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3일
숙소에서 나오니 8시 50분이었다.
고급 펜션에서 아름다운 저녁놀을 보면서 잤는데도
꿈자리가 사나워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 탓으로 늦게 일어난 것 같았다.
구중궁궐에서 산해진미를 먹고 금침에서 자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몸도 편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몸이 어쩐지 찌뿌둥했다.
날씨는 여전히 무더웠다.
하지만 펜션밖으로 나와 바다를 바라보는 순간 바로 기분이 좋아졌다.
구멍이 숭숭 뚫린 돌멩이로 둘러싸인 집들과 돌담 넘어로 보이는 바다가 시원했다.
제주도 집들은 주로 해안가로 몰려 있었다.
아마 화산지대라 바닷가로 솟아오르는 용천수 때문인 것 같았다.
바닷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은 바다를 안고 있었다.
집안에서 문을 열고 나서면 하늘빛 쪽빛 바다가 가슴 가득히 찼다.
제주도 사람들은 가슴에 넓고 푸른 바다를 안고 살고 있었다.
아침부터 찌기 시작하더니 11시 정도 되면서는
그 열기가 장난이 아니게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바다를 닮은 하늘은 한 폭의 수채화였다.
어찌 이렇게 기분 좋은 하늘이 있을 수 있을까?
흐르는 구름 사이로 흐르는 시간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멀리 제주도 한라산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제주도는 어디서든지 날씨가 좋은 날이면 한라산을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쪽빛 하늘빛이 눈부셔 한라산이 바닷속에 있는지 하늘속에 있는지 헷갈린다.
함덕해수욕장을 그냥 지나쳤다.
아름다운 함덕해수욕장에서 꼭 해수욕을 하고 싶었으나
일정에 여유를 갖기 위해 아쉬웠지만 다음으로 미루었다.
그런데 함덕을 지나 조천면으로 접어들면서부터
12번 국도의 자전거 도로가 좁아져 걷기에 심히 불편했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었다.
지도를 보니 북촌리에서 함덕해수욕장이 있는 함덕리로 들어가면
신촌리까지 걷기 좋은 길이 이어져 있었다.
도보여행에서 일단 길에 들어서버리면 다시 되돌아가서
다른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도보여행에서 길을 잘 판단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걷는 동안에는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했던 길이
그 길을 다 걷고 난 후에는 그 반대의 생각이 될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길을 걸을 때 일단 길을 선택하면 회의를 갖지 않는다.
그 길에 푹 빠져서 그 길을 즐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수많은 길을 걸으면서 깨달은 것이다.
어떻게 선택했든지 그 선택은 많은 것을 얻게도 하고 잃게도 한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훗날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
후회를 하고 또 후회를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어 한다.
“그 때 그 길을 가는 것이 아니었다고.”
나는 갈림길에서 고민할 때마다 중학교 때 좋아했던,
프로스트의 시(가지 않은 길)가 생각난다.
“멀고 먼 훗날 어딘가에서 한숨지으며
오늘 일을 말하고 있으리라.
두갈래 길이 숲속에 나 있어
나는 사람들이 덜 다닌 듯한 길을 택했었는데
결국 그것이 나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라고......”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매연을 마시며, 차의 소음 때문에 MP3 음악도 듣지 못하는
고행길이 신촌에 와서야 끝이 났다.
신촌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에어컨이 나오는 시원한 음식점을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삼양해수욕장까지 와서야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삼양해수욕장은 함덕해수욕장에 비해 보잘 것 없었으나
제주시가 가까워서 그런지 아파트도 많았고 상가와 큰 음식점도 많았다.
‘도뚜리’라는 간판이 보여서 들어갔더니 에어컨은 시원했으나 음식은 별로였다.
허겁지겁 점심을 먹고 나와 삼양 시내를 지내 가자니 좋은 음식점들이 많이 있었다.
또 선택을 잘못한 것이었다.
저절로 후회가 들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제주시 경계에 들어오니 도로 정비가 더 잘되어 있어 걷기에 좋았다.
시간이 조금 여유가 있어 가는 길목에 있는 국립제주박물관에 들러 관람을 했다.
박물관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곳(이유:대부분 지배계급의 문화 일색이기 때문)이지만
시원한 에어컨이 있는 곳에서 쉬고 싶었다.
오늘은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 마음이 풀려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막바지에 기승을 부리는 더위 때문인지 모르지만,
유난히 목이 말라 물을 많이 마셨다.
하지만 시원한 얼음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것은 꿈속 같다.
이렇게 물이 맛이 있을 줄이야!
지구상에 가장 맛있는 것이 물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제주시에 들어오니 저녁노을이 시내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매연이 없어서 그런지 저녁노을의 색깔이 선명했다.
도심에서도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제주시 사람들이 부러웠다.
과일과 우유를 산 후에 관덕정 앞에 있는 관덕정 모텔(25,000)을 숙소로 잡았다.
옷을 빨아 주인아저씨께 탈수를 부탁했더니 흔쾌히 들어주었다.
한여름 도보여행에서 귀찮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숙소에 도착하면 바로 옷을 빨아서 탈수를 한 후에 말리는 일이다.
탈수를 하여 에어컨이 있는 방안에 펼쳐 걸어두면 아침이면 말끔하게 마른다.
대부분 여관은 탈수기가 있다.
또 탈수를 부탁하면 거의 다 들어주었다.
제주,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곳이고, 또 기분 좋은 사람들이다.
걸은 거리(17km) : 동복리 --> 북촌리 --> 신흥리 --> 신촌리
--> 삼양해수욕장 --> 제주 민속 자연사 박물과 --> 제주시 관덕정
첫댓글 제주의 노을 끝내주네요.
'쪽빛 하늘빛이 눈부셔 한라산이 바닷속에 있는지 하늘속에 있는지 헷갈린다.' 표현이 넘 멋져요.
저두 그부분이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글을 너무 이쁘게 잘쓰세요~
드디어 제주 시내입성 축하합니다 제주의 마지막 밤
소진님같이 걸을수 있을까? 혼자서 수행과 정신의 맑아짐 해탈의 경지 소진님의 걷기는 보통의 대화와 여행과는 다른 관점인듯 "걷기란 다이어트다" 그래서 열심히 걷고 뒷풀이 안좋아합니다 진정한 걷기는 혼자걷기
그런데도 자꾸 잔차쪽으로 관심이 가네요 떠나기전 예약하면 더욱더 편안함을 주는 여행이 될듯합니다