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 아편전쟁과 홍콩 】
임칙서는 영국인들이 홍콩섬과 구룡반도에서도 물자를 구입못하게 막았다
이러자 싸움이 일어났고 11월에 영국 함선과 청나라 해군이 충돌했다.
영국은 무역이 자유화되어야 하며 무역자유화로 세계가 경제적인 상호 의존관계에 놓이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명분을 내세웠다
영국군은 1840년 6월 육해군 약 4,000여 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광동 앞바다에 도착했다. 인도 정부가 영국을 대표하여 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은 시작되었다. 대포와 강한 해군을 갖춘 영국군 앞에 중국의 군대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재래식 범선이 대부분이었고 군사 장비는 240여 년 전에 주조된 낡은 것이었다.
영국은 주산 군도를 점령하여 양자강 하구를 봉쇄하고 톈진 인근까지 함대를 파견하여 청나라를 위협하면서 타협을 시도했다. 천진에서 교섭을 책임지고 있던 직례총독 기선은 오랑캐를 다독인다면서 일단 영국군을 무마하여 광동으로 돌려보냈다.
임칙서가 파면되고 그 자리를 차지한 기선은 광동에 도착하자 영국군의 힘을 깨달았다. 12월 영국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기선은 엘리어트와 개인적으로 배상금 600만 냥의 지급 · 홍콩 할양 · 평등 대우 등을 조건으로 한 기초협약인 '광동협정'을 맺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크게 노한 도광제는 기선을 파면하고 체포하였다.
1841년 가을, 전쟁이 재개되어 영국군이 영파를 점거했다.
이제 영국군의 병력은 1만으로 불어나 있었고, 증기선 14척이 대기하고 있었다. 주강구와 주산에서 중국군이 용감하게 저항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한편 정부의 무능과 굴욕적인 태도는 중국인들을 분노케 했다.
중국인들은 곳곳에서 침략적인 외국인들에 대항하는 자위조직을 결성하였다. 농민군이 영국군을 포위 공격하여 영국군 사상자가 생긴 사건이 일어나자,
영국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졌다.
영국은 중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여 1842년 6월 상해를 점령하고 남경(난징)으로 진격했다.
청나라는 아주 불리한 조건으로라도 타협을 할 수밖에는 없는 상황에 몰렸다. 결국 1842년 8월 영국함대의 갑판에서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역사적인 '남경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홍콩을 영국에 넘겨준다.
2. 광동, 하문, 복주, 영파, 상해 등 5개 항구를 개항한다.
3. 개항장에 영사를 주재시킨다.
4. 중국은 전쟁 배상금 1,200만 달러, 몰수된 아편 배상금 600만 달러 등을 3년 안에 영국에 지불한다.
5. 공행의 독점무역을 폐지한다.
6. 수출입의 관세를 정한다.
7. 동등한 지위에 있는 양국 간의 문서 교환은 동등한 형식을 사용한다.
이후 관세에 관한 내용, 영사 재판권, 최혜국 대우, 5개 항에서의 군사 정박권 등을 추가시키게 된다.
이 조약은 중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이며 불평등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중국이 오랫동안 유지해오던 중화사상은 여지없이 깨졌으며 중국사회는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광주에만 제한시켰던 외국상인들의 활동은 확대되었고, 문제가 되었던 아편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아편무역을 계속하겠다는 영국의 입장이 관철된 것이다.
이후 중국은 미국, 프랑스 등 다른 서양 여러 나라들과도 영국과 맺은 조약의 내용과 비슷한 불평등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1844년에는 미국과 망하조약, 프랑스와는 황포조약을 맺게 되고 중국대륙은 서구 열강에 의해 서서히 잠식되어가기 시작했다.
영국의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1860년 또다시 꼬투리를 잡아 전쟁을 일으켜 개항장을 16곳으로 늘렸고 영국상인들이 내륙 어디에서나 왕래할 수 있도록 했다.
결국 홍콩섬에 국한되어 있던 조차지를 섬 건너 구룡반도에까지 넓혔다.
결국 1898년이 되면 영국의 조차지는 선전 이남의 선전강을 경계로 구룡반도 전체와 주변 235개 섬들까지 확대되었고 그 대신 조차기간은 당시로서는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를 먼훗날인 99년으로 정했다.
아마도 당시 영국은 중국의 지리멸렬한 상태로 보아 99년 후에도 다시 기한을 연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했을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오자 영국은 반환날짜가 다가오는 데 대한 초조함에 쫓겨 중국과 협상을 시작한다.
차마 안 돌려주겠다고는 할 수 없고 그 대신 홍콩이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해야만 돌려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이 이런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 조건을 받아들여서 1997년 홍콩은 중국의 특별행정지구로 유지된다는 조건 하에서 중국에 반환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홍콩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회복했기 때문에 그러한 조건은 이미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다고 볼 수 있다.
홍콩의 미래는 어디까지나 중국의 내정문제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