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9,31-42; 요한 6,60ㄴ-69 / 아타나시오 기념일; 2020.5.2.; 이기우 신부
최근 우리 사회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겪던 중에 신천지라는 사이비 종교집단의 몰상식하고 비사회적인 행태 때문에 사태가 악화되는 해프닝을 겪은 바 있습니다. 이 집단은 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어려운 사이비 종교집단입니다. 본시 이단(異端)이란 낯선 상황과 환경에 부닥친 정통 신앙이 새롭게 뿌리를 내리는 토착화 과정에서 곁으로 삐져나온 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신천지 집단은 그리스도교처럼 신구약성서를 내세우기는 하지만 총회장인 이만희가 자신을 추앙하게 만드는 이만희교 집단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이단 축에도 끼지 못합니다.
신천지 소동 덕분에 무엇이 올바른 신앙의 길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만들어지기는 했습니다. 또한 일부 개신교 신자들의 비이성적 행태를 보면서는 이단 시비가 붙지 않는다고 해서 과연 정통 신앙의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 개신교 집단의 이단적 행태는 끝이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가톨릭교회의 내부 사정에서도 생각할 바가 없지는 않습니다. 80%나 되는 신앙인들이 대량으로 냉담하던 추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나마 주일미사에 나오던 20%의 신자들마저 줄어들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는, 교단이 정통이라고 해서 그 정통 교단에 속한 신자들이 자동으로 정통 신앙을 보유하고 신앙적 성숙을 담보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하고 있습니다. 마치 여름에 큰 비가 내리면 골짜기마다 사람들이 몰래 버려서 눈에 보이지 않던 쓰레기들이 한꺼번에 휩쓸려서 강으로 떠내려와서 대청소가 되곤 하듯이, 찌끄레기들을 머금고 있던 거품이 꺼져야 남아 있던 진짜 알갱이들이 다시 커지고 늘어나서 진정한 가톨릭 신앙의 부흥을 주도할테지요.
신앙의 정통과 이단이라는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보면 신자들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단에도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 이단을 몰아내고 정통 신앙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불법적인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의 방법으로 화형이라는 수단까지 동원했던 일이 두고두고 가톨릭교회의 정통성을 비난하게 만드는 조롱거리가 지금까지도 되고 있음을 생각하면, 교회의 교단이 세속적인 권력을 행사하려 들고 세상과 신자들을 통해 나타나는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교훈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물음은 가장 원초적으로 돌아갑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신앙인은 누구인가? 인류 역사에서 하느님께서 개입하신 결정적 구원사건이 예수님을 보내신 일이고, 그로 인해 인류가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열렸듯이 개별 신앙인에게도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구원의 기회는 내부의 자각에서가 아니라 외부의 자극에서 옵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도 예수님께서 강생하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강생의 계기는 외부의 세상에서 일어난 일 덕분에 내부의 자각이 일어나게 되는 경로를 거칩니다. 이렇게 되고 나면 각자의 인생 경험과 축적된 내공과 성향에 따라 각자가 저마다 다르고 고유한 응답의 파노라마가 펼쳐집니다.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아타나시오 성인은 두 이단과 맞서야 했습니다. 영지주의와 입양설 이단입니다. 영지주의 이단에 앞장섰던 아리우스 사제는 예수님의 신성을 존중하는 나머지 그분은 잠시 사람의 육신을 취하시어 나타나셨을 뿐 본시 영지(靈知) 즉, 영원한 지혜를 지니신 분이라고 이해하고는,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길 역시 영지를 얻는 데 있다고 해설함으로써 강생의 신비를 부인한 이단이었습니다. 초대교회와 고대교회 시절에 걸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던 영지주의 사상에 기대어 그리스도 신앙을 간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려는 실용적 선교의도가 엿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인성을 지니고 신성으로 성숙해야 하는 지난한 고난의 과정을 생략해 버리게 되는 오류가 저질러집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지요.
그런가 하면 주로 구약성서적 신앙에 친숙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입양설이 받아들이기 쉬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비로소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자격을 얻어 입양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직 삼위일체적 신앙 이해가 없던 그 시절에, 성부 하느님의 지고한 권위를 훼손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려던 시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강생의 신비는 물론 부활의 신비까지도 훼손시켰습니다.
정통 신앙은 강생과 부활의 신비를 온전히 믿는 데서 비롯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에게서 비롯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성장시키고 성숙시켜서 가능하게 되는 우리 자신의 새로운 삶도 그리스도께서 이루어주시는 우리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정통 신앙은 정통 실천을 자기 그림자처럼 지니고 다닙니다. 이것이 믿음이 무엇이고 신앙인인이 누구인지 묻는 물음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상 정통과 이단 논쟁의 무풍지대는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개별적 신앙역사에서도 끊임없는 이단적 유혹을 받으며 식별하는 과정이 불가피합니다. 정통 신앙은 그 과정의 산물입니다.
첫댓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교회에 대한 사랑이 하나의 맥락이지만, 신도들 입장에서는 구분이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교리의 틀에 매이는 분이 아니니까 교회를 섬기는 일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기를 원합니다. 그러다 냉담자 되는건 시간문제지만요. 또 한가지 교회를 잘 모시는 성당 유지분들은 첫째아들같은 꼰대스타일이 많습니다. 서로서로 신앙나눔을 할 때 생각보다 폭이 넓지 않습니다. 조심스럽게 속을 털어놓으면, 그 이후로 거리감을 보이는 수녀님 신부님도 드물지 않습니다. 이단 취급을 받는 거지요. 설사 지식이 없어도 계속 소통하면 지혜가 찾아오실 때도 있거든요. 남편과 저는 신앙의 결이 다른데, 계속 소통하니까 되더군요.
결론은 주님을 섬기는 일과 교회를 섬기는 일이 한치의 틈도 없는 같은 섬김임을 이해시키는게 급선무입니다. 성직자분들은 그 부분을 고민하고 애쓰셔야 될듯 합니다. 제가 신부님의 글로 공부하는 것도 신앙적 삶에서 나오는 질문들을 해소하기 위해서거든요. 성도들 마다 다 공부할 터인데,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접근해야 될지 상상해봐도 막막하긴 합니다. 본당신부님들도 바빠서 대화시간을 갖기 힘드니요.
정통...올바른 신앙을 전제로 언행일치가 되어야 진정한 정통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