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화(失花)>
1
사람이
비밀(秘密)이 없다는 것은 재산(財産)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2
꿈- 꿈이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자는 것이 아니다. 누운 것도 아니다.
앉아서는 나는 듣는다.(12월 23일(十二月 二十三日))
「언더-더 워치-시계 아래서 말이에요—파이브 타운스-다섯 개의 동리(洞里)란 말이지요—이 청년(靑年)은 요 세상(世上)에서 담배를 제일 좋아합니다—기다랗게 꾸브러진 파이프에다가 향기(香氣)가 아주 높은 담배를 피워 빽-빽-연기를 풍기고 앉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낙(樂)이었답니다.」
(내야말로 동경(東京) 와서 쓸데없이 담배만 늘었지. 울화가 푹-치밀을 때 저-폐(肺)까지 쭉- 연기나 들이미지 않고 이 발광(發狂)할 것 같은 심정(心情)을 억제하는 도리가 없다.)
「연애를 했어요! 고상(高尙)한 취미(趣味)-우아(優雅)한 성격(性格)- 이런 것이 좋았다는 여자(女子)의 유서(遺書)예요-죽기는 왜 죽어- 선생(先生)님-저 같으면 죽지 않겠읍니다-죽도록 사랑할 수 있나요-있다지요-그렇지만 저는 모르겠어요.」
(나는 일찌기 어리석었더니라. 모르고 연(姸)이와 죽기를 약속(約束)했더니라. 죽도록 사랑했건만 면회(面會)가 끝난 뒤 대략 20분(二十分)이나 30분(三十分)만 지나면 연(姸)이는 내가 「설마」하고만 여기던 S의 품안에 있었다.)
「그렇지만 선생(先生)님 그 남자(男子)가 같이 죽자면 그때 당해서는 또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 같아서는 저도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생(先生)님 사람이 정말 죽을 수 있도록 사랑할 수 있나요 있다면 저도 그런 연애(戀愛) 한 번 해 보고 싶어요」
(그러나 철부지(不知) C양(孃)이여. 연(姸)이는 약속(約束)한 지 두 주일(週日) 되는 날 죽지 말고 우리 살자고 그립디다. 속았다. 속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나는 어리석게도 살 수 있을 것을 믿었지. 그뿐인가 연(姸)이는 나를 사랑하노라고까지.)
「공과(功課)는 여기까지밖에 안했어요-청년(靑年)이 마지막에는-멀리 여행(旅行)을 간다나봐요 모든 것을 잊어 버리려고.」
(여기는 동경(東京)이다. 나는 어쩔 작정으로 여기 왔나? 적빈(赤貧)이 여세(如洗)-꼭또-가 그랬느니라-재주 없는 예술가(藝術家)야 부질없이 네 빈곤(貧困)을 내세우지 말라고-아-내게 빈곤(貧困)을 팔아먹는 재주 외(外)에 무슨 기능(技能)이 남아 있누. 여기는 신전구(神田區) 신보정(神保町), 내가 어려서 제전(帝展), 이과(二科)에 하가끼 주문(注文)하던 바로 게가 예다. 나는 여기서 지금 앓는다.)
「선생(先生)님! 이 여자(女子)를 좋아하십니까-좋아하시지요-좋아요-아름다운 죽음이라고 생각해요-그렇게까지 사랑을 받은-남자(男子)는 행복(幸福)되지요-네-선생(先生)님-선생(先生)님 선생님.」
(선생(先生)님 이상(李箱) 턱에 입 언저리에 아-수염 숱하게도 났다. 좋게도 자랐다.)
「선생(先生)님-뭘-그렇게 생각하십니까-네-담배가 다 탔는데-아이-파이프에 불이 붙으면 어떻게 합니까-눈을 좀-뜨세요. 이야기는-끝났읍니다. 네-무슨 생각 그렇게 하셨나요.」
(아-참 고운 목소리도 다 있지. 10리(十里)나 먼-밖에서 들려오는-값비싼 시계(時計)소리처럼 부드럽고 정확(正確)하게 윤택(潤澤)이 있고-피아니시모-꿈인가. 한시간 동안이나 나는 스토리-보다는 목소리를 들었다. 한 시간-한 시간같이 길었지만 10분(十分)-나는 졸았나? 아니 나는 스토리-를 다 외운다. 나는 자지 않았다. 그 흐르는 듯한 연연한 목소리가 내 감관(感官)을 얼싸안고 목소리가 잤다.)
꿈-꿈이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잔 것도 아니요 또 누웠던 것도 아니다.
3
파이프에 불이 붙으면?
끄면 그만이지. 그러나 S는 껄껄—아니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타이른다.
「상(箱)! 연(姸)이와 헤어지게.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으니. 상(箱)이 연(姸)이와 부부(夫婦)? 라는 것이 내 눈에는 똑 부러 그러는 것 같아서 못 보겠네.」
「거 어째서 그렇다는 건가」
이 S는, 아니 연(姸)이는 일찌기 S의 것이었다. 오늘 나는 S와 더불어 담배를 피우면서 마주 앉아 담소(談笑)할 수 있다. 그러면 S와 나 두 사람은 친우(親友)였던가.
「상(箱)! 자네 (ERIGRAM)이라는 글 내 읽었지. 한 번 -허허-한 번. 상(箱)! 상(箱)의 서푼짜리 우월감(優越感)이 내게는 우숴 죽겠다는 걸세. 한 번? 한 번-허허-한 번」
「그러면 (나는 실신(失神)할 만치 놀랜다) 한 번 이상(以上)—몇 번. S! 몇 번인가」
「그저 한 번 이상(以上)이라고만 알아 두게나 그려」
꿈-꿈이면 좋겠다. 그러나 10월 23일(十月 二十三日)부터 10월 24일(十月 二十四日)까지 나는 자지 않았다. 꿈은 없다.
(천사(天使)는-어디를 가도 천사(天使)는 없다. 천사(天使)들은 다 결혼(結婚)해 버렸기 때문에다)
23일(二十三日) 밤 열시부터 나는 가지가지 재주를 다 피워가면서 연(姸)이를 고문(拷問)했다.
24일(二十四日) 동(東)이 훤-하게 터올 때쯤에야 연(姸)이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아-장구(長久)한 시간(時間)!
「첫번-말해라」
「인천(仁川) 어느 여관(旅館)」
「그건 안다. 둘쨋뻔-말해라」
「……」
「말해라」
「N삘딩 S의 사무실(事務室)」
「셋째번-말해라」
「……」
「말해라」
「동소문(東小門) 밖 음벽정(飮碧亭)」
「넷째번-말해라」
「……」
「말해라」
「……」
「말해라」
머리맡 책상 설합 속에는 서슬이 퍼런 내 면도칼이 있다. 경동맥(頸動脈)을 따면-요물(妖物)은 선혈(鮮血)이 댓줄기 뻗치듯하면서 급사(急死)하리라. 그러나—
나는 일찌감치 면도를 하고 손톱을 깎고 옷은 갈아 입고 그리고 예년(例年) 10월 24일(十月二十四日) 경에는 사체(死體)가 며칠만이면 썩기 시작하는지 곰곰 생각하면서 모자를 쓰고 인사하듯 다시 벗어 들고 그리고 방(房)-연(姸)이와 반년(半年) 침식(寢食)을 같이하던 냄새 나는 방을 휘- 둘러 살피자니까 하나 사다 놓네 놓네 하고 기어 뜻을 이루지 못한 금붕어도- 이 방에는 가을이 이렇게 짙었건만 국화(菊花) 한송이 장식(裝飾)이였다.
4
그러나 C양(孃)의 방에는 지금-고향에서는 스케잍으로 지친다는데-국화(菊花) 두 송이가 참 싱싱하다.
이 방(房)에는 C군과 C양이 산다. 나는 C양더러 「부인(夫人)」이라고 그랬더니 C양은 성을 냈다. 그러나 C군에게 물어보면 C양은 「아내」란다. 나는 이 두 사람 중의 누구라고 정하지 않고 내 동경생활(東京生活)이 하도 적막(寂寞)해서 지금 이 방에 놀러 왔다.
언더-더 워취— 시계 아래서의 렉튜어는 끝났는데 C군은 조선 곰방대를 피우고 나는 눈을 뜨지 않는다. C양의 목소리는 꿈 같다. 인토내이션이 없다. 흐르는 것같이 끊임 없으면서 아주 조용하다.
나는 그만 가야겠다.
「선생(先生)님 (이것은 실로 이상옹(李箱翁)을 지적(指摘)하는 참담(慘憺)한 인칭대명사다) 왜 그러세요- 이 방이 기분이 나뿌세요? (기분? 기분이란 말은 필시 조선말은 아니리라) 더 놀다 가세요- 아직 주무실 시간도 멀었는데 가서 뭐하세요? 네? 얘기나 하세요」
나는 잠시 그 계간류수(溪間流水) 같은 목소리의 주인 C양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C군이 범과 같이 건강(健康)하니까 C양은 혈색(血色)이 없이 입술조차 파르스레하다. 이 오사계라는 머리를 한 소녀(少女)는 내일 학교에 간다. 가서 언더-더 워취의 계속을 배운다.
사람이—
비밀(秘密)이 없다는 것은 재산(財産)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강사(講師)는 C양의 입술이 C양이 좀 회(蛔)배를 앓는다는 이유 외의 또 무슨 이유로 조렇게 파르스레한가를 아마 모르리라.
강사는 맹랑한 질문(質問) 때문에 잠깐 얼굴을 붉혔다가 다시 제 지위(地位)의 현격(懸隔)히 높은 것을 느끼고 그리고 외쳤다.
「쪼구만 것들이 무얼 안다고-」
그러나 연(姸)이는 히힝 하고 코웃음을 쳤다. 모르기는 왜 몰라—연이는 지금 방년(芳年)이 20(二十), 열여섯살 때 즉 연이가 여고(女高) 때 수신(修身)과 체조(體操)는 여가에 가끔 하였다.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다섯해- 개 꼬리도 3년(三年)만 묻어 두면 황모(黃毛)가 된다든가 안 된다든가 원-
수신시간(修身時間)에는 학감선생(學監先生)님, 할팽시간(割烹時間)에는 올드미스선생님, 국문시간(國文時間)에는 곰보딱지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이 귀염성스럽게 생긴 연(姸)이가 엊저녁에 무엇을 했는지 알아내면 용하지」
흑판(黑板) 위에는 「요조숙녀(窈窕淑女)」라는 액(額)의 흑색(黑色)이 림리(淋漓)하다.
「선생님 선생님- 제 입술이 왜 요렇게 파르스레한지 알아 맞추신다면 참 용하지」
연(姸)이는 음벽정(飮碧亭)에 가던 날도 R영문과(英文科)에 재학중(在學中)이다. 전날 밤에는 나와 만나서 사랑과 장래(將來)를 맹서(盟誓)하고 그 이튿날 낮에는 깃싱과 호-손을 배우고 밤에는 S와 같이 음벽정(飮碧亭)에 가서 옷을 벗었고 그 이튿날은 월요일이기 때문에 나와 같이 같은 동소문(東小門) 밖으로 놀러가서 베-제(프.Baser)했다. S도 K교수(敎授)도 나도 연(姸)이가 엊저녁에 무엇을 했는지 모른다. S도 K교수도 나도 바보요 연(姸)이만이 홀로 눈가리고 야웅하는 데 희대(稀代)의 천재(天才)다.
연(姸)이는 N삘딩에서 나오기 전에 WC라는 데를 잠깐 들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오면 남대문통(南大門通) 50간대로(十五間大路) GO STOP의 인파(人波).
「여보시오 여보시오, 이 연(姸)이가 조 2층(二層) 바른 편에서부터 둘째 S씨(氏)의 사무실 안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나왔는지 알아 맞추면 용하지」
그때에도 연(姸)이의 살결에서는 능금과 같은 신선(新鮮)한 생광(生光)이 나는 법이다. 그러나 불쌍한 이상(李箱)선생님에게는 이 복잡한 교통(交通)을 향하여 빈정거릴 아무런 비밀(秘密)의 재료(材料)도 없으니 내가 재산(財産) 없는 것보다도 더 가난하고 싱겁다.
「C양! 내일도 학교에 가셔야 할 테니까 일찍 주무셔야지요」
나는 부득부득 가야겠다고 우긴다. C양은 그럼 이 꽃 한송이 가져다가 방에다 꽂아 놓으란다.
「선생님 방은 아주 살풍경(殺風景)이라지요?」
내 방에는 화병(花甁)도 없다. 그러나 나는 두 송이 가운데 흰 것을 달래서 왼편 깃에다가 꽂았다. 꽂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5
국화(菊花) 한 송이도 없는 방안을 휘- 한 번 둘러 보았다. 절하면 나는 이 추악(醜惡)한 방을 다시 보지 않아도 좋을 수-도 있을까 싶었기 때문에 내 눈에는 눈물도 고일밖에-
나는 썼다 벗은 모자를 다시 쓰고 나니까 그만하면 내 연(姸)이에게 대(對)한 인사도 별로 유루(遺漏)없이 다 된 것 같았다.
연(姸)이는 내 뒤를 서너 발자국 따라 왔든가 싶다. 그러나 나는 예년(例年) 10월 24일(十月 二十四日) 경에는 사체(死體)가 며칠만이면 상하기 시작하는지 그것이 더 급했다.
「상(箱)! 어디 가세요?」
나는 얼떨결에 되는 대로
「동경(東京)」
물론 이것은 허담(虛談)이다. 그러나 연(姸)이는 나를 만류(挽留)하지 않는다. 나는 밖으로 나갔다.
나왔으니, 자- 어디로 어떻게 가서 무엇을 해야 되누.
해가 서산에 지기 전에 나는 2~3일내(二三日內)로는 반드시 썩기 시작해야 할 한 개 「사체(死體)」가 되어야만 하겠는데, 도리는?
도리는 막연하다. 나는 10년(十年) 긴- 세월(歲月)을 두고 세수할 때마다 자살(自殺)을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나는 결심(決心)하는 방법(方法)도 결행(決行)하는 방법(方法)도 아무 것도 모르는 채다.
나는 온갖 유행약(流行藥)을 암통(暗誦)하여 보았다.
그리고 나서는 인도교(人道橋), 변전소(變電所), 화신상회 옥상(和信商會 屋上), 경원선(京元線), 이런 것들도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렇다고- 정말 이 온갖 명사(名詞)의 나열(羅列)은 가소(可笑)롭다- 아직 웃을 수는 없다.
웃을 수는 없다. 해가 저물었다. 급하다. 나는 어딘지도 모를 교외(郊外)에 있다. 나는 어쨌든 시내(市內)로 들어가야만 할 것 같았다. 시내- 사람들은 여전히 그 알아볼 수 없는 낯짝들을 쳐들고 와글와글 야단이다. 가등(街燈)이 안개 속에서 축축해 한다. 영경(英京) 륜돈(倫敦)이 이렇다지-
6
NAUK사(社)가 있는 신보정(神保町) 영란동(鈴蘭洞)에는 고본(古本) 야시(夜市)가 선다. 섣달 대목- 이 영란동(鈴蘭洞)도 곱게 장식(裝飾)되었다. 이슬비에 젖은 아스팔트를 이리 디디고 저리 디디고 저녁 안 먹은 내 발길은 자못 창량(蹌踉)하였다. 그러나 나는 최후(最後)의 20전(二十錢)을 던져 타임스판(版) 상용영어(常用英語) 4천자(四千字)라는 서적(書籍)을 샀다. 4천자(四千字)-
4천자(四千字)면 참 많은 수효다. 이 해양(海洋)만한 외국어(外國語)를 겨드랑에 낀 나는 섣불리 배고파할 수도 없다. 아- 나는 배부르다.
진따-(옛날 활동사진(活動寫眞) 상설관(常設館)에서 사용(使用)하는 취주악대(吹奏樂隊)) 진동야의 진따가 슬프다.
진따는 전원(全員) 네 사람으로 조직(組織)되었다. 대목의 한몫을 보려는 소백화점(小百貨店)의 번영(繁榮)을 위하여 이 네 사람은 크라리넽과 코넽과 북과 소고(小鼓)를 가지고 선조 유신(先祖 維新) 당초(當初)에 부르던 유행가(流行歌)를 연주(演奏)한다. 그것은 슬프다 못해 기가 막히는 어각풍경(御角風景)이다. 왜? 이 네 사람은 네 사람이 다 묘령(妙齡)의 여성들이더니라. 그들은 똑같은 진홍색(眞紅色) 군복(軍服)과 군모(軍帽)와 「꼭구마」를 장식(裝飾)하였더니라.
아스팔트는 젖었다. 영란동(鈴蘭洞) 좌우(左右)에 매달린 그 영란(鈴蘭)꽃 모양 가등(街燈)도 젖었다. 크라리넽 소리도- 눈물에- 젖었다. 그리고 내 머리에는 안개가 자욱이 끼었다.
영경(英京) 륜돈(倫敦)이 이렇다지?
「이상(李箱)! 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내 어깨를 쳤다. 법정대학(法政大學) Y군, 인생(人生)보다는 연극(演劇)이 재미 있다는 이다. 왜? 인생은 귀찮고 연극은 실없으니까.
「집에 갔더니 안 계시길래!」
「죄송합니다」
「엠프레스에 가십시다」
「좋-지요.」
ADVENTURE IN MANHATAN에서 진-아-더가 커피 한 잔 맛있게 먹더라. 크림을 타 먹으면 소설가(小說家) 구보(仇甫)씨가 그랬다- 쥐 오줌내가 난다고. 그러나 나는 조-엘 마크리 만큼은 맛있게 먹을 수 있었으니-
MOZART의 41번(四十一番)은 「목성(木星)」이다. 나는 몰래 모차르트의 환술(幻術)을 투시(透視)하려고 애를 쓰지만 공복(空腹)으로 하여 저으기 어지럽다.
「신숙(新宿) 가십시다」
「신숙(新宿)이라?」
「NOVA에 가십시다」
「가십시다 가십시다」
마담은 루파시카. 노봐는 에스페란토. 헌팅을 얹은 놈의 심장(心臟)을 아까부터 벌레가 연해 파먹어 들어간다. 그러면 시인(詩人) 지용(芝溶)이여! 이상(李箱)은 물론(勿論) 자작(子爵)의 아들도 아무 것도 아니겠읍니다그려!
10월(十二月)의 맥주(麥酒)는 선뜩선뜩하다. 밤이나 낮이나 감방(監房)은 어둡다는 이것은 꼬리키의 「나그네」구슬픈 노래, 이 노래를 나는 모른다.
7
밤이나 낮이나 그의 마음은 한없이 어두우리라. 그러나 유정(兪政)아! 너무 슬퍼 마라. 너에게는 따로 할 일이 있느니라.
이런 지비(紙碑)가 붙어 있는 책상 앞이 유정(兪政)에게 있어서는 생사(生死)의 기로(岐路)다. 이 칼날같은 슨 한 지점(地點)에 그는 앉지도 서지도 못하면서 오직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고 울고 있다.
「각혈(咯血)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치질(痔疾)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안개 속을 헤매던 내가 불현드키 나를 위하여는 마코-두 갑, 그를 위하여는 배 십전어치를, 사가지고 여기 유정(兪政)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유령(幽靈) 같은 풍모(風貌)를 도회(韜晦)하기 위하여 장식(裝飾)된 무성(茂盛)한 화병(花甁)에서까지 석탄산(石炭酸) 내음새가 나는 것을 지각(知覺)하였을 때는 나는 내가 무엇하러 여기 왔나를 추억(追憶)해 볼 기력조차도 없어진 뒤였다.
「신념(信念)을 빼앗긴 것은 건강(健康)이 없어진 것처럼 죽음의 꼬임을 받기 마치 쉬운 경우더군요」
「이상형(李箱兄)! 형(兄)은 오늘이야 그것을 빼앗기셨읍니까? 인제-겨우-오늘이야- 겨우- 인제」
유정(兪政)! 유정만 싫다지 않으면 나는 오늘밤으로 치뤄버리고 말 작정이었다. 한 개 요물(妖物)에게 부상(負傷)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27세(二十七歲)를 일기(一期)로 하는 불우(不遇)의 천재(天才)가 되기 위하여 죽는 것이다.
유정(兪政)과 이상(李箱)- 이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 찬란한 정사(情死)- 이 너무나 엄청난 거짓을 어떻게 다 주체를 할 작정인지.
「그렇지만 나는 임종(臨終)할 때 유언(遺言)까지도 거짓말을 해 줄 결심(決心)입니다」
「이것 좀 보십시오」하고 풀어 헤치는 유정(兪政)의 젖가슴은 초롱(草籠)보다도 앙상하다. 그 앙상한 가슴이 부풀었다 구겼다 하면서 단말마(斷末魔)의 호흡(呼吸)이 서긆다.
「명월(明月)의 희망(希望)이 이글이글 끓습니다」
유정(兪政)은 운다. 울 수 있는 외(外)의 그는 온갖 표정(表情)을 다 망각(忘却)하여 버렸기 때문이다.
「유형(兪兄)! 저는 내일 아침차(車)로 동경(東京) 가겠읍니다」
「……」
「또 뵈옵기 어려울걸요」
「……」
그를 찾은 것을 몇 번이고 후회(後悔)하면서 나는 유정(兪政)을 하직하였다. 거리는 늦었다. 방에서는 연(姸)이가 나 대신 내 밥상을 지키고 앉아서 아직도 수없이 지니고 있는 비밀(秘密)을 만지작 만지작하고 있었다. 내 손은 연(姸)이 뺨을 때리지는 않고 내일 아침을 위하여 짐을 꾸렸다.
「연(姸)이! 연(姸)이는 야웅의 천재(天才)요. 나는 오늘 불우(不遇)의 천재(天才)라는 것이 되려다가 그나마도 못 되고 도루 돌아왔소. 이렇게 이렇게! 응?」
8
나는 버티다 못해 조그만 종이 조각에다 이렇게 적어 그놈에게 주었다.「자네도 야웅의 천재(天才)ㄴ가? 암만해도 천재ㄴ가 싶으이. 나는 졌네. 이렇게 내가 먼저 지껄였다는 것부터가 패배(敗北)를 의미(意味)하지」
일고 휘장(一高 徽章)이다. HANDSOMENBOY—해협(海峽) 오전(午前) 2시(二時)의 망또를 두르고 내 곁에 가 버티고 앉아서 동(動)치 않기를 한 시간(이상(以上)?)
나는 그 동안 풍선(風船)처럼 잠자코 있었다. 온갖 재주를 다 피워서 이 미목수려(眉目秀麗)한 천재(天才)로 하여금 먼저 입을 열도록 갈팡질팡했건만 급기해하에 나는 졌다. 지고 말았다.
「당신의 텁석부리는 말(馬)을 연상(聯想)시키는구려. 그러면 말아! 다락 같은 말아! 귀하(貴下)는 점잖기도 하다만은 또 귀하(貴下)는 왜 그리 슬퍼 보이오? 네?」(이놈은 무례(無禮)한 놈이다)
「슬퍼? 응- 슬플밖에- 20세기(二十世紀)를 생활(生活)하는 데 19세기(十九世紀)의 도덕성(道德性)밖에는 없으니 나는 영원(永遠)한 절름발이로다. 슬퍼야지- 만일(萬一) 슬프지 않다면- 나는 억지로라도 슬퍼해야지- 슬픈 포우즈라도 해 보여야지- 왜 안죽느냐고? 헤행! 내게는 남에게 자살(自殺)을 권유(勸誘)하는 버릇밖에 없다. 나는 안 죽지. 이따가 죽을 것만 같이 그렇게 중속(衆俗)을 속여 주기만 하는 거야. 아- 그러나 인제는 다 틀렸다. 봐라. 내 팔. 피골(皮骨)이 상접(相接). 아야아야. 웃어야 할 터인데 근육(筋肉)이 없다. 울려야 근육(筋肉)이 없다. 나는 형해(形骸)다. 나-라는 정체(正體)는 누가 잉크 짓는 약으로 지워 버렸다. 나는 오직 내- 흔적(痕跡)일 따름이다.」
NOVA의 웨이트레스 나미꼬는 아부라에라는 재주를 가진 노라의 따님 코론타이의 누이동생이시다. 미술가(美術家) 나미꼬씨와 극작가(劇作家) Y군은 4차원세계(四次元世界)의 테마를 불란서(佛蘭西)말로 회화(會話)한다.
불란서(佛蘭西)말의 리듬은 C양의 언더-더 워취 강의(講義)처럼 애매하다. 나는 하도 답답해서 그만 울어 버리기로 했다. 눈물이 좔좔 쏟아진다. 나미꼬가 나를 달랜다.
「너는 뭐냐? 나미꼬? 너는 엊저녁에 어떤 마찌아이에서 방석을 비고 15분(十五分)동안- 아니 아니 어떤 삘딩에서 아까 너는 걸상에 포개 앉았었느냐 말해라- 헤헤- 음벽정(飮碧亭)? N삘딩 바른 편에서부터 둘째 S의 사무실?(아- 이 주책 없는 이상(李箱)아 동경(東京)에는 그런 것은 없읍네) 계집의 얼굴이란 다마네기다. 암만 베껴 보려므나. 마지막에 아주 없어질지언정 정체(正體)는 안 내놓느니」
신숙(新宿)의 오전 1시(午前一時)- 나는 연애(變愛)보다도 우선 담배를 한대 피우고 싶었다.
9
12월(十二月) 23일(二十三日) 아침 나는 신보정(神保町) 누옥(陋屋) 속에서 공복(空腹)으로 하여 발열(發熱)하였다. 발열(發熱)로 하여 기침하면서 두 벌 편지는 받았다.
「저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거든 오늘로라도 돌아와 주십시오. 밤에도 자지 않고 저는 형(兄)을 기다리고 있읍니다. 유정(兪政)」
「이 편지 받는대로 곧 돌아오세요. 서울에서는 따뜻한 방과 당신의 사랑하는 연(姸)이가 기다리고 있읍니다. 연서(姸書)」
이날 저녁에 내 부질없는 향수(鄕愁)를 꾸짖는 것처럼 C양은 나에게 백국(白菊) 한송이를 주었느니라. 그러나 오전(午前) 1시(一時) 신숙역(新宿驛) 폼에서 비칠거리는 이상(李箱)의 옷깃에 백국(白菊)은 간 데 없다. 어느 장화(長靴)가 짓밟았을까. 그러나—검정 외투(外套)에 조화(造花)를 단, 땐서 한 사람. 나는 이국종(異國種) 강아지올씨다. 그러면 당신께서는 또 무슨 방석과 걸상의 비밀(秘密)을 그 농화장(濃化粧) 그늘에 지니고 계시나이까?
사람이- 비밀(秘密) 하나도 없다는 것이 참 재산(財産) 없는 것보다도 더 가난하외다 그려! 나를 좀 보시지요?
1939.3. ,문장지에 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