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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새벽 일어나보니 거실이 환했습니다. 뭔 일? 혹시, 하고 살짝 커튼을 제쳐보았습니다. 정말이네, 눈이 왔습니다. 그것도 적지 않게. 세상에! 눈 예보가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많이 오리라고는 짐작 못했습니다. 크게 추운 날씨는 아니니 금방 녹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아침 출근길은 어렵겠다 싶었습니다. 큰 사고 없이 지나온 듯합니다.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제설작업 최강국 아닌가요?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한 주간 햇빛 본 날이 있었나요? 지난겨울을 이야기한다면 춥지 않은 겨울, 미세먼지 많았던 겨울, 햇빛 보기 어려웠던 겨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다음 주에는 3월입니다. 꽃샘추위가 있다 하더라도 겨울 추위와는 다릅니다. 이렇게 가는가보다 생각하니 아쉽기도 합니다.
일상 속에 하던 일을 하지 않으면 몸도 맘도 뭔가 빠진 듯 찜찜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며칠 지나면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갑니다. 다시 익숙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하던 것을 다시 계속하려면 맘을 새롭게 다져야 합니다. 날씨 덕에 며칠 산행을 쉬었더니 다시 가려고 집을 나서기가 쉽지 않더라는 것이지요. 몸은 편한 것을 추구하니 다시 일으켜 내보내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거참! 우리 몸의 특성입니다. 조금이라도 더 편하자는 것 말입니다. 그래봤자 늙음만 재촉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강제로라도 일으켜야 합니다. 몸을 조금 힘들게 만들어주고 귀찮아도 자꾸 흔들어줘야 건강하게 오래 사는데 유익하지요. 그래서 어찌 보면 나이 들어도 일할 수 있다면 복입니다. 그럴 기회만 된다면 지금이라도 나갈 텐데 말입니다. ㅋㅋ
2월의 마지막 주말입니다. 건강하게 신나는 주말을 빕니다. ^)^
2024년 2월 24일 김종우 목사 드림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잠언 27 : 17)
<세기말의 사랑>
20여 년 전 세기가 바뀌던 때가 기억납니다. 괜히 두근거리기도 했습니다. 뭔가 새로운 일이 생길 듯한 예감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길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 그냥 평범한 날을 맞이했으니까요. ‘19’에서 ‘20’으로 바뀌던 때입니다. 아직 1년의 기한이 있었지만 일단 ‘2000’이란 수자는 대단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인생 반을 살아온 사람으로 남은 반이 다 채워질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시대를 살 수 있게 된 것만도 대단하고 감사했습니다. 여느 때 맞던 새해와는 좀 다른 감정을 가졌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공감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덤덤해졌습니다. 그냥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하기야 우리는 그렇게 역사 속에서 이미 수십 번을 지나왔습니다. 물론 그것을 느끼며 산 것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끼리 만들어놓은 시간관념으로 생긴 감정인지도 모릅니다. 별다른 것 없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다소 실망감도 있기는 했습니다. 다른 한편 안심이 되기도 했고요. 행여 세상 종말이 되는 것은 아닌지 괜한 걱정(?)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어제와 큰 차이 없는 새 날을 맞으며 그냥 희망만 키우기로 했습니다. 늘 가져본 새해의 희망이지요. 가지고 못 가지고 따질 것 없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희망 아니겠습니까? 뭔가 나아질 것 같은 희망 말입니다. 발버둥 쳐도 나아질 것 없다 싶어도 희망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 세기가 바뀌면서 우리의 의식과 문화도 많이 바뀐 것이 사실입니다. 그 가운데 요즘 특히 대두되는 문제 중 하나가 가족에 대한 관념입니다. 여태 우리가 유지하고 있던 개념은 혈통 중심의 가족입니다. 간혹 어느 집단에서 자신들의 유대관계를 돈독히 한다는 취지에서 ‘가족’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사용하곤 합니다. 하지만 일단은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를 중심으로 가족을 생각합니다. 차츰 그 개념이 확장되어 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우리 가족 가운데 들어와서 함께 살며 가족이 된 것입니다. 피가 섞이지 않아도 소위 정으로 엮어진 관계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가족’보다는 ‘식구’가 훨씬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함께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집단이지요. 한두 번이 아니라 거의 매일 같이 앉아 밥을 먹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식구가 되어 결국 가족이 됩니다. 사람이 먹어야 사는 것처럼 식사는 생존의 기본입니다. 그것을 같은 자리에 둘러앉아 주고받으며 이야기도 나누고 식사를 합니다. 어쩌면 가장 편하고 안전한 환경입니다. 우리 속담에 ‘먹을 때는 개도 안 때린다,’고 합니다. 그만큼 식사는 최고의 기본권입니다. 함께 한 사람들이 누구든 서로 가장 편안하게 그리고 평안한 마음으로 먹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는 조건이 아니겠습니까?
혼자서 짝사랑하다 가진 것 다 날리고 사기꾼과 공조했다는 죄명까지 덮어쓰고는 잠시 옥에도 들어갔다 나옵니다. 외모를 보고 붙인 것인지 형편을 보고 붙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기 말’이란 별명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하기야 그러거나 말거나 ‘영미’는 그런 대로 살아갑니다. 옥에서 나오자 잃은 돈을 찾고자 합니다. 사실 갈 곳도 살 곳도 없습니다. 세상 가운데 외톨이입니다. 그 과정에서 좋아했던 남자의 아내가 나타납니다. 돈을 찾겠다고? 알았어. 내가 주지. 그런데 받기 어려울 거랍니다. 그 남자의 아내인 ‘유진’은 전신마비 장애인입니다. 남동생이 돕고 있지만 남자와 여자 한계가 있지요. 돈을 받겠다, 주겠다, 하면서 두 사람이 동거합니다. 영미는 거할 집이 필요하고 유진은 도우미가 필요합니다.
영미는 가진 것 없이 빈털터리, 유진은 가진 것은 있으나 몸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아무 공통점도 없는데 바로 그 점이 두 사람을 함께 엮어줍니다. 유진은 몸은 불편해도 개성은 뚜렷합니다. 영미는 평범한 보통사람이고 힘쓸만한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둥글둥글 잘 어울리며 살아갑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은 그저 자신에게 맞게 세상을 살게끔 되어있나 보다 하는 생각도 가지게 됩니다. 때로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잘 어울려(?) 살아갑니다. 하기야 어찌 보면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흐르며 같이 지내다보면 정도 들게 됩니다. 서로 의지가 되는 것이지요. 자신들의 숨겨진 이야기도 나누고 아픔과 슬픔, 억울함이나 분노도 나누게 됩니다.
세기 말은 지나고 그저 평범한 날들이 이어집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 세상을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려운 세상에 익숙해지며 살아가도록 변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사건이나 사고도 당하고 뜻밖의 환경에 처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 시간들을 이기며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합하면서 어울려 사는 것이지요. 내놓을 것도 없지만 주눅들 필요도 없고 나의 삶을 당당하게 만들어 가면 됩니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Ms. Apocalypse)을 보았습니다. 독특한 상황의 두 여자들 이야기입니다. 가족에 대해서 또 다시 생각해봅니다.
<오아시스>
우리는 알게 모르게 편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혼자만의 편견일 수도 있지만 대체로 사회적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편견도 많습니다. 그 최근 전장연 문제로 좀 불편한 일도 생겼지만 바로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인터넷에 올라온 내용을 보니 공감이 가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다른 것들도 있겠지만 거기서 말한 편견 3 가지를 말해봅니다. 첫째가 장애인은 배려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돌봐주어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때문에 자칫 불편한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둘째, 장애인들끼리는 서로 잘 이해하려니 생각한답니다. 전혀 다릅니다. 더구나 장애 종류도 다양하기에 그에 따라 그들도 서로를 모릅니다.
셋째, 장애인들은 대부분 주눅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체적 또는 정신적인 장애로 인하여 삶에 대한 의욕 자체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갑자기 장애를 입었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익숙해지기도 하고 자신을 인정하며 나름 자신의 삶에 대하여 새롭게 꿈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재기한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예를 들어 패럴림픽을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고 오랜 훈련을 해서 운동경기에 출전합니다. 이기고 지고보다는 일단 자신을 이겨낸 그 일 자체가 밫나는 일입니다. 그렇게 꾸준히 노력하며 자신만의 행복과 보람을 만들어갑니다. 옆에 돕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자신의 의지가 필수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추가합니다. 일반사람들도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기에 아마도 말이 나오지 않은 듯합니다. 바로 ‘성’(性)에 대한 편견입니다. 장애인도 섹스가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못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요즘은 교육도 행해지고 인식이 많이 개선되어서 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문제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일단 성 담론 자체가 불편하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당사자에게는 심각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우리 성인들도 이야기는 피하더라도 각자의 마음속에 관심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때로는 내숭떤다고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자체가 서로 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몸이 성장하면 자연스럽게 성욕도 생겨나게 됩니다. 사춘기를 성인으로 자라며 몸 안에서 호르몬도 생성되고 그에 따라 성욕도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비록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어나는 욕구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욕망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장애인의 욕구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기야 그 몸 가누도록 돕기도 쉽지 않은데 거기까지 신경 쓸 만한 여유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욕망 자체는 살아있다는 사실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보통사람들처럼 해소시켜주기를 기다립니다.
남자 ‘홍종두’는 악하지는 않지만 평범한 보통사람보다는 약간 모자란 듯 어수룩합니다. 여자 ‘한공주’는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몸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종두는 뺑소니 운전으로 감옥생활을 하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 하나 출소한 그를 맞아준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가족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관심을 끊은 것입니다. 나오고 찾아간 옛집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거리로 버려진 셈입니다. 아마도 평생 옥살이나 하는 것이 가족들에게는 편하였을지도 모릅니다. 한 겨울임에도 입소할 때 입었던 여름옷을 입고 나왔습니다. 가족의 냉소가 사회의 냉소로 이어집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사과를 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피해자의 집을 찾아갑니다. 찾아간 집에는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여자만 홀로 있습니다. 들어가 소개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종두는 내친 김에 여자를 안아보려 합니다. 마침 가족이 찾아옵니다. 알아보지만 반겨줄 리가 없습니다. 종두 때문에 어르신을 잃었으니 말입니다. 당장 쫓겨나지요. 장애를 가진 동생의 오빠 부부가 가끔 안부 확인하려 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안 살림은 바로 옆집에 종종 살펴달라고 부탁해놓은 상태입니다. 한공주도 가족의 보살핌을 완전하게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기는 불편한 일입니다. 가족의 일상을 누리기 쉽지 않겠지요. 그렇게 한공주는 감옥 아닌 감옥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종두가 자주 들러 공주와 지냅니다. 데리고 나가기도 합니다. 남들처럼 데이트도 하는 거지요. 쉽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둘 사이에 연애감정이 들어갑니다. 공주도 그런 생활을 처음 경험하고 이성의 감정과 욕망도 비로소 느낍니다. 소위 살맛이 나는 거지요. 어느 날 집안에서 둘은 깊은 정을 나눕니다. 불행히도 바로 그 때 공주의 오빠 부부가 방문하여 산통 다 깨집니다. 종두는 변태자가 되어 다시 감옥으로 갑니다. 공주는 그게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공주의 입장을 이해하고 용납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두 사람은 그리움을 달래며 시간을 기다립니다. 영화 ‘오아시스’(Oasis)를 보았습니다. 2002년 작품입니다. 한공주 역을 맡은 배우 문소리의 연기는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천국 아무나 갑니까?
예전에 결혼생활 세미나를 인도하면서 새삼스럽게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닌 듯한데 상황이 평소와 달라서 그렇게 느꼈습니다. 강의를 듣는 청중 가운데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함께 섞여 있어서 처음부터 하나님을 언급하며 진행하기가 다소 부담스러웠습니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이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질문해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실 질문도 아닙니다. 답이 얼마나 간단합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니까요.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고, 또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지요? 무엇이 사람이 되었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남자와 여자로 구별될 수 있었을까요? 동시에? 아니면 시간차를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요? 그런 우연이 두 번씩이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도 기적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무튼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비입니다. 더구나 남자와 여자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정말 신기합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하신 일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도 지혜도 없습니다. 더구나 요 4 :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우리 눈에 보이는 분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알려고 한다 한들 아마 방법조차 찾기 힘들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당신을 알려주시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소위 계시의 방법밖에는 없다는 것이지요. ‘계시’란 펼쳐서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우리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보려고 해봐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눈을 열어주시든지 아니면 당신 자신이 무엇인가 우리 눈에 보이도록 어떤 형태를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예를 봅니다. 창 18 : 1 - 2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즉 당신이 우리 인간의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셨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예를 보겠습니다. 선지자 엘리사가 아람 나라 왕의 하는 말을 다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니 전쟁을 해도 이스라엘에게 패하기 일쑤였습니다. 아람 왕이 화가 나서 군대를 보내 엘리사의 거처를 포위합니다. 선지자의 사환이 나와 보고는 겁에 질려 선지자에게 고합니다. 아이고, 큰일 났습니다. 적군이 와서 우리집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우리 이제 죽었습니다.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왕하 6 : 16 - 17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여기서는 사람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평소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광경을 보게 한 것입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이 역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똑같이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때는 사람들이 누구나 하나님을 자기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즉 겉보기에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니 그가 하나님이신 것을 믿기가 힘들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아무리 당신 자신을 증거해도 믿지 않겠다는데 어쩌겠습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처럼 될 수 있는 분입니다. 전능하신 분이니까요.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당신 백성과 함께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내내 하나님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보이지도 않으니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처럼 보이는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우리와 똑같은 사람일 뿐인데 어떻게 하나님이냐고 물리칩니다.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소개할 때 잘 쓰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전지전능’이란 말은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알고, 못하는 것이 없이 다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스스로 우리 눈에 보이게 할 수도 있고 또는 우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해주실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시 139 : 1 - 4 “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아멘!
‘무소부재’란 ‘없는 곳이 없다’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디나 계시지요. 그러므로 여기서 기도하는 나의 기도도 들으시며 동시에 부산에서 기도하는 성도의 기도도 들으십니다. 여기 나와 함께 하시는 그 분은 동시에 지구 반대편에 있는 성도의 위기도 벗어나게 해주십니다. 동시에 여기도 계시고 거기도 계실 수 있는 분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계실 수 없는 곳은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고백합니다. 시 139 : 8 - 9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아멘! 그러므로 우리가 한국에 있든 미국에 있든 아프리카에 있든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 마음과 믿음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어디에나 계신 분이니 우리에게 오라 가라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계신 곳에서 동시에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럼에도 어느 곳을 지정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오라 하십니다. 절기를 지켜도 정하신 곳에서 지켜야 합니다. 신 16 :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시간 장소 사람 어느 것 하나에도 구애받을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일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당신의 사람으로 창조하십니다. 그가 하나님을 배역하자 한참 기다리시고 노아를 택하십니다. 그러나 그 후손도 하나님에게 등을 돌립니다. 다시 세월이 지나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유독 한 사람을 택하거나 부르시는 겁니다. 아무튼 아브라함 후에 그 자손들을 특별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세상에 하고많은 사람들이 있고 여기 저기 나라와 민족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나를 부르십니다. 창 12 :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처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약속하신 대로 그 후손 이스라엘 민족이 번성합니다.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역시 한 사람 모세를 택하시고 그를 통하여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신데 왜 구태여 하나를 불러서 일하십니까?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시고 그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창 2 : 8 - 9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그 동산에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사람을 해하게 하는 나무도 있었으니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주의를 주셨습니다. 16 - 17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사람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는 당신의 사람이 죽지 아니하고 영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것도 그것입니다. 다만 그 말씀하신 것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신 5 : 33 “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어디서 오래 산다고요? 하늘나라가 아니고 ‘땅에서’입니다. 신 11 : 9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그와 그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그렇지요? 뭐 하기만 하면? 8절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을 것이며”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면 그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유도 그것입니다. 요 3 :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당신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영생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요 6 :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아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도 우리는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영생을 어떻게 얻습니까? 요 17 :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멘! 우선 알 것은 영생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속담에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알고 모르고는 영생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할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도 오래 전부터 당신의 백성이 바로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호 6 :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아멘!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만나 뵐 수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불가능하지요. 서두에서 말씀한 것처럼 우리는 육체를 가진 존재이고 하나님은 영이시니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두 가지 사실이 가능하게 해줍니다. 하나는 요 1 :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그러므로 말씀을 알면 됩니다. 그리고 요 1 :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둘째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하신 말씀을 아는 것입니다. 그 분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요 17 :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말씀하시는 겁니다.
감사하게도 그 하나님과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또한 기록하여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 백성의 역사와 하나님 백성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 하실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계획 속에 바로 천국 비밀, 즉 영생의 비밀이 들어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놀라운 비밀은 하나님 백성만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자녀 이외에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영생과 천국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허락된 것입니다. 우리 집에 우리 자녀들이 아닌 알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들어와서 헤집고 논다면 부모로서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당황스러울까요? 기분 나쁘지요. 화가 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그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그래서 “좁은 문”입니다(마 7 : 13). 마 7 : 14절에서 설명해주기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어렵지요. 들어가기가 쉽지 않고 그래서 찾는 사람도 적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까지 포기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 성경 속에는 영생과 천국의 비밀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나에게 알려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엉뚱한 사람들이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비밀이고 우리는 그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한 사람, 한 민족, 한 나라를 택하여 당신의 뜻을 전달하십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그리고 모세 등등. 사도 바울도 이 사실을 알고 그렇게 부탁하였습니다. 딤후 2 : 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잘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합니다. 그러면 디모데가 충성된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들이 다시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디모데로 시작하여 충성된 사람들 그러고 나서 다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많은 유대인들 중에서 먼저 열두 제자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해주셨습니다. 그들이 나가서 전하여 점점 그 수가 늘어난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세계에 많은 사람들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전하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 이루어질 계 1 : 1절에도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여기서도 동일한 순서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비밀을 예수님이 받으십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받아 열어서(계시) 천사에게 다음으로 사도 요한에게 그리고 나서 그 종들에게로 전하여지는 것입니다. 계시록을 읽으면 실제 그렇게 전달되어 가는 과정이 나옵니다.
어쩌면 번거롭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비밀을 보호하기 위한 조처라 믿습니다. 예수님이 이 천국 비밀을 암호와 같이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왜 드러내놓고 말씀하지 않고 비유로 말씀하시느냐고 묻지요. 그 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마 13 : 10 - 11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그렇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허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이 천국 비밀이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시 ‘저희’라고 불렸던 그들이 누구였습니까? 로마인이나 이방인들이었습니까? 그들은 이야기 상대가 아닙니다.
바로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영적 지도자들, 서기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알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의 눈에는 전혀 ‘아니올시다’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꾸짖은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마 15 :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즉 그들은 ‘장로들의 유전’ 다시 말해서 ‘사람의 계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아버린 자들이었습니다(마 15 : 1 - 10). 그들이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당시 어쩌면 그들만이 성경을 가지고 있는 특권을 누린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 성경을 자기 임의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소경이라 꾸짖으신 것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가면 지옥행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마 15 :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이 성경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하나님의 맡기신 성도들을 가르친다면 하나님의 눈 밖에 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경고하셨지요. 마 7 :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자기는 하나님을 잘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옛날 서기관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을 부른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즉 그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행하는 자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구약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서 하나님께로 물리침을 받았습니다. 오늘날도 신약의 비밀인 이 천국의 비밀을 모르면 마찬가지 하나님과 예수님께로 버림당할 것입니다.
예수님 오셨을 때도 그 말씀을 듣고 따른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뭐라 하든 그들은 자기 믿음을 따랐습니다.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목숨을 거는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오죽하면 함부로 입을 놀리지도 못하였습니다. 출교당할까 겁이 났지요. ‘예수’를 불러도 쫓겨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뻔히 예수님이 하신 일인 줄 알면서도 예수를 증거할 수 없었습니다. 요 9 :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오늘도 기득권과 교권을 가지고 권력으로 밀어붙이려는 지도자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성도를 천국으로 인도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진리의 하나님 말씀만이 천국으로 인도해주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 예수님이 택하여 보여주신 목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천국 비밀을 열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를 찾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계시록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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