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구림교회
1950년 10월 4일 6.25동란으로 동 구림리 입구 대로변 초가집에 김봉규집사를 비롯한 전교인 18명을 묶어서 방에 가둔후, 불을 붙임으로 모두 순교하였는데, 성도들은 찬송을 부르면서 그 영혼들을 하나님께 부탁하였다. 합동묘와 순절비는 구림고등학교 앞에 세워져 있다.
구림교회 18인 순절비,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사진
공산당이 패퇴 후 동리 사람들이 뼈들을 모아 합장하여 묘를 만들었는데 1983년 그 묘를 200m 옮겨 왕인 박사 유적지 입구 우측에
순절비를 세우고 순국자와 순교자들의 명단을 새겨넣었다.
영암교회 24인 순교비
영암읍교회 24인의 순교비로 1953.12. 교회 마당에 당시 함태영 부통령의 친필로 쓴 순교비를 세웠다.
영암 상월교회 25명 순교기념비
상월교회는 6.25 동란을 겪으면서 교회를 천해로 옮겨 예배를 드렸는데 이로 상월교회(당회측)과 천해에 남은 교인들로 나누어졌다.
당회측에는 순교자가 약 40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천해 교인들로 해당되는 15명의 명단을 찾고있다. 상월교회는 1992.3.23. 밝혀진 명단 25명으로 우선 순교기념비를 세웠다.
순교기념비 봉헌문
믿으면 구원이요 죽으면 영생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그저 좋기만 하였거늘 이 평화로움도 잠시였던가 웬말인가 1950년 6·25동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죄가 되어 줄로 묶여 총칼과 대창으로 죽임을 당하였구려 찬란한 부활의 소망 바라보고 주 예수님 모른다 아니하고 믿음의 절개 지켰으니 대대에 칭송을 받으올찌라 오오! 장하도소이다 이 숭고한 믿음이여라 이 장한 죽음이여라 오늘날 우리도 그 신앙 따르오리니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실 줄 알아" 그 신앙 추모하며 기리고자 온 성도 마음 합하여 이 비를 세워 만대에 전하노라.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요 10:17)
주후 1993년 3월 23일
순교 당시 상황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믿음의 연조는 짧았지만 성령의 뜨거운 역사와 믿고 죽으면 찬란한 부활이 있음을 굳게 믿고 믿음을 지켜 나갔으니 믿지 않는 사람들과 집안 식구들로부터 많은 핍박과 박해가 있었지만 그런 핍박에 개의치 않고 신앙을 불태워가던 중에 통한의 6·25동란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죽음을 수반한 환란이 닥쳐 이곳 상월에 사무쳤으니 악랄한 빨갱이들은 예수를 믿는다 하여 줄로 묶어 총칼과 죽창으로 죽음을 협박하였으나 찬란한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고 오히려 완연하게 잠시 기도할 시간을 달라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내 영혼과 온 가족의 영혼을 받으소서 우리 상월리 교회를 기억하소서 기도하시고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순교를 당하신 것이다. 무참히도 죽임을 당한 성도님들은 하나밖에 없는 존귀한 생명을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을 위해 바쳤음은 오직 순수한 복음으로 뭉쳐진 신앙으로 부활 영생의 영광을 바라본 숭고한 순교였음을 그 누가 부인 할 수 없으니 이 신앙 길이 칭송을 받으며 빛날 것입니다. (주: 공산군의 잔학한 만행은 지방 빨갱이들의 협조로 이루어졌으며, 당시 임신 9개월의 태아까지 포함하여 25인의 상월 그리스도의 교회 소속 성도들이 교회당 근처 지금은 깎여 농지로 만들어진 낮은 야산에서 총칼과 죽창 등으로 무참히 처형되었고, 신덕철 전도사이외에는 시신도 거둘 수 없었다고 한다. 만행에 사용된 죽창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회당 근처에 숲을 이루었던 대나무를 잘라 만든 것이었다고 한다).
(1993년 3월 23(화)일 오전 11시에 드려진 순교자 기념비 건립예배 순서지에서)
상월교회 약사
1947년 7월 1일 창립자 진 성구씨께서 상월 본 부락에 거주하면서 자기 소유 주택 상월 139의 3번지의 건물을 임시교회 예배처소로 제공하면서 전도에 열심하여 초신자들을 모아 예배를 드리므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이 때에 신덕철 전도사님이 부임하시어 초대 교역자로서 모시게 되었다. 당시 김은석 목사님을 비롯하여 최요한 목사님, 김재순 목사님의 종횡 무진한 협조로 본 교회 창립 초에 중대한 신앙적으로 도움을 주셨으며 김은석 목사님은 말씀중심으로 최요한 목사님은 성령운동으로 김재순 목사님은 겸손과 미덕으로 각각 전도와 포교에 열중하여 오늘의 상월교회가 있게 하여 주었고 특히 최요한 목사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시키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셨다. 이렇게 하여 초창기 교회는 성령과 열심으로 충만하여 뜨거운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중 통한의 6·25를 만나 많은 순교자의 희생을 치르게 된 것이다. 6·25가 지나 남아 있는 성도들이 예배처소의 필요를 느껴 당시 최연남 집사님과 이순례 집사님 그리고 전 성도님들의 피나는 기도와 헌금과 공동작업을 하여 그 노임으로 얻어진 자금으로 본리 423의 5번지에 상월리 회관을 매입하여 예배처소로 삼았다. 1967년 당시 조의환 전도사님 재임시 교회 증축의 필요를 절감하고 교회건립 계를 조직하여 오늘의 석조건물을 건립하는데 물질적 토대가 움트기 시작했다. 1970년 지금의 위치 본리 423의 7번지를 매입하여 건평 40평의 석조건물로 착공하여 당시 배기주 전도사님과 온 교우들이 피나는 노력과 눈물겨운 사연으로 쌓았으니 1972년 6월 23일 역사적인 준공의 결실을 거두었다. 1981년 2월 당시 박희한 목사님의 설계로 교회예배당 증축과 현관건물 기초작업을 하여 7월 23일 지금의 교회예배당 건물을 완공하였다. 1983년 2월 사택기초 작업을 하여 23평 건물로 5월 24일 완공하다. 1983년 12월 12일 예배당 헌당식과 이용선, 신종식, 김동문, 조창희 집사, 장로 장립식 예배를 드리다. 1989년 구 사택을 지금의 친교실로 개조하고 친교실과 사택에 기름보일러 설치하다. 1990년 3월 15일 정남용 목사 취임, 박형식 집사 장로 장립, 최연남 집사, 김복덕 집사, 윤경단 집사 권사 취임, 김출재, 박정수, 배국선, 서폰심, 임보물, 임금일, 고양숙, 집사 안수식을 거행하다. 1993년 3월 5일 순교자 기념비 건립을 착공하여 3월 23일 완공하여 순교비 건립 예배를 드리다.
영암군교회협의회 주최 구림교회당에서 합동추모예배
6.25 한국전쟁 53주년을 맞이하여 영암군교회협의회에서는 6월 15일 주일 오후3시 구림교회당(강춘석 목사 시무)에서 88명의 순교자 유족들을 초청하여 합동추모예배와 현판식을 가졌다. 추모예배는 이서하 목사의 사회로 시작하여 구자성 목사의 기도와 박석봉 목사의 설교가 진행되었는데 박 목사는 '순교적 믿음으로 살아가자'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영암지방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위에 세워진 교회들"이라고 말하고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는 오늘의 신앙인이 되자"며 뜨거운 말씀을 전했다. 이어 임정화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2부 추모식은 유족회장 최진호 장로 사회로 시작하였으며, 순교자 9개처 교회중 88명의 명단을 김기창 장로가 호명하였는데 좌중은 모두 다 눈물을 흘리며 고인들의 믿음을 가렸다. 이어 김재철 장로의 추모사와 노정남 장로의 추모시가 낭송되어 6.25의 괴로웠던 순교적 현실을 상기시킴으로 감동을 주었다. 이날 예배에서는 6.25 당시 영암지방에 9개 교회였던 것이 지금은 90개 교회로 부흥 발전된 것은 순교자가 피 흘린 밀알의 결과였다고 보고했으며, 앞으로 영암지방의 순교기념관 건립을 위해 17명의 건축위원을 선정하여 추진키로 하고 신앙의 후손들과 유족들에게 길이 빛낼 영광이 될 것을 기대했다.
다음은 순교자 명단이다(가나다순). 구림교회(19명)는 집사 김정님, 노형식, 장성례 씨와 성도 노병철, 노병현, 최경애, 최기우, 이이순, 김덕경, 김창은, 김흥호, 김치빈, 김상락, 김봉규, 천양님, 성명미상 4명이며, 독천교회(1명)는 성도 정길성 씨이며, 매월교회(3명)는 집사 임자일, 이태일 씨와 성도 이영심 씨이며, 삼호교회(2명)는 성도 김상규 씨와 성명미상 1명이며, 상월교회(26명)는 전도사 신덕철 씨와 집사 서석근, 김춘동, 윤성전, 임유상, 조인심, 이복만, 임항우, 이 일, 조재윤, 신장모 씨이며, 성도 이재조, 이춘만, 송복윤, 임화상, 임남상, 진사울, 조정덕, 김길숭, 임여상, 요 셉, 전야곱, 조윤기, 마리아, 진대식, 임태광 씨이며, 서호교회(1명) 전도사 노홍균 씨이며, 신흥교회(2명)는 장로 박병근 씨와 아들 박금규 씨이며, 영암읍교회(24명)는 전도사 김인봉 씨와 장로 김동흠, 안수집사 박인재 씨, 집사 김원배, 김윤자, 김동신, 노용식, 방인태, 채수원 씨, 성도 조종환, 김석영, 박영운, 박주상, 김옥준, 박태준, 윤상림, 이문찬, 김인례, 조부복, 장성심, 조소례, 김복순, 김종연, 김천순 씨이며, 천해교회(10명)는 목사 박석현 씨와 사모 김귀남, 아들 박원택 씨이며, 집사 나옥매, 문봉순, 오죽현 씨이며, 성도 김민수, 현영필, 해남댁, 필남 씨 등이다.
빨치산, 6*25당시 13만 주민 학살
‘바닥빨갱이’, 목사*장로*신부 등 종교인 포함 원시적 학살
6*25 당시 빨치산들은 인민군 치하에서‘바닥빨갱이’로 불리며 양민학살을 주도했고, 북한 인민군 퇴각 이후에는 지리산을 거점으로 우익인사 살해 등을 벌여왔다. 빨치산들이 6*25당시 인민재판을 통해 학살한 양민의 수는 13만. 남경대학살, Warsaw Getto의 유태인학살과 함께 20세기 세계적 학살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다. 붉은 완장을 차고 다니던 바닥빨갱이들은 대개 총이 없었으므로 죽창이나 도끼, 쇠스랑, 괭이 곤봉 등으로 무장했고 곡괭이와 삽으로 우익인사들을 찔러 죽이는 원시적 학살행위를 자행했다. 전쟁사학자들은 6*25 당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13만 양민학살’이 세계적 학살로 기록되는 이유는 피해자 수는 물론 그 잔혹성에 있다고 지적한다. 경남 남해군에서는 경찰관들을 살해해 배를 갈라 간을 꺼내 씹거나 절명한 경찰관 경찰관의 배에 1척이나 되는 소나무 말뚝을 박기도 했다. 경기도 양평군에서는 반공인사 600여 명이 철사줄로 묶어져 휘발유를 끼얹어 지고 웅덩이에 생매장됐다. 전주형무소에서는 감옥에 있던 우익인사들이 살해된 후 도랑에 던져졌고 도랑이 시체로 가득 차자 우물에 던져졌고 우물이 차자 뒤뜰에 버려졌다. 대전형무소에서는 수감돼 있던 1,742명의 우익인사와 가족들이 모두 학살됐다. 바닥빨갱이들에 의한 가장 큰 피해자집단 중 하나는 종교인들이었다. 지금까지 정리된 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6*25 당시 인민군과 바닥빨갱이들에 의해 학살당한 목사*신부*장로*수녀들은 신원이 밝혀진 사람만 174명에 달한다. 또한 인민군이 퇴각하며 납북된 종교인들도 184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기독교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전남 영암읍 교회사건 등 3개월 이하의 인공치하 동안 조직적으로 전개됐다. 전남 영압읍 교회에서는 신도 24명이 집단 학살됐고, 옥구에서도 20여 명의 신도가 학살됐다. 전남 서쪽 바다에 있는 임자도에서는 150여 명이 구덩이를 파고 양민과 교인이 학살됐고, 충남 논산 병촌교회에서는 한 살짜리 어린아이부터 육순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60여 명의 교인들이 학살됐다. (미래한국 200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