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하동 옥종
무더운 여름이면 나는 여름을 쫓듯 울어대는 고향의 매미소리를 연상해 보곤 한다. 솔바람처럼 나의 귓가를 스치는 ‘지이지이이’ 왕매미소리, ‘쌔에롱 쌔에롱’ 참매미소리, ‘시옷시옷’ 무당매미소리, ‘맴맴맴’ 말매미소리가 잠시 더위마저 잊게 한다.
눈을 감으면 어느 결에 나는 고향 마을의 숲속을 뛰어 다니는 천진한 아이가 된다. ‘시옷시옷’하는 무당매미소리에 맞추어서는 짓궂게도 그 사랑의 호소를 방해라도 하듯 큰소리로 ‘순이 요오시 순이 요오시’(‘요오시’는 ‘좋아’란 뜻의 일본말)를 외쳐 보기도 했고, 또 맘 논을 맬 즈음인 늦여름에 ‘맴맴맴’하고 울어대는 말매미소리를 반주 삼아서는 그늘 밑에서 달콤한 졸음에 취한 채 게으름만 피우는 머슴을 재촉하듯 ‘맘 논 매어라 맘 논 매어라’를 후렴처럼 외쳐대기도 했다.
아무튼 내가 이 정도라도 매미소리 타령을 읊을 수 있는 것도 내가 시골 출신인 덕택이다.
나의 고향은 군으로 말한다면 경남 하동군이다. 그 어느 지역보다 풍광이 아름답고 산수가 수려하며 경관이 빼어나다. 그래서 많은 노래의 배경이 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동포구 80리」,「상사의 내 하동」,「섬진강 탄곡」,「돌아가자 하동포구」,「하동포구 아가씨」,「물레방아 도는데」,「그리운 하동포구」,「섬진강 처녀」,「삼백 리 한려 수도」,「추억의 하동포구」,「화개장터」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고도 많다.
이런 자연조건을 갖춘 이 고장의 옥종면(玉宗面)이 바로 나의 고향이다. 나의 숨결이 숨어 있고 나의 발자취가 묻어 있는 이곳은 황금어장을 잉태하고 있는 어촌도 아니고, 무나 배추가 풍성한 넓은 들녘을 베고 누운 곳도 아니며, 그렇다고 오지(奧地)나 다름없는 심심산골도 아니고, 외지의 뜨내기들이 왁자지껄 모여드는 광산촌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산골의 작은 면일 따름이다.
진주에서 버스로 약 한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하동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인데, 작가 이병주 선생의 고향인 북천면과는 바로 이웃하고 있다. 지리산에서 발원하는 덕천강이 진양군의 수곡면과 면계를 이루며 유유히 흐르고, 산청군과도 군계를 이루고 있다.
교통의 편리를 보아 하동읍 보다는 진주와 내왕이 많은 곳이고, 또 지리산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라서 지리산 공비 토벌 직전까지만 해도 밤손님(빨치산)들의 성가신 내방(?)을 받아 종종 곤욕을 치른 곳이기도 하다.
면내에서 자랑할 만한 곳으로는 우선 종화리(宗和里)라는 마을을 들 수 있다. 백로의 도래지로 지정,보호되는 곳인데, 제철을 만나면 부근의 소나무 숲은 일대 장관을 이룬다.
정수리(正水里)라는 마을은 세계적으로 품질 좋기로 이름난 고령토 산지이고 영당부락에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이 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곳인데, 춘추로 향례를 봉행하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 집안에서 관리하고 있는 연고로 따라가 함께 공부하고 잠을 자본 적도 있다.
면 소재지 청룡리(靑龍里)의 한복판에는 천연기념수로 보호되고 있는 몇 백년 묵은 은행나무가 있다.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선사해 지붕 없는 야외사랑방 구실을 해주는 곳인데, 고향 어른들은 외지로 나간 아들과 손자 녀석의 이야기로 꽃을 피우기도 하고, 열띤 시국담을 주고 받기도 한다.
내가 자란 양구리(良邱里)라는 마을을 보면, 뒤쪽에는 엄마의 품속처럼 자애로운 옥산봉(玉山峰)이 우뚝 솟아 있고, 그 품안에는 장수바위를 안고 있다. 이 바위에는 전설이 서려 있다. 아스라한 옛날에 전쟁이 일어나자 한 장수가 적을 쫓아 말을 타고 이 바위 위를 지났는데, 그 말발굽의 흔적이 남아 장수바위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소 먹이던 시절, 이 바위 위에 올라가 말을 모는 전설 속의 장수 마냥 흉내를 내며 기개와 담력을 키우던 기억이 새롭기만 하다.
그리고 이 산의 발치에는 일제시대부터 고령토를 파냈던 백토간 폐광이 여기저기 흰 이를 드러내고 있는데, 어린 시절 백토간의 철구루마 타기는 정말 신나는 놀이 중의 하나였다.
마을의 들머리에는 잘록 떨어져 나온 듯한 묏봉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하한정(夏寒亭)이란 정자가 있다. 양(梁), 이(李), 최(崔), 백(白), 정(鄭), 하(河)의 육성이 협력하여 지은 정자다. 이름 그대로 여름철에도 한기를 느낄 만큼 시원한 곳이다. 하한정이란 현판의 글씨를 대원군이 내려 주었다는 이야기를 어릴 적부터 들어왔는데, 어느새 손을 타 감쪽같이 없어졌다는 소식이다. 철이 들어 진주로 유학(진주 중․고등학교)을 나온 나는 여름방학이면 마을 친구들과 그곳에서 수박서리, 닭서리를 음모하기도 했다.
북방리(北芳里)에는 고승산(孤僧山) 일명 고승당산이 있는데 들판에 혹처럼 우뚝 솟은 해발 185m의 야산이다. 거기에는 고승산성이 있는데 옛날부터 있었던 성으로 100년 전(1894년 11월)이곳에 집결한 동학농민군 2천여 명이 신식무기를 갖춘 왜병에게 대패했다는 비운(悲運)의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이다.
옛부터 그때 죽은 넋들이 바람이 불면 ‘고시랑 고시랑’거리는 소리로 울부짖는다 해서 일명 ‘고시랑당’이라고도 불려져 내려오고 있다.
초등학교시절, 그곳으로 원족(소풍)을 가 지난 역사를 귀담아 들으며 불의에 대한 저항의 힘을 키워보기도 했다.
큰 벼슬이 나온 마을로는 대곡리(大谷里) 삼장(三壯)골이 있다. 조선 성종 때 이 마을에 조지서(趙之瑞)라는 인물이 태어났는데, 그는 처음에 생원에 합격하고 나서 뒤이어 진사에 장원, 또 그 해 문과에도 장원급제했으며, 후에 중시(重試)에도 장원을 했다. 그런 연고로 한 사람이 세 번이나 장원했다는 뜻에서 삼장골이라 불려져 왔다.
그는 연산군이 세자일 때 시강원보덕(侍講院報德)으로 연산군의 태만을 직간하여 권학에 힘쓰라고 직소하다가 미움을 받았다. 연산군이 보위에 오르자 외직으로 나가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10여 년 간 독서를 즐기고 있었는데 그만 갑자사화에 휘말려 맷돌로 갈아 죽이는 참형을 당했다. 부인 정(鄭)씨가 한강에 버려진 시신을 수습하여 이곳 삼장골의 선산하에 묻어 주었다. 부인은 그곳에 집을 지어 묘를 지키며 한 많은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중종반정이후 신원되어 개장의 명이 나서 훌륭하게 다시 장사를 치르고, 동시에 그 뜻을 기리어 나라에서 열녀문을 세워 주었는데 지금도 남아 있어 면민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있다.
또 이 대곡리에 또 하나의 열녀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도 있다. 이웃 마을 추동 부락옆 길 위쪽에는 ‘정조(貞操)’라는 한자가 조각되어 있는 바위가 있다. 옛날 이 마을에 사는 한 미천한 여인이 도적 떼들에게 붙들려 성추행을 당할 뻔했다. 죽기를 작정하고 반항해서 풀려 나온 그녀는 슬피 울면서 집으로 돌아와 유방이 도둑들에게 더럽혀졌다 해서 칼로 도려내고 자기의 정조를 지켰음을 만족히 여기고 죽었다.
뒷날 이 여인의 행동이 귀감이 된다고 지방주민들이 뜻을 모아 바위에 글을 새겨 주었고 또 나라에서도 정문을 세워주게 되자 이곳을 ‘정문거리’라고 부르게 된 내력이 있다.
그리고 효자가 난 마을로는 월횡리라는 마을이 있다. 조선 단종조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여(趙旅)선생의 후손인 함안 조씨가 250여 년 전부터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이 마을 앞에는 조그마한 나루가 있고 나루의 우측 300m쯤 되는 곳에 ‘효자도(孝子渡)’라고 한자로 새긴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얽혀 있다.
옛날 이 마을에 부모에 대한 효성이 너무나 지극한 조씨 집안의 한 선비가 있었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묘 앞에 움막을 지어 6년이나 시묘(侍墓)를 하였는데 마침 묘소와 집을 오가는 길에 시내가 있어 겨울이건 여름이건 늘 물을 건너 다녀야 했다. 그 효성에 감복한 사람들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돌을 쌓아 나루를 놓아주었고 또 그 효성을 기리기 위해 그 나루를 ‘효자나루’라 부르며 바위에다 그 이름을 새겨 넣었던 것이다.
열녀와 효자가 밥에 미처럼 귀하고 귀한 요즘 같은 세상에는 이런 이야기들은 하나의 반성적 귀감이 된다 고나 할까.
생각해 보면 내 고향 옥종면은 비록 국가적인 큰 자랑거리는 없다 할지라도 오랜 역사가 숨쉬는 곳이다. 옥산봉에는 마제석기가 나오기도 했고, 문암(文岩)이라는 곳에는 상당수의 고인돌이 길가나 논바닥에 믿음직스런 허리를 드러내놓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사람을 두고 말해 보면, 큰 인물이 나오지 않은 대신 큰 역적도 나오지 않은 곳이라 그런 나름으로 자위를 하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고향 사람들은 옥산(玉山)을 바라보면서 옥(玉)처럼 빛나는 인물이, 또 청룡리 뒷산을 바라보면서도 승천하는 청룡(靑龍)과 같은 인물이, 그리고 장수바위의 전설을 생각하면서 는 전설 속의 장수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서운해하고 있다지만, 언젠가는 그런 인물이 나오리라 기대하며 오늘을 열심히 사는 길이 오로지 그 기대를 앞당길 수 있는 지름길이 아닐까 싶다.
아니, 달리 생각해 보면 내 고향을 꿋꿋이 지키고 가꾸는 사람들이 바로 미국 작가 나사니엘 호돈의 단편소설 〈큰바위 얼굴〉의 주인공처럼 진정한 옥(玉)이요, 청룡(靑龍)같은 인물들이라고 느껴진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쌀 개방이란 우루과이 라운드의 거센 펀치를 받아 정신도 잃고 또 그 아픔도 이만저만이 아닐 성싶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이렇다 할 도움과 위안을 줄 수 없는 것이 나의 처지지만 내가 직접 작사해 본 ‘옥종면가’의 노랫말에 곡이나 붙여 선물해 볼 생각이다.
1.지리산 정기 받아 옥산봉 솟고/ 덕천강수 넘실대는 내고장 옥종
솔바람 댓닢소리 풀피리 소리/ 선인들 큰뜻 서려 우리를 지키네
마음곱고 인심좋은 이 터전에서/ 우리는 힘차게 오늘을 산다.
2.지리산 정기 받아 사림봉 솟고/ 월횡강수 노래하는 내고장 옥종
넓은 들 황금벌판 웃음꽃 피네/ 백토가 지천인 유서깊은 이 터전
대문열고 마음열고 큰 뜻도 세워/ 우리는 정답게 내일을 연다.
끝으로 나의 고향 사람들이 하루 속히 우루과이 라운드의 홍역에서 벗어나 위의 노랫말처럼 힘차게 오늘을 살고 정답게 내일을 열어가며 넓은 들 황금벌판에도 웃음꽃이 활짝 피기를 기원한다.
아호 靑多 / 평론가 / 수필가 / 현대문학 으로 등단(61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역임 / 배화여대 교수 역임
현대문학상 /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 예총 예술문화 대상 / 남명 조식문학상 본상 등 수상
평론집 『한국소설의 위상』『우리문학의 높이와 넓이』『오늘과 내일의 우리문학』등 다수
수필집 『내 마지막 노을빛 사랑』 등
편저 『나의 작품 나의 명구』『나의 작품 나의 명구 2』『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등
현재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상임고문 / 청다한민족문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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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머물다 갑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