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음악[新羅樂]은 삼죽(三竹), 삼현(三絃), 박판(拍板), 대고(大鼓), 가무(歌舞)였다. 춤은 두 사람이 추었으니, [그들은] 방각 복두(放角頭)를 쓰고, 자주색의 큰 소매가 달린 공란(公)을 입고, 붉은 가죽띠에 도금한 띠고리를 단 허리띠를 두르고, 검은 가죽 목신발을 신었다. 삼현은, 첫째는 거문고[玄琴], 둘째는 가야금(加耶琴), 셋째는 비파(琵琶)였다. 삼죽은, 첫째는 대금(大), 둘째는 중금(中), 셋째는 소금(小)이었다.
거문고[玄琴]는 중국 악부(樂部)의 금(琴)을 본받아 만들었다. 살피건대 금조(琴操)에 이르기를 『복희(伏犧)씨가 금을 만들어 심신을 닦고 본성을 다스려서 그 천진함을 되찾게 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금의 길이 석 자 여섯 치 여섯 푼은 366일을 상징한 것이고, 너비 여섯 치는 천지와 사방[六合]을 상징한 것이다. 문(文)의 위를 지(池)<지(池)는 물(水)이니 그 평평함을 가리킨다.>
라 하고 아래를 빈(濱)<빈(濱)은 복(服)이다.>
이라 하였으니, 앞이 넓고 뒤가 좁은 것은 존귀함과 비천함을 상징한 것이다. 위가 둥글고 아래가 네모난 것은 하늘과 땅을 본받은 것이다. 다섯 줄은 오행(五行)을 상징하고, 큰 줄은 임금이 되고 작은 줄은 신하가 되는 것인데,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두 줄을 더하였다.』
또 풍속통(風俗通)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금의 길이 네 자 다섯 치는 네 철[四時]과 오행(五行)을 본받은 것이고, 일곱 줄은 칠성(七星)을 본받은 것이다.』
거문고의 제작에 대하여 신라고기(新羅古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처음에 진(晉)나라 사람이 칠현금(七絃琴)을 고구려에 보냈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비록 그것이 악기인 줄은 알았으나 그 음악과 타는 법을 몰랐으므로, 나라 사람 중에 그 음을 알아서 탈 수 있는 자를 찾으면서 후한 상을 걸었다. 그 때에 제2상(第二相) 왕산악(王山岳)이 그 본래 모양을 보존하면서 자못 그 법제를 고쳐서 만들고, 아울러 100여 곡을 만들어 연주하였다. 이때 검은 학[玄鶴]이 와서 춤추었으므로 드디어 현학금(玄鶴琴)이라고 이름하였는데, 후에는 다만 현금(玄琴)이라고 하였다.
신라 사람 사찬(沙) 공영(永)의 아들 옥보고(玉寶高)가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거문고를 배운 지 50년에 스스로 신조(新調) 30곡을 만들어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하였다. 속명득이 이를 귀금 선생(貴金先生)에게 전하니, 선생 또한 지리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신라 왕이 거문고의 이치와 타는 법[琴道]이 단절될까 우려하여 이찬 윤흥(允興)에게 일러 “방편을 써서라도 그 음을 전할 수 있게 하라.” 하고 드디어 남원(南原)의 공사(公事)를 맡겼다. 윤흥이 관아에 이르러 총명한 소년 두 사람을 뽑았으니, 안장(安長)과 청장(淸長)이었다. [윤흥은 그들에게] 산중에 들어가 전수받아 배우게 하였다. 선생이 그들을 가르쳤으나 그 중 미묘한 것은 숨기고 전하지 않았다. 윤흥이 부인과 함께 나아가 말하였다.
“우리 왕이 나를 남원에 보낸 것은 다름 아니라 선생의 기술을 전수하고자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3년이 되었으나 선생이 숨기고 전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나는 복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윤흥이 두 손으로 술을 받들고 그의 부인은 잔을 들고 무릎으로 기면서 예절과 성의를 다하였다. 그런 후에야 그가 숨기던 표풍(飄風) 등 세 곡을 전수받았다. 안장이 그의 아들 극상(克相)과 극종(克宗)에게 전하고, 극종이 일곱 곡을 지었으며, 극종의 뒤에는 거문고를 자신의 직업으로 삼는 자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지은 음곡에는 두 조(調)가 있으니, 첫째는 평조(平調), 둘째는 우조(羽調)로서 모두 187곡이나, 그 남겨진 음곡 중에 널리 전파되어 기록할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고, 나머지는 모두 흩어져서 갖추어 기재할 수 없다.
옥보고가 지은 30곡은, 상원곡(上院曲) 하나, 중원곡(中院曲) 하나, 하원곡(下院曲) 하나, 남해곡(南海曲) 둘, 의암곡(倚曲) 하나, 노인곡(老人曲) 일곱, 죽암곡(竹庵曲) 둘, 현합곡(玄合曲) 하나, 춘조곡(春朝曲) 하나, 추석곡(秋夕曲) 하나, 오사식곡(吾沙息曲) 하나, 원앙곡(鴛鴦曲) 하나, 원호곡(遠岵曲) 여섯, 비목곡(比目曲) 하나, 입실상곡(入實相曲) 하나, 유곡청성곡(幽谷淸聲曲) 하나, 강천성곡(降天聲曲) 하나였다. 극종이 지은 일곱 곡은 지금[고려]은 없어졌다.
가야금(加耶琴)도 중국 악부의 쟁(箏)을 본받아 만들었다. 풍속통(風俗通)에 『쟁은 진(秦)나라 음악이다.』라고 하였고, 석명(釋名)에 『쟁은 줄을 높이 매어 소리가 쟁쟁하며, 병주(幷州)·양주(梁州)의 두 주의 쟁은 모습이 슬(瑟)과 같다.』고 하였다.
부현(傅玄)이 말하였다.
“위가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하고 아래가 평평한 것은 땅을 상징하며, 가운데가 빈 것은 천지와 사방[六合]을 본받고 줄과 기둥은 열 두 달에 비겼으니, 이는 곧 인(仁)과 지(智)의 악기이다.”
완우(阮瑀)가 말하였다.
“쟁은 길이가 여섯 자이니 음률의 수에 응한 것이다. 줄이 열 두 개가 있는 것은 네 철[四時]을 상징하고, 기둥의 높이가 세 치인 것은 하늘·땅·사람[三才]을 상징한다.”
가야금은 비록 쟁과 제도가 조금 다르지만 대개 그와 비슷하였다.
신라고기[羅古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가야국(加耶國) 가실왕(嘉實王)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다. 왕은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기 다르니 음악이 어찌 한결같을 수 있으랴?” 하고는 악사(樂師) 성열현(省熱縣) 사람 우륵(于勒)에게 명하여 12곡을 짓게 하였다.
후에 우륵은 그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악기를 지니고 신라 진흥왕에게 투항하였다. 왕은 그를 받아 국원(國原)에 안치하고, 대나마 주지(注知)·계고(階古)와 대사 만덕(萬德)을 보내 그 업을 전수받게 하였다.
세 사람이 이미 12곡을 전수받고 서로 말하기를 “이것은 번잡하고 음란하니, 우아하고 바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하고는 드디어 축약하여 다섯 곡으로 만들었다. 우륵이 처음에 [그 말을] 듣고 노하였으나, 그 다섯 가지의 음곡을 듣고나서는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면서 말하였다.
“즐거우면서도 무절제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바르다고 할만 하구나. 너희는 그것을 왕의 앞에서 연주하라.”
왕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였는데, 간언하는 신하[諫臣]가 의논하여 아뢰었다.
“가야에서 나라를 망친 음악이니, [이는] 취할 것이 못 됩니다.”
왕이 말하였다.
“가야 왕이 음란하여 스스로 멸망한 것이지 음악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대개 성인(聖人)이 음악을 제정함은 인정에 연유하여 법도를 따르도록 한 것이니, 나라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음악 곡조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드디어 그를 행하게 하여 대악(大樂)으로 삼았다.』
가야금에는 두 조(調)가 있으니, 첫째는 하림조(河臨調), 둘째는 눈죽조(嫩竹調)로서, 모두 185곡이었다.
우륵이 지은 12곡은, 첫째는 하가라도(下加羅都), 둘째는 상가라도(上加羅都), 셋째는 보기(寶伎), 넷째는 달이(達已), 다섯째는 사물(思勿), 여섯째는 물혜(勿慧), 일곱째는 하기물(下奇物), 여덟째는 사자기(師子伎), 아홉째는 거열(居烈), 열째는 사팔혜(沙八兮), 열한째는 이사(爾赦)<사(赦)자는 알 수 없다.>
, 열두째는 상기물(上奇物)이었다. 이문(泥文)이 지은 세 곡은, 첫째는 오(烏), 둘째는 서(鼠), 셋째는 순()이었다.
비파(琵琶)에 대하여 풍속통(風俗通)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근대의 음악가[樂家]가 만든 것이나 기원하는 바를 알 수 없다. 길이 세 자 다섯 치는 하늘·땅·사람[天地人]과 오행(五行)을 본받은 것이고 네 줄은 네 철[四時]을 상징한 것이다.』
석명(釋名)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비파는 본래 오랑캐[胡] 사이에 말 위에서 타는[鼓] 것이었다. 손을 앞으로 내미는 것을 비(琵)라 하고 손을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을 파(琶)라 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이름으로 삼았다.』
향비파(鄕琵琶)는 당나라의 제도와 대동소이한 것으로 역시 신라에서 시작되었으나 다만 누가 만들었는지를 알 수 없다. 그 음은 세 조(調)가 있으니, 첫째는 궁조(宮調), 둘째는 칠현조(七賢調), 셋째는 봉황조(鳳凰調)로서, 모두 212곡이었다.
삼죽(三竹)도 당나라의 적[唐笛]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풍속통(風俗通)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적(笛)은 한나라 무제(武帝) 때에 구중(丘仲)이 만든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송옥(宋玉)의 적부(笛賦)가 있고, 송옥은 한나라 이전에 있었으니, 아마 이 설은 틀린 듯하다. 마융(馬融)은 “근대의 쌍적(雙笛)은 강(羌)에서부터 기원하였다.”고 말하였다. 또한 적(笛)은 척(滌)이니, 사특함과 더러움을 씻어내어 우아함과 올바름으로 들게 한다는 것이다. 길이는 두 자 네 치이고 구멍은 일곱 개이다.』
향삼죽(鄕三竹)도 역시 신라에서 기원하였으나 누가 만들었는지를 알 수 없다. 고기(古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신문왕(神文王) 때에 동해 안에서 홀연히 한 작은 산이 나타났는데 형상이 거북의 머리와 같았고, 그 위에 한 줄기의 대나무가 있어서 낮에는 나뉘어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베어다가 적(笛)을 만들고 이름하여 만파식(萬波息)이라고 하였다.』
비록 이러한 설이 있으나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삼죽적(三竹笛)에는 일곱 조(調)가 있으니, 첫째는 평조(平調), 둘째는 황종조(黃鐘調), 셋째는 이아조(二雅調), 넷째는 월조(越調), 다섯째는 반섭조(般涉調), 여섯째는 출조(出調), 일곱째는 준조(俊調)였다. 대금(大)은 324곡, 중금(中)은 245곡, 소금(小)은 298곡이었다.
회악(會樂)과 신열악(辛熱樂)은 유리왕 때 지은 것이고, 돌아악(突阿樂)은 탈해왕 때 지은 것이고, 지아악(枝兒樂)은 파사왕 때 지은 것이고, 사내악(思內樂)<[사내(思內)는] 시뇌(詩惱)라고도 썼다.>
은 나해왕 때 지은 것이고, 가무(舞)는 나밀왕(奈密王) 때 지은 것이고, 우식악(憂息樂)은 눌지왕 때 지은 것이고, 대악(樂)은 자비왕 때의 사람인 백결 선생(百結先生)이 지은 것이고, 우인(引)은 지대로왕(智大路王) 때의 사람인 천상욱개자(川上郁皆子)가 지은 것이고, 미지악(美知樂)은 법흥왕 때 지은 것이고, 도령가(徒領歌)는 진흥왕 때 지은 것이고, 날현인(捺絃引)은 진평왕 때의 사람인 담수(淡水)가 지은 것이고, 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은 원랑도(原郞徒)가 지은 것이었다. 내지(內知)는 일상군(日上郡)의 음악이고, 백실(白實)은 압량군(押梁郡)의 음악이고, 덕사내(德思內)는 하서군(河西郡)의 음악이고, 석남사내(石南思內)는 도동벌군(道同伐郡)의 음악이고, 사중(祀中)은 북외군(北郡)의 음악이었다.
이들은 모두 우리 나라 사람들이 기쁘고 즐거운 까닭으로 지은 것이었다. 그러나 악기의 수효와 가무의 모습은 후세에 전하지 않는다. 다만 고기(古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정명왕(政明王)[신문왕] 9년(689)에 신촌(新村)에 행차하여 잔치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케 하였는데, 가무(舞)는 감(監) 여섯 사람, 가척(尺) 두 사람, 무척(舞尺) 한 사람이고, 하신열무(下辛熱舞)는 감 네 사람, 금척(琴尺) 한 사람, 무척 두 사람, 가척(歌尺) 세 사람이고, 사내무(思內舞)는 감 세 사람, 금척 한 사람, 무척 두 사람, 가척(歌尺) 두 사람이고, 한기무(韓岐舞)는 감 세 사람, 금척 한 사람, 무척 두 사람이고, 상신열무(上辛熱舞)는 감 세 사람, 금척 한 사람, 무척 두 사람, 가척(歌尺) 두 사람이고, 소경무(小京舞)는 감 세 사람, 금척 한 사람, 무척 한 사람, 가척(歌尺) 세 사람이고, 미지무(美知舞)는 감 네 사람, 금척 한 사람, 무척 두 사람이었다. 애장왕 8년(807)에 음악을 연주할 때 처음으로 사내금(思內琴)을 연주하였는데, 무척 네 사람은 푸른 옷이고, 금척 한 사람은 붉은 옷이고, 가척(歌尺) 다섯 사람은 채색 옷에다 수놓은 부채 및 금실 허리띠였다. 다음에 대금무(琴舞)를 연주하였는데, 무척은 붉은 옷이고, 금척은 푸른 옷이었다.』
이와 같을 뿐인즉, 그 상세한 것을 말할 수 없다. 신라 때에는 악공(樂工)을 모두 척(尺)이라고 불렀다.
최치원(崔致遠)의 시(詩)에 향악잡영(鄕樂雜詠) 다섯 수(首)가 있으므로 지금 여기에 기록한다.
금환(金丸)
몸을 빙빙 돌리고 팔을 휘두르며 금환을 희롱하니,
달이 구르고 별이 떠다녀서 눈에 가득차 보이네.
의료(宜僚)가 있다한들 어찌 이보다 나을쏜가!
이제야 큰 바다의 물결이 잠잠해진 이유를 알겠네.
월전(月顚)
어깨 높고 목 오그라지고 머리카락 우뚝 솟아,
팔뚝 걷은 여러 선비 술잔을 다투네.
노랫소리 들으면서 사람들 모두 웃는구나!
초저녁에 세운 깃발이 새벽녘을 재촉하네.
대면(大面)
황금빛 얼굴색이 바로 그 사람인데,
구슬채찍 손에 들고 귀신을 부리네.
빠른 걸음 느린 달음질, 우아한 춤 드러나니,
마치 붉은 봉새가 태평 성대에 춤추는 것 같구나.
속독(束毒)
쑥대머리 남빛 얼굴이 사람같지 않은데,
떼지어 뜰에 와서 난새춤을 배우네.
북치는 소리 둥둥, 바람은 솔솔!
남쪽으로 북쪽으로 뛰고 달리며 끝이 없구나.
산예(猊)
멀리 유사(流沙)를 건너 만리를 오느라,
털옷은 다 해어지고 먼지를 뒤집어썼네.
머리를 흔들고 꼬리를 휘두름에 어진 덕이 배었으니,
굳센 그 기상 어찌 온갖 짐승 재주와 같을쏘냐!
고구려 음악[高句麗樂]은 통전(通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악공인(樂工人)은 자주색 비단모자[紫羅帽]에 새깃으로 장식하고, 누른색 큰 소매옷[黃大袖]에 자주색 비단띠[紫羅帶]를 두르고 통 넓은 바지[大口袴]를 입었으며, 붉은 가죽 목신발[赤皮]을 신고 오색의 검은 노끈[緇繩]을 매었다. 춤추는 자 네 사람은 뒤에 상투를 틀고 진홍색[絳]을 이마에 바르고 금귀고리[金]로 장식하며, 그 중 두 사람은 누른색 치마·저고리[黃裙]에 적황색 바지[赤黃袴]요, 두 사람은 적황색의 치마·저고리와 바지를 입는데, 소매를 극히 길게 하고 검은 가죽 목신발[烏皮]을 신고 쌍쌍이 나란히 서서 춤을 추었다. 음악에는 탄쟁(彈箏) 하나, 추쟁(箏) 하나, 와공후(臥) 하나, 수공후(竪) 하나, 비파 하나, 오현(五絃) 하나, 의취적(義笛) 하나, 생(笙) 하나, 횡적(橫笛) 하나, 소(簫) 하나, 소필률(小) 하나, 대필률(大) 하나, 도피필률(桃皮) 하나, 요고(腰鼓) 하나, 제고(齊鼓) 하나, 담고(擔鼓) 하나, 패(貝) 하나를 썼다. 당나라[大唐] 무태후(武太后) 때는 오히려 25곡이 있었으나, 지금은 오직 한 곡을 익힐 수 있고, 의복도 차츰 낡아 없어져서 그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음악에 오현(五絃), 금(琴), 쟁(箏), 필률(), 횡취(橫吹), 소(簫), 고(鼓) 등속이 있으며, 갈대를 불어 곡조를 맞추었다.』
백제 음악[百濟樂]은 통전(通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의 음악은 중종(中宗) 때에 공인(工人)들이 죽고 흩어져서, 개원(開元) 중에 기왕범(岐王範)이 태상경(太常卿)이 되어 다시 아뢰어 그를 설치하였다. 그래서 음악과 재주가 많이 빠졌다. 춤추는 자 두 사람은 자주색 큰 소매옷과 치마·저고리에 장보관(章甫冠)을 쓰고 가죽신[皮履]을 신었다. 음악의 남은 것은 쟁(箏), 적(笛), 도피필률(桃皮), 공후()였다.』
이로 보아 악기 등속이 내지(內地)와 많이 같다.
북사(北史)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고(鼓), 각(角), 공후(), 쟁(箏), 우(), 지(), 적(笛)의 음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