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독누리길을 걸으며 상념에 잠기다
황영숙
대독누리길은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남서쪽에 위치해 있는 대독천을 따라 걷는 길이다. 고성읍의 상습 침수 지역이던 수남 지구에 침수예방사업으로 철둑을 만들었고 수문도 만들었다. 이와 함께 완성된 대독누리길은 고성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재탄생하였다. 대독천은 6km구간의 대독천 물길 복원사업과 함께 5.5km에 이르는 황톳길을 조성하여 수남 유수지생태공원(일명 백세공원)과 연계하여 친환경 생태체험공간이 되었다.
대독누리길 코스는 수남 유슈지생태공원(백세공원)→대곡교→대안교→대독교→세월교→독곡교→면전교→황불암교→우설교→갈모봉삼림욕장 입구(이정표기준 9.2km) 까지 이다.
수남 유수지생태공원(백세공원) 주차장 주변
수남지구는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자취를 하며 잠깐 살던 마을이다. 1968년 무렵 폭우가 쏟아져 마을이 온통 물에 잠겼던 기억이 있다. 그 날은 돼지가 둥둥 떠다니기도 하고 온갖 가구들이 떠내려가기도 했다. 물에 잠겨 슬픈 듯 떨고 있는 미모사 꽃잎을 보며 탕아처럼 맨발로 흙탕 물길을 걷던 추억이 담겨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남지구의 남외마을은 고성읍성의 남문 밖 즉 남문의 바깥에 있는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 남밖 이라고도 불려왔던 곳이다. 바다와 가까운 지역이라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거주가 이루어졌으리라 짐작된다. 구한말(대한제국)까지는 50호 남짓의 가구가 거주했다고 하며 1904년 남포마을에 제방(일명 철둑)이 축조되어 바다가 육지로 변하면서 주민수가 증가하여 큰 마을이 되었다.
지금의 주소지인 고성읍 수남동 79번지는 구한말 대섬이 있던 곳인데 이곳의 유명한 전설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대섬은 지금은 육지화가 되어 가옥이 들어서 있으나 조선말기 까지만 하여도 바닷물에 둘러싸인 섬이었던 곳이다. 다른 섬 지역 고깃배들이 와서 물물교환을 하기도 하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엔 배들의 긴급 피난처로서의 역할도 하였으나 평소에는 한적한 바닷가로 경치가 좋기로 유명하여 섬 위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이 정자에는 많은 시인 묵객이 거쳐 가며 한 수의 시와 그림을 남기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공민왕 때 호은 허기(정절공)가 신돈의 부정을 공박하는데 가담했다가 유배를 오게 된 곳이라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호은 선생을 다시 중용하려 하였으나 선생은 불사이군의 대의를 몸소 실천하여 대섬에 은거하였다. 후손이 집터에 비를 세워 지금도 후덕을 기리고 있는데 선생의 한 많은 일생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 밤이면 집터에 도깨비불이 자주 나타나고 그 때마다 비가 내렸다고 한다.
시인 묵객이 묵었던 대섬의 전설이 있는 곳 인근이라서 일까? 시조단의 거목이신 서벌 선생도 근처 대독리에서 성장기를 보내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웠다. 타향에서도 늘 고향을 그리워하였으며 그리움과 삶의 애환을 우리민족 고유의 시조에 담아 노래하였고 후배 양성에도 큰 힘을 쏟으셨다.
수남 유수지생태공원 내 갈대숲
대독누리길을 걷기 위해 창원에서 출발하여 고성읍 남외마을을 거쳐 수남 유수지생태공원(백세공원)에 파킹을 하였다. 파킹을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수변 갈대숲에서 미처 떠나지 못한 겨울철새들이 푸드득 푸드득 날며 모이를 쪼고 있다. 공원에 조성된 꽃길과 풍차를 보며 가다보니 시조시인 서벌 선생 시조 건립비가 있고 여러 수의 서벌 선생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고성의 문인들과 군의 업적에 문학을 사랑하는 시조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고마운 마음에 저절로 숙연해진다. 천천히 걸으며 시비에 새겨져 있는 시조들을 감상해 보았다.
서벌선생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서울1을 소개해 본다.
서울1
내 오늘
서울에 와
만 평 萬坪 적막을 사다.
안개처럼 가랑비처럼
흩고 막
뿌릴까 보다.
바닥 난 호주머니엔
주고 간
벗의 명함......
서벌선생이 살았던 곳–집은 사라지고 그 위치를 추정하여 집터에 비석을 세움
서벌 선생이 낯설고 힘든 서울살이를 하며 고향 고성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그 절절한 마음을 담은 시조 가슴에다 고성 固城 넣고 사는 노래 또한 절창이다.
가슴에다 고성 固城 넣고 사는 노래
난 곳은 바루절
자란 데는 갯가 철둑
한 뜻 펴고 싶어
무작정 내 떠났었네
그날은
아침부터 비
붙드는 듯 내렸다네
걷다가 발 찢기는
서울은 사금파리밭
얄궂은 사람덤불
어지간히 헤쳐냈네
헛딛어
떨어져 묻힐
허방, 너무 많더라
시방껏 가슴안엔
옛집, 그 대숲바람
네 고향 어디냐며
꾸짖다가 타이르네
아직은
늦진 않으니
고성으로 가라시네
시를 읽고 나니 가슴이 참 아프다. 누군들 고향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나도 고성이 고향이라서 가금씩 찾아와 방전된 몸과 마음에 충전을 해 가곤 한다. 시비의 시들을 다 읽고 누리길을 빠르게 걷기 시작하였다. 벼를 심기 위해 물을 잡아 놓은 무논에서 개구리들이 열창을 한다. 녹록하지 않은 삶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둑길을 따라 피어있는 꽃잔디와 유채꽃이 덩달아 웃는다.
둑길 곳곳에는 데크와 잠수교와 여러 가지 이름의 다리가 있고, 상징성이 있는 조형물과 쉼터가 있어 가볍게 산책하고 트레킹하기에 아주 좋다. 공룡 알 조형물도 보이고 공룡 모습을 재현한 인조 화석도 보인다. 또한 자연생태하천을 끼고 있어 갖가지 물고기와 곤충, 여러 가지 들꽃들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혼자서 걸으면 흐르는 물처럼 잔잔히 상념에 잠길 수 있고 친구와 가족이 함께 걸으면 웃음이 절로 나는 길이다. 봄바람을 마주하며 오늘 하루도 참 행복하게 걸었다.
잠수교 대독누리길
나는 혼자 걷는 것을 좋아한다. 생각이 맑은 아침이나 길이 어둑해지기 전 노을을 보며 걷는 것을 좋아한다. 이다음엔 남파랑길 31코스 중 하나인 고성 남산과 연결된 해지개해안길과 대독누리길을 연결해서 걸으며 남은 생을 퇴고해 보기로 할 것이다. 길은 언제나 나를 묵묵히 기다려 주는 연인이다.
황영숙
2011년 《유심》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크리넥스』, 『매일 아침 매일 저녁』이 있음.
오늘의시조시인상, 김상옥백자예술상 신인상을 수상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