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아메리카를 떠올리다 보면 반드시 들어가게 되는 단어들은 바로 열정과 춤이라 할 수 있다. 멕시코의 살사, 브라질의 삼바, 그리고 비록 독재자의 멍에를 써야 했지만, 페론이 자신의 부인 에비타와 멋들어지게 춘 바로 그 탱고. 하지만 여기서 분명한 것은 라틴댄스는 그 역사나 발전단계가 정확히 일치되는 문헌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삼바를 브라질의 대표춤이라고는 하지만, 아르헨티나에서도 삼바가 있었으며, 멕시코의 살사 또한 실제 우리에게 가장 알려져 있지 않은 나라 쿠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은 다소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국내에 출판되어 있는 많은 스포츠 댄스 교재들이나, 인터넷 상의 자료들은 그 시기와 발전 형태등에 있어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물론 노예나 하층민의 문화라서 정확히 기원이 밝혀지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당시 흑인 노예들의 문맹률이 높아 자신의 문화에 대한 기록을 할 수가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라틴댄스는 흔히 국제 댄스 스포츠 연맹에 의해 규정지어진 일정한 틀을 가지고 그 형식적 완성을 보이고 있는 춤들에 한정되었 있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발전된 형태의 춤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이것들 만으로는 정확히 그 당시의 정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대한 자료를 통해 객관화를 시도하려 한다. 또한 본 글에서는 리듬과 춤에 대한 구분이 모호한 부분도 존재하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는 춤 자체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리듬의 춤도 지구상에는 많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은 어떤 리듬에 의한 반응으로서 춤이라는 형태가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라틴아메리카에 존재한 많은 춤들이 라틴음악 즉 그 리듬과 맥을 같이 한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본 글은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고대 제례 의식에 의한 춤사위는 논외로 하기로 한다.
2. 본 문
1) 라틴 댄스의 형성 배경
1492년 크리스토퍼 콜론이 서인도 제도를 발견한 뒤, 라틴 아메리카의 고대문명들이 스페인군에 멸망당하고, 시기상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쿠바를 제외한 나머지의 거의 1800년대 중반 이전에 독립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약 300년에 걸친 식민 기간을 통해 라틴 아메리카는 다양한 양상으로 문화의 syncretism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후일 우리가 라틴 댄스라고 부르는 춤과 리듬의 모태가 된다.
토착 인디오와 주로 스페인에 의한 서유럽적 리듬 , 그리고 부족한 노동력 조달을 위해 아프리카에서 도입한 흑인 노예들의 문화가 서로 혼합되면서 각 지역마다 독특한 색깔을 띤 문화적 형태가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 고유한 문화적 현상이 서로 배태적이지 않고, 혼합된 형태로 존재할 수 있었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흔히 afro-america나 afro-cuba라고 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중, 남미 아메리카를 살펴볼 것 같으면, 중미 지역은 식민시절 당시 그 자체로 고유한 인디오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남미 지역은 사탕수수 재배를 위한 플랜테이션 산업으로 많은 노동인력이 부족했으며, 이 부족 인력을 대규모의 흑인 노예의 유입으로 이어졌다. 특히 쿠바섬은 라틴 국가들과 서유럽 국가들을 연결시켜주는 주요한 관문이었으며, 18세기 말 무렵 흑인노예의 유입이 약 10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많은 라틴 댄스는 이 곳 쿠바에서 유래된 것이다. 당시 지배자로 있던 스페인계 백인들과 criollo들은 구대륙에서 함께 건너왔기 때문에 인디오 토착음악보다 더 친숙하게 혼혈음악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것이 다른 라틴 국가들과 서유럽에 전판됨으로써 세계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식민시절 혼합성이 두드러질 수 있는 배경은 우선 선교단의 활동에 의해 성가등이 오케스트라로 연주되었으며, 이것에 매료된 주민들의 자연스럽 흡수, 또한 ciollo 출신 작곡가들이 라틴음악을 이용한 많은 곡을 배출하기도 했다.
2) 라틴 댄스의 발전 형태
가) 탱고
탱고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확실한 것은 탱고음악은 한 문화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아프리카를 비롯해서 유럽 각지에서 이민 온 사람들에 의해서 다문화적 성격을 띄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가장 흔한 설은 쿠바의 아프리카 노예들이 만든 아바네라(Habanera) 와 아르헨티나의 아프리카 흑인들의 드럼(tan-go라고 알려진)으로 연주하는 거친 리듬인 칸돔베(Candombe) , 가우초(목동)들의 민요 밀롱가(Milonga) 등이 유럽의 폴카 등 각국의 음악과 합쳐져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혹자는 tango가 라틴어 "tangere"(to touch)에서 왔다고도 한다. 또 다른 언어의 기원설은 아프리카의 어느 곳에서 어떤 땅이나 장소를 가르키는 오래된 말 "탕고" 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그러나 스페인 민속음악인 플라멩고에도 탱고 음악이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를 구별하기 위해 편의상 스페인 탱고를 플라멩고 탱고라고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 외로운 이주자들과 부랑자들처럼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사람들이 그들의 감정-외로움, 박탈감, 슬픔 등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들은 오히려 그 감정들을 전형화하여 나타내는 음악과 춤을 발전시키게 되었다는 점이다. 탱고는 사랑의 좌절보다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숙명을 한탄하며 이야기한다. 원래 탱고 댄스는 매춘부와 포주 사이의 관계를 형상화하며 발달하였다. 사실, 초기 탱고의 제목들은 매춘 세계의 인물들을 나타낸 것이었다. 탱고의 곡들과 춤에는 가사가 없었고, 주로 즉흥적으로 지어졌으며 일반적으로 외설적인 가사가 대부분이었다. 탱고를 만들었다는 Compadre와 Compadrito란 사람들을 살펴보면, 꼼빠드레는 카우보이들인 가우초의 후예들로서, 19세기 말엽 토지와 재산에 대한 사유 개념이 도입되면서 생활 터전인 팜파를 떠나 도시로 몰려 든다. 강인한 근육, 거친 생활, 먼지 쌓인 모자, 회색 목도리.. 아마도 인디오와 니그로, 그리고 스페인인의 피가 섞인 이 거친 남자들은 들판의 음악 밀롱가를 이 도시 외곽으로 가져오게 되었다.
꼼빠드레를 흉내내는 도시 빈민 청년들인 꼼빠드리또는 시간이 나면 흑인 구역에 가서 그들의 음악과 춤을 흉내내기 시작했고, 이들에 의해 밀롱가에 깐돔베의 멜로디가 섞이기 시작하게 된다. 1870년대 말 밀롱가의 리듬에 깐돔베의 멜로디가 섞이고 밀롱가의 스텝에 깐돔베의 코르테가 섞인 새로운 춤과 음악이 탄생하고 이들은 이 춤을 생각해낸 장소 "땅고" 라는 이름을 여기 붙이게 된다. 흥미 있는 사실은 흑인들은 춤을 추는 장소를 "땅고" 라고 불렀고, 꼼빠드리또들은 밀롱가에 깐돔베를 섞은 춤을 땅고라 불렀으며 땅고를 추는 장소를 "밀롱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초기 탱고는 남자들만이 췄다고 한다. 여자가 없다보니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당시 세계에서도 유명한 인신매매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한다. 많은 가난한 유럽의 처녀들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팔려오고,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유태인의 포주들에 의해 부에노스 아이레스 외곽으로 팔려가고 이들 중 일부는 단속을 피해 "아카데미"라는 탱고 학교에 들어갔다. 아카데미는 탱고가 추어지던 매춘굴을 말하는데 비교적 상류층이 가던 곳이라고 한다.
탱고는 주로 꼼빠드리또가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자기들끼리 탱고를 거리에서 연습했으며 탱고를 추는 곳에서 다른 꼼빠드리또와의 경쟁이 칼싸움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보통 하층민의 문화를 멸시해던 중산층과 상류층은 당시 탱고를 멀리했고, 탱고가 널리 퍼지게 된 계기는 파리에서 굉장한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다. 파리인들에 의해 유럽에 수입된 탱고는 미국으로까지 퍼지게 되는데 이 때 콘티넨탈 탱고와 아메리칸 탱고가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과장된 고개짓, 어깨짓과 규격화된 리듬이 아르헨티나 탱고와는 차별된다. 아무튼 전세계적인 인기로 인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상류층도 이때 자신의 문화로 받아들이게 된다. 중산층의 경우는 탱고는 주로 가족들 사이에서 추어졌다고 한다. 유럽에서의 탱고의 인기로 역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중상류층에게 탱고를 받아들이게 했지만 그들의 춤은 거리와 술집에서 추어지던 거친 탱고와 차별을 두게 된다.
1930년경 군부의 시민 투표권 금지로 잠잠해 졌던 탱고의 열풍은 1930년대 후반기에 시민들이 정치적 자유를 얻으면서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고, 그들은 탱고를 통해 육체적 고독과 삶의 고통을 달랬다. 이 1930년 후반부터 전설적인 에비따(Evita)가 죽기 이전인 50년대 초반까지가 탱고는 황금시대를 맞게 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아르헨티나는 경제적 부유와 문화적 자존심을 잃고, 미국의 락앤롤(Rock&Roll)등의 대중 문화의 침입으로 30년간의 암울한 시기를 맞는다.
2차세계대전 이후 아르헨티나는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국내에서도 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에서도 탱고는 근근히 그 맥을 이어갔다. 뛰어난 밴드리더 중의 한 사람이었던 Osvaldo Pugliese는 블랙리스트에 오르거나 수감되는 등 탄압을 받기도 했다.
60년대에는 록큰롤이 세계를 장악하고 아르헨티나는 군사독재의 그늘로 접어들어, 세 사람 이상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는 법에도 불구하고 탱고는 사그러들지 않았고 Antonio Todaro와 Pepito Avellaneda라는 훌륭한 댄스지도자 덕분에 80년대 탱고는 무대 형식으로 되살아나게 되었다. Tango Argentino와 같은 공연을 통해 세상은 탱고라는 음악과 공연을 위한 탱고댄스에 익숙해져갔다. 무대 위의 탱고는 더 큰 움직임으로 활기와 함께 발레적 요소를 가미한 극적인 구성을 취했다. 갓 탱고를 익힌 풋내기들에 의해 서툴게 모방되는 무대스타일과 탱고를 삶의 한 방식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클럽에서 추는 탱고의 간극은 커져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이 '진정' 탱고인가라는 건강한 논의가 탱고세계에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론, 탱고 연주곡을 세계의 유수한 콘서트홀로 이끌었던 아스토르 피아졸라 Astor Piazzola에 의한 모던탱고의 출현으로 '진정한' 탱고 음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1970년대 꼬뻬스와 니에베스가 기획하고 당대의 스타들이 출연한 "땅고 아르헨티노"는 전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탱고가 다시 널리 퍼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또한 그들은 당시 파리에서 귀국한 삐아솔라와 손을 잡고, 삐아솔라의 음악에 안무한 탱고를 추는 새로운 형식의 무대 탱고도 만들냈는데 이것은 당시 충격적인 상황이였다고 한다. "땅고 아르헨티노"는 뛰어난 댄서들과 음악가들로 브로드웨이와 동경 등 전세계를 강타하고 삐아솔라와 함께 탱고를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하던 아르헨티나의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1980년대의 지속적인 탱고 쇼의 성공, 삐아솔라의 성공 그리고 토다로 스쿨의 기린아인 소토 형제와 밀레나 플렙스 모라 고도이등의 뛰어난 젊은이들이 꼬뻬스로부터 독립해 만든 Tango X 2 등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쇼는 죽어가던 탱고를 다시 살려내기 시작했다. 1990년대는 탱고의 새로운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유능한 댄서들의 미국과 유럽으로의 이주로 조금씩 탱고가 퍼져 나가고. 인터넷을 통한 전세계 연락망, 위성TV를 통한 아르헨티나의 탱고 방송, 그리고 새로운 쇼인 Forever Tango의 세계적 성공, "탱고 레슨", "탱고" 등 유명 감독의 탱고 영화 제작은 작지만 과거에 비한다면 정말 탱고 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탱고들은 거의 보여주기 위한 탱고, 외국인들을 위한 탱고라는 점에서 정통 밀롱게로의 춤과 거리가 있다.
아르헨티나 탱고를 다른 나라들과 차이점을 들어 설명하자면 어려운데 그건 공통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원래 탱고는 상체의 중심이 약간(아주 약간) 앞으로 기울어서 피라미드 형태같이 잡게되고 따라서 상체를 이용한 움직임이 거의 없다. 반면에 발의 사용이 무척 다양해서 발로도 상대를 리드하게된다.
아르헨티나 탱고는 일단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필요하고, 그 다음으로 음악에 맞춰 걸을 수 있어야 한다. 탱고음악은 상당수가 명확하게 리듬이 떨어지지 않는다. 비엔나 왈츠, 왈츠, 유럽탱고, 미국탱고, 살사, 메렝게, 스윙.. 어떤 종류라도 그 음악을 특징 짓는 정확한 박자가 있지만 탱고에는 이런 것이 없다. 늙은 탱고 댄서들이 말하기를 탱고를 잘 추는 사람은 박자를 가슴속에 품고 태어난다고 한다. 기본 스텝만 해도 8박자라고 되어 있지만 사람에 따라서 5박에서 12박까지 다르게 걷는다. 그래서 탱고는 부드럽고 자유로운 춤이며, 춤추는 사람마다의 스타일을 존중하는 춤이다.
현대 모던댄스로서의 탱고는 일반적으로 1분에 32-34 소절에, 2/4 또는 4/4박자의 이거나 36-38소절정도의 빠르기를 가지고 있다. 탱고의 스텝을 잠시 살펴보면 1. walking three step, 2. the promenade chasse, 3. the promenade link, 4. the promenade turn, 5. the outside swivel turn to left 등이 주요한 amalgamation을 형성하는데, 탱고는 남성의 lead가 중요하며, 여성의 flow는 남성의 lead에 따라 그 형태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룸 바(rumba)
룸바는 쿠바의 흑인들로부터 시작한 민속 무용이다. 1913년 쿠바거리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 룸바는 관능적인 면이 이전 춤들보다는 덜하지만 20세기 초에 국제적인 춤곡으로 자리잡게 된다. 카리브해의 쿠바섬 원주민들에게는 일찍부터 이 섬의 특유한 음악이 있었다. 크고 작은 온갖 타악기로써 이루어진 흑인들의 복잡한 리듬과 스페인사람들의 정열적인 멜로디가 융합하여 연주한 이상야릇하고도 매혹적인 것이 룸바음악이다. 룸바음악이 영국에 처음 소개된 것이 "땅콩 장수" 라는 음악이였고, 1930년대에 대중적인 사교춤으로 미국과 유럽에 전파되었다. 이후 룸바는 재즈의 영향을 받아 맘보의 모체가 되었다.
무도장용 룸바는 쿠바인들의 춤인 son을 바탕으로 하지만 룸바는 보다 자유롭고 동작이 많다. 쿠바의 룸바와 맘보는 모두 아프리카의 영향으로 빠른 박자와 격렬한 동작을 가진다
룸바의 도법이 소개된 것은 1931년 무렵이다. 이후, 영국무도강사협회의 무도연구가들이 이 새로운 댄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거듭하여 오늘의 모양을 갖춘 것이 1948년경이며, 그 후 1950년이 지나서 영국의 라틴 아메리칸 댄스의 연구가인 "무슈 삐엘" 이 쿠바섬을 시찰하였을 때, 이미 룸바의 춤이 변화하여 영국에 귀국한 "무슈 삐엘" 은 변화하기 이전의 룸바를 스퀘어 룸바(Square Rumba)또는 아메리칸 룸바(American Rumba)라 하였고, 변화된 새로운 춤을 쿠반룸바(Cuban Rumba)라 하였다. 현재 우리가 흔히 댄스스포츠를 통해서 접하는 것이 바로 이 쿠반 룸바이다.
3) 맘 보
맘보에 관한 역사적 배경은 이미 룸바에서 발전된 형태가 되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정확한 창작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우선 원래 쿠바의 son 몬토우노에서 몬토우노가 독립한 것일거나, 1943년 베로스 부라트가 창안해 멕시코에서 완성되어진 것으로서, 1950년경 전세계에 유행했던 춤으로 4/4박자에 약 34-36소절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QQS,QQS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는 1940년대 초 쿠바에서 몇 사람의 뮤지션에 의해 작곡된 것으로서 40년대 후반에 미국 모던 재즈 연주자에게도 영향을 미쳐, 재즈룸바, swing rumba로 발전했다는 설과, 쿠바 태생의 피아니스트, 지휘자, 작곡 및 편곡가인 페레스 프라도에 의해 1943년 창작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아바나의 카지노에 출여할 무렵, 미국 모던 재즈의 하모니와 주법을 도입하여 쿠바 특유의 afro-latin을 가미하여 야성미 넘치는 강렬한 음색, 신선한 음향을 가진 것으로 탈바꿈 시켰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맘보 곡은 <맘보 제 5번>, <맘보 제 8번>, <쿠반 맘보> 등이 있다.
4) 살 사
살사의 발생지에 관해서는 그것이 쿠바라는 설과 푸에르토리코라는 설이 있다.
카리브 해안의 이들 두 섬은 남미와 북미 사이에 위치해 있다. 중간지대라는 뜻인 cubanacan이라는 인디안의 말에서 유래했다는 쿠바는 1492년 콜럼부스가 쿠바해안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스페인과 만났으며, 푸에라토리코는 1493년 콜럼부스의 두 번째 항해를 통해 스페인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 다음 세기동안 두 섬의 토착민들은 거의 절멸되었고 스페인 이주민들은 1511년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했으며 이 노예제는 19세기 중반까지 존속되었다. 확연히 다른 두 섬이지만 노예제 종식투쟁과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투쟁 등 몇 가지 공동의 역사를 갖고 있다. 1898년 스페인 -미국 전쟁 후 두 섬은 미국령이 되었다가 1959년 쿠바는 독립국이 되었다. 스페인/아프리카/고유문화가 혼합된 문화적 다양성은 쿠바와 푸에르토리코의 풍성한 음악적 전통에 반영되었다.
쿠바는 백인, 흑인, 그리고 그 사이에서 생겨난 뮬라토 등 이들 세 갈래 구성원의 특성을 조합하여 나름의 정체성을 구축해 왔으며 음악은 여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렇게 백인과 흑인을 무리없이 만나게 한 것은 바로 son이라는 음악이며 이는 곧 쿠바만이 아니라 스페인어권 카리브해 일대의 문화를 장악하게 되었다. son은 원래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쿠바 동부지방에서 생겨났다. 처음부터 son은 스페인적 요소와 아프로-쿠바적 요소의 혼합된 형태를 나타냈으며 두가지 기본적인 형식은 1920년대부터 지금까지 거의 유사한 형태로 남아있다. 그리고 살사음악(쿠바인들은 son이나 guaracha라고 부른다.)의 대다수는 이런 유형을 따른다.
1800년대 초반부터 오늘날까지 푸에르토리코는 son, guaracha, rhumba와 bolero 등 다양한 쿠바 음악스타일을 받아들였으며, 푸에르토리코 음악의 풍성함은 많은 부분이 쿠바로부터 얻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seis, bomba, plena 등은 쿠바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푸에르토리코의 전통적인 형식으로서 푸에르토리코를 단순히 쿠바의 모형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1920년대 이래 푸에르토리코 음악은 뉴욕으로 이주해간 이들의 열정적인 활동으로 푸에르토리코 섬에서뿐 아니라 뉴욕에서도 널리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푸에르토리코 문화는 푸에르토리코 섬 내부의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Newyorican 문화와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뉴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또한 Newyorican 문화는 뉴욕의 흑인문화와 여타 라틴문화와 겹쳐지며 그 자체로서 북미문화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1940년대까지 뉴욕의 라틴댄스음악은 푸에르토리코 섬을 앞지를 정도로 풍성한 열매를 맺었으며 오늘날까지도 푸에르토리코보다 뉴욕에서 더 많은 살사밴드와 클럽을 만날 수 있다.
미국 살사에 영향을 준 아프로-쿠바의 비종교적 음악의 주요장르 중의 하나가 rumba이다. 룸바에는 세 가지 주요형식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한 리드싱어와 코러스로 형성되어 있다. 커플댄스인 guaguanco와 yambo 그리고 남자독무인 colombia가 그것들로서, guaguanco는 conga 셋과 clave 그리고 guagua로 연주되며, yambo에서는 cajones가 conga를 대신한다. 미국 살사는 주로 쿠바 음악스타일이나 음악인들과 관련되어 왔다지만 푸에르토리코의 리듬, 멜로디, 그리고 악기의 독특한 혼합이 현대의 뉴욕 살사를 규정짓기도 했다. 푸에르토리코 음악 중 직접적으로 살사에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진 것이 bomba와 plena이다. 아프리카에서 만들어진 bomba는 원통형의 두 북과 함께 연주되며 매우 강렬한 춤과 노래를 특징으로 한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의 생활을 잘 보여주는 plena 노래들은 셋 이상의 pandero(작은 틀의 북)과 타악기들 그리고 sinfonia(하모니카)나 기타같은 비타악기들의 합주로 연주된다. 미국에서 bomba와 plena는 댄스파티, 축하행사 그리고 마을모임 등에서 연주되며 또한 무대공연에서 조화롭게 종합된 형태로 보여지기도 한다.
1970년대 말 살사는 예전의 적극적인 현실묘사에서 멀어져 감상적인 사랑을 주로 노래하게 되었다. 이 시기 라디오와 음반을 통해 흥행하던 살사의 대부분은 훨씬 공격적이던 아프로-카리브 스타일의 Caliente나 Salsa Gorda보다는 Eddie Santiago나 Luis Enrique, Lalo Rogriruez 같은 이들의 부드럽고 감상적인 로맨틱 살사였다. 이런 종류의 살사에 대해 비판이 일기도 했지만, 이들이 살사의 맥을 유지해왔던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살사는 라틴아메리카와 스페인의 경계를 넘어 지금도 많은 이들이 즐기고 있다. 특히 1990년대에는 원래 힙합 혹은 하우스 쪽의 La India나 Mark Anthony 등의 가수들이 신선한 이미지의 살사스타로 청중들을 매혹시키기도 했다. 최근 들어선 Victor Manuelle과 Rey Ruiz가 새로운 살사스타로 부상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두 가수를 통해 50년대와 70년대의 영광을 재현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5) 삼 바
삼바는 남미 브라질의 민속무용이며 또 메시시(Masixe) 라고 하는 순수한 라틴 아메리카 댄스이다. 삼바의 유래는 브라질의 목화밭에서 목화재배의 경작을 위해 아프리카에서 노동인력으로 수입된 노예들이 노동에 혹사를 당하면서 겪는 고통을 잊으려고 그들의 원시적인 특유의 노래가락에 맞추어 율동하였던 몸의 움직임에서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삼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프리카의 기원인 흑인들의 특유한 바운스(Bounce)와 전후의 힙 무브먼트(Hip Movement)를 가미한 피겨와 내츄럴 롤(Natural)이나 리버스 턴(Reverse Turn), 그리고 플랜트(Plant)된 유니크(Unique)한 댄스가 믹서되어 발전하였다.
그것은 최초의 이민자로서 계속하여 브라질에 이주한 유럽의 포르투칼인의 춤이 후자의 것이고, 그 옛날 노예로서 수입된 아프리카 흑인들의 거치른 바운스가 전자의 것이다.
브라질에서는 카톨릭교 4순절의 직전, 3일에서 1주일간에 걸친 "삼바 축제일" 로 제정된 국공일에 모든 브라질인들이 이 "삼바 대축제"에 참가하고 있다. 브라질의 옛 수도인 리오 데 자네이로에서 가장 성대하게 벌어지고 있는 "리오 카니발"은 전세계에서 이 "삼바 대축제"를 보고자 수많은 관광객이 모여들어 이 "삼바 대축제"에 참가하고 또한 이를 배워서 돌아 갈 정도로 유명한 댄스가 바로 브라질의 유일한 민속무용인 삼바춤이다.
이 삼바는 1910년부터 약 10년간 미국에서 사교댄스로 인기가 있었으며, 이 때 미국에서는 이 삼바를 탱고 브라질리언이라 불리었다. 1917년 비로서 사교댄스로 인정받게 된 이 삼바는 한편으로는 카리오카 삼바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이는 브라질의 축제일에 리오 데 자네이로시를 가로질러서 흐르는 조그만한 강인 카리오카를 건너 들어온 흑인들에 의해 소개된 삼바의 원형이 아닐까 한다.
삼바음악의 대부분은 이 리오시의 일상생활을 배경으로 한 것이 많으며, 제일 처음으로 소개된 삼바음악의 대표작은 동가(Donga)의 작곡인 펠로 텔레폰이고 삼바어의 모태는 흑인여자란 잠바(Zamba)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삼바는 20세기초에 세계적으로 널리 유행을 하였으나, 일단 잊혀졌다가 근래에 다시 유행하고 있는 것은 지구촌 사회화의 영향에 따른 해외관광여행의 붐에 편승, 브라질의 "삼바 축제"에 많은 세계인의 참가가 그 원인이 아닐까 한다.
6) 메렝게
메렝게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행해지는 대중적인 민속춤이며, 이웃나라 아이티의 민속춤이기도 하다. 하지만 도미니카와 아이티의 메렝게는 기본적으로 리듬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여러 가지 메렝게의 기원설중 대표적인 두가지를 살펴보면, 우선 쇠사슬에 묶인 채 드럼소리에 맞춰 한쪽 다리를 끌며 일을 했던 노예들의 노동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다리 부상을 당한 한 영웅의 승리 축하파티에서 마을 사람들이 그를 기리어 모두가 한쪽 다리를 끌면서 춤을 춘 데에서 시작되는 설이 있다. 룸바란 춤의 명칭은 설탕과 계란으로 만든 과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인데 그것은 가볍고 천박한 춤의 특성과 간결한 리듬에 기인하는 듯 하다. 메렝게는 북, 드럼, 구이로, 뜨레스, 기타 등으로 연주되며 도시에서는 아코디언과 색소폰이 추가 되었다.
19세기 중반까지 메렝게는 도미니카내에서 가장 대중적인 춤이 되었고, 나아가 조니 벤뚜라(Johnny Ventura)나 윌프레도 바르가스(Wilfredo Vargas)와 같은 음악가들로 인하여 중남미 전체에서 인기있는 춤으로 부상하였다.
3. 맺음말
지면의 제약으로 많은 부분 부족한 설명과 논리의 미흡함을 느끼게 된다. 이는 그만큼 우리가 알고 있는 라틴 댄스의 원형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많으며, 그것의 배경이 바로 유럽인과 미국인의 시각에 의한 것이라고 볼 때,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조차 그 역사와 마찬가지로 식민시대의 잔재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왜인가.
라틴 아메리카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발전된 춤들은 이제 그 정형성을 잃어가고 있으며, 오히려 유럽과 미국에서 변형된 형태로 발전된 양식을 우리는 댄스스포츠 동아리나, 화면상으로 접하고 있다. 물론 그것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양식으로 지금까지 계속 발전되어왔다는 점에 있어서는 두말 할 나위가 없지만, 그 느낌, 정서가 틀리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룸바라는 춤을 보자. 이 춤은 흔히 사랑의 춤이며, 연인의 춤이라고 불리워진다. 그만큼 음악이 감미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바 대로 과연 그러한가. 쿠바로 팔려간 흑인 노예들의 리듬과 그들의 삶이 그러했던가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다소 아쉬움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도 아직까지는 라틴댄스의 종주국이라는 위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여전히 그 전통을 유지시켜나가는 라틴 아메리카 제 국가들의 건승을 바라며 맺음말을 마감한다.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라틴댄스에 대해서 공부 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