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히테와 괴테.
피히테의 저서인 "인간의사명"에서 主意主義를 해설하면서 독일인 특유의 이 태도는
루터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와 현대의 유무신론적 실존철학을 관련시키다.
가장 명확하게 표현된 것으로 괴테의 파우스트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파우스트는 그의 서재에서 명상하다가 성경의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가 쓰인 것을 보게된다.
그는 그 대신 "테초에 의미가 있었느니라"를, 그 다음엔 "태초에 힘이 있었느니라"를 내걸어 본다.
그러나 최후에 그는 "태초에 행위가 있었느니라"라는 확신에 도달한다.
파우스트를 읽어본지 오래되어 그런 구절을 본지 기억에 없다.
희곡이라 익숙지 않았으나 몇 페이지를 읽은 후, 소설 읽듯이 밤새워 읽었던 기억 밖에 나지 않는다.
헤겔과 테니슨
테니슨은 헤겔의 관념을 그의 詩 "담장 틈에 핀 꽃"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 담장 틈에 핀 꽃
내가 너를 담장 틈에서 뜯어낸다.
내가 너를 여기에 뿌리와 함께 온통 내 손에 들어 본다.
작은 꽃 ______ 그러나 내가 너를 이해할진댄, 네가 무엇임을 뿌리와 네 전체가 무엇임을 알진댄,
또한 하나님과 사람이 무엇임을 내 알지니라."
이 시는 여러 예술인 종교인들이 나름 즐겨 인용하는 것인데, 헤겔의 철학과 연결하고 있다.
헤겔에 대한 마르크스의 응답
마르크스는 경제적 동기가 사회의 주요한 그리고 모든 것을 포함하는 힘이라고 믿었다.
마르크스가 많은 개인들에 대한 공민권의 침해를 허용한 것은,
소수의 개인들이 추진하는 사회적 개혁의 여파로 그들이 고통받게 마련이라고 확신하는데 기인한다.
편가르기와 권력투쟁, 천부인권을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의 침해를 당연시하는 공산주의자들의
행태가 신념으로 화하는 대목이다.
서양철학사 700 P 중 3P에 불과한 그의 철학이 100여년에 걸친 공산당 폭력혁명과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중국과 북한, 종북세력들의 시대착오적 광신의 연료를 제공한 셈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정치. 경제는 물론 문학 예술등 모든 분야에서 그들 자신들의 뇌를 세뇌 당하고
나아가 타인들의 정신을 장악하려 하고 있으니,
쇼펜하우워와 붓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인생에 의례 있는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안을 고찰하면서,
그는 두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예술은 일시적 해탈은 가능하나 미적 경험은 오래 지속 될 수 없기에,
희랍 특히 플라톤의 철학, 영원한 관념들에 대한 명상에서 찾고,
둘은 불교에 대한 공감에서 찾았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쉼없는 의지와 이에 따르는 괴로움을 당하는데 있어서
자신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개별성을 초월하여 인류에 대한 보편적 동정심을 가지게 된다.
성자다움이란 살려는 의지의 否定에 기초를 둔 삶의 자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