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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현우 정사 원문보기 글쓴이: 현우당 법오
우리안의 괴물, 간택심
“스승님, 먼저 '간택(揀擇)'이라는 말의 정확한 뜻부터 분명히 하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간택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야 그걸 멀리하던, 안하던 할 것이 아니냔 생각이 듭니다.”
“그렇구나.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
“말씀해 주시지요.”
“내가 「간택을 멀리하라」고 했을 때의 간택의 문제는 사실 외물에 대한 간택을 문제 삼은 것은 아니었다. 그 보다는 ‘너희 내면에있는 간택심.’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19번 버스를 타야 하는데 간택을 말랬다 해서 91번 버스를 타면 어떻게 되겠느냐?
외부경계에 대한 간택은 삶에 필요한 것이므로 간택이 불가피 하지.”
“..........”
“간택심(揀擇心)이란 한마디로 ‘우리 안에 있는 잣대’를 말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세워진 분별의 잣대로 세상을 재단하여, 그 잣대에 맞으면 취하고, 잣대에 맞지 않으면 버리는 취사선택을 하며 산다.
자기 잣대로 세상을 재어 취사선택을 하는 행위, 그것이 간택(揀擇)이라는 말의 정확한 뜻이다.”
“그러니까『간택을 멀리하라』는 말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말라는 그런 단순한 뜻이 아니라, 내 잣대로 세상을 재서는 안 된다는 그런 뜻이로군요?”
“그렇지. 내 잣대로 세상을 보지 않아야 진리에 이르게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예수님도 견해를 같이 한다. 그는「너희는 도무지 심판하지 말라. 너희가 세상을 심판하는 대로 하느님도 너희를 심판 한다」라고 간택을 엄히 경계하는 말을 남겼다.”
“그렇군요. 신약 복음서에 분명히 그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안의 잣대는 그대로 놔두고 그 잣대에 맞게 세상이 바뀌어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세상을 자신의 잣대에 맞춰 뜯어 고치려고 안달들이지. 그렇게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사람마다 잣대가 다르니 어찌 싸움과 분쟁이 끝날 수 있으랴!
우리가 겪는 모든 괴로움은 세상이 내 잣대대로 안 되는 데서 오는 고통이고, 우리가 자유 할 수 없는 것은 자기 잣대가 자신을 묶고 있기 때문이다.”
“저도 제 잣대로 세상을 재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제 자유를 박탈하는 독재자라는 점에 대해서까지는 미처 숙고해 보지 못했습니다.”
“니 안의 잣대가 너를 묶는 오랏줄임을 깊이 생각했더라면, 이미 간택에서 벗어난 부처가 되어 진리의 삶을 살고 있겠지.... 내 잣대가 없어지면 타에 대해서 잘했다-잘못했다, 옳다-그르다, 길다-짧다 탓할 일이 없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했다-잘못했다 평가하고 자책할 일도 없어져, 만사가 평온이요, 자타가 평등이며, 부족하다 넘친다 할 것도 없는 구족한 삶을 살게 되느니라.
‘참사람’이 되어 ‘참세상’을 사는 거지.”
“그러나, 내안에 어떠한 잣대도 없다면 제가 판단하고 행동할 준거가 없어져버리는데, 어떻게 판단하고, 어디에 맞춰 세상을 살아간단 말입니까?”
“걱정이 많은 것도 병이다.
너는 어찌하여 '잣대가 없으니 얼마나 자유롭겠느냐'는 데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느냐?
잣대에 맞춰 이러면 되고, 저러면 안 되고, 이렇게 해야만 되고, 저렇게 해야만 하고... 그런 속박의 삶과 이래도 탈이 없고 저래도 괜찮은 잣대 없는 자유의 삶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삶이냐?
잣대에 얽매인 삶과 잣대에 묶이지 않은 삶 중 어느 쪽이 더 프리(free)한 삶이냐?”
“...........”
“너는 잣대가 없으면 세상 일을 판단할 준거가 없으니 어디에 맞춰 세상을 살아가야 하느냐고 걱정하고 있다. 정말 모든 것을 판단해야만 속이 후련하고, 모든 것을 해결 해야만 직성이 풀리느냐? 속이 좀 덜 후련하고, 직성이 좀 안 풀리면 안 되겠느냐?”
“...............”
“나는 언제나 덜 후련하고, 덜 풀리며, 덜 만족스런 내 삶에 만족을 느낀다.
그래서 너희 보기에 내 삶이 좀 찌질 하겠지만, 좀 찌질 하면 또 어떠냐?
잘난 너희가 찌질한 나에게 법을 묻고, 참 삶을 묻는 이유가 무엇이냐?”
“...............”
“잣대가 없으면 어디에 맞추어 세상을 살아가느냐고?
그 우려가 너로 하여금 늘 타를 의식하고, 눈치 보며, 타와 맞추려는 못난 너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느냐?"
“그렇기는 합니다만....”
“합니다만...은 또 뭐냐? 긍정이면 긍정이고 부정이면 부정이지, 긍정하면서도 ‘합니다만...’으로 부정하는 구나. 긍정한다는 뜻이냐 부정한다는 뜻이냐?”
“옳다고 긍정 하면서도 제가 그 긍정대로 하지 못하고 있음을 한탄하려 한 것입니다.”
“말은 솔직히 해라. 너는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고 있는 것이다.
니 안에 ‘그렇다’라는 긍정이 일면, 그대로 하면 되지, 무슨 뒷걱정에 잡혀 다시 부정으로 흐르느냔 말이다. 행이 없는 ‘알음’은 헛 것이니라.”
“...........”
“잣대가 문제임을 알았으면, 그 아는 대로 당장 행하여, 잣대 없이 살 거라.
진리를 사는 자는 앎과 행이 하나다.”
“제 확신을 위해 한 말씀 더 들려주십시오.
간택 없이 살면, 정말 참된 자유, 참된 삶이 오게 될까요?”
“아무것도 오지 않는다.”
“예?”
“진리란 진리라 하는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잣대 없이 사는 것,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진리다.
니가 구하는 ‘진리의 삶’이란 영원히 없다. 단지 잣대 없이 사는 너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사는 너 자신이 진리인 것이다.
그렇게 사는 네 자신이 바로 깨달음이요, 그렇게 사는 네 자신이 대자유인 것이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제 안에서는 온갖 의문이 듭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잣대 없이 산다면, 제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여 세상이 엉망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죄송하지만 이 의구심도 좀 풀어 주십시오.”
“왜, 잣대가 없어지면 막가파 세상이 될 것 같으냐?
너는 네 안에 잣대가 없어졌다고 해서 살인 강도 폭행 같은 막된 짓을 서슴없이 할 것 같으냐?
세상을 막되게 할 것 같냔 말이다."
"저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럼 되었지 않느냐? 니가 그렇다면 남들도 다 그런 마음들이다. 그걸 믿어라.
그 믿음 하나가 너와 세상을 살린다. 니 안의 잣대가 너는 믿는데 남은 믿을 수 없다고 속삭이는 구나. 하늘을 찌르는 그 오만이 어디서 나올꼬.... 쯪쯔."
“..........”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분별과 간택을 경계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들어 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들어 보겠느냐?”
“예, 들려주십시오.”
“프로크루스테스라는 괴믈이 있었다. 이 자는 길가에 무쇠로 만든 침대 하나를 놓아두고 그곳을 지나가는 나그네가 있을 때마다 잡아들여, 이 쇠침대에 묶어놓고는 몸이 침대보다 짧으면 침대 길이에 맞추어 늘여 죽이고, 침대보다 길면 긴만큼 잘라 죽이는 짓을 일삼다가 나중에 영웅 테세우스에게 잡혀 자신이 만든 침대에 눕혀져 잘려 죽는다.”
“저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 신화는 겉모습만 보면, 포악한 괴물을 처치한 영웅 테세우스의 단순한 무용담에 불과하다.
그러나 속 모습은 바로 우리의 내면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도 프로크루스테스처럼 우리 내면에 침대 하나를 만들어 놓고, 오고가는 사물이나 생각, 느낌, 감정 등 무엇이든지 거기에 맞춰 이리저리 헤아리고 분별해 본 다음, 어떤 것은 길다고 잘라내고, 어떤 것은 짧다고 늘이는 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만든 침대로 멋대로 잣대질을 한다는 점에서 우리 또한 프로크루스테스를 닮은 괴물인 것이다. 그렇지 않냐?”
“말씀 듣다보니 무섭습니다. 제 안의 잣대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순전히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침대이듯이, 우리가 갖고 있는 저마다의 잣대도 지극히 자의적이고 모호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이 옳다고 믿는 것을 자신의 잣대로 삼는다.
잣대가 되는 그것이 옳아서가 아니다. 자신의 마음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굳게 믿는다는 반증이다. 자신의 마음에 대한 확신이 큰 것이지.”
“우리가 잣대를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도, 결국 자신의 마음을 버리기 싫어서 이겠군요?”
“그렇지, 심리학적으로 보면, 잣대가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는 상실감을 견딜 수가 없는 것이지.
그만큼 자신의 마음을 믿다보니 자신이 세워놓은 판단의 기준도 결코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해 양보가 없는 것이고.....”
“모든 잣대가 자의적인 것이라고만 하기에는 무리가 아닐까요?
과학적 실험과 객관적인 검증을 통해 확립된 잣대들도 있다고 믿는데요?”
“자의적이지 않은 잣대는 없다. 이 세상 그 무엇도 객관적인 것은 없다.
객관적이라고 믿는 우리의 마음이 있을 뿐이다.”
“.........”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은 자신이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내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한다. 내가 내 마음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 ‘내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것’뿐이다. 알지 못하므로 나는 내 마음을 믿지 않는다.”
“저는 스승님만은 마음에 대해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만.....”
“마음에 대해 모른다는 게 내가 아는 전부다.
나는 산을 좋아하고 바다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음식도 중국음식은 좋아하고 일본 음식은 싫어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왜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에 대한 객관적이고 보편성 있는 이유를 댈 수가 없었다. ‘순전히 내 마음대로.’ 세워진 기준이었으니까. ‘내 마음대로’라는 말은 더 이상 어떤 근거나 이유를 댈 수가 없다는 뜻이니,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어떠한 객관적인 규칙이나 법칙도 원칙도 없는 참으로 자의적이고 기준이 모호한 잣대를 세워놓고, 나로 하여금 바다보다는 산을, 일식당 보다는 중식당을 찾도록 간택케 하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왜 어떤 것은 좋아하고 어떤 것은 싫어하는지 그 이유를 눈곱만치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마음을 안다 하겠느냐?
그래서 난 내 마음을 믿지 않고, 그놈이 세워놓은 잣대도 믿지 않는다.”
“저는 마음은 믿을 게 못된다고 시인하면서도, 다른 한쪽으로는 제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이중성을 갖고 있습니다.”
“니가 마음을 알기 때문에 그런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마음을 모른다면 그놈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데, 어찌 믿고 따라다니겠느냐.
범부는 자신의 마음을 알고, 성인은 자신의 마음을 모른다.”
“범부는 자신의 마음을 알고, 성인은 자신의 마음을 모른다.
아! 마음을 깨친다는 뜻이 마음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모르게 되는 것이로군요!”
“그렇다. 마음을 아는 자신에서 마음을 모르는 자신으로 후퇴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래서 깨달은 자는 마음에 대해 건방을 떨지 않는다.”
“.............!”
첫댓글 _()_
요즘 제 과제와 닮은 말씀이시네요. 감사합니다._()_
그저 아~~~~~,내 안의 모든 것으 확 날려버리는 말씀.
그저 감사할 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