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피고 있는 부처님 십대제자를 어떤 분들이 어떤 시대에 어떤 목적으로 엮었는지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자료들이 빈약합니다. 그렇지만 오늘 만나게 될 라훌라(Rāhula) 존자에 관한 기록이나 경전은 상당히 많습니다. 제가 팔리 경전을 살펴보니 라훌라 존자에게 설해졌거나 이름이 언급된 경전 수만 12개에 이릅니다. 대승경전으로는 <유마경>에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라훌라 존자는 알려진 바와 같이 부처님의 아들입니다. 부처님 제자가 되어서는 밀행(密行) 제일로 불리었습니다.
앙구타라 니까야(Aṅguttara Nikāya)라는 <증지부 아함> 첫 부분에 “내 제자 가운데 열심히 배우고자 하는데 으뜸인 라훌라” 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라훌라 존자가 밀행 제일로 불리게 된 연유로 “공부하기 좋아하는데 으뜸인 라훌라”라는 부처님 말씀에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또 라훌라 존자의 출가 배경이나 생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라훌라 존자가 태어난 날은 부처님이 출가하던 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주석서에는 ‘라훌라’ 라는 말은 ‘속박’ ‘무엇인가를 묶어둔다’라는 뜻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되시기 전, 싯달타 태자는 출가를 고민하던 중 라훌라의 탄생소식을 듣습니다. 이 소식은 또 하나의 걱정이었습니다. 그 걱정은 아이의 이름을 ‘라훌라’라고 했던 근원이었습니다.
사실 라훌라라는 말은 힌두신화에 나오는 신의 이름입니다.
자기들이 지어 놓은 업에 따라 복을 받고 지어놓은 업만큼 복이 소진하면 다시 신의 지위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하는 것이 힌두신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힌두 신들은 죽음을 걱정한 나머지 어떻게 하면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의 지위를 얻을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신들이 까일라스라는 히말라야 산으로 바다를 휘저어서 불사약을 얻습니다.
불사약을 얻자 어느 신이 약병을 들고 달아나서 먹으려고 하는데 밝은 달이 떳습니다. 껌껌한 곳에서 약을 먹던 신의 얼굴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가 바로 ‘라후’입니다. 라후는 더 이상 약을 먹을 수가 없었고 쫓겨나게 됐습니다. 라후는 쫓겨나면서 달을 저주하게 되었습니다. 가끔 나타나는 일식, 월식이 그때의 라후가 달을 갈아먹으며 복수를 하는 것이라 합니다.
힌두의 신들이 보기에 라후는 고약한 놈이자 방해자였습니다.
청년 싯달타가 자기의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리를 듣고, ‘아이구, 방해자가 생겼군’ 이라고 했던 혼잣말이 아이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싯달타가 출가하여 수행 끝에 완전한 해탈의 길을 보고 열반을 증득했습니다. 그 후 고향을 찾아옵니다. 라훌라가 출생한 후 6년간 고행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라훌라 나이 일곱 살 되던 해였습니다.
부처님이 아버지 정반왕의 초청으로 왕궁에서 공양을 받게됩니다. 일곱 살 먹은 라훌라가 공양이 끝나고 돌아가는 부처님을 따라가며 청합니다.
“유산을 주십시오”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재물은 없다. 다만 열반과 해탈을 성취하는 길을 알려 줄 수 있을 뿐이다. 내가 가진 그 유산을 가질 것인가”
이렇게 해서 부처님 제자 가운데 최초의 사미가 탄생합니다. 부처님은 아들인 라훌라를 지혜 제일 사리불 존자에게 맡깁니다.
경전에 보면 사미승 라훌라는 짓궂은 장난으로 수행자들을 골탕 먹이거나 사람들을 속이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나무라지 못하고 난처해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어린 사미 라훌라를 만나면 혼을 내거나 달래곤 했습니다.
<중부 니까야> ‘망고동산에서 라훌라에게 주신 가르침’은 라훌라가 새롭게 태어나는 전환점이 됩니다.
하루는 부처님이 망고 동산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라훌라 존자가 발 닦을 물을 준비했습니다. 발을 닦는 부처님께 예를 올린 라훌라 존자가 한 쪽에 물러나 앉았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그릇에 남은 물을 보이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발 닦은 물처럼 하찮은 것이 알면서 거짓말을 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수행자의 삶이다."
그리고는 그 물을 버리며
"이처럼 버려지는 것이, 고의로 거짓말을 하면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수행자의 삶이다."
이어 부처님이 물그릇을 엎어놓으며
"이렇게 엎어진 것이 바로 고의로 거짓말을 하면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수행자의 삶이다."
다시 부처님이 물그릇을 바로 놓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텅 비어 공허한 것이 알면서 거짓말을 하고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수행자의 삶이다. 이것은 마치 긴 상아에 커다란 몸집으로 전쟁터에 나온 코끼리와 같다. 그 코끼리는 온몸으로 싸움을 하면서도 코는 다치지 않게 보호한다. 그러나 그 코끼리가 코를 쓰게 되면 조련사는 '이 코끼리가 이제 목숨을 버렸구나, 드디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구나'라고 알게된다. 마찬가지로, 라훌라여 알면서 거짓말을 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이제 그가 하지 못할 악행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심하여 닦지 않으면 안 된다. '장난으로라도 거짓을 말하지 말라"
이것은 요즘말로 ‘중노릇 잘못하고 있다’는 엄한 꾸지람입니다. 경전에 보면 이때부터 라훌라 존자는 마음을 고쳐먹고 열심히 정진하게 됩니다. 그후 라훌라 존자는 아침마다 모래를 한줌 쥐고
“제가 오늘 움켜쥔 모래수 만큼 우리 스승님들로부터 고귀한 가르침을 듣게 해주십시오” 라고 발원하고 공부했습니다.
우리도 평소 라훌라 존자와 같이 공부하기를 권해봅니다.
밀행은 ‘남몰래 열심히 하다’는 뜻이지만 ‘주도면밀하게 정교하게’라는 뜻도 포함합니다. 장난꾸러기 라훌라가 후에 공부가 되어 밀행제일로 불렸던 연유는 드러내지 않고 남 몰래 차근차근 엄밀하게 정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찰에서 라훌라 존자를 쉽게 만날 수 있는데 나한전에 모셔진 16나한 가운데 11번째 나한이 바로 라훌라 존자입니다.
경전에서 라훌라 존자에 관한 내용은 대부분 부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테라가타 장노게에 라훌라 존자의 게송이 나옵니다.
두 가지를 갖춘 까닭에 내 이름 축복 받은 라훌라 / 붓다의 아들로 법 보는 눈(法眼)을 얻었네
번뇌 모두 씻어 다시 태어나지 않으리 / 세 가지 지혜(三明)로 不死를 보니 공양 받을 만한 아라한이라
쾌락에 눈멀고 갈망의 그물에 사로잡힌 사람들 / 망태기에 든 물고기처럼 해태(懈怠)라는 이름의 친척들에 묶였네
나 저 쾌락을 내려놓고 마라(Māra)의 사슬을 벗었어라 / 갈망의 뿌리 뽑고 불꽃 사그라들어 서늘하여라.
여기서 부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석가족의 왕위계승권을 가진 싯달타의 아들이라는 것이 아니고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올바른 지혜, 또 그런 것을 통해 스스로 증득한 경지를 가진 사람으로서 부처님 아들을 뜻합니다. 세가지 지혜는 자신의 전생에 관한 지혜, 중생들의 죽음과 내생에 관한 지혜, 업의 소멸에 관한 지혜를 말합니다. 법안이란 세상을 제대로 올바르게 보는 부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르게 아는 불교적 세계관을 증득했음을 말합니다. 이로써 두 가지를 갖춘 아라한이라고 스스로 선언합니다.
<유마경>에서 유마거사는 라훌라 존자에게 “출가의 공덕은 그야말로 무이고 말로 할 수 없는 것으로 모두 내려놓은 것인데 어떻게 공덕과 이득을 이야기 합니까?” 고 묻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가나 라훌라 존자의 출가가 가질 수 있는 메시지는 매일 매일의 출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태도로 세상을 보고, 이웃과 나 자신을 보는지, 거기에서 정말 제대로 보는 일, 그것과 합당하게 사유하는 일이 곧 매일 매일하는 출가라고 봅니다. 거기에서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이 채워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출가는 방하착(放下着)으로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 생각 한번 내려놓아 볼까?’ 이것이 출가의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고 있는 노력이나 현재의 내 삶이 정말 그렇게 아둥바둥 해야 될 일인가? 정말 해야 되는가? 다시 한번 확실하게 밝혀서 정말 해야 된다면 올바르게 해야겠습니다. 그것이 매일 매일 출가하는 밀행 제일 라훌라 존자의 가르침이라 하겠습니다.
문 :
부처님은 아들이자 제자인 라훌라 존자를 엄히 꾸짖어 가르켰다고 하였는데 세속에 살면서 자식들을 교육하는 방법을 소개해 주세요
답:
경전에서는 교육에 대해 두가지 형태가 나옵니다. 꾸지람과 칭찬입니다. 시기적으로 초기경전을 보면 비교적 꼬집고 지적하는 쪽이 강합니다. 후기 대승경전 쪽으로 가면 칭찬하고 북돋워 주는 것이 보입니다. 꼭 대승경전과 초기경전이라고 구분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인 분위기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지적하는 이와 풀어나가는 이의 마음입니다. 너그러우면서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꽉 차있다면 표현 방법이 과격하더라도 이해하지만 서로 비툴어져 있다면 아무리 부드러운 말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경전에서는 늘 ‘말도 좋고 뜻도 좋게’를 강조합니다. 이렇게 말씀하는 것은 가슴도 따뜻해야 되지만 그것을 담아내는 표현방식이 보다 더 정교하고 따뜻한 자비로 채워진다면 정말 멋진 일이 되겠지요. 자녀나 학교의 학생들에게 더욱 따뜻한 자비심으로 대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