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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일본 요청으로 체결된 청일수호조규
이홍장-다테 무네나리 간의 줄다리기 협상 끝에 탄생… 메이지 천황의 일본, 새로운 패권국으로 급부상하다
메이지 시대를 전후해 한·일관계의 변화를 보여주는 일본 목판화.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 일행(왼쪽)에게 조선의 사신이 내정개혁을 받아들인다는 내용의 협정서를 건네고 있다
메이지 천황은 1868년 8월 27일(양력) 즉위식을 거행했다. 뒤이어 9월 8일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바꿈으로써 새로운 천황이 치러야 하는 의례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런 의례는 대내적인 권위와 정통성을 주장하는 데 필요할 뿐이었다. 대외적으로도 천황의 권위와 정통성을 보장받으려면 외국으로부터 천황의 권위와 정통성을 공인받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접국인 청나라와 조선으로부터 천황의 권위와 정통성을 공인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수백 년 동안 중국과 외교관계가 단절돼 있었다. 그 이전에는 아시카가(足利)막부 때 쇼군이 명나라 황제로부터 일본 국왕에 책봉돼 조공책봉관계를 맺었던 것이 전부였다. 문제는 당시 청나라는 구미열강에 대해서는 만국 공법에 입각한 근대외교를 인정했지만, 동아시아 각국에 대해서는 여전히 조공책봉관계를 고집한다는 사실이었다.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는 1869년 2월 28일 메이지 천황에게 글을 올려 내치와 외교에 관한 의견을 피력했다. 당시 이와쿠라는 에도막부의 멸망 원인을 외교 실책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에도막부의 몇몇 중신이 구미열강과의 외교를 독단으로 결정했다가 전국적인 반발을 초래해 멸망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중의(衆議)에 따라 화친할 나라와는 화친하고 전쟁할 나라와는 전쟁함으로써 천황의 권위와 정통성을 공고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 글에서 이와쿠라는 청나라·조선과의 외교가 중요함을 역설했다. “청나라는 근자(近者)에 국세가 크게 약화됐고, 조선 역시 약소국이기는 하다. 하지만 인접국이고 또 오랫동안 우호국이었으므로 속히 사절을 파견해 옛 우호를 닦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이와쿠라의 의견은 대청·대조선 외교를 이용해 궁극적으로 천황의 권위와 정통성을 공고히 하자는 데 있었다. 그렇게 하려면 단순히 기왕의 외교관계를 복구하는 것으로는 되지 않았다.
예컨대 일본과 중국은 기왕에 조공책봉관계를 맺었고, 조선과는 일본 국왕의 이름으로 교린관계를 맺었다. 그런데 메이지 천황이 이런 외교관계를 복구한다면 오히려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메이지 천황의 권위와 정통성을 공고히 하려면 청나라 황제와 대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했고, 조선과도 천황의 이름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청나라가 조공책봉체제를 포기해야만 했고, 조선 역시 기왕의 교린외교를 포기해야만 했는데 청나라와 조선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나가사키 등 일본 각지에는 이미 수많은 청국 상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또한 상해 등 청나라 각지에도 적지 않은 일본 상인이 거주했다. 따라서 양국 거류민들을 단속하는 문제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이를 명분으로 메이지 천황은 청나라에 사절을 파견해 양국 거류민의 단속문제를 논의하고, 그 기회에 수호조약과 통상조약을 요구하기로 했다.
1870년 7월 29일 외무 권대승(權大丞) 야나기하라 사키미쓰(柳原前光)는 외무 권소승(權少丞)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등을 대동하고 도쿄를 떠나 상해로 갔다.
이들은 공식적인 사절이 아니라 비공식적인 사절이었다. 일단은 청나라가 일본과 수호통상을 할 의지가 있는지 없는지 비공식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사절이었던 것이다. 상해에 도착한 야나기하라는 상해도대(上海道臺) 서종영과 더불어 상해 거류 일본 상인의 단속문제 등을 의제로 회담했다. 이어서 천진으로 가서 양광총독 증극번, 직예(直隸)총독 이홍장을 접견하고 아울러 삼구통상대신 성림을 만나 수호통상을 요구했다.
日 수호통상 요구에 둘로 나뉜 淸
1873년 21세 때의 메이지 천황으로 당시 외교사절에게 선물됐던 사진
이 같은 일본의 요구에 청나라 조정은 찬성과 반대로 갈렸다. 반대 측은 일본과의 수호통상조약은 결국 조공책봉체제의 와해로 이어질 것이고, 나아가 일본인들이 중국 전역에서 왜구처럼 소란을 피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조공책봉체제의 와해는 기왕에 청나라가 동아시아에서 누렸던 패권국의 자리를 상실한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결국 청나라가 약소국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기에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했다.
반면 찬성 측은 일본의 요구를 거절할 경우 일본이 구미열강과 합세할 가능성이 있고, 또 일본은 조선이나 월남 같은 속방이 아니므로 조공책봉체제와는 아무 관계없다고 강조했다. 반대 측의 대표는 영한(英翰)이었고, 찬성 측의 대표는 이홍장이었다.
그런데 1870년 당시 청나라 동치제는 15세로서 이미 친정을 해야 할 나이였다. 청나라에서는 14세를 성년으로 간주해 그때부터 친정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태후는 동치제가 혼인 전이란 사실을 명분으로 수렴청정을 거두지 않았다. 이에 따라 일본의 수호통상 요구를 받아들일지 아니면 거부할지는 궁극적으로 서태후와 동태후 두 명의 판단에 달려 있었다.
양 태후는 중요한 국정은 수렴청정을 하는 자리에서 군기대신들의 의견을 들어 결단했다. 수렴청정은 동치 황제가 거처하는 자금성의 양심전에서 거행됐다.
동치 황제의 어좌(御座) 뒤에 황색 명주를 발처럼 드리우고, 서태후와 동태후가 그 발 뒤에 앉았다. 발 앞에는 탁자를 하나 놓았는데, 의정왕 공친왕이 탁자 옆에 앉았다. 동치 황제의 어좌 앞으로는 군기대신 등 중신들이 자리했다. 국내외의 장주(章奏)는 서태후와 동태후가 먼저 읽어본 후에 의정왕과 군기대신들이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해 다음날 보고했다. 서태후와 동태후는 그 보고서를 읽어본 후에 함풍제가 하사한 어상 도장과 동도당 도장을 찍어서 반포했다.
1862년에 수렴청정이 시작되고 몇 년간은 의정왕 공친왕의 영향력이 매우 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의정왕 공친왕은 서태후로부터 점점 더 심하게 견제받았다. 드디어 1865년(동치4) 3월에 서태후는 공친왕에게서 의정왕 및 일체의 직임을 박탈했다. 내정에서 접견할 때 공친왕이 자신에게 예의 없이 행동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신하들이 비상시국임을 들어 공친왕의 재임용을 요청하자 서태후는 공친왕으로 하여금 기왕의 총리아문 일만 계속하게 했다. 그때 공친왕은 서태후를 찾아가 대성통곡하며 스스로의 허물을 자책했다고 한다. 이후 공친왕의 영향력은 예전만 못해졌다.
그 자리를 이홍장이 대체했다. 이홍장 역시 공친왕과 마찬가지로 청나라의 국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인 인재였다. 그러나 이홍장은 몇 가지 면에서 공친왕과 대비됐다. 공친왕은 황족 즉 만주족이었지만 이홍장은 한족이었다. 공친왕은 열강의 북경침략을 수습하면서 능력을 발휘했지만 이홍장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면서 능력을 발휘했다.
천진사태 거치면서 급부상한 이홍장
천진사태를 계기로 증국번 대신 청나라의 실세로 떠올랐던 이홍장
한족임에도 불구하고 이홍장이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이유는 전통문화를 수호하기 위해서였다. 태평천국의 지도자 홍수전은 중국 땅에 기독교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봉기했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중국의 전통문화를 수호하려는 한족 지식인들이 태평천국 진압에 앞장섰다. 이홍장과 그의 스승인 증국번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들은 의병을 일으켜 태평천국 군대를 공격했다. 증국번은 고향 호남성에서 상군(湘軍)을 조직했는데 상(湘)이란 호남성의 약칭이었다. 이홍장 역시 고향인 회하(淮河) 유역의 안휘성에서 회군(淮軍)이라고 하는 의병을 조직했다. 최대 병력 25만을 헤아리던 상군과 회군의 활약에 힘입어 태평천국 난은 1864년(동치 3)에 완전히 진압됐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증국번과 이홍장은 수차례 지방 총독을 역임했다. 또한 효과적인 군사작전을 위해 그들의 추천을 받은 지인들이 총독 또는 순무에 임명됐다. 태평천국 난이 진압된 이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농민반란군이 봉기함으로써 증국번과 이홍장의 역할은 여전히 컸다. 이에 따라 동치 황제 초반의 권력구도는 서태후와 공친왕을 대표로 하는 중앙 권력과 증국번과 이홍장을 대표로 하는 지방권력으로 양분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1870년(동치 9) 6월 천진에서 수만 명의 군중이 교회를 습격해 수십 명의 서양인과 신도를 살해하는 폭동이 발생했다. 원인은 기독교 선교에 대한 중국인들의 반감이었다. 제2차 아편전쟁 이후 천진이 개항되면서 서양 선교사들은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벌였다. 특히 프랑스 선교사들이 적극적이었다.
자연히 천진 시민들 사이에 반(反)프랑스 감정이 높아졌다. 천진 시민들 사이에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어린아이들을 유괴해 배를 갈라내고 눈을 파낸다는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소문을 조사하던 중 양측이 충돌해 프랑스 영사를 비롯한 수십 명의 서양인이 살상됐고, 중국인들 또한 1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흥분한 천진 시민들은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고아원·회사 등을 습격해 파괴했다.
프랑스는 책임자 처벌과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프랑스는 폭동 주모자뿐만 아니라 천진의 관리들도 연대책임을 물어 처벌하라 요구했다. 이런 프랑스의 요구에 영국·미국 등도 동조했다. 프랑스·영국·미국 등은 천진으로 군함을 파견해 무력시위를 벌였다. 10년 전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함대가 천진을 공격하고 북경을 점령하기 직전과 유사한 상황이 재현됐다.
당시 천진사태는 일종의 외교문제였다. 그래서 천진사태는 천진에 상주하는 북양대신이 처리해야 할 사안이었다. 그렇지만 서양열강은 천진이 직예성에 소속됐기에 직예총독과 협상하려 했다. 당시 직예총독은 증국번이었다. 이에 따라 증국번이 청나라를 대표해 서양열강과 협상하게 됐다.
무력을 앞세운 서양열강과 협상에 임하는 증국번은 매우 난처한 입장이었다. 최악의 경우 서양열강과 전쟁까지도 각오해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당시 청나라의 현실로는 서양열강을 이길 수 없었다.
증국번은 민족 자존심을 내세우는 국내의 여론보다는 무력을 앞세운 서양열강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증국번은 폭동 주모자는 물론 천진의 관리들도 처벌하고 북양대신을 프랑스에 보내 사죄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증국번이 서양열강에 민족 자존심을 팔아먹었다는 여론이 폭발했다.
서태후는 증국번을 희생양으로 삼아 천진사태를 해결하고자 했다. 증국번은 직예총독에서 해임됐다. 후임으로는 이홍장이 됐었다. 서태후는 공친왕에게 필적할 만한 권력을 이홍장에게 줬다. 직예총독뿐만 아니라 북양대신까지 겸임시켰던 것이다.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인 이홍장이 총괄하는 산동성·직예성·요녕성에 소재한 개항장의 외교·통상·국방은 사실상 청나라 외교·통상·국방의 핵심이었다. 이홍장의 역할이 커진 만큼 공친왕의 역할은 축소됐다. 이는 일본과의 외교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870년 9월에 외무 권대승 야나기하라 사키미쓰가 상해를 거쳐 천진에 도착했을 때는 서태후가 공친왕 대신 이홍장을 한창 신임하던 때였다.
이에 따라 그 누구보다 이홍장의 의견이 중요했다. 당시 이홍장은 일본의 요구를 거절할 경우 일본이 구미열강과 합세할 가능성이 있고, 또 일본은 조선이나 월남 같은 속방이 아니므로 조공책봉체제와는 아무 관계없다는 점을 들어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특히 이홍장은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면 일본을 청나라 영향권 안에 묶어둘 수 있으므로 구미열강에 공동으로 대항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서태후 “전권대신 보내면 의논하겠다”
청나라 말 수렴청정을 하는 등 중원을 쥐락펴락했던 서태후
서태후는 이홍장의 의견에 따라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이번의 야나기하라는 공식적인 사절이 아니므로 메이지 천황 명의의 전권대신을 보내면 수호통상을 의논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수반되는 제반 문제는 이홍장이 응보시(應寶時), 진흠(陳欽)과 더불어 미리 검토해 대비하도록 명령했다. 그때가 1870년 윤10월 26일이었다.
이홍장은 일본과의 수호통상에서 어떻게 하면 일본을 청나라 영향권 아래 묶어둘까에 더해 어떻게 하면 기왕의 조공책봉체제를 최대한 유지할까에 대해 가장 많은 신경을 썼다. 특히 어떻게 하면 기왕의 조공책봉체제를 최대한 유지할까 하는 문제는 당시 청나라 국익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만약 일본이 중국과 구미열강의 근대조약을 들어 동일한 근대조약을 요구할 경우 수용하기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반대하기도 어려웠다. 수용한다면 장차 조선·유구·월남 등과도 동일한 근대조약을 맺어야 하는데 그것은 조공책봉체제의 와해를 의미했다.
그렇다고 계속 반대한다면 분개한 일본이 구미열강과 합세해 침략적으로 나올 가능성도 있었다. 이에 따라 이홍장은 조공책봉체제와 근대조약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묘안을 찾고자 고심참담했다.
야나기하라는 1870년 윤10월 25일 귀국해 협상 결과를 보고했다. 전권대신을 보내면 수호통상을 의논하겠다는 청나라의 약속은 결국 일본의 수호통상 요구가 성공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메이지 천황은 야나기하라의 노고를 치하해 옷 한 벌과 금 300냥을 하사했다. 아울러 수행원들에게도 각각 차등적으로 위로금을 하사했다.
메이지 천황은 청나라에 전권대사(全權大使)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필요한 준비를 하도록 명령했다. 메이지 정부 수립 이후 전권대사를 파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에 따라 필요한 준비도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국서에 사용할 국새(國璽)가 시급했다. 그 이전에는 단지 ‘천황어새(天皇御璽)’라고 새겨진 어새만 있었고, 그 어새를 천황 조서나 관료 임명장에 사용했었다. 하지만 어새를 국서에 사용하기는 적합하지 않아 ‘대일본국새(大日本國璽)’라고 새겨진 석재 국새를 새로 만들게 했던 것이다.
전권대사는 다테 무네나리(伊達宗城)로 결정했다. 부사에는 기왕의 야나기하라를 임명했다. 이들의 위임장과 청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국서에는 공히 새로 만든 대일본국새를 찍었다.
국서의 내용은 “대일본국 천황이 대청국 황제에게 공경히 아룁니다. 지금 세계에서는 국제교류가 날로 융성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구미 여러 나라와 수호통상하고 있으니 이웃한 귀국과 같은 나라와 더불어 친선의 예를 닦는 것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사신과 폐백을 보내 화호(和好)를 맺지 못해 심히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이에 특별히 대장경 다테 무네나리를 귀국에 파견해 성신(誠信)을 통하고 아울러 전권으로서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게 하려 합니다. 귀국은 교의(交誼)를 생각하고 인호(鄰好)를 돈독히 해 즉시 전권대신을 파견해 함께 협상해 조약을 체결하기 바랍니다”라고 돼 있었다.
이 같은 국서는 형식적으로 대일본국 천황이 대청국 황제에게 보내는 것으로서 천황과 황제의 대등한 입장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일본은 청나라와 대등한 입장에서의 수호통상을 목표로 했다.
일본 역사에서 천황 명의로 중국 황제에게 국서를 보낸 것은 고대 천황제 때 이후 처음이었다. 당시 일본의 국서에는 ‘해 뜨는 나라의 황제가 해지는 나라의 황제에게’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이번의 국서에는 ‘대일본국 천황이 대청국 황제에게’라고 함으로써 고대 천황제 때의 국서 형식을 상당부분 모방했다.
획일주의 vs 특이주의 ‘힘겨루기’
청나라 말기 <비룡각화보>에 실린 격구를 즐기는 여성들
이뿐만 아니라 전권대사를 파견할 때도 고대 천황제 때의 파견 의례를 상당부분 모방했다. 즉 다테 무네나리와 조정중신들이 신전(神殿)에 참배하고 사행을 고하면서 무사성공을 기원했던 것이다.
참배가 끝난 후 메이지 천황은 다테 무네나리 등에게 신주(神酒)를 하사했다. 이어서 다테 무네나리 등을 불러 위임장과 국서를 직접 전달해줬다. 이후 메이지 천황이 외국에 전권대사를 보낼 때는 이런 방식으로 했다.
다테 무네나리는 1871년 5월 18일 도쿄를 출발해 6월 7일 천진에 도착했다. 이에 대응해 서태후는 이홍장을 전권대신으로 삼아 다테 무네나리를 상대하게 했다. 6월 9일 상견례를 마친 후 이홍장과 다테 무네나리는 본격적으로 협상에 들어갔다. 양국 사이의 최대 쟁점은 근대조약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조공책봉체제로 할 것인가에 있었다.
다테 무네나리는 근대조약으로 하지 않으면 구미열강이 그냥 있지 않을 것이라는 명분을 들어 근대조약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이때 근대조약으로 한다는 것은 중국이 구미 열강과 맺은 것과 동일한 형식과 내용으로 일본과도 수호통상을 해야 마땅하다는 요구였다.
이와 같은 다테 무네나리의 요구를 이홍장은 획일(劃一)주의라고 불렀다. 다테 무네나리는 획일주의에 따라 조약의 첫머리에 ‘대일본국 천황과 대청국 황제’를 명기함으로써 양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조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아울러 내지 통상과 영사 재판권도 보장하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되면 메이지 천황은 일거에 청나라 황제와 동격의 권위와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유무역을 통한 막대한 이익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일본에는 일방적으로 유리하지만 청나라에는 일방적으로 불리했다. 이홍장은 중국에 일본과 구미열강은 여러 면에서 다르므로 동일한 근대조약을 맺어야 한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했다. 예컨대 일본은 아주 가까이 있지만 구미열강은 아주 멀리 있다고 했다.
또한 중국 상선이 구미열강에는 왕래하지 않지만 일본에는 자주 왕래한다고도 했다. 이런 차이를 고려해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수호통상은 구미열강과의 근대조약과 다른 형식과 내용으로 맺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아울러 이홍장은 청나라와 일본은 공히 동아시아 국가로서 힘을 합해 구미열강에 대항해야 함으로 구미열강의 근대조약을 무비판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이와 같은 자신의 입장을 이홍장은 특이(特異)주의라고 했다.
이홍장은 특이주의에 입각해 두 가지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첫째는 ‘(청·일 양국이) 타국으로부터 불공정한 일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일을 당하면 서로 돕거나 혹은 중간에 개입해 주선함으로써 우의를 돈독히 한다’였다.
이것은 청·일 양국이 수호통상하는 근본 목적이 구미열강으로부터 불공정한 일을 당하거나 무시당할 때 서로 도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청일수호조약은 근대조약과 달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아울러 일본을 청나라의 영향력 안에 확실하게 묶어두기 위한 방편이었다.
둘째로 이홍장은 ‘양국에 속한 방토(邦土)도 서로 예로써 대하고 상호 간에 침략하지 않는다’는 요구도 강하게 주장했다. 이때 양국에 속한 방토는 단순한 영토가 아니었다. 방(邦)은 본국의 영토라는 의미였지만 토(土)는 속방의 영토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에서 일본은 속방이 없었지만 청나라에는 조선·유구·월남 등 적지 않은 속방이 있었다. 따라서 이홍장의 요구는 일본이 중국 본토는 물론 조선·유구·월남 등 속방도 침략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나 같았다.
이와 같은 특이주의를 이용해 이홍장은 근대조약을 요구하는 일본의 주장을 제압하고자 했다. 즉 이홍장은 조약의 첫머리에 ‘대일본국 천황과 대청국 황제’를 명기하자는 일본의 요구 대신에 양국의 전권대신을 조약의 첫머리에 명기하자고 했으며, 내지 통상과 영사 재판권 요구도 거부했던 것이다.
특히 이홍장이 강조해 채택하기로 한 내용 즉 ‘(청·일 양국이) 타국으로부터 불공정한 일을 당하거나 무시 받는 일을 당하면 서로 돕거나 혹은 중간에 개입해 주선함으로써 우의를 돈독히 한다’는 조항은 청나라와 일본의 군사동맹을 의미하는 것으로까지 확대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그것은 곧 일본이 구미열강으로부터 벗어나 확실하게 청나라 편이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이홍장이 노린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淸, 결렬 ‘무기’로 조규(條規) 관철시켜
벌거벗겨진 채 쇠꼬챙이에 꿰여 심문을 받는 여성을 그린 그림. 17세기 청나라를 찾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사절단의 올퍼트 다퍼가 그렸다. 이 그림이 실린 책은 유럽에서 널리 읽히며 청나라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낳았다
당시 이홍장은 49세였고, 다테 무네나리는 54세였다. 비록 다테 무네나리가 나이도 많고 한학에 해박하기도 했지만 이홍장은 청나라 최고의 지식인이자 경세가였다.
획일주의를 주장하는 다테 무네나리는 특이주의를 주장하는 이홍장을 상대하기 벅차했다. 이는 이홍장의 경륜이 앞섰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본에 비해 청나라의 입장이 아직은 우세한 결과이기도 했다.
냉정히 볼 때 당시 일본은 청나라에 비해 수호통상이 훨씬 아쉬운 입장이었다. 새로 출범한 메이지 천황을 위해서도 또 열악한 국가재정을 위해서도 청나라와의 수호통상은 꼭 필요했다. 반면 청나라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다. 최악의 경우 협상이 결렬돼 일본이 구미열강에 합세한다고 해도 일본이 국제외교를 주도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홍장은 다테 무네나리가 획일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할 때마다 협상 결렬을 무기로 특이주의를 관철시키곤 했다. 이런 배경에서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수호통상 협상은 이홍장의 주도로 진행됐다. 한 달여의 협상을 거친 결과 1871년 7월 마침내 18조로 된 ‘청일수호조규(淸日修好條規)’와 33조로 된 ‘통상장정(通商章程)’이 조인됐다.
이렇게 조인된 청일수호조규는 이홍장의 특이주의에 따라 조공책봉체제와 근대조약이 교묘하게 결합한 모습을 갖게 됐다. 우선 수호조규의 주체가 청나라 황제와 일본 천황이 아니라 전권대신 이홍장과 전권대사 다테 무네나리로 됐다. 이에 따라 명칭도 조약이 아니라 조규가 됐는데, 조규라는 이름은 청나라 황제의 특별한 배려로 청일수호가 이뤄졌음을 드러내기 위한 이홍장의 의도에서 생겨났다.
청일전쟁(1894년) 개전(開戰) 소식을 듣고 술렁거리는 서울 거리 외국인들의 모습. 당시 프랑스 신문 <르 프티 파리지앵>(1894년 8월 13일자)에 실린 삽화다.
또한 청일수호조규의 제1조는 ‘양국에 속한 방토(邦土)도 서로 예로써 대하고 상호 간에 침략하지 않는다’인데, 이 또한 이홍장의 주장으로 들어간 내용이며, ‘(청·일 양국이) 타국으로부터 불공정한 일을 당하거나 무시 받는 일을 당하면 서로 돕거나 혹은 중간에 개입해 주선함으로써 우의를 돈독히 한다’는 제2조 역시 이홍장의 주장으로 들어간 내용이었다.
다만 쌍방 모두 최혜국(最惠國) 대우는 인정하지 않고 서로 영사재판권(領事裁判權)을 인정해 양국민의 분쟁 시에는 양국 관리의 협의 아래 재판을 하며, 관세율도 상호 협정으로 시행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일본 요구가 어느 정도 반영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보면 청일수호조규의 명칭 및 대의는 이홍장의 주도로 성립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청일수호조규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대 이래로 조공책봉체제를 고수해오던 중국이 동아시아 국가인 일본과 최초로 근대적 조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은 동아시아에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와해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오래된 패권국 중국이 퇴장하면서 동아시아에도 약육강식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한편 메이지 천황의 일본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권국으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