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도 우리직장에서 내 집 갖기에 억지로 참가 시켜준 그 과장님께 감사 할 일이었습니다. 사람의 운명은 아무도 모릅니다. 78년 이라 기억 됩니다. 바로위 시숙께서 승진해서 도청으로 내려올 찬스가 있었습니다. 서울에 집을 살 때 대출을 좀 많이 받아서 산 주택이라 아이 셋 과 살기에 좀 팍팍해서 집값이 오르기 바로 전에 집을 팔고 고향근처에 논을 사기로 했습니다. 그 때는 시골 논 값도 상당 했습니다. 그런데 서울 집값은 몇 배로 뛰고 시골 논 값은 그대로 이었습니다.
순간에 생각을 잘 못했지요. 내 집 갖기에 참가해서 집을 가지게 된 우리를 보고 시어머님께서 다음에 그런 기회가 있으면 한 번 더해서 시숙 집 장만하는데 좀 도움을 줄 수 없니 기회가 오면 그러겠다고 대답을 했더니 동서분이 나 한태 꼭 좀 해달라는 당부를 하셨다. 시어머님 뜻이 많이 반영 됐기 때문에 부탁하셨다. 또 그런 기회가 왔다. 80 년 초 요번에는 아파트를 짓기로 했다. 당장 신청을 했다. 요번에는 우리직원 만 아니고 외부 사람도 허용이 됐다. 대구에서 살기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오르기를 바라는 맘에서 신청하라고 하셨다. 나는 좀 잘 됐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신청을 했다. 한 번 올랐던 집값은 집 짓는 도중에도 오를 생각은 않고 주위 집값이 내렸다. 22평 아파트가 원가가 480쯤 들었는데 그 값 받기도 쉽지 않은 가격이다. 집을 짓자말자 밑져도 팔아 달라고 하셨다. 겨우 본전에 팔 수 있었다. 형님은 당장 집을 장만해야 될 형편인데 돈은 턱 없이 모자란다고 하셨다. 혼자 외벌이신데 내가 장만 할 때처럼 봉급의 거의 반을 넘게 대출로 집을 사려고 하신다. 몇 년 전 빚을 감당하기 어려워 친정에 손을 벌려 놓고 겨우 숨 쉴 만할 때 내가 100만원을 해 드리겠습니다. 고생한 나를 알기에 그만 두라고 하셨다.
그러나 형님도 다급하셨던 모양인지 막 우시면서 시어머님께 말씀을 드리지 말게 형님 시동생한태도 말 안할게요. 지금도 생각하면 그 때 무슨 맘으로 그렇게 말했는지 이해 할 수가 없다. 너무 고생했기에 사정을 알아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여동생이 나를 나무랬다. 옷도 돈 버는 언니보다 좋은 옷 입고 계시는데 언니 정신 차리라고 우리 집이 1,900 할 때 백 만 원은 아주 컸다. 신랑한태 그러면 돈이 있는 줄 알까봐 말을 안했지만 그 돈을 갚는데 나도 힘들었다. 아직도 그 형님은 나를 친형제처럼 생각한다. 암이 걸려 누워있을 때 오셔서 하도 많이 우시니까 같은 병실 환우들이 친언니 인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친하게 지낸다. 그 후 조카가 대학 들어 갈 때 등록금도 자청해서 내 주었다. 자랑이 되고 말았네요. 그 이유도 없진 않았습니다. 결혼 직후에 우리 집에 오셔서 그 때 돈 만원을 시숙께서 저보고 주셨습니다. 늘 마음으로 고맙게 생각해서 그랬지 생각됩니다.
큰아이가 2학년이고 작은아이가 입학 했을 때 남편은 대구로 오게 됐습니다. 큰 아이를 사립학교에 넣고 나니 작은 아이는 일반 학교에 넣기로 하였습니다. 학교에서 교직원 아이들에게 등록금 혜택을 얼마간 주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을 사립학교에 넣지 않는 눈치를 알고 이번에는 큰아이가 울고불고 야단이 났습니다. 친구 아이는 또 사립학교에 원서를 냈는데 내가 내지 않은 것을 알고 큰 아이가 우는 바람에 또 원서를 냈답니다. 나는 학교에 가지도 않았는데 큰 아이가 부모대신 선생님께 물어 주사위처럼 던지는데 학부모들이 웃고 야단이 났다고 합니다. 그 때만 해도 부모들이 아이 생일 때 누구누구 초청하면 큰 아이는 우리 동생 데리고 가지 않으면 못 간다니까 같이 오라고해서 작은 아이는 자기반 아이들 생일에는 못 가고 형 친구 생일에는 늘 따라다녀 지금 생각해도 동생을 엄청 사랑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남편이 오기 직전에 동생은 이사를 갔습니다. 방학 때 남편이 오면 까칠한 형부 성품 맞추기가 힘든 다며 좀 덜된 집으로 이사를 가려고 하더랍니다. 참 그 중간에 집터가 넓어 아래채를 지었습니다. 남편도 없을 때 방 두 개 부엌이 딸려 한집 살림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집 전세 놓으면 집값은 되어 돈 걱정은 안했지요. 그런데 7 년 만에 남편과 한 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남편 뒷바라지가 여간 힘 든게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내가 어디 놀러 다니는 것처럼 완벽하게 청소도 되어있고 아이들도 자기 맘에 들도록 나를 채근했습니다. 그런데 그 낭비벽은 오나가나 매 한가지 이었습니다. 한 번은 애들이 놀다오면서 옷에 흙칠을 하고 집에 온 모양입니다. 대문에 들어서는데 아이를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내가 가까이 오자 더 큰소리를 지르며 엄마가 없는데 그래서 되겠느냐며 애를 왜 때리느냐고 그러면 소리소리 지르면서 나를 사표 내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시댁에 질렸다고 했지요. 나는 오빠 여동생 셋이 자랐습니다. 너무 조용하게 남편은 8남매 아들 다섯 딸 셋 부잣집이었기에 맏시숙 지금 90세 비롯해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그것도 서울에서 넷 부산에서는 제일 큰 시숙께서 동아대학을 졸업하셨습니다. 둘째시숙 80, 셋째 76 남편이 73 아래 시동생68세 큰 시숙아래로 시누이, 갑자기 간 살림에 모이면 살림을 말아먹은 큰 시숙을 향한 싸움이 질리게 만들고 남편 공부시켜주고 오히려 원망을 들어 남편한태 한마디 대꾸도 못했습니다. 화가 나면 남편은 유리창문을 와르르 부수는 무서운 성질이라 아예 대들지도 못했답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2.02 08:01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2.03 07:20
첫댓글 에휴 그 남편분 그 못된 성질을 다 어떻게 받아주고 살으셨어요
요즘 시대 같으면 100% 이혼 당하실 남편감인거 같은데요..
남편분이 시대를 잘 타고 나신것 같아요^^
다음 세상에 바꿔어 태어나서 내가 신랑이되고 남편이 아내 되어 보은 한다네요.
아무리 보은해도 다시 안만난다고 하지요. 이세상은 할 수없이 살았다면서 ㅎㅎㅎ
무슨말을 하실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되네요~~
내가 놀러 갔다와서쓴 글이라 쓰놓은 글을 보니 좀 그렇지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둘 만 생각하면 안살지요. 아이들이 생각해서 살았지요. 지금은 집에서 짱이예요. 맘 고생 많이 했다고
오늘 글은 조금 정리가 안된 듯 보입니다
저도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네요 ^^
남편분은... 단지 아이들을 태어나게 해 준 아이들의 아버지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네요...
요즘같으면 분노조절장애로 신고하기 딱이에요
어머님 너무 고생하셨네요
우리 엄마 영향도 컸어요. 무조건 여자는 참으래요. 돌아가시면서 너가 맘에 제일 걸린다고 하셔서
지금도 지금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한스러워요.시댁이 무서워서요. 대소가 집안이 모두 쨩쨩하고
시댁도 살림이가서 그렇지 그 시골에서는 최고로 많이 배운집이었습니다. 신랑이 친정을 무시한듯
하고 시모님은 짜꾸 더 안가지고 오는가 하는 눈치를 보였습니다. 나는 다 말 못하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