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륙 하남성의 백제불상 필명 상선약수 작성일 2005/08/17 11:02
하남성 용문석굴에 백제 부여씨 불상이 왜 있나?
▲ 용문석굴
<조선일보>(2004. 11. 07. A23)에 소개된 "中 룽먼석굴서 백제불상 첫 발견"이란
제목으로 "망국의 한을 안고 이역만리 중원으로 간 백제인의 자취가
중국 뤄양(洛陽) 룽먼석굴(龍門石窟)에서 처음 발견됐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석굴은 "7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이고,그것이 "룽먼석굴의 877번 불상 왼쪽 좌불이 조각된
두 개의 작은 감실(龕室) 아래에서 부여씨(扶餘氏)라고 적힌 명문(銘文)을 발견했다."고 했으며,
그 "부여씨는 백제 왕실의 성"이라고 밝혔다. 조선일보는 중국어 실력이 좋은지 룽먼석굴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나
이는 용문석굴을 룽먼으로 발음하는 중국인들의 한자어 발음을 오역해서 나온 것이다.
또 누군가 이를 가지고 국수주의 운운할것 같아서 말하지만 어떻게 한자어 한 개가
두개 세개의 발음기호를 갖는가? 한자어의 표기가 자신의 글자조차 없었던 지나인들에게는
우리글인 한자를 자신들의 음운표기로 가차하다보니 이런 일들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출처도 없는 간자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百濟 왕실의 성씨가 龍門石窟에서 발견되었을까?
그 글을 소개한 유 기자나,그 사실을 밝힌 림성조(林性照) 洛陽大 특임교수의 주장은
"이 불상을 만든 사람은 百濟 멸망 직후에 唐나라로 끌려온 百濟人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단연코 아닙니다.
百濟의 수도는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이며,"직산(稷山)"이라고도 한다.
바로 이 "稷山"이 山西省 서남부에 있습니다.
룡문(龍門)은 룡문산(龍門山)을 말하며,山西省 稷山 서쪽에도 위치하면서,
河南省 洛陽縣 남쪽에도 위치하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룡문은 후자를 가리킵니다.
三國史記에 나오는 百濟의 건국지 河南을 黃河 남쪽으로 본다면 초기 百濟의 중심지는
山西省 남부 일대가 되며 또한 개로왕(蓋鹵王) 때에 백제의 강역에 河南城 중악 崇山이 등장하므로
대륙 洛陽 龍門石窟에서 백제 왕실의 불상이 발견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으며 오히려 당연한 사실이 됩니다...
그러나 稷山이 山西省 서남부에 있었으니, 그 지역에 百濟와 그 수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 百濟의 강성시기에 河南省 龍門山 龍門石窟이 있는 곳까지 와서 불상을 조각하였던 것입니다.
만약에 그 불상의 조각 시기가 정말로 7세기경이 옳다고 한다면,
백제가 멸망했을 시기이니,그 百濟 사람들이 新羅에 끌려가 신라의 수도
경주(慶州)인 낙읍(洛邑) 남쪽에다 불상을 조각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낙읍(洛邑)이 바로 낙양(洛陽)입니다.
만약 韓半島 서남부에 있었던 百濟였다면,그럴 수는 없지만, 정말 그곳
하남성 낙양 남쪽까지 끌려가서 그런 불상을 조각했을까요?
노예(?)로 끌려가서 어떻게 자신의 성씨를 적을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지 의심 스럽습니다.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진 않겠지만,
그보다도 훨씬 가능성이 있고,훨씬 신뢰성이 있고,훨씬 합리적인/논리적인 주장이
바로 그 중원대륙 그 중심에 百濟가 있었고,그 동쪽에 新羅가 있었으며,
백제의 서쪽에 唐나라가 있었는데, 그 唐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그 사이에 있는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케 했다는 말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요?
이것은 당연히 그 夫餘氏가 百濟의 姓氏이고,그런 사람이 그 곳에서 불상을 조각하였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고구려/백제/신라/가야는 당나라와 마찬가지로 중원대륙에 함께 존재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꼭 百濟에만 "夫餘氏"가 살았는가? 신라에는,고구려에는 없었는가?
그리고 龍門石窟이 7 세기 이전에 5 세기라고 한다면, 百濟가 멸망하기 전의 시기이므로,
망명자나,끌려온 百濟人 등등으로 몰아세우는 것이 설득력이 없습니다.
아예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작품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한 신라 땅에 백제와는 상관없이 신라 사람 부여씨가 살았다면
신라 사람 부여씨가 살면서 불상을 조각한 것이 됩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출처 : 대륙조선사 연구회 최두환 박사님의 글중에서 가필,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