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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번호 |
11 |
날짜 |
2001-05-30 |
조회수 |
134 |
이 름 |
정 종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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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신의터 재 後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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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저는 상주 지경의 대간을 3회차 지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지기재에서 새벽 3;30에 출발하여, 신의터 재, 김지미가 아닌 윤지미산을 넘어 화령재에 08:30에 도착하였습니다. 산길 23KM를 15킬로 배낭를 메고 5 시간에 주파해도 야산 지대라 힘이 남아 돌더군요.
윤지미에서 맥주 두캔하고 왔는데 면장 지낸 촌로들이 소주 몇잔을 주셔서 목울 축이고 화령정에 올랐습니다. 동행한 산우들이 담은 소주를 권해 또 몇잔 하엿습니다.
화령정의 편액에서 나의 먼 할아버님 정자 기자 룡자 님의 기공기를 읽으며 감개무량하였습니다.
충의공께서는 일반인은 잘 모르나, 임진 정유왜란을 통하여 대소 200여회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은 유일한 육군 지휘관이셨습니다. 명나라 장수도 이를 인정하여 함양 전역에서 명군의 총병자격으로 1,500 조명 연합군을 지휘하시어, 내 고향 사근역에서 배수진을 치셔서, 5,000 왜군에 크게 승리하시어 명 황제로부터 하사품을 받으신 유일한 육장이셨습니다. 공께서는 충무공의 차차기로 삼도 수군 통제를 맡으시어 병제를 재정비 하셨습니다.
또 화령정에서 불과 1.5킬로 거리의 화령초등학교는 625 사변시 패주하던 아군의 첫 승전지입니다. 옹진 반도에서 철수한 백인엽의 18연대가 안동으로 향하던중 이 고개에 쉴때 초교 여선생이 제보하여, 마음 놓고 휴식하던 박 성철의 건제 적 15사단의 기계화 주력을 섬멸하였습니다. 이 승리가 없었다면 영천 전투의 승리는 보장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박 성철은 수안보에 와있던 김 일성에 소환되어 옷을 벗었으나, 김의 신임이 두터워, 부수상으로 진급, 남북회담 수석대표로 서울에 온 바 있습니다.
또한 이곳 상주는 태조 왕건에 나오는 아자개의 거점으로 화령정에 가까운 거리에 사벌면이 있으며, 옛 사벌성 자리도 있습니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