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현충원 명당길지에 자리한 창빈 안씨의 묘역이다.
창빈 안씨는 조선 제 11대 임금인 중종(1488-1544)의 후궁이다.
14대 임금인 선조(1522-1608)의 할머니가 되는 분이다.
1499년 7월 9일 경기도 시흥에서 안탄대의 딸로 출생하였다.
용모가 빼어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홉 살 때인 1507년 궁녀로 들어가 22세 때에 상궁이 되었다.
성종의 계비인 정현대비의 각별한 후의로 1518년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
중종의 총애를 받는 동안에도 몸가짐이 바르고 인품이 후덕하여 궁내에서 덕망이 높았다.
1544년 중종이 죽자 문정왕후의 명으로 계속 궁에 머물렀다.
1549년 10월 친정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중종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그 둘째 아드님이 선조 임금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이다.

1683년 숙종 때 건립된 창빈 안씨(昌嬪安氏)씨의 신도비이다.
비문은 예조판서 신정(申晸 1628-1687)이 지었고,
글씨는 판돈녕부사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으다.
머리전서(頭篆)는 오위도총부 도총관 동평군 이항(李杭)이 썼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11권 7년(1681년) 3월 17일 세번째 기사
'낭원군의 이간 상소로 창빈 안씨의 묘도에 비석을 세우다'는
신도비 건립경위를 밝히고 있다.
낭원군(朗原君) 이간(李偘)이 상소(上疏)하기를,
“창빈(昌嬪) 안씨(安氏)께서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을 탄생(誕生)하셨는데,
묘도(墓道)에 비(碑)조차 없습니다. 청컨대 미처 거행하지 못했던 의식을 빨리 거행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사체(事體)가 중대(重大)하다 하여 대신(大臣)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모두 묘도(墓道)에 오히려 드러나게 새길 것을 빠뜨린 것은
진실로 흠사(欠事)이므로, 특별히 명령하여 마땅히 천수(阡隧) 에
비석(碑石)을 세워야 한다고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은 명종의 동생이었다.
아들이 없던 명종이 덕흥대원의 세아들 하원군 하릉군 하성군을 불렀다.
명종은 임금만이 쓸 수 있는 익선관을 가르키며
"머리의 크고 작음을 알기위함이니 차례로 한번씩 써봐라"고 했다.
선조의 두 형 하원군과 하릉군은 아무 생각없이 시키는데로 하였다.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함부로 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막내인 하성군(선조)만은 익선관을 공손히 받들어 제자리에 갖다놓았다.
명종의 신임을 얻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고사가 전해온다.
1568년 셋째아들 하성군이 조선 제 14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1577년에 선조의 할머니는 창빈(昌嬪)으로 추봉되었고, 특명으로 덕흥대원군의 사당에 향사되었다.
원래 1550년 3월 8일 경기도 양주 서쪽의 장흥리(長興里)에 장례 지냈다.
그 묘자리가 다음해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지금의 자리인 과천(果川) 동작리(銅雀里) 언덕으로 이장했다.
그때부터 동작릉(銅雀陵)이라 불리웠다고 한다.
묘소에는 곡장이 둘러져 있고 묘 앞에는 묘갈, 석등, 석인상 2기가 세워져 있다.

"내 보기에 맹호가 숲을 뛰처나가기 전 새끼를 감싸고 보호하고 있는 형국이라
가히 국립묘역내에서 진혈(眞穴)이 이곳이 아닌가 한다."
풍수전문가 최창조 교수는 그의 책 '풍수잡설'에서 최고의 명당으로 진단하였다.
최교수는 "지금 이곳은 분위기가 음울하고 냉랭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며
"이는 이 땅의 성격이 그러해서가 아니라 주위의 조경이 잘못된 때문"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