천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마땅히 해야 하는
우리의 몫이요 자랑할 것은 오직 하느님뿐임을 망각하고 그 결과를 자기
것인양 생색내고 우쭐해하기도 한다. 선행에 대한 칭찬이나 감사의 말에
흡족해하고 자신의 업적이나 천국 가는 보험을 든든히 쌓고 있는 듯
여기지는 않는가? 복음을 선포하며 겪을 수 있는 박해나 고통을 피하려고
하지는 않는지도 돌아볼 일이다.
우리 모두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의 모범을 본받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지니고,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도록 하자(2티모 1,7-8).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주님의 사랑으로 무장
로베르 두아노의 ‘시청 앞의 키스’라는 1951년도 작품 사진이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도 많이 보았던 아주 유명한 사진이지요. 연습장 표지,
책받침 등에 새겨진 이 사진을 보면서 정말로 사랑하는 연인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의심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저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그리고 ‘이 둘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때의 사랑을 지금도 유지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한 기자가 이 의문을 안고 사진 속의 인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힘들게
사진 속의 여주인공을 찾았지요. 그래서 그 뒤를 물어보니, 글쎄 사진 속
남자와 9개월 만에 헤어졌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영원한 것은 사진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 순간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에는 영원할 것 같은
사랑이었겠지만, 영원히 남을 사진만 남겨둔 채 지금은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남남이 되고 만 것입니다. 사진 이야기를 하다 보니 또 한 장의
유명한 사진이 생각납니다.
1974년 5월 8일 미국의 사진작가 듀안 마이클이 사랑하는 연인과 사진을
찍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뒤에서 꼬옥 껴안고 있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두 사람은 마치 지금 이곳이 꽃구름 속인 양 달콤하고 행복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둘 역시 곧 헤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진 속의 모든 이미지는 진실과 거리가 너무도 먼 것이다.”
역시 순간만 진실했을 뿐이지요. 즉, 이들 역시 영원한 사랑은 아니었나
봅니다. 어쩌면 인간의 사랑이란 부족하고 나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부족한 사랑을 주님께서 채워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부족한 사랑을 따름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너무 다릅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면서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심지어 신발도 지니고 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저 평화를 빌면서
돌아다니며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라는
것이지요. 사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돈도 있고 각종 여건이 잘
마련되어 있어야 더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들을 통해서는 참 사랑을 간직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부족한
것들을 채우기보다는 주님의 사랑으로 무장하라는 것이지요.
세상의 것들은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올 뿐이라는 것. 그래서 주님의
사랑으로 내 마음을 채워나갈 때, 순간의 사랑이 아닌 영원한 사랑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을 늘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나는 사상이나 힘으로 승리한 사람을 영웅이라 부르지 않는다. 마음으로
위대했던 사람을 영웅이라 부른다(로맹 롤랑).
웃기는 의사(‘따뜻한 하루’ 중에서)
버지니아주의 한 정신병원. 우울증과 자살미수로 스스로 입원하길 바라는
한 남자가 찾아왔다. 세상과 격리된 환자들과의 생활이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적어도 그들보다 정상적이었던 남자. 거기서 할 수 있는 건,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뿐이었다.
하루, 이틀, 한 달.. 병원에 놀라운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함께 식사를
하게 된 결벽증 환자. 혼자 화장실을 가게 된 자폐증 환자.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한 식물인간까지.
한 일이라곤 즐겁게 해준 것뿐인데, 환자가 환자를 치료하게 된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같이 감정을 나누고 웃으며 생활하는 동안 자신의 병도
감쪽같이 치료된 것이었다. 그래서 시작된 그가 만든 또 다른 기적.
정신병원에까지 입원했던 그가 버지니아 의대까지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의대에 간 목적도 가는 길도 처음부터 다른 의사들과는 달랐던 아담스..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환자들을 만나러 다녔고 광대의 분장도 마다하지
않으며 먼저 그들을 웃게 만들었다. 환자들은 그를 아픔을 치료해주는
우리의 친구 '페치 아담스'라 부르기 시작했다.
환자를 위한 그의 행보는 친구들의 조롱도, 학교에서의 제재도 막지
못하였다. 그럴수록 생명의 진리를 깨닫고 더 힘차게 환자들의 곁으로
다가간다.
그의 영화 같은 삶은 진짜 영화로도 만들어지며 사람들의 깊은 감동을
자아냈다. 아직도 그는 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환자들을 위한 강연과
치유를 계속하는 중이다.
저도 이 영화 봤는데, 실제 이야기였네요. 자신의 위치에서 기뻐할 수 있는
삶.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기쁨을 전해주는 삶. 이런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요?
패치 아담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령의 불을 끄지 맙시다
2015년 나해 1월26일 월요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
복음: 루카 10,1-9
< 성령의 불을 끄지 맙시다 >
저희 동네는 중학교 2학년 때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그 전에는 촛불을
켜고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면 더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처음 전기가 들어온 날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 환해서
눈이 부셨습니다. 처음으로 배터리가 다는 걱정 없이 텔레비전을 볼 수도
있었습니다. 비디오까지 있어서 영화들을 빌려 보는 재미에 쏙 빠졌습니다.
하루 종을 그것만 붙들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전기가 들어오니 공부를 더 안 하네.”
그러고 보니 전기가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전에 아무 것도 없을
때는 촛불 켜고서라도 공부를 했는데, 전기가 들어오니 놀 거리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절로 공부에 대한 열정이 식어졌던
것입니다. 내 안의 열정은 내가 어떤 것을 제공하느냐에 따라 식을 수도
있고 활활 탈 수도 있습니다.
두 화분이 있습니다. 한 화분에는 물을 주고 다른 화분에는 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을 주지 않은 화분은 말라 죽어버리고
물을 준 화분은 더 자라 꽃을 피웠을 것입니다.
세상 욕심도 계속 충족시켜주지 않으면 나중엔 시들어버립니다. 돈도
가난하게 사는 버릇을 들이면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입니다. 처음 습관을 바꾸는 것이 힘들지 막상 6개월 정도만
그 유혹을 이길 수 있으면 그 유혹도 음식을 먹지 못하여 힘이 약해져
나에게 더 이상 유혹거리가 못 되게 됩니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계속 유혹을 어떤 식으로든 충족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만 이 세상 욕심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에 붙여진 성령의 불을 계속 타게 하기
위해서는 불에 타는 것들을 끊임없이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의지적인 ‘사랑의 행위’입니다. 아무리 성령님이 불타고 있더라도 사랑의
행위로 그 힘을 북돋아주지 않으면 성령의 불은 사그라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 티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바오로는 “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라고 격려합니다.
안수로 받은 성령의 은사가 바로 ‘십자가의 사랑’으로 표현되지 않을 때는
식어버리니 주의하라는 말입니다. 성령을 받고도 이 세상의 편안함만
찾다가보면 그 은사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서 편안하라고
불러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가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랑을 위한 십자가의 희생인데도 이
세상 오염된 것들을 추구하다보면 성령의 불은 그 습기에 못 이겨 꺼지고
맙니다.
사람이 활동할 때는 뇌에서 스트레스가 되는 베타파가 나오고 밤에 잠을
잘 때만 좋은 알파파가 나온다고 합니다. 알파파는 엔돌핀이 생성되게
해서 몸의 피로도 회복하고 병균도 물리칩니다. 엔돌핀은 암세포까지도
이기는 힘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잠만 잘 자도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파파가 깨어있을 때도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사랑할 때’라고 합니다. 사랑할 때 알파파가 나오고 그래서 엔돌핀이
솟아 기분이 좋고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결국 내 안의 좋은 것이 있어도
사랑을 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사랑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져서 밤에 잠도 잘 오지 않게 됩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부어주시는 사랑의 에너지가 멈추지 않도록 끊임없이 이웃의
행복을 위해 힘써야겠습니다.
제가 이번 주는 피정으로, 다음 주는 휴가로 2주 동안 복음묵상을 올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말은 사랑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썼는데 더
죄송스럽습니다. 2주 뒤에 뵙겠습니다 ^^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2015년 나해 1월26일 월요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제1독서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 1,1-8
또는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토서 말씀입니다. 1,1-5
복음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9
오늘은 유 경촌 주교님의 축일입니다. 주교님은 신학생 때 함께 연극을
하기도 했습니다. 노래도 잘 부르셨고, 늘 겸손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신학생 때 유학을 가셨고, 서품은 저 보다 6개월 늦게 받으셨습니다. 그
뒤로 주교님과 개인적인 만남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다 작년에 주교
서품을 받으셨고, 저도 교구청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가끔 만날 기회가
생겼습니다. 주교님에 대해서는 주변의 신부님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듣게
됩니다. 방 청소와 빨래도 스스로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차량도
오래된 프라이드를 아직도 운전하신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본인이
겸손하시니, 주변 어려운 이웃들의 아픔을 잘 보듬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세상의 것들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시니 올바른 판단으로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주교님의 축일을
축하드리고,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가끔 외식을 할 때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해물 뚝배기’를 하는 곳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음식은 맛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직원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모두들 지치고, 힘들어 보였습니다. 얼굴
표정은 근심과 걱정이 가득해 보였습니다. 손님들과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나중에 다시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함께
식사를 한 친구들도 한마디씩 하였습니다. 직원들이 좀 더 친절하고,
환하게 웃으면서 손님을 맞이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녁을 먹은
식당도 맛이 있었습니다. ‘갈치조림’을 먹었습니다. 경치도 좋았고,
직원들도 친절했습니다. 얼굴의 표정이 모두 밝았고, 손님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였습니다. 당연히 친구들도 나중에 다시 오자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두 곳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우리들의 신앙을 잠시 생각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종교를 선택한다면 ‘천주교’를 택하겠다고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천주교와 개신교를 방문한다면 어떤 느낌을
가질까? 천주교나 개신교 모두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준 사랑과 희생을 본받아 영원한 생명에로
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들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보여 줄 수 있는지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이기적인 모습,
우리들의 이율배반적인 신앙생활, 우리들의 나약함 때문에 어쩌다 성당을
찾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는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합니다.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신념이 있어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이는 자기 자신의 욕심을 버려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이는 희망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바로 그런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비록 감옥에
있었지만, 결코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을
걱정하였고, 제자들의 가족들까지 배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의 모습을 보면서 ‘티모테오와 티토’는 참다운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힘들고 어려웠지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주님을 전하는 제자들입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위로와 희망을 얻을 것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들이 생긴다고 합니다. 적어도 하루에 하나씩은 감사할
일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2015년 나해 1월26일 월요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카 10,5)
여러분은 어떤 인사를 즐겨하세요?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 주로 이런 인사이겠지요?
옛적에 저희 경상도 시골에서는 "잘 주무셨어요?" "밥 잡수셨습니까?"
뭐 이런류의 인사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먹기 살기 힘든 시절에 했던 인사가 요즘 와서는 좀더 편하게
업그레이드 된 셈이죠.
그런데 우리 신앙인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인사를 즐겨 해야 합니다.
"평화를 빕니다."
인도인들은 "나마스떼!" 라고 인사한다지요.
"내 안의 영이 당신 안에 있는 영에게 인사합니다." 뭐 그런 뜻이라네요.
신앙인의 인사는 이렇게 품위가 있으면서 내 온맘을 모아
축원해 주는 인사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인사는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축복이요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나에게 되돌아오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두손을 정중하게 모으고 정성과 마음을 모아
축복괴 평화를 기원하는 인사문화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더 정성을 다해 인사해 보면 어떨까요?
여러분 "평화를 빕니다!" "나마스떼!"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청주] 기쁨의 삶이 복음 선포|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1월26일 월요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제1독서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 1,1-8
또는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토서 말씀입니다. 1,1-5
복음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9
기쁨의 삶이 복음 선포
미국 캘리포이아주의 첫 성당인 Mission Basilica San Diego는
1769년에 세워졌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말을 타고 하루를 가야 할
거리마다 성전을 지어 21개의 예배 장소를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238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현대식 성당보다는 훨씬 아름답고 기도할 수
있는 분위기를 줍니다. 제단벽면의 작은 십자고상은 양 팔이 떨어진
‘몸통의 예수님’을 모셔서 우리가 예수님의 손이 되어드릴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신부님들이 묵었던 숙소를 보면서 소박한 선배들의 삶을 헤아릴
수 있었고, 작은 박물관은 문화는 다르지만 인간의 살아가는 방법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하느님의
집을 가장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았던 그들의 믿음이 오늘 되살아나길
기도하였습니다.
미국의 첫 선교지 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여 신자 틈에 앉아 미사참례를 한 적이 있습니다. 주교님께서
강론을 어떤 의도로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사도 바오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의 사람이 된 후 그 기쁨을 온 세상에 전하였다”고
알아들었습니다. 주님의 사람으로 바뀌면, 바뀐 모습 자체가 복음의
선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의 선포자가 되길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10,2)고
하였습니다. 사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습니다. 돌봐줘야 할
사람은 많은데 그들을 위해서 희생하고 봉사할 사람은 적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부르는 것은 하느님의 몫이니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해야한다는 호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을 달라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받은 소명과 선교사명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결국 기도하지 않고는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4,27).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많이 증가 하였다고
자랑하지만 세상이 그 만큼 더 밝아졌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의 일꾼다운 삶을 사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삶의 양식과 태도가 바뀌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여전히 자기를 고집하는 이들이 많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갈2,20-21). 하고
고백하였고, 실제로 당신 자신의 삶을 통하여 증거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믿음으로써 새로워진 기쁨의 삶을 고백하고 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주님 안에서의 기쁨이 세상을 두고 누리는 기쁨에
승리를 거두게 하시오.” 하고 권고하였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자녀들은
기쁨 속에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쁨을 널리 확산 시켜야 합니다. 기쁨에
흠뻑 취해야 합니다”(가롤로 까레또). 주님 안에서의 기쁨의 삶이 복음의
선포입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행정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서울] 진리에 매립하는 신앙인들은 참 양들
2015년 나해 1월26일 월요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제1독서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 1,1-8
또는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토서 말씀입니다. 1,1-5
복음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9
진리에 매립하는 신앙인들은 참 양들
놀고먹는 채권자와 일 해 갚을 채무자의 고달픔, 약육강식의 세상입니다.
가지고 꾸몄기에 위세부리고 가난하고 소박하면 힘 못 쓰는 세상입니다.
황금만능주의로 이리 같은 사람들은 늘어나고 양 같은 사람들은
줄어듭니다.
부모님들께 의지해야 사는 나약함을 알기에 어린이들은 순진한 양이고요.
배움의 부족을 느껴 학업에 몰두하는 젊은이들도 아직은 양 같기도 합니다.
인생무상을 알고 세상허무에 지쳐 진리에 매립하는 신앙인들은 참
양들이고요.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3~4)”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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