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3월, 제16회 사법시험에 수석으로 합격>
초등학교 시절 박주선은 무거운 쌀 꾸러미를 어머니의 머리 위에 올려주면서 맞잡은 어머니의 손이 매우 거칠어진 것을 보고 “공부를 열심히 해 훌륭한 아들이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박주선은 초등학교 때부터 그야말로 노력가였다. 보성남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보성중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박주선은 ‘보성 3총사’로 불릴 만큼 가까운 박옥근(개인사업), 이용철(현 중앙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등 평생을 함께 할 친구를 만났다.
이들은 항상 1,2등을 다투는 선의의 라이벌이자 격의 없는 친구였다. 박주선은 지금도 이들에 대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자신보다 더 노력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고마운 친구라고 말한다.
보성중을 차석으로 졸업한 박주선은 전라도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몰리는 광주고에 입학했다. 그리고 광주에서 자취생활을 했다. 보성에서 짐을 들고 나설 때 어머니는 “방학이 아니고는 절대 내려오지 마라. 건강과 공부에만 전념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주선은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한 달 동안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에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자주 얼굴을 보여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해 일주일에 한 번씩 보성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어머니가 오히려 매주 광주로 올라와 박주선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했다.
광주고에 들어가 검사의 꿈을 키우던 박주선은 졸업을 앞두고 중학교 졸업생이던 동생 박주현과 서로의 진학을 위해 양보하는 언쟁을 벌이다 결국 ‘큰 꿈을 이루라’는 가족들의 뜻을 따른다.
서울대 법대를 응시했다가 연거푸 고배를 마신 박주선은 3수를 한 끝에 드디어 서울대 법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박주선은 언제나 노력과 끈기로 자기가 세운 목표를 성취해 가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대학에 다니는 동안 남다른 노력으로 4년 동안 줄곧 장학생으로 정상을 차지했다. 사법시험 준비는 대학 도서관과 세 들어 사는 단칸방에서 할 수밖에 없었다. 박주선은 사법고시를 준비하면서 늦은 밤 어둠이 깔린 동네 모퉁이를 돌아 힘든 발걸음으로 집에 오시는 어머니를 보며 합격의 의지를 불태우곤 했다.
1974년 3월, 박주선은 제16회 사법시험에 드디어 합격했다. 그것도 수석으로 합격했다. 중앙과 지방의 전 언론들이 그의 인간 승리를 앞 다투어 보도했다. 하지만 그는 그럴수록 “내 자신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며 스스로를 다스렸다. “검사가 되었다고 인생에 있어서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나와 나의 가족이 흘린 눈물과 땀방울을 퇴색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 지금보다 더 순수해져야 하며 더 솔직해져야 한다. 앞으로 나에게는 더 큰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며 ‘검사 박주선’보다는 ‘인간 박주선’이 되고자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