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크지도 작지도 않은 증심사의 단정함을 대변하는 듯한 전각의 기왓골이 곱다. / 일주문 옆의 부도밭. 증심사의 역사가 꼿꼿이 서 있다.
지금의 절 모습은 1970년 이후 꾸준히 복원해온 결과입니다. 무등산 서쪽 기슭에 석축을 쌓아 터를 얻은 사역은 전형적인 산속 절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일주문을 지나면서부터 진입로는 성큼 키를 높이는데, 석축 위로 증심사의 얼굴격인 취백루(종무소)가 상승감을 한층 부추깁니다.
취백루 모퉁이를 돌아 진입하면 곧장 네모꼴의 가운데 마당이 펼쳐집니다. 취백루와 마주한 대웅전을 중심으로 지장전과 행원당, 적묵당과 범종각이 마당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위엄 넘치지만 위압적이지 않은 선승의 얼굴 같은 마당입니다. 어디서 봐도 모나지 않은 무등산의 얼굴을 그려보기에 딱 좋은 마당입니다.대웅전 뒤로 살포시 단을 높인 곳에는 오백전과 비로전이 좁고 긴 네모꼴의 마당을 이루며 오체투지의 기도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오백전의 나한상은 저마다 다른 표정입니다. 부처를 이루지 못할 어떤 중생도 없다는 메시지로 읽어야 하겠지요. 비로전 뒤 산신각은 누각 형식을 빌리고 있는데, 엉덩이를 살짝 산허리에 걸치고 있습니다. 산을 허물지 않고 알뜰히 공간을 활용한 모습은, 인간이 어떤 마음으로 자연과 한 몸을 이루어야하는지를 알게 합니다. 낮은 목소리지만 크게 울리는 무등산 산신의 육성입니다.
백두대간의 영취산에서 솔가한 호남정맥이 섬진강을 살찌우면서 내장산까지 서남쪽으로 내달리다가 곧장 남하하여 호남의 가장 깊숙한 곳에 솟구친 산, 그 산이 바로 무등산(1,187m)입니다. 호남정맥에서 장수 장안산(1237m)과 광양 백운산(1218m)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이지만, 도무지 그런 높이가 느껴지지 않는 산입니다. 워낙 두루뭉술한 흙산인데다 주름도 많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산의 면모는, 광활한 억새 벌판을 이루고 있는 장불재 위에서 정상을 바라보면 더욱 실감이 납니다.중봉과 천왕봉과 규봉은 커다란 세 개의 무덤처럼 보입니다. 한으로 치면 깊이를 가늠할 길 없는 한을 저민 무덤이겠지요. 그런데도 왠지 그 모습은 일대사를 마친(一大事畢) 한도인(閑道人)의 풍모를 느끼게 합니다. 장불재의 억새 벌판도 일제의 소나무 수탈이 남긴 상처인 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너무 평화롭습니다. 무등(無等)의 마음 덕분이겠지요.
한때 무등산은 무당산, 무진악, 무악으로 불렸다 합니다. 고려 때부터 서석산(瑞石山)이라는 이름과 함께 무등산이라 불렸다 하는데, 훗날 있을 5월의 비극을 예견한 증심사의 부처님이 ‘상서롭게 빛나는 돌산’이라는 뜻의 ‘서석’이라는 이름은 감추어 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무등(無等)의 마음’이 아니고는 모진 세월을 건널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테니까요.어쩌면 무등산은 일찍이 증심사에서 해탈하고 그 ‘사리’로 서석대와 입석대, 광석대를 이루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나는 언감생심 차등(差等)의 세상을 무등(無等)으로 살아낼 형편이 못 됩니다. 이런 내 마음, 증심사에 두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정정현 부장 rockart@chosun.com
무등산 산행 쪽지정보무등산 정상을 목표로 산행기점으로 대표적인 곳이 증심사다. 원점회귀까지 소요 시간은 3시간 정도. 새인봉 맞은편 약사암까지 찻길을 따라가다가 나무계단 길을 따라 오르면 된다.
산행만을 목적으로 할 경우 증심사에서 출발하여 중머리재를 거쳐 장불재, 규봉, 꼬막재를 넘어 원효사로 산 전체를 한 바퀴 돌거나 그 반대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소요시간은 6시간 정도.
증심사를 기점으로 삼든, 종점으로 삼든 그냥 지나치기 아까운 곳이 증심계곡 입구에 자리한 의제미술관이다. 1979년에 떠난 남종화의 대가 의제 허백련은 추사 김정희로부터 소치라는 호를 얻었던 허유의 후손이다. 본디 진도 사람이었으나 해방 후 증심사 아래에 정착하여 자신의 집을 춘설헌이라 하고 평생 그림을 그렸다.
하늘과 땅과 사람을 지극히 사랑한 그는, 삼애학원을 세워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농업 기술을 가르쳤고, 삼애다원을 세워 손수 차밭을 가꾸며 ‘춘설차’를 만들기도 했다. 이런 그의 삶과 예술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의제미술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