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연구자료 박지원1737(영조 13)~1805(순조 5).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 필균(弼均)이며, 아버지는 사유(師愈)이다. 그의 가문은 노론(老論)의 명문세신(名門世臣)이었지만, 그가 자랄 때는 재산이 변변치 못해 100냥도 안 되는 밭과 서울의 30냥짜리 집 한 채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영조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으면서도 척신(戚臣)의 혐의를 피하고자 애썼으며, 청렴했던 조부의 강한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1752년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다. 그의 처삼촌이며 이익(李瀷)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던 홍문관교리 이양천(李亮天)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3년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에 전념, 경학(經學)·병학·농학 등 모든 경세실용의 학문을 연구했다. 특히 문재(文才)를 타고난 그는 이미 18세 무렵에 〈광문자전 廣文者傳〉을 지었다. 1757년 〈민옹전 閔翁傳〉을 지었고, 1767년까지 〈방경각외전 放?閣外傳〉에 실려 있는 9편의 단편소설을 지었다. 이 시기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이 극히 날카로웠으나, 사회적 모순은 대체로 추상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1759년 어머니가, 1760년에 할아버지가, 1767년에는 아버지가 별세했다. 아버지의 장지(葬地) 문제로 한 관리가 사직한 것을 알고는, 본의 아니게 남의 장래를 막아버린 것을 자책해 스스로 과거에의 뜻을 끊었다. 1768년 서울의 백탑(白塔:지금의 파고다 공원) 부근으로 이사했다. 주변에 이덕무(李德懋)·이서구(李書九)·서상수(徐常修)·유금(柳琴)·유득공(柳得恭) 등도 모여 살았고, 박제가(朴齊家)·이희경(李喜慶) 등도 그의 집에 자주 출입했다. 당시 그를 중심으로 한 '연암 그룹'이 형성되어 많은 신진기예의 청년 인재들이 그의 문하에서 지도를 받고, 새로운 문풍(文風)·학풍(學風)을 이룩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북학파실학(北學派實學)이었다. 문학에서는 당시 이덕무·유득공·이서구·박제가가 4대시가(四大詩家)로 일컬어졌는데 모두 박지원의 제자들이었으며, 이서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얼 출신이었다. 1780년 진하별사(進賀別使) 정사(正使) 박명원(朴明源)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청(淸)의 베이징[北京]에 갔다. 박명원은 영조의 부마로서 그의 8촌 형이었다. 5월 25일에 출발해 8월 1일부터 9월 17일까지 베이징에 머물렀고, 10월 27일 서울에 돌아왔다. 이 연행에서 청의 문물과의 접촉은 그의 사상체계에 큰 영향을 주어 이를 계기로 그는 인륜(人倫) 위주의 사고에서 이용후생(利用厚生) 위주의 사고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는 귀국한 이후 〈열하일기 熱河日記〉의 저술에 전력을 기울였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호질 虎叱〉·〈허생전 許生傳〉 등의 소설도 들어 있고, 중국의 풍속·제도·문물에 대한 소개·인상과 조선의 제도·문물에 대한 비판 등도 들어 있는 문명비평서였다. 1783년 무렵에 일단 탈고되었으나,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개작과정을 거쳐 최종적인 수습은 그가 죽은 뒤 1820년대 초반의 어느 시기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열하일기〉는 공간되기도 전에 이미 필사본이 많이 유포되었는데, 특히 자유분방하고도 세속스러운 문체와 당시 국내에 만연되어 있던 반청(反淸) 문화의식에의 저촉 때문에 찬반의 수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루하고 보수적인 소화의식(小華意識)에 젖어 있는 지식인들의 비난 때문에 정조도 1792년에는 그에게 자송문(自訟文:반성문)을 지어 바치라는 처분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 그는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과 부패의 폭로가 더욱 원숙해졌고, 사회모순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드러냈으며, 이용후생의 실학을 대성하기도 했다. 1786년 처음 벼슬에 올라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다.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 1790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제릉령(齊陵令), 1791년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안의현감(安義縣監), 1796년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의금부도사·의릉령(懿陵令), 1797년에는 면천군수(沔川郡守)를 지냈다. 1799년에는 1년 전에 정조가 내린 권농정구농서(勸農政求農書)의 하교(下敎)에 응해 〈과농소초 課農小抄〉(〈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를 부록으로 붙임)를 바쳤다. 이 책은 농업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농업생산관계를 조정하는 문제를 깊이있게 다룬 것으로, 그의 사상의 원숙한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1800년 양양부사가 되었고, 1801년 봄에 사직했다.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1805년 10월 20일 69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의 묘는 지금 북한 땅인 장단(長湍) 송서면(松西面) 대세현(大世峴)에 있다. 만년의 그의 사상은 구체적 개혁안의 제시에 주력하는 경향이었고, 따라서 비판력은 약화되고 개량적·타협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이덕무 (조선 실학자) [1741(영조 17) 서울~1793(정조 17). 규장각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서적을 정리·교감했고, 고증학을 바탕으로 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본관은 전주. 자는 무관(懋官), 호는 아정(雅亭)·청장관(靑莊館)·형암(炯庵)·영처(?處)·동방일사(東方一士).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성호(聖浩)이다. 서자로 태어났다. 어려서 병약하고 집안이 가난하여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나, 총명하여 가학(家學)으로 문리(文理)를 터득했다. 약관의 나이에 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와 함께 〈건연집 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내어 문명을 중국에까지 떨쳤다. 이후 박지원(朴趾源)·박제가·홍대용(洪大容)·서이수(徐理修) 등 북학파 실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고염무(顧炎武)·주이존(朱彛尊)·서건학(徐乾學) 등 중국 고증학파의 학문에 심취하여, 당대의 고증학자였던 이만운(李萬運)에게 지도를 받았다. 1778년(정조 2)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 심염조(沈念祖)의 서장관으로 청의 연경(燕京)에 갔다. 이때 기균(紀均)·당악우(唐樂宇)·반정균(潘庭均)·육비(陸飛)·엄성(嚴誠)·이조원(李調元)·이정원(李鼎元)·이헌교(李憲喬)·채증원(蔡曾源)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했다. 돌아올 때 그곳의 산천·도리(道理)·궁실·누대(樓臺)·초목·충어(蟲魚)·조수(鳥獸)에 이르는 기록과 함께 많은 고증학 관계 서적을 가지고 왔는데, 이것은 그의 북학론 발전에 큰 보탬이 되었다. 1779년 박제가·유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초대 규장각 외각검서관(外閣檢書官)이 되었다. 근면하고 시문에 능했던 그는 규장각 경시대회에서 여러 차례 장원하여 1781년 내각검서관(內閣檢書官)이 되었으며, 사도시주부·사근도찰방·광흥창주부·적성현감 등을 거쳐 1791년 사옹원주부가 되었다. 그는 규장각의 도서편찬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전회통〉·〈규장전운 奎章全韻〉·〈기전고 箕田攷〉·〈도서집성〉·〈국조보감〉·〈규장각지〉·〈홍문관지〉·〈검서청기 檢書廳記〉·〈시관소전 詩觀小傳〉·〈송사전 宋史筌〉 등을 정리·교감했다. 1793년 병사했는데, 정조는 그의 공적을 기념하여 장례비와 유고집인 〈아정유고 雅亭遺稿〉의 간행비를 내렸다. 서화(書畵)에도 능했다. 저서로는 〈영처시고 ?處詩稿〉·〈이목구심서 耳目口心書〉·〈기년아람 紀年兒覽〉·〈사소절 士小節〉·〈영처문고 ?處文稿〉·〈청비록 淸脾錄〉·〈뇌뢰낙락서 磊磊落落書〉·〈영처잡고 ?處雜稿〉·〈관독일기 觀讀日記〉·〈앙엽기 ?葉記〉·〈입연기 入燕記〉·〈열상방언 洌上方言〉·〈예기고 禮記考〉·〈편찬잡고 編纂雜稿〉·〈협주기 峽舟記〉·〈천애지기서 天涯知己書〉·〈한죽당수필 寒竹堂隨筆〉 등이 있다. 양명학 정리 주자학은 그 체계가 완비되어 있어 원나라 때부터 수양과 실천을 위주로 할 뿐 이론적인 독창성이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 초기 진헌장(陳獻章)은 독서에 의한 자기수련방법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독서를 버리고 정좌(靜坐)를 통하여 사색한 끝에 '곳을 따라서 천리를 체인(體認)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문인 임광(林光)은 진헌장에 대해서 "선생께서 교육할 시초에 반드시 정좌케 하여 그 착한 실마리를 기르게 했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학문하는 까닭은 도리를 듣고자 하는 것이다. 도(道)를 서적에서 찾으나 얻지 못하니 도리를 내 마음에서 찾는 것이 옳겠다'라고 했다." 이로써 진헌장의 심학(心學)은 양명학의 선구가 되었다. 왕수인은 저장 성[浙江省] 위야오 현[餘姚縣]에서 태어났으며, 젊어서는 많은 정신적 편력이 있었다. 그는 용장(龍場)으로 귀양가서 "성인의 도는 나의 본성만으로 스스로 넉넉하다. 따라서 밖으로 찾을 것이 아니다"라고 자각하게 되었다. 또 주자의 즉물궁리(卽物窮理)는 심(心)과 이(理)의 간격을 좁힐 수가 없으므로 격물(格物)의 격(格)을 주자처럼 '이르다'[至]로 해석하지 않고, 바로잡는다[正]로 했으며, 물(物)을 주자처럼 사물의 이라 하지 않고, 심의(心意)가 있는 인간사(人間事)라고 해석했다. 즉 심의 발동의 부정(不正)을 바루는 것[正]을 격물이라고 했으며, 치지(致知)의 지는 지식이 아니라 양지(良知)이니 양지를 수렴하여 확충하고 실현하는 것을 치지라고 했다. 그리하여 심즉리(心卽理)에 귀착하게 되었다. 뒷날 왕수인이 성인의 학문은 심학(心學)이라고 했듯이, 심학이 체계화되는 기초가 여기서 마련되었다. 한편 구이양[貴陽]에 있을 때, 처음으로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주장하고, 저양(檍陽) 이후 정좌를 가르쳤으며, 강우(江右) 이래로 비로소 치양지(致良知) 세 글자를 제시하여 본체를 바로 지적했다. 흔히 왕수인의 교(敎)가 삼변(三變)했다고 하는데, 이는 지행합일설 - 정좌 - 치양지설로의 변화를 말한다. 지행의 본체는 심이며, 더욱 구체적으로는 양지(良知)이기 때문에 지식과 실천이 심에 의하여 합일된다고 했지만 실천과 지식의 합일을 위하여 정좌공부를 주장했다. 이로 인해 한때는 배우는 자가 깨우치는 듯했으나 오래됨에 따라 점차 고요한 것을 즐기고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폐단이 발생해 치양지공부(致良知工夫)로서 그 폐단을 타파했다. 이처럼 양명학은 치양지설에서 체계가 완성되었다. 원리심즉리로부터 출발하여 지행합일설에 도달하고 마지막으로 치양지설에 의하여 완성된다. 심즉리 새로운 격물치지설을 주장하게 된 원리는 심즉리이다. 이는 육상산(陸象山)에서 발견된 심학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심학은 왕수인에 의해 대성되었다. 그는 "심은 곧 이이다. 천하에 심외(心外)의 일이 있고, 심외의 이가 있겠는가"라는 주체적인 자각에서 심즉리가 정립되었다고 했다. 심외에 사물이 없고, 심외에 일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객관적인 외계(外界)의 사물은 마음을 떠나면 소멸해 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가 남진(南鎭) 땅에서 바위 위에 핀 꽃을 보고, "저 꽃은 스스로 피고 스스로 떨어지니 우리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하고 질문했을 때, 왕수인은 "당신이 이 꽃을 보지 못했을 때는 이 꽃은 당신의 마음과 함께 고요했다. 그러나 당신이 와서 이 꽃을 보았을 때 이 꽃은 빛깔이 분명하게 되었다. 이 꽃은 당신의 마음 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사람에게 의식되지 않을 때 그 꽃은 고요히 그대로 있었지만, 사람이 의식했을 때 비로소 아름답다·분홍이다·빨갛다 등의 평가와 판단으로 인하여 꽃은 꽃노릇을 하게 된다. 사물은 인간의 의식과의 관계에서 그 가치가 주어지고 세계질서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마음 외에 사물은 없다'는 근본 뜻이다. 그러나 치양지설을 주장한 후부터 이보다 심에 중심이 옮겨졌다. 즉 심의 외화(外化)가 곧 자연적인 사물이라는 것으로 사물현상은 심의 현상물이라 했다. 지행합일 아름다운 꽃을 보는 것은 지(知)에 속하고 아름다운 꽃을 좋아하는 것은 행(行)에 속한다. 그런데 아름다운 꽃을 보았을 때는 이미 좋아하는 것이지 먼저 보고 난 뒤에 또다른 마음이 있어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왕수인이 지는 행의 시작이요, 행은 지의 완성이라고 했던 까닭이다. 즉 우리의 지식과 실천은 본래 합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린(賀麟)은 지행합일신론(知行合一新論)에서 대략 "지는 의식활동이며, 행은 생리적인 활동이다. 지행이 비록 성질이 다른 활동이라고 하더라도 활동이라는 점에서는 합치한다. 우리의 의식활동은 생리적 조건과 물질적인 변화가 있게 된다. 이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므로 지행합일이라고 한 것이다. 의식활동과 생리적인 활동은 동시에 발동되며, 시간적인 선후가 없다"고 했다. 치양지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지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양지이다. 왕수인은 49세 때에 치양지설을 주장했다. 치양지설이 창안된 뒤부터는 인욕을 버리고 천리를 보존한다는 등의 수양방법보다 오히려 양지의 실현이 중시된다. 양지를 실현한다면 모든 사사로운 폐단이 스스로 소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정을 바룬다', '사욕을 버린다'고 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치양지 그것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왕수인은 양지의 두 글자가 참으로 성인되는 학문의 바른 법이요 안장(眼藏)이라고 했다. 치양지설 이후부터 사상마련설(事上磨鍊說)이 분명하게 드러났고 그것이 치양지하는 수단이 되었다. 치양지는 일상생활에서 때와 곳을 따라 정당한 실천이 요구된다. 고정되어 있지 않은 일들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양지에 따른 판단과 처리가 있어야 하고, 이러한 요구들은 즉결(卽決)을 요하는 것이니, 정좌하여 명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왕수인은 천군만마(千軍萬馬)의 전쟁터에서 즉결이 요구되는 실지체험을 했기 때문에 사상마련이라고 하는 양지발현의 수단방법이 발상되었다. 치양지의 수단으로, 그의 만년부터 정좌에 의존하거나 독서에 의존하는 수양법을 버렸던 까닭에 사상마련법이 발견되었다. 또 대동(大同)의 인(仁)을 실현하기 위해 천지만물 일체의 인인 본체가 내 본연이요, 양치인 것을 철저히 깨우쳐서, 공리(空理)와 기능적 지식이 그것을 막고 어둡게 하는 줄을 알아서 이를 근본·근원부터 뽑아버리며 막자는 발본색원론(拔本塞源論)을 주장했다. 천하를 보되 한 집처럼 하고, 중국 보기를 한 사람과 같이 한다는 대동주의(大同主義)는 왕수인의 가장 만년 저술인 〈대학문 大學問〉의 간절한 주장이다. 수용 양명학의 동전(東傳)에 대하여, 1558년(명종 13)에 유성룡(柳成龍)이 17세 때, 의주(義州)로 돌아온 사은사 심통원(沈通源)이 압록강변에 버린 짐짝에서 양명집을 얻어 베껴 두었다고 했으므로 이해에 처음 양명학이 전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눌재집 訥齋集〉 연보(年譜)에 박상(朴祥)이 48세(1521)에 "왕양명의 전습록을 변론한다"고 한 것이 있고, 김세필(金世弼)도 〈십청헌집 十淸軒集〉에서 "양명 노선생이 심학을 다스렸다"고 했으니, 이를 볼 때 양명학이 우리나라에서 전해진 것은 1521년이 된다. 이해는 왕수인이 50세로 강서(江西)에 있었는데, 양명연보(陽明年譜)에 의하면 "이해에 선생이 비로소 치양지의 교(敎)를 내어 걸었다"고 했다. 왕수인은 그해에 진구천(陳九川)에게 "양지 두 글자는 참으로 천고성현(千古聖賢)이 서로 전수한 한 점의 골혈(骨血)이다"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양명학에 대한 논의는 이와 같이 왕수인이 생존시에 일어났던 일이다. 그러나 양명학은 이황(李滉)에게 불교적이라고 배척되었으며, 유희춘(柳希春)·유성룡·박세채(朴世采)·한원진(韓元震) 등에 의해 계속해서 배척받았다. 하지만 남언경(南彦經)·이요(李瑤)·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 등에 의하여 수용(受容)되어 정제두(鄭齊斗)에 의하여 양명학파가 수립되었다. 그로부터 이종휘(李鍾徽)·이광사(李匡師)·이충익(李忠翊)·정동유(鄭東愈)·이건창(李建昌)·이건방(李建芳)·박은식(朴殷植)·정인보(鄭寅普) 등으로 계승·발전되었다. 조선의 양명학파 조선 양명학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주자학의 무력함을 자각하여 실용적인 실학과 함께 역동적인 양명학이 일부 학자에 의하여 연구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실학파의 선구인 이수광·허균 등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양명학설이 수용되고 심학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셋째, 양명좌파의 이탁오(李卓吾) 등의 문학이론이 허균·박지원 등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넷째, 특히 진(眞)과 가(假)의 분별이 강조되어 가도학(假道學)·가대의(假大義)·가인(假人) 등으로 가가 배격되었다. 왕수인이 "이 양지를 투철히 이해한다면 천만 가지의 말을 하더라도, 옳고 그름과 성(誠)·위(僞)가 그 앞에 오면 곧 분명해질 것이다. 그의 양지에 맞으면 옳고, 들어맞지 아니하면 그른 것이다"고 한 것에서 그들이 순진무가(純眞無假)를 추구하는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조선을 대표하는 양명학자는 정제두·이충익·이건방 등을 들 수 있다. 정제두의 양지체용도(良知體用圖) 정제두는 양지를 체와 용으로 구분하여 양지체용도를 만들었다. 체(體)는 양지의 체요, 용(用)은 양지의 용이다. 성(性)은 심의 본연이요, 양지의 체이다. 정(情)은 심의 발이요, 양지의 용이다. 이와 같이 성과 정으로써 양지의 체와 용으로 구별했으며, 천지만물도 마음 속의 일이며 물아(物我)·내외(內外)가 모두 심이라고 보았다. 양지의 영명(靈明)한 체로 말한다면 제(帝)요, 그 지각하는 용으로 말한다면 만물을 화육함[化工]이니 곧 하나의 마음으로서 하는 말이다. 양지의 본체는 미발(未發)이며 중(中)이요, 양지의 용은 이발(已發)이요 정이며, 선을 알고, 악을 아는 지라고 했다. 다음과 같은 정제두의 고백은 양지학의 폐단이 혹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내가 양명집을 살핌에 그의 도가 간요하면서도 몹시 정미했으므로 마음 속으로 기뻐하고 좋아했다. 신해(辛亥, 1671) 6월에 동호(東湖)로 가서 일박했다. 꿈 속에서 갑자기 왕씨의 치양지학이 몹시 정밀하지만 또한 폐단이 있어 감정대로 하고 욕(欲)에 좇을 근심이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자각은 양명좌파의 정욕긍정적 폐단을 말한 것이니, 그의 양명학은 자연 양명우파, 내지 정통파와 연결된다. 그의 손서인 이광명(李匡明)은 이충익의 양부(養父)이며 이충익은 이건창과 이건방의 5대조(五代祖)이다. 이충익의 가설(假說) 이충익은 그의 〈초원유고 椒園遺稿〉의 가설 상하편(上下編)에서 "처음의 가를 어찌 스스로 그것이 가임을 모를까. 오직 그것이 오래되면 처음의 가를 잊어버리고 죽을 때까지 이것을 사용하여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습(假習)이 형성되면 양지는 말살된다고 했다. 또한 송시열(宋時烈) 등의 횡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공격한다. "속으로 칼과 칼날을 맞내이나 겉으로는 노린내나는 골로 달리며, 나와서는 찡그렸다 폈다 하면서 공맹(孔孟)은 세상을 구제하기가 급했다 하고, 교만하게 스승의 도가 그렇다고 한다…… 온 세상사람의 입을 막고, 언론의 자유를 속박할 뿐만 아니라, 항의도 할 수 없게 한다.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지 못하고서 그들의 하는 바를 예뻐하고 본받아 배우며 오직 못났다고 두려워하면서 물끄러미 보고 즐겁게 무리가 되어 부끄러워할 줄을 모른다"고 하여 노론(老論)의 전제주의를 비판했다. 이건방의 원론(原論) 이건방은 이충익의 고손으로 그의 〈원론〉 상·중·하와 〈속원론 續原論〉을 보면, "이른바 도와 의(義)는 반드시 참된 도와 의가 아니다. 만약 가심(假心)으로부터 나와서 높은 이름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도를 도적질하고, 의를 해침에 알맞을 것이다"라고 했으며, 또 송시열당의 가대의설(假大義說)을 다음과 같이 공격했다. "우리나라 중엽에 한 큰 선비가 있었는데, 처음 나올 때는 총명하고 글을 잘하여 넉넉히 사람을 감동케 하고 나라가 무사할 때를 만나 유술(儒術)을 높이고 권장하여 배우는 것이 조광조·이황·성혼·이이의 뒤를 이어 오로지 정주(程朱)를 숭상하여 그 반대론자를 물리쳤다.……헛된 이름이 융숭하니 흡족하고, 지위가 날로 높아지니 굳게 자기에게 붙는 자와 결탁하여 당파를 만들어서 자기에게 붙지 않는 자를 배척하여 그 말이 조금이라도 다른 자라면 반드시 주자(朱子)를 끌어다가 그 말을 꾸며서 이를 공격하되 주자를 배반한 죄인으로 삼았다." 그는 주자를 이용하여 반대파를 말살한 송시열의 행동을 두고 가주자학도(假朱子學徒)·가춘추대의론자(假春秋大義論者)라고 공격했다. 이는 양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모두 가라고 한 이들 조선 양명학자의 특색을 짐작하게 한다. 성령주의 시문 성령주의(性靈主義)는 도문일치(道文一致)를 주장한 고문파(古文派)를 반대하고 개성주의적 문학을 주장한 이탁오의 동심설(童心說)을 기폭제로 하여 원중랑(袁中郞)의 공안파(公安派) 문학이론이 되었다. 이러한 문학정신은 우리나라의 허균·박지원·박세당(朴世堂)으로 이어졌다. 박세당은 "문득 사람의 성령(性靈)을 증가한다"고 했으며, 정제두의 문인 신대우(申大羽)는 이광려(李匡呂)에 대하여 "그 문장은 성령을 발휘하여 충원(沖遠)함을 이루었다"라고 했다. 또한 이충익도 〈이참봉집발 李參奉集跋〉에서 "문장을 지을 때 앞 사람들의 형식을 사용하지 않고, 시세(時世)에 구애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한 것은 즉 문장형식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탁오가 "동심에 감동된 것이 있다면 스스로 문장이 된다"하고, 원굉도(袁宏道)가 홀로 성령을 서술하되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자기의 가슴 속으로부터 흘러나지 않는다면 붓을 들지 않는다"고 한 것이 바로 성령주의 문학정신이다. 성령주의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말한 문학정신에도 나타나며 김정희(金正喜), 문인 장지완(張之琓), 최성환(崔煥)·정수동(鄭壽銅) 등 중인층으로 확산되었다. 장지완은 시라는 것은 도사성령(陶寫性靈)이라고 했고 최성환은 방대한 〈성령집 性靈集〉이라는 시평문을 편집하여 "근체시(近體詩)가 성령을 얻음에 가장 가까운 까닭이다"하고, "성령을 오로지 하고, 격조를 뒤로 미루며 기백을 버리기로 했다"고 했으며, 정수동도 "가장 영롱한 곳에 성령이 나타나며, 깊은 공부를 쌓지 않고는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것은 김정희의 "시인은 자기의 성령에 가까운 것을 따를 일이요, 한 가지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한 성령에 근거한 것이다. 성령주의란 양명학 좌파의 이탁오의 영향을 받는 공안파의 문학이론인데, 이러한 문예사조가 우리나라의 양명학 수용과 함께 다른 학파에까지 파급되었다. 공안파 만력기(萬曆期, 1573∼1619)에 문학은 동심(童心)의 소산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모든 봉건적 권위와 도덕을 무시한 이지(李贄)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당시의 복고파(復古派) 문학에 도전했던 문학집단의 명칭이다. 이 명칭은, 대표 기수였던 원종도(袁宗道) ·굉도(宏道) ·중도(中道) 3형제의 출신지가 후베이성[湖北省] 궁안현[公安縣]이었던 데서 생긴 것이다. 그들은 당시의 복고파가 케케묵은 느낌인 데 비해서 성당(盛唐)의 시가 오히려 신선한 것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성령(性靈)에 그 바탕을 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그러한 성령의 발로와 풍운(風韻)의 표출을 낭만주의적 문학론의 밑바닥에 깔고, 실제 창작에 있어서도 평이하고 명석하며 청순한 필치로 개성적인 자아표현에 힘쓰는 반면, 옛 사람들이 하던 낡은 생각을 그대로 답습하는 일을 철저히 거부하였다 이지(李贄, 1527년~1602년) 중국 명나라의 양명학 좌파에 속하는 사상가이다. 처음에 대지(戴贄)라 하고, 탁오(卓吾)라 호 하였다. 천주(泉州) 진강현(晋江縣-현재의 푸젠 성에 속함) 사람이다. 그의 관직 생활은 허난 성·베이징·난징의 하급관리 및 남경 형부원외랑(南京刑部員外郞)을 거쳐, 51세 때에 윈난 성 요안부(姚安府)의 지부(知府)가 되었다가 54세에 그만둔 것이 전부이다. 회교도였던 그의 성격은 지극히 독존적인 인품으로 시비를 즐겨 도전적·전투적이었다. 더욱이 기행(奇行)을 좋아하고 반유교적(反儒敎的)·파괴적 언사를 써서 당시 모순 많은 명대 사회에서 압도적인 인기를 모았다. 따라서 당시의 부패한 관료층의 탄압을 받아 체포되어 그는 자살하였다. 그는 왕양명과 왕용계를 도를 얻은 진인(眞人)의 불사자(不死者)라고 준숭하였다. 그의 사상에 있어서의 〈동심설(童心說)〉이라든가, 역사 비판에 있어서의 선악·현부(賢否)의 상대화 등은 양명학의 발전임과 동시에 불교나 노장사상의 영향도 받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지의 저작으로 전 6권이며 《속분서(續焚書)》 5권이 부가되었다. 이 저서는 이탁오가 관직을 그만두고 허베이 성 황안현(黃安縣)의 경정향(耿定向)의 처소에서 기거하다가 사상적인 대립으로 절교한 후 마성현(麻城縣) 용호(龍湖)의 지선원(芝仙院)에 거주하고 있던 시절(59세 이후)의 십여 년 동안 써놓은 서간·수필·시 등을 수집한 문집이다. 이 저서 중에서 대표적 논문은 제3권에 수록되어 있는 〈동심설(童心說)〉이다. 동심이 상실되는 것은 문견(聞見)이 밖으로부터 들어와 안의 주인이 되고 도리(道理)가 들어와서 안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특히 그 도리를 부정적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그의 입론에서 본다면, 음란을 가르치는 《서상기(西廂記)》라든가 도둑을 가르치는 《수호전(水滸傳)》과 같은 속문학(俗文學)이 고금의 지문(至文)이며, 6경(六經)·《논어(論語)》·《맹자(孟子)》는 도학자들의 구실로서 위선자를 만드는 본원이라고 한다. 이 외에 《분서》에는 “사람이 각각 생지(生知)를 소유하고 각인이 다 부처가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卷一 答周西嚴), “의복을 입고 밥을 먹는 것. 이것이 인륜의 물리(物理)이다”(卷二 答鄧石陽)등 독자적이면서 자유로운 견해가 많이 제시되어 있다. 이지의 대표적 저작으로서 전68권, 《속장서(續藏書)》 27권이 부가되어 있다. 《분서》가 그의 문집으로 잡다한 것을 수집한 것에 비하여 이 책은 전국 시대에서 원대(元代)까지를 기록한 기전체(紀傳體)의 종합 역사서이다. 이것은 이탁오가 지선원에 체류하고 있었던 시절의 십수년 동안에 저술한 것이다. 서두의 〈장서 세기열전 총목전론(藏書世紀列傳總目前論)〉에 보이는 것처럼 시비선악에는 정체(定體)가 없고 전부 상대적·병존적이라고 한다. 이 입장은 장자(莊子)의 사상과 많이 비슷하다. 〈세기총론(世紀總論)〉, 〈덕업유신론(德業儒臣論)〉 및 〈후론(後論)〉, 기타 이 책 전반적인 논조는 무위(無爲)·무사(無私)에의 반론과 공리의 주장이라든가 전통적 가치관·규범의식에의 반발과 송유도통론(宋儒道通論)의 부정 등 종래의 사서(史書)인 《사기(史記)》, 《자치통감(資治通鑑)》, 《통감강목(通鑑綱目)》에 있어서의 춘추학적(春秋學的) 발상을 무시하였다. 매우 자유분방하고 독창적인 견해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원굉도 [袁宏道, 1568~1610] 중국 명나라 말기의 문학자. 국자감조교(國子監助敎), 이부계훈시랑(吏部稽勳侍郞) 등을 역임했다. 고문사파(古文辭派)에 의한 의고운동(擬古運動)에 반대해 시의 진수(眞髓)는 개성의 자유로운 발로이며 격조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호 석공(石公). 자 중랑(中郞). 후베이성[湖北省] 공안현(公安縣) 출생. 형 종도(宗道), 아우 중도(中道)와 함께 3원(三袁)으로 일컬어지며, 출신지 이름을 따서 공안파(公安派)로 불린다. 25세 때 진사에 급제하여 오현(吳縣)의 지현(知縣)으로 치적을 올렸으며, 그후 국자감조교(國子監助敎)·예부의제사주사(禮部儀制司主事)·이부계훈시랑(吏部稽勳侍郞)을 역임하였다. 형제들과 함께 이지(李贄)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반전통·반권위 사상의 감화를 받았고, 왕세정(王世貞) 등의 고문사파(古文辭派)에 의한 의고운동(擬古運動)에 반대하여 시의 진수(眞髓)는 개성의 자유로운 발로이며 격조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원래가 문인기질이어서 평속(平俗)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나, 평명(平明)하고 경묘한 시문은 북고의 풍조 속에 청신한 기풍을 도입하여 종성(鍾惺) 등의 경릉파(竟陵派)나 청나라 원매(袁枚)의 성령설(性靈說)의 선구가 되었다. 저서에 《원중랑집(袁中郞集)》(40권)이 있다. 이언진 [李彦?, 1740~1766] 본관은 강양(江陽)이며 자는 우상(虞裳), 호는 송목관(松穆館)·창기(滄起)이다. 대대로 역관(譯官)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났다. 실학의 대가 이가환(李家煥)의 아버지인 이용휴(李用休)에게 수학하였다. 1759년(영조 35) 역과(譯科)에 합격하여 사역원주부가 되었고, 1763년 통신사(通信使) 조엄(趙?)을 수행하여, 일본에 다녀왔다. 어려서부터 시문과 서예에 능하여 스승 이용휴에게 영이적 천재(靈異的天才)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성당(盛唐)의 시풍(詩風)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27세로 요절(夭折)하였는데, 죽기 전 모든 초고(草稿)를 불살라 버려 남아 있는 작품이 많지 않으나, 초고를 불사를 때 그의 아내가 빼앗아 둔 일부 유고(遺稿)가《송목관신여고(松穆館燼餘稿)》라는 이름으로 편집되어 전한다. 생전에 그를 문전박대(門前薄待)했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사후에 그를 애도하며 한문소설《우상전(虞裳傳)》을 쓰는 등 그에 대한 몇 편의 전기(傳記)들이 있을 뿐이었는데, 2008년 한성대학교 지식정보학부 강순애 교수가 그의 친필 서첩《우상잉복(虞裳剩馥)》을 발견하였다. 왕세정 [王世貞, 1526~1590] 가정 칠재 자(嘉靖七才子:後七子)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학식은 그 중에서도 제1인자였던 중국 명나라의 문학자. 명대 후기 고문사(古文辭)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격조를 소중히 여기는 의고주의(擬古主義)를 주장했다. 주요 저서에는 《엄주산인사부고(?州山人四部考)》등이 있다. 자 원미(元美). 호 봉주(鳳州) ·엄주산인(?州山人). 장쑤성[江蘇省] 타이창[太倉] 출생. 1547년 진사가 되고 형부(刑部)의 관리가 되었으나, 강직한 성격 때문에 당시의 재상 엄숭(嚴嵩)의 뜻을 거역하였다. 엄숭이 구실을 만들어 고도어사(古都御史)인 그의 아버지를 사형시키자, 벼슬을 그만두고 아버지의 무고함을 주장하여 8년간이나 노력한 끝에 명예를 회복시켰다. 그 뒤 다시 지방관에 복귀하였고, 난징[南京]의 형부상서(刑部尙書)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젊을 때부터 문명이 높아 가정칠재자(嘉靖七才子:後七子)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고, 학식은 그 중에서도 제1인자였다. 후칠자의 맹주격인 이반룡(李攀龍)과 함께 이왕(李王)이라 불려 명대 후기 고문사(古文辭)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이반룡이 죽은 뒤에는 그 지위를 독점하였다. 격조를 소중히 여기는 의고주의(擬古主義)를 주장하였으나, 이반룡이 진한(秦漢)의 글과 성당(盛唐) 이전의 시만을 그대로 모방한 데 비하여 왕세정은 상당히 유연한 태도를 취하였다. 만년에는 당나라의 백거이(白居易)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송(宋)나라의 소동파(蘇東坡) 등의 작품에도 심취하였다. 그는 《엄산당별집(嚴山堂別集)》 등 많은 역사 관계 논문을 남겼다. 《엄주산인사부고(?州山人四部考)》(174권) 《속고(續稿)》(207권)는 그의 전집이며, 문학 ·예술론은 《예원치언(藝苑?言)》에 수록되어 있다. 중국 4대기서(四大奇書)의 하나로 알려진 《금병매(金甁梅)》가 그의 작품이라는 설이 있고, 희곡으로는 《명봉기(鳴鳳記)》가 유명하다 의고파와 당송파의 창작이론 차이에 대해 의고파와 당송파의 창작이론을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원굉도를 언급해야합니다. 원굉도의 스승은 ‘분서’의 지은이 이탁오입니다. 이탁오는 알다시피 양명좌파입니다. 그는 주자학이 말하는 절대진리 ‘리(理)’를 해체하고 거부했습니다. 어떤 초월적 원리와 중심도 인정하지 않는 이탁오의 사상이 문학으로 전화(轉化)한 것이 원굉도의 문학비평입니다. 원굉도 이전 중국 문단에은 진(秦)나라 이전의 산문과 한(漢)나라의 산문을 전범으로 삼아 산문을 창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파, 곧 의고문파(擬古文派)가 있었습니다. 의고문파가 문단을 휩쓸자, 이에 반대해 당나라와 송나라의 산문을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유파, 당송파가 등장했습니다. 당송파의 주장은 의고파의 주장에 비해 설득력이 있었지만, 이 역시 당·송 산문이란 전범을 설정한다는 점에서는 의고파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여기에 이탁오 사상의 세례를 받은 원굉도가 등장한 것입니다. 원굉도는 숱한 비평문에서 절대적 전범은 존재하지 않으며, 문학은 오로지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사유와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이탁오가 절대진리 ‘리’를 부정했듯, 그는 절대전범의 설정을 부정했던 것입니다. 이로써 문학의 언어는 이제 고전의 압력으로부터 해방됐던 것입니다. 이용휴 1706(숙종 34)~1782(정조 6). 당대의 문장가로서 초야에 머문 선비였으나 남인계의 문권을 30여 년 간 주도했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추종을 받았다. 본관은 여주. 자는 경명(景命), 호는 혜환재(惠?齋). 기(沂)의 아들이며, 실학의 대가 가환(家煥)의 아버지이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숙부인 이익의 실학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아 다시 과거를 보지 않고 문학에 전념했다. 뒤에 음보(蔭補)로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주자학의 구속을 그 이전에 있었던 경전에 입각하여 부정했으며, 문학을 영달을 위한 수단이 아닌 그 자체의 진실을 추구하려는 것으로 보았다. 경전에 모범을 두고 고인지법(古人之法)에 맞는 문장을 이룩하고자 했으나, 자기 노선을 철저하게 다지지는 못했다. 전대의 전(傳)의 전통을 이으면서 일사(逸士)와 하층민의 삶을 긍정적으로 다룬 〈해서개자 海西?者〉 등의 작품을 남겼다. 저서로는 〈탄만집 集〉·〈혜환시초〉·〈혜환잡저〉가 있다 왕양명 1472 중국 저장 성[浙江省] 여요(餘姚 : 지금의 항저우[杭州])~1529 장시 성[江西省] 난안[南安]. 본명은 수인(守仁). 자는 백안(伯安), 호는 양명. 시호는 문성(文成). 심성론(心性論)으로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철학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관리로서 굴곡이 많은 세월을 보내기는 했지만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워, 그가 다스리던 지역은 100여 년에 걸쳐 평화를 누렸다. 양지(良知 : 선악을 구분할 줄 아는 마음)가 바로 천리(天理 : 세상의 올바른 이치)라는 그의 주장은 12세기에 활약한 성리학자 주희(朱熹)의 "각각의 사물에 그 이치가 있다"라는 주장과는 정면으로 대립한다(→ 성리학). 왕양명의 주장은 전통 유교사상과 어긋난다는 인식 때문에 한동안 사학(邪學)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중국철학). 초기생애와 지적 편력 그는 정부 고관의 아들로 태어나 15세에 변방의 진(鎭)인 용삼관(庸三關)으로 가서 궁술(弓術)을 익혔다. 결혼식날 불로장생의 술법인 양생술(養生術)에 대해 도사와 토론하는 데 열중하여 결혼 초야를 도교사원에서 보내고 말았다. 1492년 성시(省試)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다. 베이징[北京]에 있던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위대한 성리학자 주희의 가르침대로 대나무 앞에 조용히 앉아서 그 이치를 찾아내려 했으나 1주일의 명상 끝에 병에 걸렸을 뿐 별 소득이 없었다. 1493, 1495년의 전시(殿試)에 떨어진 그는 병법 연구와 도가의 양생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1499년 마침내 전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공부주사(工部主事)에 임명되었다. 황제에게 국경의 수비·전략·행정 등에 관한 8개 조항의 정책을 상소하여 일찍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1500년 형부주사(刑部主事)에 임명되었고, 1501년 난징[南京] 부근에 있는 감옥의 죄수기록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많은 부조리를 시정했다. 1502년 그는 건강이 나빠져서 양명(陽明) 계곡에서 정양했는데 이때 도가의 도인술(導引術)을 수련한 듯하다. 산둥[山東] 지방의 과거시험을 감독했고 이어 병부주사(兵部主事)가 되었으며, 1505년경부터 학자들이 그의 문하에 몰려들었다. 유교의 성인(聖人)이 되는 데에는 성인이 되고자 하는 결심이 중요하다고 가르쳤고, 경전을 암송하고 화려한 문장을 써내는 일 등을 비난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그가 인기전술을 쓴다고 매도했으나, 존경받는 학자·관리였던 잠약수(湛若水) 같은 사람은 그의 학설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친구가 되었다. 1506년 그의 신상에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큰 권력을 쥐고 있던 부패한 환관(宦官) 유근(劉瑾)을 탄핵하다가 투옥된 한 검열관을 옹호하여, 그 자신도 40대의 곤장을 맞고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혔다. 그후 구이저우 성[貴州省] 룽창[龍場]의 역승(驛丞)으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 토착민들과 함께 살았는데 자주 병에 걸렸다. 이같은 질병과 고독 속에서 36세가 되던 해의 어느날 밤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이를 룽창의 大悟라고 함). 즉 천리를 탐구해나가는 데 있어 주자의 이론에 따라 실재하는 사물에서 이(理)를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良知) 속에서 그 이치를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이렇게 하여 왕양명은 12세기의 철학자 육구연(陸九淵)이 처음 주장하기 시작했던 심성론(心性論)을 완성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육왕학파). 정치적·군사적 경력 1509년 왕양명은 또다시 획기적인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제창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은 효도를 실제로 행하고 있을 때에만 비로소 효도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바른 앎이 있어야만 바른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식론). 1510년 장시[江西]의 지방관이 되어, 10가구씩을 묶어 서로의 행위에 대해 연대책임을 지게 하는 '10가패법'(十家牌法)을 실시하는 등 많은 개혁안을 시행했다. 그뒤 형부와 도찰원(都察院) 등에서 근무한 후 1516년 장시의 지사(知事)가 되었다. 장시 지방에는 수십 년 동안 비적(匪賊)과 반도(叛徒) 들이 들끓고 있었다. 왕양명은 1517~18년 4차례에 걸친 토벌전을 벌여 이들을 소탕했다. 그는 복구사업, 세제 개혁, 서원 설립 등을 추진했고, 부락민들의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향당의 규약인 남공향약을 만들었다. 1519년 푸젠[福建]의 반란을 진압하러 가던 도중에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고 그의 근거지인 난창[南昌]을 포위했다. 4일 뒤에 신호와 교전하여 그를 사로잡았다. 왕양명은 신호와 전부터 교유가 있었기 때문에, 베이징의 시기심 많은 관리들은 왕양명이 모반을 꾀하고 있으며 관군이 진격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신호를 공격했다고 모함했다. 그러나 협상을 위해 찾아간 왕양명의 문하생을 신호가 투옥하는 일이 벌어지자 모함이 사라지고, 왕양명은 다시 장시 지사에 임명되었다. 1521년 새로 등극한 황제 가정제(嘉靖帝 : 世宗)는 그를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임명하고 신건백(新建伯)에 봉했다. 1522년 그는 아버지의 상(喪)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가 3년 동안 상중에 있었으며, 5년 이상을 고향에 머물면서 중국 각지에서 찾아온 수백 명의 문하생들과 함께 도에 대해 토론했다. 이때에 나눈 대화와 그 이전의 대화들을 하나로 엮은 것이 〈전습록 傳習錄〉이다. 1521년 그는 치양지(致良知 : 마음 속에 있는 양지를 다 발휘함)에 대해 처음으로 가르쳤다. 1527년 6월 광시[廣西]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고 6개월 만에 그 반란을 평정했으나, 수년 동안 고통을 받아온 천식이 도져 중태에 빠졌다. 그는 1529년 개선하여 돌아오던 중 장시의 난안에서 죽었다. 세력 있는 대신이 그를 미워했기 때문에 그의 작위와 세습봉록이 박탈되어 그의 두 아들은 전혀 혜택을 받지 못했다. 이 조치에 항의한 사람들은 파면되거나 유배당했으며, 또한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도 철저히 금지되었다. 그가 죽은 지 38년 후에 새로 등극한 목종(穆宗)이 그에게 신건후(新建侯)의 작위와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584년초에는 공자묘에 배향되는 최고의 영예를 얻었다. 왕양명의 철학은 150여 년 동안 중국 전역에 널리 퍼졌으며, 그는 2,000여 년에 걸친 중국 철학사에서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문체반정 문체를 정통고문(正統古文)으로 되돌리려 한 운동. 조선 후기 박지원을 비롯한 진보적 문인들이 정통적인 문체를 벗어나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를 구사해 글을 쓰자 정조(正祖)를 비롯한 보수파가 이를 바로잡으려 한 것을 말한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熱河日記〉가 당시 문단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읽히자, 이러한 패사소품체가 확산될 것을 염려한 정조는 명청(明淸) 소설의 수입을 금지하고 박지원에게 순정고문(醇正古文)으로 글을 지어 바치게 했다. 당시의 문풍(文風)과 연암체의 성립 조선 후기는 봉건사회가 해체되면서 여러 변화를 겪게 된다. 농촌사회가 분화되고 상공업과 도시가 발달했으며 민중들의 의식도 변화했다. 이때 박지원을 비롯한 당시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고금(古今)의 치세(治世)와 난세(亂世)의 원인, 제도개혁, 농공업의 진흥, 화식(貨殖) 등 사회경제적인 개혁방안을 토론했고, 중국여행 체험을 글로 써서 돌려보기도 했다. 홍대용·이덕무·박제가·유득공·이서구·정철조 등이 박지원의 집에 모여 밤을 새워 당시 현실문제를 논의하고 학문적·문학적 교류를 함께 했다. 그들이 특히 흥미를 가졌던 것은 청나라 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읽는 것이었다. 그중 〈열하일기〉는 다채로운 표현양식과 독특한 문체를 구사해 당시의 화제작이었다. 박지원의 문체는 독특해 연암체(燕巖體)라고 불렸다. 연암체의 특징은 소설식 문체와 해학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정통 고문에 구애되지 않고, 소위 패사소품체라고 불리던 소설식의 표현방법을 과감히 도입해 쓰고 현실의 생동하는 모습을 묘사했으며 시어(詩語)의 사용이나 고답적(高踏的)인 용사(用事)는 쓰지 않았다. 정조의 문학관과 문체반정책 정조는 문체의 흥망성쇠는 정치현실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세도(世道)를 반영한 글을 읽으면 당시 정치의 득실(得失)을 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문학은 도(道)를 실어나르는 도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당시의 문체가 위미(萎靡)하여 근심스럽다고 하면서 문체 문제에 크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정조는 육경(六經)을 진짜 고문(古文)이라고 하면서 그 정신을 이어받아 전아(典雅)한 고문으로 글을 지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정조는 연암 일파의 문체를 못마땅히 여기고 문풍을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문화정책을 펼쳤다.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해 각신(閣臣)에게 당시의 문운(文運)을 진작시키는 정책을 시행하도록 했고 주자서(朱子書)를 비롯해 학문과 문학에 본보기가 될 만한 책들을 간행하는 한편 명청의 문집과 잡서(雜書) 그리고 패관소설의 국내 유입을 금했다. 또 문체가 불순한 자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했고 남공철·이상황·김조순 등을 문체 불순으로 문책했으며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바치도록 했다. 이 문화정책은 당시의 전통적인 순정(純正) 문학의 전통을 계승하고, 치세(治世)의 문학을 꽃피우는 데는 어느 정도 기여를 했지만, 당시의 변화하는 현실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정조의 문체반정책에도 불구하고 패사소품체는 더욱 확산되어, 소설적 문체와 사실주의적 표현기법의 작품이 계속 인기를 끌게 되었다. 문체반정은 당시 사상의 발전과 문인들의 창작활동을 억압하는 보수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시대의 흐름을 되돌리려 한 문화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양명좌파 왕수인의 제자들 가운데 온건파를 양명우파, 급진파를 양명좌파라 일컫는 것이 보통이며, 양명좌파의 대표적인 인물들로 왕기(王畿: 1498-1583), 왕간(王艮: 1483-1540), 하심은(何心隱: 1517-1579), 나여방(羅汝芳: 1515-1588) 등이 있다. 왕기는 왕수인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뒤 강남 지방에서 40년 동안 강학 활동을 펼쳤다. 사대부는 물론이고 농민, 상인, 공인의 문하생들도 많았다. 그는 양지의 자연스런 발현을 강조하여, 별다른 수양이나 공부 없이 내 마음 속에 양지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때문에 왕기에 이르러 양지는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佛性)과 비슷한 것이 되어버렸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왕간은 염전 노동자 출신의 상인이며, 왕기와 마찬가지로 양지의 자연스런 발현을 강조했으나 독서와 체험에 의한 학문의 필요성도 긍정했다. 왕간은 자신에게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 신분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으며, 농민들을 대상으로 강학 활동을 펼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신분귀천을 가리지 않고 대중들이 모여든 유교 강학은 유교사 전체를 통틀어 왕기, 왕간에 와서 최초로 이루어졌다. 한편 하심은은 욕망이 인간의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강조했고, 특히 사사로운 욕망이 아닌 공적인 욕망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그밖에도 북송 시대 장재의 사해동포주의 사상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나여방은 양지를 갓난아기의 순수한 마음과 결부시켜, 갓난아기의 자연스런 친애의 마음이 인이며, 그러한 인을 기르면 도덕이 된다고 보았다. *희대의 반항아 이지 탁오(卓吾)라는 호로 보다 널리 알려져 있는 이지(李贄: 1527-1602)는, 조상이 무역상이었으며 아버지는 이슬람교도였다. 과거에 합격하여 미관말직을 전전하다가 54세 이후부터는 관직 생활을 접고 절에서 십여 년 동안 저술 활동에 힘썼다. 당시 저술한 {분서}(焚書)가 물의를 일으켜 도망자의 생활을 했고, 결국 체포되어 옥중에서 76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이지는 왕간, 왕기, 하심은 등의 영향을 받아 40대 중반에 왕수인의 책을 처음 접했고 이후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심설 태어남과 동시에 갖추고 있는 도덕심이 왕수인이 말하는 양지임을 이미 거론한 바 있다. 그런 입장을 한 단계 더 밀고 나가면 양지는 이미 완성된 형태로 마음 안에 갖추어져 있으며, 별다른 수양이 필요 없이 그저 타고난 바 그대로를 놓아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된다. 이지의 동심설(童心說)이 바로 그런 주장에 가깝다. 이지가 말하는 동심은 거짓이 없는 순수한 진심을 뜻한다. 이지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동심을 지니지만, 보고 들으며 경험을 쌓아나가면서, 특히 책을 읽어 이치를 알아나가면서 동심을 상실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이지는 입만 열면 인의를 말하면서도 명예와 지위만을 추구하는 사대부들의 위선을 무척 싫어했다. 그는 심지어 유교 경서의 말도 동심의 말이 아니며, 시대를 불문한 진리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문학에 대해서도 그것이 동심의 발로라면 어떤 시대, 어떤 문장이라 해도 높은 가치를 지닐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그는 {수호전}과 같은 명대 당시의 소설을 {시경}에 견주기까지 했다. *인욕의 긍정 이지는 '옷을 입고 밥을 먹는 일상의 일 자체가 바로 인륜이자 사물의 이치'라고 보았다. 인간의 윤리 도덕은 성인의 가르침이나 그 가르침을 담은 경서에 따른 것이 아니라, 밥 먹고 옷 입는 일상의 모든 것에 따른 것이다. 이지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사욕이 없으면 사람의 마음도 없을 것이다. 수확하려는 사욕이 있기에 밭을 갈고, 녹봉을 받으려는 사욕이 있기에 관리가 되고자 애쓴다. 요컨대 사욕은 당연한 이치이다. 사욕을 부정하는 도덕론은 문자 그대로 그림 속의 떡과 같다.' 메모: 강소성 태주 출신인 왕간은 태주학파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하심은, 나여방이 모두 태주학파에 속하며, 태주학파는 양명좌파와 사실상 동일시된다. context: 문맥, (문장의) 전후 관계; (어떤 일의) 정황, 배경, 환경 어록체: 한문으로 씌어진 산문 문체의 하나. 기교와 형식을 지나치게 중시한 변려문(騈儷文)에 반발하여 진한(秦漢) 이전의 순정한 문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상에 따라 지어진 글이다. 당대(唐代)에 유행한 변려문은 현실을 반영하거나 사상과 감정을 나타내는 것을 외면하였고 꾸밈이 많았다. 이에 한유(韓愈)를 중심으로 한 고문운동가들은 순정한 고문으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유가 주장한 것은 고문을 모범으로 삼아 창조적인 문장을 구사하자는 것이었고, 옛사람의 진부한 말을 답습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목적은 공자의 도덕인의(道德仁義)를 보호하고 사설(邪說)을 막으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평이한 문언문(文言文)을 썼으며, 이는 모방이 아니라 새로운 풍격을 갖춘 당시의 문장을 내세운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후대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게 이어져 고문운동의 주된 줄기를 이루게 된다. 한편 이와 다른 줄기를 이룬 고문운동가들로 복고(復古)에만 치중한 문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명나라에 와서 하나의 풍조를 이루었으며, 문장은 반드시 진한의 것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여 일명 '의고문파'(擬古文派)라고 불린다. 고문운동은 시대마다 내세운 바가 조금씩 달랐으나 당시(唐詩)의 병폐를 극복하여 그 시대에 적합한 문장을 쓰자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송나라 때에 구양수(歐陽修) 등이 고문을 씀으로써 고문은 변려문을 완전히 압도하였고 이후 문어체 산문의 주류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고려시대에는 〈문선 文選〉의 영향을 받아 변려문이 성행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고, 조선시대에 와서도 완전히 고문 만이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한문학). 고문이 본격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고려말의 이제현(李霽賢)에서 시작되며, 그는 당송시대의 고문을 모범으로 삼았다. 나아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명나라와의 잦은 교류에 힘입어 고문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크게 '의고문파'와 당송고문을 위주로 하는 '당송고문파'로 나눌 수 있다. 이제현이 제창한 고문은 제자인 이색(李穡) 등이 정주학(程朱學)에서 즐겨 쓰는 어록체(語錄體)와 주소체(註疎體)를 혼용하여 차츰 고문의 본령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선 중기의 최립(崔笠)이 명나라 의고문파의 고문이론을 수용하여 의고문을 쓰기 시작했고, 그밖에 윤근수(尹根壽)·신흠(申欽)·신유한(申維漢)·허목(許穆) 등도 영향을 받았다. 의고문파는 조선 중기까지 상당한 세력으로 문단을 지배하였으나 복고를 위한 모방에만 치우쳐 독창성이 떨어진 편이었다. 이와 달리 개성을 중시하면서 고문을 완성시킨 문인들이 있었는데, 허균(許筠)·장유(張維)·이식(李植)·김창협(金昌協)·박지원(朴趾源)·홍석주(洪奭周)·김매순(金邁淳)·이건창(李建昌)·김택영(金澤榮)·이남규(李南珪) 등이 이에 속한다. 이중 허균은 의고문을 반대하는 고문이론을 전개하여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고문론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당송고문의 진정한 가치는 복고에 있지 않고 자기 시대의 문체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시대의 일상어를 갈고 다듬어서 사용하는 것이 참다운 고문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고문관을 이어 보다 혁신적인 내용과 다양한 표현을 구사한 이가 박지원이다. 그는 문은 반드시 진한의 것을 따르고 시는 반드시 성당풍(盛唐風)을 따라야 한다는 의고문파들을 배척하고,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는 새롭고 개성적인 문학을 주장하여 금문(今文)이 곧 고문임을 내세웠다. 홍석주·김매순은 금문을 써야 한다는 점에서 박지원의 고문관과 비슷하며, 이건창과 김택영은 모방과 표절을 배격하고 개성있는 문장을 강조하였다. 우리나라의 고문은 중국의 영향으로 시작되었으나, 우리 민족 고유의 생활과 감정이 배어든 문장이라는 점에서 독자적이라 할 수 있다. 또 조선 후기 고문가들에 이르면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고문에서 산문문학의 정점을 발견할 수 있다. 고문은 언문(言文)이 일치되지 않은 한계로 갑오개혁 이후로 없어졌으나, 근대적 산문의식은 신소설 등에 긍정적으로 계승되었다. [우상전] 조선 후기에 박지원(朴趾源)이 지은 한문단편소설. 영조 때에 역관인 우상(虞裳) 이상조(李湘藻, 일명 李彦? 이언진)가 죽자 그의 행적과 남긴 시를 모아 엮은 열전체(列傳體)의 변체(變體)이다. ≪연암별집 燕巖別集≫ 방경각외전(放?閣外傳)에 실려 있다. 그러나 끝부분이 떨어져 나가서 전하지 않는다. 〈우상전〉은 우상이 죽은 1766년(영조 42) 이후에 쓴 작품이다. 1763년에 일본이 사신을 청하므로 조정에서는 3품 이하의 문신들을 뽑아 삼사(三使)를 갖추고 수행원을 딸려 보냈다. 우상은 한어 역관으로 따라가서 문장으로 그들을 놀라게 한다. 우상은 늘 자기의 문장을 알아줄 사람이 없음을 한스러워 하였다. 우상은 박지원과는 만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자주 아는 사람을 통하여 새로 지은 시를 보여주던 사이이다. 작자는 우상의 시가 뛰어남을 알고서도 혹평을 하여 그가 더욱더 분발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우상은 자기의 단명을 예견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지은 글을 불태운 뒤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박지원은 자기의 상자를 뒤져서 우상의 글을 찾아 〈우상전〉을 꾸몄다고 한다. 작자는 〈방경각외전〉 자서에서 “아름답다 우상이여, 고문을 배워 문장을 이루었도다. 예(禮)가 없어지면 야인에게서 구하는 법, 향수(享壽)는 짧았으나 남긴 것은 길도다.”라고 찬탄하였다. 이 말에서 야인인 우상의 시가 어떠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시가가 삽입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상전〉의 내용 사이사이에 일본의 허영, 한국인의 밀수행위, 임관 후에 일본에 다녀온 무능한 사신 등을 슬며시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나라의 명예를 빛내고 붓으로 산하를 움직일만한 탁월한 재주를 가진 우상이 이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입전(立傳)한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서류(庶類)들이 뜻을 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담아 사회적 부조리를 대변한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서도 박지원의 인본주의정신을 읽을 수 있다. metaphor:은유(隱喩, metaphor)는 직유보다 한 단계 발전된 비유법으로 사물의 본 뜻을 숨기고 주로 보조관념들만을 간단하게 제시한다. 직유법에서처럼 '~처럼' '~듯' 등의 연결어는 쓰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 稗史小品體ㆍ 옛 사상이나 문체에서 벗어나 현실의 다양한면모와 각양각색의 인물군상을 생동감 있게 담은 새로운 문체 이옥 1760(영조 36)~1812(순조 12). 문체반정(文體反正)에 걸려 억압받고 불우하게 지냈다. 그러나 이단적인 문학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 한문단편에서는 박지원과 맞먹는 경지에 이르고, 민요시 개척에서는 정약용과 함께 가장 앞선 성과를 보여주어 한문학 혁신의 2가지 방향을 주도했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기상(其相), 호는 문무자(文無子)·매사(梅史)·매암(梅庵)·경금자(絅錦子)·화석자. 가계(家系)나 생애를 밝혀줄 만한 자료가 없으며, 지금 알려진 자료는 친구 김려의 문집 발문(跋文)과 지은이의 글뿐이다. 어렸을 때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30세 전후로 서울에서 성균관의 유생(儒生)으로 있었다. 박지원의 제자 세대로, 박지원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지는 않았으나 정조의 문체반정에 따르지 않았다. 실록(實錄)에는 이때 그가 소설문체를 써서 선비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었으므로 정조가 문체를 개혁한 뒤 과거를 보게 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과거에서도 문체를 고치지 못하자 그는 영남 삼가현(三嘉縣)에 이적(移籍)되었으며, 뒤에도 같은 문제로 다시 삼가현에 머물러야 했다. 그 뒤로는 본가(本家)가 있는 경기도 남양에서 저작활동에 힘썼다. 그는 유기론(唯氣論)의 사고체계를 갖고 가치의 원천을 이(理)가 아닌 기에서 찾았다. 그래서 성현의 도리나 고문(古文)의 규범을 벗어나 현실을 직접 경험하고 인식해야 진실에 이른다고 했다. 일상생활에서 겪은 바를 그대로 나타내면 고전적인 명문(名文)과 겨룰 만한 새로운 문학이 이룩될 수 있다고 했다. 이옥의 전(傳)은 23편으로 박지원의 작품보다 많고 등장인물과 사건이 훨씬 다양하다. 그 가운데 〈심생전 沈生傳〉은 사대부 잡안의 청년이 중인 계급의 처녀를 사랑하다가 둘 다 비참하게 된 사연을 다루어 신분질서에 대한 비판이 들어 있다. 〈유광억전 柳光億傳〉에서는 과거 답안지를 지어 파는 사람이 자기는 급제하지 못하는 처지를 다루면서 세상에 못 팔 물건이 없게 된 상황을 그렸다. 그밖의 작품들에서도 사기꾼, 협객, 기인, 가객, 여염집 아낙네 등을 주인공으로 삼아 세태와 인정의 다양한 모습을 그렸다. 박지원이 한정된 소재에 고도의 표현 능력을 발휘했다면, 이옥은 흔히 있는 이야기를 받아들여 수법보다는 내용이 앞서는 작품을 내놓았다. 구전설화와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면서 단편소설의 성향을 즐겨 받아들였다. 이옥의 시는 어떤 명분을 내세워도 합리화될 수 없을 정도로 관습에서 어긋났다. 남녀관계에 대한 민요를 한시(漢詩)로 옮긴 〈이언집〉에서는 〈삼난 三難〉이라는 제목의 긴 서문(序文)을 앞세워 자기는 조선사람이므로 중국풍의 국풍, 악부(樂府), 사곡(詞曲)이 아닌 이언을 짓는다고 했다. 하층민의 남녀관계를 여성적인 감각으로 노래하는 것이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했고, 우리말의 어휘와 어법을 대담하게 살려서 한문으로 새기면 말이 되지 않는 문구(文句)를 쓰는 등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한문으로 창작된 유일한 희곡 〈동상기 東廂記〉도 이옥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백화(白話)가 섞인 한문이라 읽기 어렵고 연극으로 공연할 수 없었다. 지은이의 다양한 취향을 알려주므로 흥미롭다. 허균 출생 1569년강릉 초당동 사망 1618년 허균(許筠, 1569년 음력 11월 3일~1618년 음력 8월 24일)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허균의 본관은 양천,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또는 성소(惺所)로 불렸고, 후에는 백월거사(白月居士)로도 불렸다. 광해군 때 반역을 도모하려했다는 밀고로 능지처참되었다. 허균은 1569년(선조 3년) 음력 11월 3일에 초당 허엽의 삼남 삼녀 가운데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허균은 아버지 초당 허엽의 둘째 부인인 강릉김씨 예조참판 김광철(金光轍)의 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아들이다. 그의 부친 초당 허엽은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동인의 영수가 되었던 인물로, 그의 나이 12세인 1580년(선조 13년)에 부친 허엽이 상주의 객관에서 별세하였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배우다가, 나중에 둘째 형의 친구인 손곡 이달(李達)에게서 배웠다.[1] 서자 출신으로 출세가 어려웠던 이달의 처지에 비애를 느끼고 홍길동전을 지었다 한다.그의 나이 17세 때인 1585년(선조 18년) 초시에 급제하고, 김대섭의 차녀와 결혼을 한다. 21세 때인 1589년 생원시에 급제를 한다. 24세 때인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을 피해 피난 중이던 부인 김씨가 단천에서 첫아들을 낳고 사망한다. 허균은 외가 애일당 뒷산의 이름을 따서 교산이라는 호를 사용하게 된다. 1593년(선조 26년) 그의 나이 25세 때 한국 최초의 시평론집인 《학산초담》을 지었었으며, 이듬해인 1594년(선조 27년)에는 정시을과에 급제하고, 1597년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를 한다. 그러나 1597년 황해도 도사가 되었으나 기생을 가까이 한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면당했다. 1604년(선조 37년)에 성균관 전적이 되고, 수안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불교를 믿는다는 다시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사퇴하였다.
1606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에 임명되자, 누이 허초희의 시선을 모아 명나라 사신으로 온 주지번에게 주어 그녀의 사후 18년 뒤에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출간되게 된다. 1607년(선조 40년) 삼척부사와 공주목사를 역임하고, 《국조시산》을 편찬한다. 그해 음력 5월 6일 숭불(崇佛)했다 하여 파직되었으나 얼마 뒤 내자시 정으로 임명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재위에 오르자, 이듬해 1609년(광해군 1년) 형조 참의가 되고, 다음해 명나라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얻어 왔다. 1610년 함열에 유배됐고, 1611년(광해군 3년) 문집 《성소부부고》64권을 엮었고, 1612년에는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저술한다.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 때 피화(避禍)하였다가 이듬해 1614년(광해군 6년) 호조참의가 되었고, 그해에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5년에도 문신정시에서 1등을 하고, 정2품 가정대부에 올라 동지 겸 진주부사가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다. 1616년(광해군 8년) 정2품의 형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1617년에는 길주에 유배됐다가 다시 정2품 좌참찬에 오른다. 1618년 기준격이 상소를 올려 허균이 왕의 신임을 얻은 것을 기화로 반란을 계획한다고 모함하고, 허균이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그의 심복들과 함께 능지처참형을 당해 생을 마감한다.[2] 1618년 8월 남대문 격문이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고 한다.[3] 그의 처형을 두고 당시 조정의 권신이었던 유희분이 죄인에 대한 면밀한 심문 없이 자백 직후 형을 집행했다 하여 의문을 제기하면서 작은 소동이 일었다. 이를 두고 허균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했던 또 다른 권신 이이첨이 처형의 정당성과 허균의 역모 혐의를 강조하면서 이 논란은 가라앉았으나, 허균이 능지처참되던 날 형장에서 죄안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는 증언이 있어 의문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허균은 처형 직전 광해군이 친국하는 자리에서 광해군을 향해 '할 말이 있다' 고 외쳤으나 곧 제지당하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또한 이이첨은 허균이 의금부에 하옥되어 있던 당시 허균에게 처벌은 없을 것이라며 꾸준히 안심시켰다고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일기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실록은 '왕 역시 허균의 역모와 관련하여 사실 관계를 더 파악하려고 하였으나 권신들의 강압으로 형을 집행할수 밖에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군다나 허균과 함께 능지처참형을 당한 김개는 1678년(숙종 4년) '결정적인 죄안이 없다'는 당시 도승지였던 김석주의 주청에 따라 신원되면서 허균의 죄안의 존재 여부 자체에 대한 의문을 낳고 있다. 이러한 의문점 때문에 그의 하옥부터 형 집행의 순간까지를 소설화하거나 드라마로 제작하는 등 많은 흥밋거리도 낳고 있다. 1623년 3월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시절의 무수한 옥사로 희생된 사람들은 거의 복권과 추숭이 이루어졌으나, 허균만은 유일하게 조선왕조가 멸망하던 시점까지 역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처형을 예감하고 자신의 문집 《성소부부고》를 자신의 외가에 비밀리에 의탁했으며, 이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그의 사상과 학문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어 있다. 죽음이 임박해옴을 예감한 허균은 1617년말 맏사위인 이사성(李士星)에게 자신이 수집한 4000여권의 장서도 맏사위 이사성에게 보낸다.[4] 또한 자기 문집을 정리해 큰사위에게 보낸다. 허균의 문집은 외손자이자 이사성의 아들인 이필진에게 전해졌고 이필진의 묘지명에 허씨의 책 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게 되었다.[5] 그가 지은 소설 《홍길동전》은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허균이 진보적인 종교인이어서, 천시 받던 불교는 물론 천주교회까지 신봉하였다는 평가도 있다.[6] 서위 1521 중국 저장 성[浙江省] 산인[山陰]~1593. 중국 명대(明代)의 화가. 중국 회화사에서 신동(神童)·관료·화가·광인(狂人) 등의 다양한 면모를 지녔던 인물이다. 한때 감옥살이를 하게 된 적이 있으나 미친 사람으로 행세해 풀려났다. 지독한 술꾼으로도 알려졌으며, 가난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나중에 절파(浙派) 화가로 꼽혔는데, 대진(戴進)으로 대표되던 절파는 마원(馬遠)과 하규(夏珪)의 남송원체화(南宋院體畵) 전통을 이은 화파이다. 그러나 기질과 화풍면에서는 석도(石濤)라든가 8대산인(八大山人) 같은 17세기 개성주의 화가들에 더 가까웠다. 그의 화풍은 자유분방하면서도 때로는 폭발적이다. 노긍[ 盧兢 ] 1738(영조 14)∼1790(정조 14).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교하(交河). 초자는 신중(愼仲), 자는 여림(如林), 호는 한원(漢源). 아버지는 진사 명흠(命欽)이다. 1765년(영조 41) 진사가 되었는데, 과시에서 명성을 떨쳐 호서지방 사류들의 추앙을 받았다. 1777년(정조 1) 사간 이현영(李顯永)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여론을 조성, 사풍(士風)을 어지럽히는 인물이라 하여 경중(京中)의 고봉환(高鳳煥), 개성의 이환룡(李煥龍), 호남의 이행휘(李行輝) 등과 함께 먼 변방에 유배시킬 것을 상소하자, 이로 인하여 위원(渭原)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저서로는 한문소설로 〈화사 花史〉를 지었다. 이하곤 [李夏坤, 1677~1724]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화풍은 대체로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을 따랐으며, 정선(鄭敾)의 초기 작품과도 상통한 데가 있다. 또 화평(畵評)에도 일가견이 있어 그의 문집 중에 보이는 윤두서(尹斗緖)의 《자화상》과 《공재화첩》에 대한 화평, 정선의 그림과 중국 화가들에 대한 화평 등은 당대의 회화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본관 경주(慶州). 자 재대(載大). 호 담헌(澹軒)·계림(鷄林). 1708년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는 별로 뜻이 없어 일찍 고향 진천으로 내려가 학문과 서화에만 힘썼다. 화풍은 대체로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을 따랐으며, 정선(鄭敾)의 초기 작품과도 상통한 데가 있다. 그는 또 화평(畵評)에도 일가견이 있어 그의 문집 중에 보이는 윤두서(尹斗緖)의 《자화상》과 《공재화첩》에 대한 화평, 정선의 그림에 대한 화평 및 중국 화가들에 대한 화평 등은 당대의 회화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유작으로는 간송미술관 소장의 《춘경산수도》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산수도》 등이 전한다. |
출처: 올챙이의 블로그 원문보기 글쓴이: 올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