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정부 수립 50돌을 맞이해 ‘국민의 정부’는 사면·복권을 단행하며 ‘사상전향제’를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정부가 사상전향제 대신 ‘준법서약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히자 논란이 일었다.
정부는 대한민국의 실정법률을 지키겠다는 뜻을 확인하는 절차일 뿐 사상전향제가 아니라고 밝혔지만, 이 주장은 논리적 근거가 부족한 것이었다.
이른바 ‘비공안사범’에게는 왜 준법서약서를 쓰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일까.
똑똑하기로 유명한 김대중 대통령과 박상천 당시 법무부 장관이 이런 논리적 모순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그들은 준법서약제를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 이유는 간명하다. 그들로서는 사상전향제 전면 폐지 이후 일어날 사회적 논란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분단 50년 동안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이권을 챙기고 쌓아온 기득권 세력들. 이들에게는 김대중정부에 대한 비판과는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지금 많은 이들이 고민해야 할 대목이다.
보안관찰법에 따른 보안관찰처분이라는 게 있다.
법조문은 복잡하지만 실제는 형기를 마친 좌익 사상범 가운데 ‘재범 위험이 있는 이들’을 감시하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보안관찰법에는 형법상 내란 목적 살인 및 음모, 군형법상 반란죄 및 반란 예비·음모죄 등이 규정되어 있지만,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군사쿠데타 주도세력’이 보안관찰을 받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바 없다.
보안관찰 대상 인물은 이사 일시와 이유, 여행 목적지와 기간, 여행 이유 등 시시콜콜한 것들을 관할 주소지 경찰서장에게 신고해야 한다.
보안관찰법에는 보안관찰처분 기간이 명시돼 있지 않다.
면제를 받기 위해선 관할 경찰서장에게 법령을 준수할 것을 맹세하는 서약서 등을 제출해야 한다.
이걸 두고 법원의 재판 없이 사상범을 10년 이상 감옥에 가둬두었던 사회안전법에 비하면 ‘엄청난 진전’이라고 해야 할까?
보안관찰제 적용의 근거인 ‘재범위험성’은 ‘행위의 반사회성’이 아니라 ‘내심의 반사회성’을 평가해 부과된다는 점에서 ‘침묵의 자유’(말하지 않을 권리)라는 사상의 자유의 본질을 침해한다.
준법서약제는 헌법상 평등권을, 보안관찰제는 이중처벌 금지 원칙(13조1항), 신체의 자유(12조), 거주이전의 자유(14조), 프라이버시(17조),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21조) 등을 무차별적으로 침해한다.
당신이 만약 머리 속의 생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다면?
‘그들’은 빨갱이이기 때문에,
친북적인 주체사상주의자이기 때문에, 폭력혁명론자이기 때문에,
당신과 다르기 때문에
그런 권리의 제약이 부당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다를 수 있는 자유의 실체는 기존 질서의 심장을 건드리는 사안에 대하여 다를 수 있는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검증되는 것이다.
”(스톤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사상의 자유의 원칙은 우리와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상을 위한 자유의 원칙을 뜻한다.”(홈스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무슨 얘기를 할 때 꼭 다른 나라 사람의 말을 따와 주장한다고 지적할 사람들을 위해 이건 또 어떤가.
“사상범이나 확신범의 경우 형벌로써 개선이나 사회방위가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떠한 형사제재를 사용해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며), 사상범 내지 확신범의 경우 형벌로 해결되지 못하는 부분은 사실 국가 공권력이 개입해서는 안 되는 부분(으로), 그것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양심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이며 사회 및 국가적 차원에서는 정치적 입장 대립의 문제인 것이다.”(이승호, ‘보안관찰법폐지론‘)
한국사회에서 좌파와 우파를 막론해 사상의 다름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입장 대립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실천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